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15편 녹취록- 야훼의 장막에 거할 자

조회 수 2156 추천 수 0 2010.02.15 21:32:08

시편강해 시편 15편-야훼의 장막에 거할 자

시편 15편입니다. 5절까지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가 먼저 읽을 테니까 여러분들은 눈으로 따라 보세요.

 

〔다윗의 노래〕

1. 야훼여! 당신 장막에서 살 자 누구입니까?

    당신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2. 허물없이 정직하게 살며

   마음으로부터 진실을 말하고

3. 남을 모함하지 않는 사람,

   이웃을 해치지 않고

   친지를 모욕하지 않으며,

4. 야훼 눈 밖에 난 자를 얕보되

    야훼 두려워하는 이를 높이는 사람,

    손해를 보아도 맹세를 지키고,

5. 돈놀이하지 않으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지 않는 사람.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아멘!

우리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이번에는 함께 읽겠습니다. 다 같이 1절부터 5절까지 읽겠습니다. 

 

  〔다윗의 노래〕

1. 야훼여! 당신 장막에서 살 자 누구입니까?

   당신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2. 허물없이 정직하게 살며

   마음으로부터 진실을 말하고

3. 남을 모함하지 않는 사람,

   이웃을 해치지 않고

   친지를 모욕하지 않으며,

4. 야훼 눈 밖에 난 자를 얕보되

   야훼 두려워하는 이를 높이는 사람,

   손해를 보아도 맹세를 지키고,

5. 돈놀이하지 않으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지 않는 사람.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참고>개역개정

〔다윗의 시〕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 방하지 아니하며

4.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 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 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아멘! 오늘 이 시편 15편은 일반 보통 구약학자들이 제의전승으로 분류하는 시예요. 제의, 이건 제사 지낼 때 하는 의식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도 여러 가지 성격이 있는 거죠, 어떤 사람들은 고통당했을 때 하나님을 향해서 호소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를 간구하는 것, 하나님의 징벌을 간구하는 것도 있겠구요. 혹은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왕 즉위식을 할 때 노래하는 시들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이 시편이 유대인들의 노랫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대인들은 늘 일상적인 삶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일치시켜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 그들의 노랫말, 시, 그런 것들이 다 신앙화 된 거죠, 심지어 아가서 같은 것들은 남녀 사랑 관계, 에로스적인 것들을 많이 담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 마저 하나님의 신앙 안에서 생각을 해서 성서 안에 들어오게 된 겁니다. 아가서 같은 것도 성서가 됬으니 이런 시편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여러 종류의 유대인들의 그 노랫말이 담겨 있는 거예요. 이 15편은 제사 지낼 때 어떤 사람이 들어 올 수 있느냐 없느냐 그러한 전승 가운데서 나온 시라고 합니다. 그 당시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일치되고 있어서요, 이러한 제의, 종교적 그러한 것들도 그들의 일반적인 삶 전체를 지배하는, 규정하는 그러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짧은 구절인데, 그래도 구절을 나누어서 좀 봅시다. 그렇게 어려운 부분은 없어요. 그래도 우리가 안으로 조금 깊숙이 들어가면, 생각해야 될 내용들은 많이 있습니다. 이게 제의 전승이라고 하는 근거를 1절에서 찾아 볼 수 있어요. 이렇게 얘기하죠, 야훼여! 당신 장막에서 살 자 누구입니까? 당신 장막, 당신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예, 이거는 이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참여할 사람들이 누구냐, 아니냐 하는 것들을 제사장이 판단하는 거거든요? 그런 게 이제 1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 제사장의 역할은 여러 가지로 많이 중요했습니다. 이런 제사 지낼 때 이 사람 통과, 아니면 또 안되 이런 것도 했겠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걸 기억 할 거예요. 문둥병 치료된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제사장에 가서 몸을 보여라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이 제사장이 의사와 같은 역할까지, 이 문둥병이 치료되었는지 안 되었는지에 대한 결정을 제사장이 한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유대인들의 삶을 제사장이 끌어 왔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제사장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 중매자와 같은 역할을 한 거죠. 이거는 사실은 유대만이 아니라 동양에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무당 같은 사람들이 영매자라고 보통 하고요. 신과, 그들이 말하는 신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뜻은 아니고 어쨌든 그들이 어떤 신적인 신들, 악한 힘이든 선한 힘이든, 주로 악한 힘을 통해서 어떤 일을 해결해 보려고 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러나 신을 사실, 악한 신이다, 선한 신이다 구분하는 것이 그리고 우리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하여튼 그 무당들도 신과 인간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했듯이 구약의 이 제사장들이 신적권위를 확보하고 신을 대리해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1절이 바로 그걸 얘기하는 거죠, 누가 할 수 있느냐, 이건 제사장이 판단하는 거예요.

 

2절부터 그런 목록이 나옵니다. 어떤어떤 사람이라고, 2절엔 두 가지 단어가 중요하죠? 정직과 진실입니다. 허물없이 정직하게 살며 마음으로부터 진실을 말하고 제사에 참여 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인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보통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오늘 이 시편 말고 다른 토라, 율법서 이런데 보면, 보통 정결의식이 많잖아요? 어떻게 몸을 씻고, 옷을 어떻게 입고, 이렇게 정결의식으로 많이 얘기하는데, 여기는 조금 색다릅니다. 제사 지내는 자격이 윤리도덕적인 걸 얘기하죠. 아주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 제사의 어떤 근본적인 성격보다도 그냥 다른 윤리와 도덕 같은 걸 얘기하니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정직과 진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게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가능하고요, 어쩌면 방금 태어난 어린아이들에게만 가능할까요? 그런데 그 어린아이들도 조금 크면, 거짓말하죠, 그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거짓말해요, 그러니까, 이 거짓말, 진실과 정직하지 않고 반대되는 것을 하는 것은 거의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 기억하시잖아요? 우리가 자주 읽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아담아, 누가 선악과 먹으라했느냐, 이렇게 말할 때, 당신이 나에게 준 이브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브는 또 뱀을 핑계되고요, 그렇거든요? 물론 우리가 많이 노력해서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어떤 윤리적인 노력을 통해서 또 어릴 때 부터 부모에게 좋은 교육을 받으면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기는 하는데, 늘 그렇게 되지는 못하지요. 카인과 아벨 사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아벨을 죽인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질문을 받고 카인이 뭐라고 대답하는지 아실 거예요. 뻔뻔스럽게 대답하거든요? 자기가 죽였는데도,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이게 인간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을 성서가 우리들에게 지적해 주는 겁니다. 정직과 진실로 사는 사람만이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자격이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절, 여기에도 한 단어 한 단어가 딱딱 상징적으로 표현됩니다. 세 단어가 나와요. 모함, 두 번째는 해침, 세 번째는 모욕, 남, 이웃, 친지 그게 각각 나오는데, 결국은 자기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죠. 남을 모함하지 않는 사람, 이웃을 해치지 않는 사람, 친지를 모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바로 2절에 나온 단어, 정직과 진실은 조금 적극적인 윤리와 도덕이구요. 포지티브(positive)하다고 할 수 있고요. 해야 되는 거니까, 적극적으로 행함, 3절에 나와 있는 윤리 도덕 이것은 좀 패시브(passive)한 거죠? 하지 말아야 될 거니까요. 소극적인, 부정적인 차원에서의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시편기자가 이걸 강조하고 있을까요? 그냥 그리되려하고 에서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 말라는 말씀은요, 우리는 늘 그렇게 산다는 얘기예요. 늘 모함하고 모욕하고 해치고, 개인에 따라서는 차이가 있지요. 어떤 사람은 더 과격하게 그렇게 하고, 어떤 사람은 덜하고, 어떤 사람들은 은근하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는 포장을 잘 하지만, 속으로는 늘 해치는 생각을 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친구를 향해서 이놈, 저놈, 라가 이렇게 욕을 하는 게, 이미 살인한 거다라고 하는 예수님의 경구, 아포리즘(aphorism)이라고 하는데요? 그 경구에 따르면 인간은 늘 친구를 향해서도 그렇게 늘 살인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산다는 것을 우리가 배울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모함하고, 해치고, 모욕을 할까요? 왜 그럴까요? 이런 것들도 다 본질적인, 본성적인 우리들의 속성인데요? 이건 교만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휘브리스(hybris)라고 하거든요? 어거스틴이 원죄가 뭐냐 하는 것에 대해서 휘브리스, 교만이다라고 얘기했는데, 옳은 이야기라고 봅니다. 사람이 교만하거든요? 그냥 제가 공자왈로 이렇게 말씀드린 게 아니라 이건 정말 사람에게 있는, 떼낼수 없는 본질에 속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게 되거든요?

 

이거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벗어나기가 참 힘들어요.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만이 교만한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도 때에 따라서 상당히 교만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가면, 이런 것들은 우리가 노력을 해서 해결하기 힘든 우리 안에 있는 요소들이거든요? 그래도 우리가 최선으로 교만한 게 아니라 겸손할 수 있도록 우리자신을 다스려 나가야 되고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그렇게 비춰달라는 그런 기도를 드리면서 살아야 되겠지요. 우리는 어둠이거든요? 교만은 어떤 면에서 어둠인데, 자꾸만 싸워봐야, 겸손 해야지 겸손 해야지, 하루 수 백 번 외쳐도, 해결 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아요. 그게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다고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어둠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힘으로 내쫓는 게 아니라 빛이 들어와야 되는 것처럼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가득 비춰야만, 우리가 교만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겸손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데요. 우리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는 되지만, 근본적인 것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꼭 명심하세요. 그 하나님의 은총, 그걸 우리는 생명이라고도 얘기하고요? 그런 것들이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은총이라고 얘기 할 수도 있고, 그런 것들이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가 근본적으로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고요, 우리가 교만한 데로부터 근본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게 정말 완벽하게 하냐 안하냐, 완벽한 건 아니죠, 죽을 때까지 우리는 교만으로부터 멀어지는 영적인 그러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모함, 해침, 모욕 이런 것들을 꾸준하게 우리가 거절해야 될, 극복해야 될 그러한 요소들이죠, 조금 까다로운 부분을 만나게 됬습니다.

 

4절 전반절, 우리 성경으로 세 줄로 되었는데, 두 줄만 좀 봐야 되겠어요. 세 번째 줄은 다른 도덕 윤리적인 것인데요? 이 첫째, 둘 째 줄에 좀 이상한 게 들어와 있습니다. 윤리도덕이 아니라 이건 야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타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한 건데, 이 유대인을 향한 이방인의 태도라고 할 수 있겠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야훼 눈 밖에 난 자를 얕보되 좀 이상하죠? 얕보라고 그러지요? 이거는 개역성경 이런데 보면 멸시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야훼 두려워하는 이를 높이는 사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을 믿는 유대인들은 서로들 존경하고 야훼를 모르는 이방인들은 무시해라 멸시해라, 그런 얘기 아니겠어요? 이건 유대인들의 신앙이죠. 요런 부분들은 우리 기독교인으로서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성경에 있다고 그래서 모든 걸 다 우리가 그대로 받아 드릴 수는 없어요. 구약은 일단 유대인들의 어떤 신앙이거든요? 그러나 기독교가 유대교에 뿌리를 두어서 우리가 이 성경을 받아 드리고 읽는 거지 여기 있는 것을 몽땅 다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적인 신앙으로 말한다면, 오히려 이걸 극복하고 어디까지 나가야 됩니까? 원수 사랑까지 가야 되잖아요? 실지로 우리가 원수 사랑하기 힘들어요. 그래도 원수 사랑에까지 이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의 태도는 필요한 거잖아요? 신약성경에 믿지 않은 자와 그렇게 뭐를 함께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긴 있지만, 이렇게 멸시해라, 무시해라, 이런 정도까지는 나가지 않거든요? 그리고 신약성서에 있는 그 구절도 구약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서를 해석하는 것은 참 굉장히 예민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정말 전체 큰 틀에서 볼 때 바른 거냐 아니냐를 늘 판단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러한 판단능력이 쉽지 않죠. 예, 요 부분은 그러니까 야훼 눈 밖에 난 자를 얕보고 야훼 두려워하는 자를 높이라고 하는 이러한 말은 이것 자체로서보다도 신학적인 차원에서 보충을 해야 되겠지요. 우리는 어떤 사람을 향해서도 멸시하지 않고 얕보지 않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늘 열어 놓고 서로 존경하고 모든 이들을 향해서 공정한 그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마땅한 거죠. 하여튼 요 부분만큼은 유대교만의 특징이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4절 후 반절 세쨋 줄에 남은 것은 다시 도덕 윤리 문제로 돌아가요, 손해를 봐도 맹세를 지키고, 맹세, 5절 전 반절에 돈놀이, 맹세는 지키고, 돈놀이 하지 말고 뇌물 때문에 무죄한 자를 해치지 않는 사람, 이해 되었죠? 그러니까 맹세와 돈놀이와 뇌물, 이런 것이 같이 연결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일종의 사회윤리라고 할 수 있어요. 앞에 있는 것은 정직하게 산다거나 진실을 바란다거나 이런 것들은 개인 윤리라고 한다면, 요 부분, 4절 후 반절과 5절 전 반절에 돈놀이, 이거는 사회를 빈익빈 부익부를 강하시키는 악한 짓이기 때문에 이건 사회윤리인 거죠. 뇌물 같은 것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 사회라고 하는 것은 한 개인이 도덕적으로 각성한다고 그래서 새로워지지는 않는 거거든요? 그런 점에서 사회윤리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하나의 시스템인거죠, 그런 것들이 잘 된 나라들을 보통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하고요, 개개인의 삶을 제도가 지탱해 주는 거죠, 사실은 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조금 냉소적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이러한 말이 있듯이, 그리고 법도 이현령비현령이란 말이 있듯이 이 법이 오히려 돈 가진 사람에게 유리하게 이용된 경우가 많이 있는데, 원래 법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제도적인 안전장치를 제공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시스템, 사회윤리라고 할 수 있는거죠. 기본적인 정신은 거기에 있습니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1892-1971)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도덕적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 아주 유명한 책인데, 거기서 그런 걸 지적하는 거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아주 Moral 하지만, 그러나 이 Society에 들어가게 되면 인간이 그 제도, 구조 속에서 사람이 아주 Immoral 한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인간을 현실적으로 보고 제도를 바르게 해 나가는 것들이 기독교 윤리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맹세 지키는 것, 돈놀이 안하는 것, 뇌물 받아서 무죄한 자 해치는 이 없는 것, 이 사회적인 윤리이고 오늘 이 시대에도 정말 필요한 그러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결론적으로 5절 후 반절에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 시편기자의 결론이죠.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 예, 요런 결론도 사실은 유대교적인 이야기예요. 이게 율법을 완성하는 거거든요? 정직, 진실, 돈놀이 하지 않고, 이게 다 좋은 건데, 이런 것들을 잘 지키면,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얘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그렇게 정직하게 살아도 겉으로는 많이 흔들립니다. 힘들어져요.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신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튼튼해진다고 하는 점에서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옳긴 합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볼 때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는 이런 윤리 도덕의 완전성을 통해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보지 않고요, 율법 너머에 복음으로 들어가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가 완성된다고 하지 않고 그러니까 의롭다고 인정받는 세계, 칭의론의 세계지요. 율법과 복음의 관계라고 할 수 있고요. 행함과 칭의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대비되는데, 이런 결론이 유대교의 특징, 율법주의, 업적의, 자기성취라고 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전혀 다른 길이죠. 전혀 색다른 길로 자기의가 아니라 칭의 라고 하는 거죠. 인정받는, 그렇다고 해서, 뭐 지난주의 설교주제이기도 하군요. <율법을 넘어서>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칭의론에 들어 있다고 해서, 율법, 도덕 이런 제도이니까요. 우리들, 이 사회가 요구하는 이 모든 가치 있는 행위들을 얘기하니까요. 그런 것도 다 무시해도 좋다, 무의미하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우리 근원적인 신앙의 자리가 어디냐, 자리를 새롭게 정리한 것이구요. 그렇게 된 사람들은 누가 하라 말라 그런 강요 없이 자기를 성취할 의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는 당연히 그런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되겠지요. 그게 그거 아니냐,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좀 열매를 맺기 위해서 그게 자기가 성취되는 길이라고 그렇게 가는 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으로서 그 안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에 나타나는 거 하고는 그건 전혀 차원이 다른 거죠. 우리 기독교 신앙은 후자에 놓여 있습니다. 시편 15편 1절에서 5절까지를 읽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어떤 위대한 영적 시인이 쓴 시였습니다. 유대인들의 특징들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숙이 들어가려고 했었던, 이 시인의 시들이 신앙의 어떤 부분들을 새롭게 해 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다만 제가 공부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기독교적인 신앙으로 이런 유대교적 율법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신앙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우리가 신앙의 자기 성찰을 놓치지는 말아야 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에게 시편 15편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말씀 안에서 우리가 새겨들어야 될 말씀들을 잘 새겨듣고 또 뛰어 넘어야 할 부분들을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잘 헤쳐 나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돈독해 질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여러모로 혼란스럽고 어려운 이 시대에 하나님을 나라를 향한 우리들의 온전한 관심이 어느 한 순간도 흐려지지 않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돌아오는 발걸음도 함께 해 주실 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라인홀드 니버,〔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남정우 역, 대한기독교서회. 2003.


profile

[레벨:38]클라라

2010.02.16 00:52:49
*.229.151.223

주님은 참회하는 자에게만 가까이 하십니다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알 수 없나니...

 

오 주님,

주님은 혈육을 가진 사람과 같지 않으시니

우리를 창조하고 재창조하시어,

위안을 주십니다.

 

내가 주님을 찾고 있을 때

나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주님은 바로 내 앞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에게서 떠나 있었으므로

나 자신을 찾을 수 없었으니

하물며 주님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 주님,

주님은 위대하시므로

낮은 자를 굽어보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십니다.(시 138:6)

주님은 마음 깊은 데서부터 참회하는 자에게만

가까이하십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들은

그들이 아무리 깊고 묘한 지식으로써

별과 모래알을 세고, 성좌의 위치를 관측하며,

천체의 궤도를 추적한다 할지라도

주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있을 일식은 미리 알면서도

현재에 있는 자기 자신들의 일식은

전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어거스틴 『고백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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