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13편 녹취록- 야훼를 향한 송영

조회 수 1441 추천 수 0 2010.01.31 22:28:05

시편강해 13편-야훼를 향한 송영

 

시편 13편 1절에서 6절까지 말씀입니다. 제목이 다음과 같군요,“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 짧은 구절인데요. 영적으로는 아주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그러한 시편입니다. 먼저 제가 읽을 테니까 여러분들은 눈으로 그리고 또 마음으로 따라서 읽으시길 바랍니다.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

1. 야훼여!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영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2. 밤낮없이 쓰라린 이 마음, 이 아픔을,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언제까지 원수들이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합니까?

3. 야훼, 나의 하느님,

   굽어 살피시고 대답해 주소서.

   죽음의 잠 자지 않도록

   이 눈에 빛을 주소서.

4. 원수들이 "이겼노라." 뽐낼 것입니다.

   적들은 기뻐하며 날뛸 것입니다.

5. 이 몸은 주의 사랑만을 믿사옵니다.

    이 몸 건져주실 줄 믿고 기뻐합니다.

6. 온갖 은혜 베푸셨으니

    야훼께 찬미드리리이다.

 

아멘! 우리 다시 한 번 읽을까요? 이제는 교독 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1절 읽습니다.

 

1. 야훼여!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영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2. 밤낮없이 쓰라린 이 마음, 이 아픔을,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언제까지 원수들이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합니까?

3. 야훼, 나의 하느님,

   굽어 살피시고 대답해 주소서.

   죽음의 잠 자지 않도록

   이 눈에 빛을 주소서.

4. 원수들이 "이겼노라." 뽐낼 것입니다.

   적들은 기뻐하며 날뛸 것입니다.

5. 이 몸은 주의 사랑만을 믿사옵니다.

   이 몸 건져주실 줄 믿고 기뻐합니다.

6. 온갖 은혜 베푸셨으니

    야훼께 찬미드리리이다.

 

<참고> 개역개정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 지 숨기시겠나이까

2.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 의 잠을 잘까 하오며

4.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 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아멘! 우리의 신앙생활,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여기에 가장 핵심적인 게 뭘까요? 일상적인 삶과 신앙적인 삶을 제가 두 가지로 나눠서 얘기했지만, 이게 완전히 이원론적으로 구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일상이 따로 있고 신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그냥 우리 삶 자체가 신앙이고, 예, 삶 자체입니다. 이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죠.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참된 생명을 얻는 그러한 삶의 태도라고 한다면 일상적인 것도 사실은 어떤 생명, 우리가 살아가는 거니까요, 연관되지 않습니까? 다만 인제 일상적인 것은 생명적인 차원을 우리의 살아가는 일반적인 그러한 사건에서만 된다면 하나님 안에서의 그러한 생명은 하나님과의 그런 관계로 승화된다고 하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긴 있지만 그러나 결국은 하나죠, 결국은 삶의 문제예요. 그것은 생명의 문제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것을 놓치면 죽는 거 아닙니까? 숨이 끊기면 죽는 건데요? 사람들은 그냥 무의식적으로 숨 쉬고 살아가요, 그리고 밥만 잘 먹으면 되고 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저 사람 행복하다고 하는 그런 삶의 조건들, 그런 것들을 많이 만들어 가면, 많이 쌓아 가면, 그러면 사는 거다, 생명을 얻는 거다, 그렇게 생각을 하죠,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거기서 머무르지 않잖습니까? 생명이 자기 업적을 세운다거나, 성취한다거나 다른 사람들 눈에 볼 때 그럴 듯하게 사는 것, 이것, 우리는 사실은 이게 우리 약하기 때문에 그 틀 안에서 벗어나기는, 자유롭기는 쉽지 않아요, 옆의 사람들이 참 행복하다 자식들도 참 잘 되고 저 사람들 정말 부러운 게 없다 이렇게 들으면 정말 자기가 행복한 것처럼 느끼는데, 그러나 정직하게 자기 자신의 삶을 드려다 보면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아느냐는 그렇게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핵심인 거예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우리는 너무 형식에 머물러 있을 때가 있습니다. 뭐 정기적으로 기도한다거나 큐티를 한다거나 우리 신앙적인 틀에서 볼 때 말이죠, 교회봉사를 한다거나, 늘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예요. 결국은 본질이라고 하는 것도 형식 안에 담겨져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의 형식, 삶에 있는 그러한 형식, 신앙생활의 형식들이 중요하긴 한데, 그러나 그런 형식 안에만 머물러 있게 되면 결국은 이 본질이 약화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예, 그건 그렇구요. 제가 그걸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은 실제적으로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대해서 질문해야 된다 말이죠, 지금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생각하지요? 그걸 우리가 예배라면 예배라고 할 수 있고, 기도회면 기도회구요. 성경공부일 수도 있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고 하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으니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이 자리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일상을 그렇게 살아가야 되겠구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확인해요? 어떻게 느끼십니까? 지금 이 자리에, 제가 방금 기도를 드렸습니다마는 하나님이 옆에 계신 것처럼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무슨 모양으로 어떻게 계신 것일까요? 예, 이런 문제들을 여러분들이 더 진지하게 아주 실질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뭐 그런 경험들이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르겠습니다만 이렇게 몇 가지로는 좀 얘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저께 조직신학 공부에도 한 말씀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생명경험인거죠,

 

여러 가지 차원에서 생명경험이 있을 텐데요. 다른 건 접어두고 우리 안에 어떤 평화가 아주 가득 찬다고 하는 그런 경험들, 이런 것들이 하나님 경험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화가 그렇게 맘대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 아시죠? 내가 정말 마음이 평화롭고 또 불안하지 않고 말이죠, 같이 연관되는 문제죠? 그렇게 하려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지 않는 거 알죠? 내가 정말 마음이 평화롭고 불안하지 않고 말이죠, 다 연관되는 문제죠? 그렇게 하려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지 않는 거 알죠? 조금 자기가 노력하면 약간 그래도 복잡한 문제들이 해결 되는 것 같지만, 그렇게 그런 것으로 해결 되지는 않습니다. 이 평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니까요, 하나님과의 관계인 거예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관계 속에 들어가느냐, 인제 이게 예,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런 성경 공부하는 거라든지 기도하는 거라든지 말씀을 본다든지 신앙적인 대화를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다 그런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같이 읽은 이 말씀 속에서도 시편기자의 이 기도, 신앙고백 여기에서도 이 사람의 삶이 좀 힘들다, 고되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호소를 하고 있거든요? 이게 여러분들이 상투적으로 생각 안해야 되요, 제가 처음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호소, 하나님을 향한 탄식, 이런 것들이 우리 영혼의 깊이에서 우러나와야 되는데, 그런 것 없이 일종의 신앙적 매너리즘이라고 할까? 거기에 빠질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그러면 아무리 시간이 가도 우리가 신앙적으로 풍요로워지지가 않습니다. 오늘 여기 성서기자가 도대체 어떤 삶의 문제들, 그러한 짐, 그리고 그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호소가 나오는가, 이런 문제들을 우리가 좀 같이 검토함으로써 우리의 하나님 경험도 더 깊어지길 바랍니다.

 

오늘은 전체적으로 세 가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탄식, 하나님을 향한 탄식, 두 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기원,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감사의 맹세,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두 줄씩 그렇게 나뉘어져 있어요. 1절과 2절은 탄식입니다. 재밌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제가 재미있다고 표현해서 좀 뭣합니다마는 우리의 영적인 흥미를 끈다는 뜻입니다. 1절과 2절에 보면 반복되는 어떤 단어가 있어요. 그게 ‘언제까지’라고 하는 이게 부사인가요? 언제까지, 언제까지, 언제까지 그게 네 번이나 나옵니다. 1절에 두 번, 2절에 두 번,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언제까지 원수들이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합니까? 이렇게요. 이렇게 언제까지라고 하는 것을 네 번이나 반복해서 말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마 이 시편기자의 어떤 인내심에 한계에 도달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는 우리는 잘 모르지요, 이 사람이 처한 형편은 우리가 잘 모릅니다. 죽을병에 걸린 걸까요? 아니면 어떤 조폭에게 시달리는 걸까요? 아니면 어떤 빚쟁이한테 계속해서 시달림을 당하는 것일까요? 빚 못 갚으면 아들 딸 다 보내라 라든지 고대시대에는 이런 일들이 없잖아 있었으니까요. 뭐 그런 어려운 상황에 빠진 걸까요? 어떤 걸까요? 어쨌든 이 사람은 언제까지냐,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예, 1절에 보면 이 탄식이, 언제까지라고 하는 표현을 통해서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지 않는 것 같은 그러한 상태를 이야기하죠, 언제까지 나를 잊으십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십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어떤 상태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거와 같은 어떤 상태에 빠진 겁니다. 그런 게 뭘까요? 구체적으로요, 아마 그는 뭔가에 큰 두려움, 예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그런 두려움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의 외면이라고 하는 거죠, 어쩌면 죽음에 대한 공포일까요? 여러분들도 살아가면서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잖아요? 아, 내가 완전히 무로 사라진다고 하는 그런 것을 아주 절감하게 되면 이건 뭐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두려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아마 이 사람이 틀림없이 그런 내면적으로 큰 불안, 좌절, 공포 이런 것에 휩싸여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그러한 상태, 이게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는 거죠,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서 벗어 날 수 없는 그런 상태 말이죠, 2절에 보면, 원수들이 우쭐되는 꼴을 언제까지 봐야 되냐, 그렇게 탄식을 하죠? 예, 원수가 누굴까요? 구체적인 어떤 인물일까요? 아니면 조금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어떤 불치병에 걸려 있는 것을 그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한 걸까요? 아니면 그 이외 여러 가지 다른 정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고난,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할까요? 그 원수라고 칭하는 그런 것 앞에서 자기가 놀림을 받는 상태를, 어떤 벗어날 수 없는 그런 거죠, 이런 게 정확한 예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나라에 와서 아주 조롱받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또 외국인 부인들 있죠? 농촌에 있는 노총각들에게 베트남 여자가 시집와서, 낯선 곳에 와서 힘들어 하는 그런 사람들, 그런 건 몽땅 다 어렵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대다수는 힘들죠? 특별히 그런 분들 중에서는 악덕기업가 이런 사람들 만날 경우에 그런 사람들은 아주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잖아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 대로 그렇습니다. 월급도 못 받고요, 산업재해 만난다고 하더라도 적절하게 치료도 받지 못하고,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잖아요? 그런 사람들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조롱당하는 느낌, 자기가 해 볼 수 없는 상태,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되냐, 그런 탄식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았으니까 다행이다, 혹시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를 당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다행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면 되지만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도 있을 거구요? 그런데 대해서 우리가 외면하면서 살면 곤란하겠지요?

 

기독교인의 우리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안일에만 떨어지는 것은 아니죠? 더불어서 어떻게 이 땅위에서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그런 삶을 같이 누리느냐에 대해서 우리 영적인 촉수를 더 예민하게 작동시켜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뭐 사회개혁의 투사가 되어야 된다든지 반드시 그러한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고요, 우리가 더불어서 살아가는 세상 속에 있는 이러한 절박한 상황들 신이 나를 버린 게 아니냐와 같은 이러한 삶의 조건들을 더불어서 같이 해결해 나갈 수 있는 힘을 모을 수 있는 그런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3절과 4절이 이야기하는 기원입니다. 기원 이 시편기자가 하나님을 향해서 1절과 2절에서는 아이구, 이게 어찌 된 것입니까?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탄식하고 3절에서 이제 간절하게 기원하는 거죠, 3절에 보면, 두 가지로 좀 나누어서 볼 수 있습니다. 대답해 주소서 하죠? 굽어 살피시고 대답해 주소서, 하나님을 향한 기원입니다. 이 현실이 정말 힘든데, 하나님의 대답을 정말 찾기가 힘들거든요? 하나님이 침묵하는 거와 같은 그러한 상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좀 대답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을 찾기가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대답을 자주 발견하시나요? 어떤 때 여러분의 기도에 하나님이 대답하시나요? 뭐, 쉽게는 젊은이들로 말하자면 대학에 들어가야 되는데 기도해서 됬다든지 좋은 사람 만나야 되는데 기도해서 만났다든지, 아마 그게 대답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늘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대답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는 거와 같은 상황을 더 많이 만납니다. 그건 뭐 여러분들이 조금만 세상을 정확하게 들여다보면 다 눈에 들어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게 잘 되는 거, 이걸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거하고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답하시거든요? 3절 두 번째 나오는 게 바로 그거에 대한 시편기자의 자세입니다. 뭐라고 얘기해요? 죽음의 잠 자지 않도록 이 눈에 빛을 주소서, 이러죠? 눈, 볼 수 있는 눈, 눈의 빛,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눈의 빛, 죽음의 잠, 잠들면 눈을 감게 돼서 볼 수 없는데요? 눈의 빛을 주소서 이런 얘기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대답을 알려면 눈의 빛이 필요하겠지요? 영적인 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영적인 눈 하면 자꾸만 기도 많이 해 갖고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본다, 그런 생각으로만 나가지 마세요, 아, 영적이라고 하는 것을 무엇으로 생각하세요? 아, 저 사람은 영적이야, 그럴 때 어떤 게 생각나요? 말은 늘 거룩하게 하고 늘 기도 응답 받았다는 말하고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꿈도 해몽해 주고 그런 것을 영적이라고 얘기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냥 주술적인 거예요. 주술적인 것하고 영적인 것 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성서가 말하는 이 영이라고 하는, Spirituality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의 가장 심층적인 어떤 활동을 이야기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저 사람이 영적이다 라고 하는 것은 저 사람은 정말 아주 깊은 차원에서 생명 지향적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옳습니다. 생명은 바로 하나님이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 생명, 아주 다층적이고, 다층다기(多層多岐)라고 하지요, 여러 층이고 아주 심층적이고 그리고 포괄적이고, 그리고 우주론적이고 보편적인 그러면서 아주 열정적이면서도 따뜻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그런 생명지향성, 그런 것들이 바로 영적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눈, 눈의 빛으로 영적인 것을 본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대답은 영적이니까요. 그것을 본다는 것은 이제 자기를 확대하고 늘 우리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 성취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영역을 확대하는 이러한 방식을 우리는 생명이라고 얘기 하지 않거든요? 어떻게 하나님이 그러한 세속적이고 기복적이고 아주 물신(物神)적인 신자유주의,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그러니까 경쟁만 최고로 여기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 것을 성취해야 한다고 하는 이 시대정신을 거슬러서 참된 사랑, 평화, 진리 이런 세계를 볼 수 있는 눈, 이런 것들이 바로 눈의 빛이다, 영적인 눈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 게 없으면, 제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좀 관념적으로 들릴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관념적인 것은 아닌데요. 제 표현이 좀 충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 영적인 눈을 가져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데, 이게 없으면 아무리 예수 믿어도 그건 생명과 짝을 같이 한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냥 욕심만 가득 차게 되는 거예요. 신앙적인 욕심 있는 거 아시죠? 좀 우습죠 그게? 신앙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아주 작게 만드는 건데, 그런데 자기가 점점 커져, 자기가 점점 잘 났어요, 우리교회가 잘났고 말이죠? 그래서 배가 하고, 십 배하고, 늘 이렇게, 이거는 신앙이 아니라 바알종교죠, 종교도 욕심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제국주의적 종교라고 하는 말을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 봤으니까, 이게 전혀 다른 세계인데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국주의적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기준으로 해 가지고 모든 것을 다 평정하려고 하는, 자기를 절대 기준으로 삼는 것, 이걸 이제 제국주의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의죠, 자기만 옳은 것, 자기교단만 옳은 것, 자기신앙만 절대적으로 아는 것 뭐 이런 것들이 제국주의적인 것이고 욕망이고 자기성취고, 이게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도 그럴 위험성이 많이 있어요. 인간이 기본적으로 그런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늘 자기를 성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순식간에 겉으로는 상당히 세련된 종교적인 옷을 입어도 그 내면적으로는 아주 세속적인, 그러한 그 정신에 지배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정말 놀라운 고백을 하네요. 죽음의 잠을 자지 않도록 이 눈에 빛을 주소서 영적인 것을 볼 수 없는 건 죽음의 잠 이예요. 살아 있다고 하나 그러나 그냥 자기 욕심이 가득 차 갖고 있는 건 이건 뭐 죽음의 잠이죠.

 

그렇습니다. 이 4절에 이 기원의 두 번째 부분으로 탄식의 두 번째 부분에서 말했듯이 그 원수들을 다시 한 번 지적합니다. 그 원수들이 뽐낸다, 그들이 기뻐 날뛴다, 그러니까 나로 하여금 눈에 빛을 주어서 하나님의 대답을 잘 알아 깨닫고 그러한 원수들의 조롱을 이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런 기원이죠, 그러니까 이 원수들과 맞싸워서 내가 그들을 이기겠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는 거죠, 이게 원수들 조롱 앞에서우리는 비굴해 질 수 있잖아요? 자기 자신이 초라해 질수도 있잖아요? 그러나 영적인 생명을 알 수 있는 그러한 우리의 영적인 자세가 된다면, 그런 원수들 조롱 앞에서도 전혀 비굴해 질 수도 없고 그 똑같은 방식으로 악은 악으로, 이는 이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대적할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런 것을 시시하게 볼 수 있는 거죠, 하나님의 어떠한 대답을 발견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대답, 하나님의 대답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 눈의 빛, 이런 것을 주셔야 그래야 원수들이 나를 조롱 하는 것에서 내가 이길 수 있지 않냐, 벗어날 수 있지 않냐,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하소연, 기원하고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하루빨리 이러한 영적으로 성숙한 그러한 상태가 좀 필요 하겠다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평생 동안 그러한 신앙생활, 신학공부 하더라도, 이게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예요. 그러니까 이 기독교신앙은 정보가 아닙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기독교 신앙이 뭐냐라고 하는 정보는 많이 말할 수 있지만, 그 정보가 능력으로 다가오기는 힘들어요. 그리고 일반적인 삶도 처세술은 많이 늘 수 있는데, 그러나 정말 삶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죠? 주변에 많지 않습니다. 그러한 꾸준한 성령과 그러한 소통을 통해서 우리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그러한 상태가 되어야만 우리는 이러한 원수의 조롱 앞에서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그렇게 되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게 사실은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평화, 기쁨, 자유,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속성에 우리가 들어가서 살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 5절과 6절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신뢰와 감사에 대한 맹세, 하나님을 향해서 그러한 맹세를 하는 거죠, 5절에 보면 두 가지가 나와요, 주님의 사랑만을 믿는다, 주님의 사랑만을 은혜라고 바꿔도 좋아요, 주님의 은혜만을 믿는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나를 건져 줄 것을 믿고 기뻐한다, 세 번째 6절에 나와 있는데, 그런 모든 은혜를 베푸셨으니까 야훼께 찬미 드린다, 이렇게 하나님께 맹세를 합니다. 어때요? 이러한 시편기자의 영적인 차원이 머리에 들어옵니까? 예, 세상은 어린아이들처럼 살아요, 서로 싸우고 지지고 볶고,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그러한 방식으로 싸웁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정의를 위해서 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투쟁해야 할 때는 해야죠, 음, 그거는 전제되고, 우리가 역사변혁과 개혁을 위해서 투쟁하더라도, 아, 나만 옳고, 너는 완전히 잘 못 됬다고 하는 그런 교만의 차원이 아니라 전혀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차원에서 투쟁을 해야 되겠지요,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원수들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원수를 내가 갚겠다, 전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니까요. 하나님의 사랑, 그 분의 도우심, 그것을 믿고 기뻐하겠다, 이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그러니까 복 있는 사람 아니겠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찬미한다, 그걸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도우심이 정말 필요합니다. 돈이 우리들에게 주는 도움과 하나님이 하신 거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거예요. 이 차이를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아마, 그러나 우리는 쉽게 물질적인 것에 유혹을 당하지요, 그런 것을 구분하려면 억지로는 안되요, 우리는 아주 자동 발생적으로, 자연발생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그러한 세상에 막 기울어집니다. 그런 게 없으면 불안해지고요,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될 겁니다. 그거는 음악경험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음악이 주는 새로운 예술적인 차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음악경험이 가능한 거거든요? 하나님 경험도 똑 같습니다. 예,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우리들에게 주고 있는 말씀처럼 이러한 어려운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혹은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전제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분을 온전히 신뢰하고요.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찬미하는 일종의 독솔로지(doxology:영광송)죠? 그 분을 향한 송영(頌榮)입니다. 찬양하는 노래죠, 그렇게 우리 인생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넘치기를 바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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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10.01.31 22:44:01
*.229.151.223

악인들의 적은 자신들이 저지른 악한 행동입니다

교만과 정욕과 호기심 때문에 악을 행하게 됨(요일2:16)

 

오 하나님,

주님만이 만물을 초월하여 높이 계시는 분이므로

주님만이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존엄과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교만은

주님의 높으심을 흉내내려 합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 잔인성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외에 참으로 두려울 자가 누구입니까?

누가, 언제, 어디서, 어디로, 누구를 통해서

주님의 능력으로부터 감히 벗어나 피할 수 있습니까?

 

음탕한 자들의 매혹이 사랑을 끌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보다 더 우리의 사랑을 끄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을 뛰어넘어 아름답게 빛나는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건전한 사랑은 없습니다.

호기심은 지식욕을 자극하여

모든 것을 안 것 같이 보이게 하지만

모든 것을 아주 잘 아시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무지와 어리석음이 단순하고 무해한 것처럼

가면을 쓰고 자기를 나타내지만

참으로 주님과 같이 단순하고 무해하신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악인들을 해롭게 하는 적은

바로 자기 자신들이 저지른 악한 행동입니다.

아멘.

 

어거스틴 고백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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