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12편 녹취록- 야훼여 도와 주소서

조회 수 1501 추천 수 0 2010.01.27 21:50:47

시편강해 12편-야훼여 도와 주소서

 

시편 12편 1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2500년도 더 된 아주 오래전, 하나님을 진실하게 따르던 어떤 한 히브리 사람이 기록한 기도이고 신앙고백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신학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흔하게 읽고 듣고 지나가지만, 이것을 처음 기록한 그리고 그것을 역사 전승한 이 신앙의 선배들은 자기들의 삶 모든 것을 여기에 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2500년 후에 이 말씀을 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또 2500년 후 또 우리의 신앙의 또 후배들이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서 읽겠지요, 예, 오늘 이 말씀을 우리가 잘 새겨서 신앙의 밑 걸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먼저 읽을 테니까 여러분들은 눈으로 한번 잘 보십시오.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팔 현금에 맞추어 부르는 다윗의 노래〛

1. 야훼여! 도와주소서.

    믿음 깊은 자 한 사람도 없사옵니다.

    믿을 만한 사람 하나 없사옵니다.

2. 입만 열면 남 속이는 말이요,

    입술을 재게 놀려 간사한 말을 하고

    속 다르고 겉 다른 엉큼한 생각뿐입니다.

3. 야훼여! 간사한 모든 입술 막아주시고

   제 자랑하는 모든 혀를 끊어주소서.

4. 저들은 말합니다. "혀는 우리의 자랑,

    제 혀로 말하는데 누가 막으랴?"

5. "없어서 짓밟히고, 가난해서 신음하니 나 당장 일어서리라.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베풀리라." 야훼의 말씀 이러하시니

6. 야훼의 말씀이야 진실된 말씀,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녹여 거른 순은입니다.

7. 야훼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이 더러운 세상에서 우리를 끝까지 보살피소서.

8. 주위에는 악인들이 우글거립니다.

    더러운 자들이 판을 칩니다.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이번에는 교독으로 읽겠습니다.

 

1. 야훼여! 도와주소서.

    믿음 깊은 자 한 사람도 없사옵니다.

    믿을 만한 사람 하나 없사옵니다.

2. 입만 열면 남 속이는 말이요,

    입술을 재게 놀려 간사한 말을 하고

   속다르고 겉다른 엉큼한 생각뿐입니다.

3. 야훼여! 간사한 모든 입술 막아주시고

    제 자랑하는 모든 혀를 끊어주소서.

4. 저들은 말합니다. "혀는 우리의 자랑,

   제 혀로 말하는데 누가 막으랴?"

5. "없어서 짓밟히고, 가난해서 신음하니 나 당장 일어서리라.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베풀리라." 야훼의 말씀 이러하시니

6. 야훼의 말씀이야 진실된 말씀,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녹여 거른 순은입니다.

7. 야훼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이 더러운 세상에서 우리를 끝까지 보살피소서.

8. 주위에는 악인들이 우글거립니다.

    더러운 자들이 판을 칩니다.

 

<참고>개역개정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1.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2.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3.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4.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 리요 함이로다

5.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6.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7.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8.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9.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아멘! 예, 오늘 이 시편 12편 말씀은 전체 제목을 첫 절에 나와있는 첫 문장으로 잡았습니다. “야훼여 도와 주소서” 야훼여 도와 주소서, 우리가 흔하게 그렇게 기도 하지요,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는 겁니다. 이러한 시편기자의 기도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도와주시나요? 그런 건 어느 때 경험하시나요? 우리는 이러한 성서언어를 읽을 때, 그냥 들은 풍월처럼 지나가거나 혹은 변죽을 올린다거나 아니면 이미 자기가 알고 있었던 전이해(前理解)있죠? 이미 알고 있는 그런 것 안에서만 생각합니다. 그걸 뚫고 들어가는 그러한 훈련들이 우리들에게 부족하죠, 그건 전문가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나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도우시나요? 기도할 때 마다요? 꼭 그렇지는 않죠, 물론 아마도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는 경험을 하는 적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요, 그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가장 노골적인 거라고 한다면, 불치병에 걸렸는데, 기도해서 나았다던지, 사업이 망하게 되었는데, 혹은 가정이 깨지게 되었는데,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더니 그런 것이 다 회복되었다 하는 그런 간증류의 그런 것들이 많이 있구요. 뭐 그럴 가능성도 있긴 있습니다. 그러나 또 그 반대되는 가능성도 많이 있는 거예요. 아무리 도움을 청해도 안 될 가능성도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닌데, 옳은데, 여러분들이 이런 말씀을 읽을 때 그 안으로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고 하는 게 뭔가? 하는 거죠, 예?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게 뭔가?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방법은 사람이 사람을 돕는 거 하고는 좀 다른 거잖아요? 아내가 바쁘니까 설거지를 좀 해 달라 예, 그럼 도와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은 아닐 거랍니다. 뭐 그럴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데, 이게 기계적으로 그렇게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자칫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이러한 하나님과 관계된 많은 신앙의 내용 중에서 중요한 게 하나님을 누구로 인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 게 잘 정리 되어야 우리의 기도도 제자리를 갈 수 있는 거예요. 아까 우리 성 어거스틴의 기도문을 읽지 않았습니까? 그런 은밀하게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계시는데, 그러나 가까이 있다고 하는 그러한 어떤 영적인 그 세계가 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충분하게 확보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하나님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정도로 생각하거나 본 훼퍼식의 표현을 빌리면, ‘자동응답기’ 생각을 합니다. 자동응답기 혹은 동전 넣으면 마실 것 떨어지는 것 있죠?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통치하시는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그 생각들을 쉬지 말고 끊어진 게 이게 완료된 게 아닙니다. 앞에 어거스틴 기도문을 말씀 드리면서 짚은 얘기인데요?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 분은 우리들에게 종말까지 계속해서 다가오실 거고 자기 자신을 노출하시는데, 그걸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라고 합니다. 그 때가서 종말에 가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방식으로 모든 실체가 드러날 텐데, 그 전까지는 은밀한 거예요. 숨겨진 방식이예요. 그러나 굉장히 현실적인, 아주 분명한 그런 하나님의 통치를 그리고 호흡하듯이 그렇게 경험 할 수가 있어야 되는데요, 예, 거기에는 어떤 훈련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성경 읽고 말씀 잘 깊이 알고 개인적으로 경건훈련하고 그런 것들이 다 두루두루 많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런 점에서 우리 한국교회 조금 부족한 게 다른 훈련들은 많이 되는데, 신학훈련이 너무 안 됬다, 성경을 무조건 많이 읽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바르게 아는 게 중요한데, 이게 거의 한국교회에서는 신학 무용론(神學 無用論)에 빠져 있어서 이러한 신학적 마인드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학이 만능은 아닙니다마는 또 우리가 다 신학대학에 가서 공부해야 되는 건 아닙니다만, 그 하나님에 대해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성서적인 근거로 해명하고 있는 신학적 사유가 우리들에게 좀 필요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도와주십시요. 이렇게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요? 하나님이 만사형통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더 일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걸 여러분들이 전제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잘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된다고 하는 이런 것은 기독교 신앙이라기보다도 그건 오히려 바알신앙에 가까운 거죠, 우리는 우리의 삶이 부 한데나 빈 한데나 넉넉 한데나 부족 한데나 어떤 형편에든지 처할 줄 아는 어떤 능력, 어떤 영적인 능력이거든요? 바울이 이야기한 거구요. 예,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에게 도움을 청할 때 어린아이들이 군것질 달라 듯이 그러한 방식이 아니라고 하는 것, 그러나 오해는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우리가 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 행복해진다고 하는 것 사실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건 차원이 다른 거죠, 다른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겁니다. 그건 예를 하나만 들고 또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좀 비유적으로 설명하려고요, 어렸을 때는 어머니 아버지가 군것질 사다주고 용돈 주면 좋아하거든요? 그러면 크면 부모들하고 성숙한 삶에 대해서 대화를 해야 그 관계가 잘 이루어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컸는데도 맨 날 그 부모들에게 손만 벌리고 그런 방식이라고 한다면, 성숙한 삶이 못 되는 거처럼 기독교 신앙도 똑 같습니다.

 

우리 삶이 어떤 상황이 되던지 그건 그냥 받아들이고 사는 거예요, 뭐 불치병에 걸려도 그렇고 장애가 된다고 하더라도 뭐 그걸 뭐 억지로 우리가 어떻게 거부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말씀을 거시거든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영적인 통찰력, 이것입니다. 예, 그런 제목으로 오늘 시편기자가 말하고 있는데요? 내용은 간단하지요? 예, 쓸데없는 말하고 간사한 말하고요, 남을 비웃은 일이고 냉소적인 거구요. 그러한 사람들의 말이 많이 있어서 힘들다, 이런 혀, 이런 입술을 당장 끊게 해 달라 아마 이 시편기자가 그러한 상황에 처했던 거 같습니다. 그 삶의 자리, 그 시인이 처했던 삶의 자리가 그렇게 좀 척박했던 거 같아요. 오늘 본문 그대로 나오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믿음이 깊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경건한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종교적인 사람이 없다는 것이구요? 믿음이 없다? 경건하지 않다? 종교적이지 않다? 이 얘기는요, 보이는 것에만 치중해서 사는 것,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 사람이 없고 또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여러분, 보이는 것들 출세, 보통 이제 이러한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 그래서 저 사람 인생이 성공해졌다고 일컬어지는 그런 조건들, 이런 것에만 민감하게 반응하게만 되면, 그런 사람은 결국은 믿을 만하지 못합니다. 이제 그런 관계라고만 하면, 그런 것들이 허물어지면 그럼 다른 것까지 허물어지니까요. 그런 사람들이 없다고 하는 하소연을 하고요,

 

2절에 한마디 더 합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은 세 가지로 표현하죠? 그들은 입만 열면 남을 속인다, 속이는 말이다, 속이는 말, 입술을 제게 놀려 간사한 말 속 다르고 겉 다른, 이중적이라고 하는 거죠, 속이 이중적이다, 공동번역에는 엉큼한 생각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생각이나 말이 똑같습니다. 생각이 있으니까 말이 나오는 거죠, 속이는 것? 속이는 말 간사한 말, 이중적인 말 그런 말들이 그런 말들의 홍수 속에 이 시편기자가 빠져 있습니다. 이 말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성서에서도 아주 중요합니다만, 성서에서만이 아니라 철학에서도 중요하고요, 그리고 우리가 지금 말을 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참 신기한 현상이죠? 인간론 보통 이야기 할 때 가장 특징 중의 하나가 사유도 있지만,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이런 걸 이야기하구요?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해서 직립원인, 두발로 걷는 동물, 호모 파벨Homo pabel)이라고 해서 공작인, 무얼 만드는.. 뭐 등등 이런 얘기를 하고 합니다만 이 언어라고 하는 것이 그 중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는 이 말 이것이 어떤 창조적인 능력이기도 하고요, 또 원죄하고도 연결된 이중성이 있는 거예요. 히브리어로 이 말을 다바르라고 한답니다. 다바르, 다바르 이 다바르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거죠, 참 이 성서기자들의 이 통찰력이 놀랍습니다.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뭐가 있어라, 말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도 보면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고 그랬는데요, 헬라어로 말하면 로고스(λογος) 히브리어로는 다바르 똑 같은 의미입니다. 이미 태초에 로고스, 언어, 말, 이런 것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는 겁니다. 김춘수의 “꽃”*이라고 하는 시가 있다고 하면서요? 꽃이 있었는데, 처음엔 꽃이 아니었다가 내가 꽃이다 이렇게 부르니까 꽃이 나에게 왔다. 시인들의 어떤 언어적 감수성이 거기서 드러나는데 그건 시인들의 감수성만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분명한 겁니다. 그 말, 언어가 거기 들어가야만 그 성질을 얻게 되는 거예요. 창세기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물들을 쭉 지나가게 하고 이름을 붙이게 했거든요? 그래 가지고 이름이, 그 말이 그 성, 사물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은 잘 못 쓰여 지게 되면 뱀이 아담을 유혹 했을 때 쓰여 진 것처럼 타락과 원죄로 들어가게 되는 그러한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속이는 말, 간사한 말, 엉큼한 생각과 말들, 이런 것들은 교양과, 교양의 정도 문제가 아니라 그러니까 이 성서기자는 이런 것들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 사람은 말 자체를 저 사람이 말을 좀 실수 했다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아주 엄중한 사태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속이는 것은 단순히 잘못된 습관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부패한 그런 것으로 성서가 진단하고 있습니다.

 

아주 엄중한 거죠, 그래서 3절에 보면 야훼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합니다. 간사한 입술을 막아주고, 또 하나는 자기 자랑하는 혀를 끊어 주소서, 이런 것 여러분 들으면서 너무 잔인하다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이거는 어떤 사람의 말은 조금 아까 말씀 드린 그대로요. 한두 번 실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과의 관계에 머문 것이 아니라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속하는 거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이 어떤 사람의 영혼을 죽일 수도 있거든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창조한 영혼을 병들게 하는 거기 때문에 이건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많이 경험하실 겁니다. 어떤 사람 죽이는 말, 정말 파괴하는 말들 말이죠? 쉽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우리도 모르게 실수 할 때가 있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서 구절구절에 그런 표현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내 혀에 자갈을 물려 달라고 말이지요. 그래 자기 말이 하나님의 차원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말한다고 하는 것에 대한 진정성 이런 것들을 좀 갖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 사람들, 간사한 말하고 쉽게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을 속이고요, 자기들은 모르지요, 그게 하나님까지 속이는 건데, 그들은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 하냐면 4절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거죠, 혀는 우리의 자랑, 우리거다 나는 말로 먹고 산다 내 혀로 말하는데 누가 막으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참 뻔뻔한 사람이다 생각 할진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굉장히 세련된 사람들을 이야기 합니다. 표현을 이렇게 했습니다마는 그러나 우리의 속 중심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는 말씀이죠, 어쩌면 저를 향한 것 같기도 해요. 목사는 늘 말로 사니까 말을 너무 많이 하니까 말이죠?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로 번역 해석해야 하는 정말 중차대한 사명을 갖고 있는데, 자칫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인간의 말에만 기울어질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일종의 언어적 포퓰리즘(populism)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신자들을 닦달하는 방식으로만 목사들이 자칫 말의 홍수라고 할까? 조금 나쁘게는 말장난에 떨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건 어떤 인격의 문제가 아니에요. 인격은 괜찮아도 하나님의 말씀, 다바르, 로고스, 계시 이런 세계가 어떤 것인지 잘 들어오지 않게 되면 자기도 그 쪽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인간의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고요. 우리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저지르게 되는 그러한 잘못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성이 목사들에게 아주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을 향해서 하는 얘기구요. 혀로 말하는데, 누가 막으랴 오만한 그러한 태도지요, 자기 말 몇 마디로 확확 쏠려 다니니까 일종의 선동이기도 하고요, 이게, 사람은 참 약합니다. 이게 왜 먹히냐면 사람은 대게 자기가 듣고 싶은 얘기를 들으려고 하거든요? 그걸 좋아하거든요? 그 솔깃한 말에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아, 저거 좀 거짓말 같애, 그래도 그걸 들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걸 극복해야 하는데 사실은 쉽지 않죠, 말과 우리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허물어뜨리는 일들이 많은데, 아주 오만한 거죠, 자기 말자랑, 말에 대한 자신감, 이런 것들이 시편기자가 지적하고 있는 그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말에 대해서 오만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짓밟히는 사람들, 또 이제 가난해지고 실망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5절에 보면 일어나서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리라 그렇게 말했다고 그랬습니다. 예, 그러니까 말 자랑하고 말로 뻔뻔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죠, 인간이 하는 말들은 다 말장난에 불과 할텐데 언어를 창조하신 언어의 아주 근원적인 힘이신 하나님이 일어서시면 사람들에게 있는 말들은 그 위선이 드러나게 되는 거지요. 그건 부끄러운 거죠. 그런데 오늘 6절에 보면 그게 대비되고 있어요. 오늘 여러분들에게 성경말씀을 좀 가르치려고 좀 읽으면서 저도 오늘 다시 한 번 더 공부했습니다. 6절에 보면요. 이렇습니다. 야훼 말씀, 앞에 있는 것은 사람들의 말이에요. 자기 잘 낫다고 떠드는 것, 야 내 혀로 가지고 떠드는데, 내 자랑인데 뭐냐 그런 사람들의 말이 있군요. 6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실된 말씀인데요? 그 표현이 참 멋집니다.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녹여 거른 순은입니다. 일곱 번 재련한 거예요. 그럴수록 순도가 높아지죠? 금도 그렇고 철광석들이, 금속 비금속들이 다 재련할수록 좋아집니다. 그런데 일곱 번이라고 그랬어요. 이건 하나의 문학적 수사겠지요? 여러 번에 걸쳐서 가장 순수한 은이다 이런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여기서 무엇을 오늘 깨달았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한 번 탁 던져서 된 것이 아니라 역사에 반복해서 그것이 진리라고 하는 말씀이 드러난 말씀이라고 하는 겁니다. 온갖 시험을 다 거쳐서 살아남은 말씀인거죠. 이 성서는 역사적 과정인 거예요.

 

제 설명이 전달 됬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의 말씀이 나오죠, 예언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신탁이라고 하거든요? 오래클(oracle)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사야나 예레미아나 미가나 이런 예언자들의 말씀을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더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더 많은 예언자들, 그래 너도나도 하나님으로부터 무얼, 계시를 받았다고 떠들었습니다. 사이비 예언자들이 훨씬 더 많았죠, 그런데 그 당시에는 누가 진짜고 가짜인지 몰랐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수 백년 동안 세월이 지나면서 오늘 여기 표현되어 있듯이 도가니에서 일곱 번 녹여서 순수한 은이 되어 있는 것들만 살아남은 거예요. 거기서 나머지 찌꺼기들은 다 살아진 거죠.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역사적 검증을 거친 거다 그 점을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굉장한 통찰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배웠습니다.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녹여 거른 순은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성, 이런 점에서 오늘 설교자들도 늘 그러한 것을 감수해야죠. 한 번 전해서 은혜 받은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일곱 이상 이런 것이 검증 받아서 정말 알짜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 말입니다. 이건 뭐 사실은 말씀만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신앙 전체하고도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한 번 뜨거워서 은혜 받았다고 해서 펄펄 뛸 수는 있는데, 과연 일곱 번 순수 재련되는 방식으로 우리 신앙이 그 순수성으로 계속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느냐 없느냐 이게 중요한 거죠, 예, 7절에 다시 이 시편기자는 첫 1절에 나온 그 말을 반복합니다. 우리를 지켜 주소서 이 말은 아마 주변에서 거짓말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지켜주소서 라는 뜻이 핵심이겠습니다는 조금 더 광의로 본다면 우리 자신도 헛된 말을 하지 않도록 좀 지켜 달라 그런 기도 아닐까요? 우리 스스로는 늘 간사한 말을 합니다 사람에게 비위 맞추는 말도 또 해요. 예, 늘 구분하기가 사실은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이간질 시키는 말들도 안하려고 많이 노력은 합니다마는 또 그럴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 언어를 창조하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영혼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말 하나하나도 말입니다.

 

예, 마지막 8절에 주변에 악이 더러운 자 판을 치고 우글거린다 그러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시편기자는 주변의 사람들도 이야기 하지만 영적으로 자기 내부에 있는 그러한 악한 생각들도 포함해서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 말씀을 정리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헛된 말을 많이 해서 가난한 사람들 힘들게 하거나 사람들이 시험에 들게 하고 자기 말하는 재주에 푹 빠져 있는 그러한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잘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런 거죠. 이 사람보다도 우리 경우를 통해서 말씀 드려야 되겠군요. 그러니까 우리는 주변사람들을 고쳐서 저 사람 말 자꾸만 실수해, 말 좀 실수하지 않게 만들어야지 그 사람을 고쳐서 좋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인 거예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니까 말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도움의 차원이 뭔가, 내가 환경을 고치는 것은 두 번째예요. 어떤 면에서는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가 온전하게 잘 유지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사람들 속에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영성이 훼손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필요한 거죠, 기도는 시간 딱 정해서 어떻게 하루에 몇 시 몇시 기도하자 그러한 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 관계를 어떻게 요령 있게 해 갖고 좀 편리하게 살아야지 이게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받아 드린다고 하는 영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서 요즘 대구성서아카데미 인터넷에 큐티 그 부분에 그런 말을 제가 썼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목회에 너무 소진해서 자기구원을 놓치는 걸 등한히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지 말자 목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기구원이다 그건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 천착해야 한다고 하는 그러한 말이었습니다. 이 기도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영혼 우리의 관심들을 오직 아까 어거스틴의 기도에 나와 있듯이 은밀하지만 가까이 계시고 하여튼 우리가 다 파악하지 못하지만, 정말 진리이신 그 분에게 모두 맡긴다, 그 쪽을 향해서 몰입한다, 올인 한다고 할까 그 쪽으로 우리 삶을 끌어간다 그러한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들 시편 12편의 말씀을 같이 나누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오늘 이 시편기자의 하소연이 그의 기도가 절절한 외침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혀와 우리의 입술을 성령께서 단속해 주시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만 우리가 대언하도록 주님 간절히 원하오니 인도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 가르친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가 영원히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金春洙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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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10.01.27 22:08:19
*.229.151.223

모든 피조물이 주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어린시절을 돌이켜보면서 1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내 존재의 시작과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주님게 고백하고 찬양을 올립니다.

주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타인을 이해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이해하도록 하셨고,

또 자기를 길러준 여인들의 권위를 토대로

자신에 대하여 말해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믿게 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분명히 존재했고 또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이 끝날 무렵에는

내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

무슨 표시를 해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오 주님,

이러한 피조물이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고

어디서 왔겠습니까?

누가 충분한 기술이 있어서 자기 자신을 만들어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

존재와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아멘.(1.6.10)

 

어거스틴 『고백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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