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75편 녹취록- 하나님만이 심판자이다

조회 수 1471 추천 수 0 2010.01.31 22:30:52

시편강해 75편- 하나님만이 심판자이다

 

시편 75편을 공부하겠습니다. 먼저 우리 같이 이 말씀을 돌아가면서 읽읍시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겠어요. 제가 먼저 1절 읽겠습니다.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1.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 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2.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3.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4.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5.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6.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7.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8.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 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9.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10.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아멘! 네, 10절까지 있는 짧은 구절의 시편입니다. 1절에서 10절까지 있습니다. 우리가 읽으면서 대충 내용은 따라 갈수 있었어요. 우리가 일반 시를 이해하는 것도 낱말 뜻을 아는 것으로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시인의 어떤 영감, 세계경험 이런 것들을 알아야 되는 것처럼 우리 구약에 있는 시편도 단지 인제 낱말 뜻 정도가 아니라 이 시인의 어떤 영적 경험들, 그걸 좀 따라 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대충 읽어서는 사실은 좀 어려운 거죠. 뭐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 크게 겁먹으라고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아니구요. 이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냥 그런 게 그러려니 그렇다 하고 그냥 지나가면 다 은혜롭다 그런 정도로 생각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꼼꼼히 따져보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속 사정들이 있습니다. 이거는 마치 우리 삶의 경험하고도 비슷하잖아요? 그냥 맹숭맹숭하게 생각해 보면, 그냥 거칠게 보면 사는 게 뭐 특별한 거겠습니까? 비슷비슷 하잖아요? 그러나 그 속 사정으로 들어가게 되면 한 사람 한사람의 삶이 우주와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러한 깊이로 들어갈 때에 그 때 인제 삶이 뭐냐 그거가 눈이 뜨여지는 것처럼 이 시편 말씀도 그렇습니다.

 

예,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나눠드린 그 유인물을 좀 보십시오. 제목을 “하나님만이 심판이시다” 그렇게 정했습니다. 예,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시다. 당연한 이야기죠, 예, 그렇죠? 제목을 일단 조금만 설명해 볼께요. 하나님 하면, 우리 머릿속에 어떻게 그려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그 동안에 교회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어떤 상, 뭐 표상이라고도 하고요, 뭐 이미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게 있어요. 그런데 그게 천차만별입니다. 아마 신자들 숫자만큼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각양각색일걸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말한다는 자체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서로 각자가 머릿속에 다른 어떤 절대자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서로 받아드려지는 게 다른 거죠. 옥황상제처럼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사랑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Humanism 곧, 이게 뭐 신이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고, 우리에게 복을 주는 자 뭐 이런 등등 여러 가지의 생각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각양각색으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예, 어쨌든 그렇구요. 그런 하나님,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은 붙이긴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에게는 이름이 없으니까요. 그 어떤 분, 어떤 존재 어떤 힘 어떤 생명 이런 쪽으로 조금 더 생각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하나님만이 심판자이다. 거꾸로 이야기를 해도 되겠지요? 심판자가 곧 하나님이다 그런 말이 되는 거예요. 예, 심판하면 어떤 게 생각이 납니까? 어떤 사람은 정말 살기 좋은 천당으로 보내고 어떤 사람은 지옥불로 보내고 늘 그런 쪽으로 심판자를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는 조금 부족한 거예요. 조금 부족한 게 아니라 크게 부족한 거랍니다. 그런 것들은 고대인들이 어떤 절대적인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그 표현 방식이었던 거예요. 그러면 그런 거 하고 전혀 상관이 없냐, 뭐 그 뜻도 아닙니다.

 

이 심판이라고 하는 의미도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들에게 자기를 다 계시하지 않았고 계시하는 중이시고 그 분을 우리가 알아 가는 것처럼 심판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알아가는 과정인거죠. 오늘 강의안에도 거기 나오겠습니다마는 심판을 이런 쪽으로 이해하실 수 있는 거예요. 생명이 생명 되게 하는 그런 분, 심판자구요? 그 행위 자체가 심판인거지요. 알곡과 가라지를 가른다거나 염소와 양을 가른다거나 이런 표현들이 다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힘을 이야기 하거든요? 서론적으로 그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제목에 대한 설명이었어요. 하나님만이 심판자이다 이 명제가 어떤 큰 의미를 갖고 있다 그걸 좀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 오늘 본문이 1절에서 10절인데, 조금,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내용공부하기 전에 그 구조를 확인해야 되겠어요. 저도 읽으면서 좀 왔다 갔다 하더라구요. 이게 시인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대목도 있고, 또 어떤 데는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부분도 있고 그러니까 그 하나님을 이야기 할 때도 여기에서 직접화법이냐 간접화법이냐 하는 차이가 있는데, 그런 것들이 우리 번역 성경으로는 정확하게 나와 있질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어서 아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구약성경이 원래 자음만으로 되어 있다고 그래요. 히브리어 자음, 모음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진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다 그런 것들이 구전되던 것들이라서요, 이게 좀 번역이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개정판 딱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대목들이 있어요. 그걸 좀 설명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일단 1절은 시인의 말이예요. 시를 쓴 사람의 말,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감사 한다’고 했는데, 다른 성경번역에서는 ‘믿는다’ 뭐 그런 걸로 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쨌든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거기까지는 시인이 자기 말을 표현한 거예요. 그 다음 2절에서 4절까지는 이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어떻다 주의 말씀이, 이렇게 시작하죠? 4절 마지막 부분에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그러니까 요기까지 문장이 끝나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5절하고 혼동이 되는 거예요. 보세요. 4절 다시 보겠습니다. 4.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이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5.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이것만 보면 이게 4절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 같잖아요? 이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앞에 4절까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 하셨으니까 시인이 나도 너희들에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하라 그겁니다. 쭉 9절까지 그렇게 나오고요. 9절 보면 이렇습니다. 9.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그 다음에 10절을 보면 또 이렇게 되어 있어요. 10.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그럼 10절도 역시 나, 나는 했을 때 ‘나’가 주어처럼 보이잖아요? 그대로, 그러니까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이렇게 이해가 되죠? 문장구조상 그게 아닙니다. 9절은 이 시인이 하는 얘기구요, 10절은, 9절에서 말하는 내가 왜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고 찬양하냐의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이유에 대한 설명, 그러니까 10절을 정확하게 의역을 하려면 왜냐하면, 하나님이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을 들릴 것임이다 이렇게 문법적인 것을 말씀 드린 거예요. 그런데 지금 여기 있는 글을 제가 설명하지 않고 읽다 보면 혼동이 되는 거예요. 누구의 말인지 왔다 갔다 하게 되는 거죠, 그러한 부분들이 좀 있습니다. 그건 뭐 좀 문장을 유심히 보시라는 말씀 이예요.

 

예, 또 서론적으로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시편의 주제를 조금 더 생각하겠습니다. 제목을 이미 앞에서 말씀 드리기는 했는데요. 이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심판자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 여러분 이런 게 당연한 것 같지만 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영적인 시각, 깊은 영성에서만 가능한 진술입니다. 영성에서만, 깊은 영성, 혹은 영적시각 그런거요, 또 다른 말로 이야기 하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영성이라는 말을 좀 간혹 했지요? 예, 여러분들 많이 들었지요? 아, 그게 뭐예요? 실제적으로 이렇게 와 닿아요? 여전히 어렴풋합니까? 와 닿지 않을걸요? 영적이다 그러면 아, 기도 많이 해 갖고 어떤 신령한 경험하는 거, 이런 쪽으로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되요. 오늘 우리가 영성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게 아니니까 자세하게 말씀 드리지 않고 한 마디만 드린다면 이렇습니다. 영성은 성령과의 만남, 혹은 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우리 영혼의 생명경험, 뭐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받아 적었어요?^^) 다른 때는 또 내가 다르게 이야기 할 겁니다.(목사님께서는 맨 날 다르게 말씀 하셔요.^^) 맞아요. 그 만큼 제가, 잘난척 하는 걸로 한 마디 하면 그 만큼 자유로워서 그런 거예요. 어떤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갖기 때문에 표현이 늘 달라질 수 있는 거예요. 이건 이제 그러니까 어떤 신앙의 세계, 신학의 세계, 이런 것들은 고정된 형태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신비로운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깊은 영성이라고 하는 그 이야기는요.

 

여기에 한 마디만 더 붙인다면 영성, 보통 Spirituality 라고 하지 않습니까? Spirituality, 이건 성령과의 조우, 만남, 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우리 영혼의 생명경험이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깊은 영성에서만 가능한 진술이다. 이런 표현은 깊은 생명경험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생명의 주인이 누구라고 합니까? 하나님이라고 보통 이야기 하잖아요? 그러니까 성령을 가리켜서 생명의 영이라고 하거든요?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그 성령과의 관계, 성령과의 조우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생명의 주관자, 생명의 주인과의 어떤 관계, 만남인 거죠.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보통 생명이라고 하는 말을 자주 하지만 그 생명경험은 곧 성령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그걸 전제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우리 일상적인 경험하고 좀 연결해서 한다면 지금 뭐 유전공학이라든지 이런 데서도 생명이 뭐냐 이런 말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도 사실은 큰 틀에서 보면 성령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물학자, 물리학자 이 세계에서 생명과 관계된 모든 일들은 다 성령과 관계된 거예요. 그러니까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단조롭게 한두 가지로 정리가 되지 않는 거기 때문에 우리는 인제 생명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생명의 힘에 우리의 마음을 우리 영혼을 열어 둠으로써 생명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좀 정리하면요, 하나님만이 유일한 심판자라고 하는 그 말은 그건 낱말 뜻으로 본다면 간단하지만 정말 이 세계에 들어가려면 그러면, 생명의 신비를 알지 못하면 불가능한 거예요. 그 강의안을 보시면 설명이 되어 있지요? 이 세상은 교만한 자들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것만 보이면, 그런 것에 우리 마음들이 송두리째 빼앗기면 하나님만이 심판자라고 하는 말을 이해할 수도 없고 말 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 일반적으로 그렇게 살잖아요? 그런 반면에 의로운 사람들은 별로 기를 피지 못하는 것 같다 바로 우리 앞에 현상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세계는 사실은 그렇습니다. 힘, 자본, 권력, 이런 것들이 더 득세하고 그런 것을 가져야만 더 편안히 살 수 있을 것 같구요. 지금 우리가 모두 그 쪽으로 경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게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세계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심판자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말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거죠, 영적인 경험 없으면 불가능하겠지요? 예, 바로 그 경계에서 시편기자들이 자리합니다. 또 이 경계라는 말을 기억해 두세요. 경계, 우리는 어떤 경계에 놓여 있어요. 그건 어떻게 보느냐에 조금 따라서 다른데, 일단 본문에 나오는 걸로 거기서 느끼는 걸로만 제가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아 같은 예언자들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계라고 하는 것은 앞에 있는 설명하고 연관되는 거예요. 악이 득세하는 세상과 하나님이 심판하는 세상 사이에, 그 사이에 끼여 있는 거죠, 예언자들과 시편기자들과 어떻게 보면 우리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둘이 충돌하고 있거든요?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어떤 악이 득세하는 것 같구요.

 

어떤 다른 시각, 영적인 시각으로는 하나님이 심판하는 세상이니까요. 이것은 곧 의가 드러나는 것이잖아요? 그 두 개가 늘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경계라는 말이 정확한 건 아닌 것 같네요. 요기서 여기까지는 뭐 악이 득세하는 세상의 질서고, 그 다음까지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심판의 세계고, 그런 차원에서 제가 구분하는 것은 아니고요. 서로 이게 다 섞여 있기도 합니다. 이 악이 득세하는 세상 자체에 하나님이 아주 비밀한 방식으로 심판을 하시니까 사실은 뭐 경계를 딱 그어서 어디까지다 딱 말을 할 수가 없어요. 편의상 제가 경계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거는 하나의 긴장, 영적인 긴장을 말하려고 하는 거 였어요. 요 경계 혹은 이 경계라는 말과 혹은 다른 말로 하면 뭐라고 이야기하죠? 방금 이야기 했으니까 긴장, 예, 경계, 긴장 여기서 대개의 사람들은 길을 잃습니다. 어떻게 잃느냐면 그 뒤의 설명인 거예요. 하나님을 이 세계를 통치하는 악한 힘하고 비슷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에서 힘을 갖는 방법으로 승리해야 한다 일종의 승리주의죠, 예수 믿고 출세한다거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뭐 뻔대 있게 살아야 된다거나 하여튼, 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도 어떻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된다거나 하여튼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뭣을 한다거나 거의 기독교가 승리주의에 빠져 있잖아요? 이건 악한 힘이 지배하는 세상과 하나님을 비슷한 차원에 놓고 하는 겁니다. 예, 하나님은 결코 이 세상이 말하는 똑 같은 방식으로 심판자이고 승리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역설적으로 생각해야 되요. 하나님은 오히려 무기력한 방식으로 정말 권능을 행하시는 것 요 영적긴장, 이것을 우리가 빨리 알아야 되는데, 이게 좀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이 세상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늘 드러난 것, 표면적인 것 그리고 아주 실제적으로 실증적으로 어떤 힘이 작동하는 그런 것에 아주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 비밀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오히려 이러한 무기력한 방식 같지만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신다고 하는 것을 뚫어 보기가 쉽지 않은 거죠,

 

인제 그걸 뚫어 보는 게 영성이고 그 길을 아주 흔들리지 않고 그 길을 쭉 가는 사람들을 뭐 신비주의자 영성가들, 마에스터 에카르트라든지 뭐 십자가의 성 요한이라든지, 루이스(C.S. Lewis)라든지 요즘 매일 큐티를 누가 싣고 있지요? 다비아에, 헨리 나우웬, 예, 이런 사람들은 상당히 영성적인 훈련이 많이 된 분들이죠, 그런데 대개 일반 신자들은 좀 보기 힘듭니다. 어쩔 수 없는 것 같애요.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이 mechanism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난폭하기 때문에 거기서 살아남기가, 영성을 잘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승리주의에 빠지거나 또 하나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 그냥 하나님은 창조만 했지 이 세계는, 이 자연의 질서들은 움직인다 하나님의 능력을 완전히 부정하는 냉소주의 패배주의 이런 데 빠지는데 주로 이제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거구요. 앞에 있는 거는 좀 열광주의에 속해 있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이 빠진다고 한다면 후자는 지성적인 쪽에 있는 신자들이 빠지기 쉬운 하나의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승리주의와 패배주의입니다. 예,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만이 심판자라고 하는 오늘 시편기자의 영적인 경험 그걸 좀 따라 가보자 그 얘기죠, 오늘 공부는 한 절 한 절 제가 간단하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공부하는 방식이 때에 따라서 좀 달라졌죠? 첫 번째 할 때는 전체적으로 주제를 잡아서 쭉 설명했고요. 지난주에는 문단을 나눠서 했는데, 오늘은 한 절 한 절 좀 이렇게 해 볼까 합니다. 예, 1절요, 사실은 1절 하나만 놓고도 한 시간 공부해도 뭐 그렇게 넉넉하지도 않은 겁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공중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아주 깊은 영적인 시각, 그리고 역사적 배경 이런데서 나왔기 때문에 일일이 따라 가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해요.

 

1절에서 두드러진 것만 한번 짚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편기자의 고백입니다. 의 이름이 가까움이다 얘기하고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주의 이름이 가깝다, 예, 하나님은 이름이 없는 분이거든요? 또 어떤 데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 얘기를 하고 있구요. 그거는 시편만이 아니라 성서기자들이 하나의 문학가적인 그러한 관점에서 때에 따라서는 이름을 하나님에게 붙이기도 하고, 안 된다고 하는 근원적인 세계를 이야기 하고 있어요. 때에 따라서 우리가 다르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여기서 주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체를 이야기하는 거죠, 하나님에게 딱히 이름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하나님 이름이 가깝다, 주의 이름이 가깝다 이 말은 곧 주님, 아도나이라고 할 텐데, 주님이 행하신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주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주님 자체, 혹은 주님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행위로써 존재하거든요? 고 차이는 제가 한 두 번 이야기했는데 그게 와 닿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행위를 따로 하는 게 아니라 행위 자체가 하나님이죠, 이게 성서에서 다르게 표현하고 있긴 있지만 이걸 배경으로 깔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이다, 주님의 행위다, 그런 쪽에서 보면 그 다음 문장이 이해가 되죠,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 하나이다, 주님의 일을 이야기다고 하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그게 주님의 기이한 일들, 잘 기억해 두셔야 됩니다. 기이(奇異)하다, 신비롭다, 놀랍다,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표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계속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경험은 늘 새로운 경험으로 생각하시면 되는 거예요. 요즘 제가 다비아에 제가 그 “부활”에 대해서 계속 연재를 합니다. 오늘 저녁에 쓰는 게 마지막으로 끝내려고 하거든요?

 

부활에 대한 경험을 복음서 기자들이 잘 묘사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당연한 겁니다. 그건 아주 처음 경험이기 때문에 여태까지 자기들이 알고 있었던 것 하고는 완전히 이질적인 어떤 것에 대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쓸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거는 조금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종말에 일어나게 될 완성된, 선취의 방식으로 미리 당겨서 경험된 것이기 때문에 그걸 무슨 수로 복음서 기자들이 그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그러니까 그냥 아주 거칠게 아주 두서없이 그건 아주 당연할 겁니다. 금시초문에, 아주 처음에 유일무이한 어떤 사건에 대한 경험에 대한 거였기 때문에 그런 건데요,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다 그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이 새롭냐, 종말에 이르기까지 계속 그 분은 자기를 계시 하실 분 인거죠,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완전히 알았다, 하나님을 완전히 보았다, 그러니까 기억이 나는군요. 제가 자주 쓰는 용어로, 하나님을 본 자는 죽어야 되거든요? 그 표현들이 하나님은 그 어느 때라도 완전하게 자기를 드러 내지 않고 무궁무진하게 여전히 어떤 숨어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그걸 이야기 하는 겁니다.

 

예, 이 기이한 일을 전파한다, 그게 이제 주의 이름으로 가까이 오는 거죠, 하나님의 행위를 사람들이 놀라운 방식으로 경험하는 거죠, 예, 그 다음 2절부터 4절까지 요게 이제 시편기자가 주님의 말씀이다 라는 관점으로 간접화법 비슷하게 해서 전하는 겁니다. 2절 주의 말씀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는 뜻이예요.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내가 정한 기약 그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정의롭게 바르게 심판한다, 그런 말씀을 이 시편기자가 경험한 것으로 받고 주의 말씀으로 대신하고 있는 겁니다. 그 강의안을 좀 보시죠, 그 정한 기약이 되면 심판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기약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막연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죠? 안 올 수도 있다고 그렇게 맘을 놓고 있죠? 예수님의 재림도 연관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 기약, 때예요. 하나님의 때예요. 그걸 모른다고 해서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무의미하다고 말하면 정말 무책임한 겁니다. 음, 그쪽으로 여러분들의 관심을 열어 놔야 되는데요? 자꾸만 우리는 내가 아는 것, 전이해, 나의 전이해 내가 알고 있는 것, 이런 것만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방식으로 살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새로움에 대해서 참 경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인식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걸 전제해야 합니다. 질적인 차이예요? 그래서 성서가 자주 비유적으로 설명하잖아요? 토기장이와 질그릇, 예, 하나님이 때가 되면 심판하시는데요? 그 심판을 사람들은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제가 서론적으로 말씀드렸듯이 심판이라고 하는 낱말, 혹은 그 개념, 혹은 그 표상을 더 적극적으로 여러분들이 생각하셔야 되요. 그건 곧 생명을 완성하는 행위인 거예요.

 

몇 주일 전에 설교 중에 나왔을 겁니다. 가라지라고 한다면 아예 불 속에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구원이다. 생명 아닌 것은 태워져야 되니까 말이죠. 진리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행위 예, 그런 거죠. 제가 여기서 뭔가를 보충해야 되겠다 생각하면서 이 강의안을 썼는데, 그게 딱히 정리가 되지 않네요. 정확하게 정리가 되지 않네요. 이 하나만 이야기하고 지나가겠습니다. 기약을 우리가 모르는 거예요. 그 때가 되면 심판하신다고 했는데요? 이게 막연한 건 아닌 거예요. 우리의 인식을 뛰어 넘어서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신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죠, 다만 우리는 정말 인식이 짧기 때문에 아주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미처 따라가지 못해서 문제인 거죠, 성서기자들은 거기 대해서 영적인 문을, 눈을 뜬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3절, 요 번역도 앞뒤가 조금 바뀌었어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서는 이게 좀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모든 주민이라기보다도 그 안에 사는 모든 생명체라고 하는 게 좋습니다.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그렇게 되어 있죠? 그 3절에서 두 문장이 나와요, 내가 세웠다고 하는 거하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는 거죠? 여기에는 상관이 없는 거 같지요? 이게 번역이 조금 바뀌셔 그렇습니다. 땅과 거기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소멸 되겠지만, 그러나 그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흔들려도 결국 하나님이 세우신다 그 얘기구요. 심판은 파괴하는 게 아니라 세우는 거죠. 예, 4절, 여긴 교만한 자들에 대한 경고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교만이라고 하는 게, 성서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대항, 이런 뜻 이예요. 왜 그럴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오만한 자, 교만한 자 이걸 하나님이 응징한다, 뿔이라고 하는 것도 인간이 잘난 체 하는 거거든요? 그런 것들을 다 한다고 했을까요? 이걸 여러분들이 이렇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그래야 성경을 자기가 해석할 수 있게 되요. 이 해석도 상당히 다양하게 할 수 있어요, 창조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영적인 시야만 확보되면 그건 가능한 거죠, 왜 오만한 자,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그렇게 경고하실까, 핵심적으로 뭘까요? 생각해 보세요. 교만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세계 역사를 자기가 어떻게 처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거든요? 이 생명의 주인만이 할 수 있는 건데, 그걸 자기가 하려고 하는 거니까 그게 인제 교만한 거고 가장 적대적인 행위인 거죠, 이 강의안 맨 끝 구절에 썼듯이 종이 주인처럼 행동하는 것, 예, 대충 중요한 것은 설명을 한 거예요.

 

뒷부분으로 나가게 되는데, 5절에서 8절은 한 묶음으로 좀 보겠습니다. 5절 부터는 다시 시인의 이야기예요. 2절부터 4절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시인이 전한 거고, 5절부터는 다시 시인이 자기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세상이 교만한 자들이 생각 하듯이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렇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달려 있다, 하나님만이 심판자다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7절이 거기서 핵심구절이겠네요.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누구는 낮추시고, 누구는 높이고, 주인이니까 그 분이 한다 그 얘기지요. 그 6절에 표현되어 있는 동쪽, 서쪽, 남쪽 이런 것들은 그냥 여러 가지 왕들, 남쪽나라 왕들, 뭐 이집트를 생각하는 걸까요? 하여튼 그런데서 되는 게 아니라, 그걸 설명하는 겁니다. 8절에 보면 그걸 조금 더 뭐라고 할까, 문학적으로 표현한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악한 자들, 그런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손에 있는 술잔의 거품들, 그런 것들을 받아 마신다, 찌꺼기까지도 받아 마신다, 자기도 모르게 패망의 길을 간다 그런 얘기죠, 예, 이제 대충 다 됬습니다. 이제 9절하고 10절만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9절에서 시편기자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75편은 보통 제의시, 제의시 뭐 보기에 따라서 감사의 시라고 할 수 있는데, 감사시보다 제의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사 드릴 때,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부르던 시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여기 9절에 찬양이 나오지요, 그런데 야곱의 하나님을 선포한다고 그랬잖아요? 요게 이걸 달았을까요? 시편기자가 그냥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그래도 되는데 야곱이라고 하는 것을 붙였어요. 글쎄요, 뭐였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렇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동생이었잖아요? 그런데 장자의 책임과 권한을 얻은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의 질서대로 왔던 게 뒤바뀐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신다고 하는 것을 이렇게 암시하는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10절은 9절에 나와 있는 대로 하나님을 찬양한 이유가 뭐냐에 대한 해명입니다. 그것은 악과 교만을 끌어내고 하나님이 의인을 높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설명입니다. 예, 어떻습니까? 이런 시편기자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들리시나요? 동의가 되시나요? 정말 하나님이 악과 교만을 끌어내시고 의인을 높이십니까? 여러분, 이거 당장 이러나지 않습니다. 지난주의 설교하고 연관되나요? 하나님의 침묵을 우리는 안고 살아야 됩니다. 늘 뭐 착하게 살았다고 그래서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악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금방 당장 뭐 이렇게 징벌이 임하고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 마져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세계를 끌어가시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주 올곧게 신앙을 유지하기가 조금 위태로운 거예요. 눈에서 벌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하고는 다른데, 그런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좀 깨닫고 살아가야 되니까 좀 어렵기는 합니다, 지금 당장 일어나지 않아요, 정한 기약, 앞부분으로 다시 가는군요, 정한 기약이 이르면 그런 것들이 되지요. 그런데 그것도 우리가 하는 방식하고는 다릅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인 거예요. 부활의 방식, 이건 십자가까지는 인간이 할 수 있어요. 억울한 사람을 정말 죽일 수도 있고, 힘이 승리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부활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사건이거든요? 그러니까 부활의 생명 앞에서, 여러분! 인간의 모든 교만한 행위들은 술, 거품, 찌꺼기가 되는 거죠, 그냥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몇 억원 저금통장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인정사정 가리지 않고 애걸복걸해 가지고 모은 그런 것들이 부활 생명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사건 앞에서 술 찌꺼기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시편기자가 아직 부활 생명에 대한 생각은 없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다행스럽게 역사가 한참 흐른 다음에 예수님 이후에 우리가 살기 때문에 시편기자가 아주 못 다 이해한 그런 것 까지 우리가 알게 되는 거지요. 이러한 부활 생명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뭐냐 하는 걸 알게 되는 거고, 그때 찬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제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만이 심판자이다” 이것은 누구를 두렵게 하려고, 헐뜯으려고, 너희들 못된 짓 했지, 당장 끌어내리고 내가 잘 되려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한 구원사건에 대한 통찰을 한 영적 시인의 진솔하고 정확한 신앙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2500년 전, 이스라엘의 한 위대한 영성가의 기도문, 신앙 고백문을 같이 읽고 공부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도 우리들에게 그대로 진리임을 저희들이 믿습니다. 하나님만이 심판자임을 믿습니다. 그 궁극적인 심판을 하시는 분만이 우리의 하나님임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사건, 또 심판 사건인 그 부활에 우리의 삶의 모든 근거들을 놓고 이 어려운 시절에도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붙들며 살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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