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92편 녹취록-주께서 행하신 일

조회 수 1472 추천 수 1 2010.08.04 01:03:53

시편 92편 강해-주께서 행하신 일

시편 93편, 우리 기도하는 마음, 혹은 찬양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에 집중해서 같은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절부터 15절까지 있습니다.

 

〚안식일의 찬송시〛

1-3.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4.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5.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6.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7.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8.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9.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

10.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11.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

12.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13.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14.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15.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아멘! 우리가 같이 읽은 92편, 시편의 표제가 거기 나와 있지요. 표제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어요. 93편, 94편은 제목이 따로 안 적혀 있지요? 92편은 제목이 있습니다. 이 시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나왔느냐, 하는 걸 말해주는 거죠, 보통 고전음악에서도 표제가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잖아요? 베토벤 음악에도 “월광 소나타” 이런 게 있어요. “월광” 이라고 하는 표제가 붙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본인이 붙이기도 하고 나중에 붙이기도 하는데, 92편의 표제, “안식일의 찬송시” 물론 나중에, 어떤 사람이 붙였겠지요.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찬송을 드렸는데 이게 그 중의 하나라는 거지요. 안식일에 모두 제사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제사는 어디에서만 드려지는지 아시지요? 성전 이예요. 그런데 성전이 곳곳에 다 있는 게 아닙니다. 예루살렘에만 있어요. 그러니까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멀어서 예루살렘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습니다. 대신 그 사람들은 어디 가서 하는지 아시겠지요? 회당에 가서 드립니다. 회당에 가서 드리는 것은 제사는 아니예요. 제사장이 희생제물을 드려서 하는 거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가능한 겁니다. 회당에서도 모여서 제사는 아니지만 자기들의 어떤 모임을 가졌습니다. 회당의 어떤 모임이죠. 이렇게 비교해서 생각하시면 되요.

 

성전에서 드린 제사는 지금 예배라고 한다면, 회당에서 갖는 모임은 어떤 성경공부라든지 그런 정식예배 말고 다른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두 개 다 중요했어요. 회당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로 읽고 듣는 거였습니다.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거죠?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가르쳤더라, 그런 얘기 나오죠? 그게 주로 랍비들이 주로 하는 일들입니다. 회당에서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운다고 한다면, 성전에서 드려지는 그 말씀보다도 희생제사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 예배에는 이 두 가지 전통이 다 들어와 있는 거죠. 희생제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그런 거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선포하는 것 이런 것이 두루두루 갖춰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이러한 특별한 종교적인 일들을 할 때 부른 찬송이 92편인 거지요. 이것만이 아니라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런 표제가 붙었어요. ‘안식일의 찬송’이라고 하는 거죠, 안식일에 대해서는 제가 지금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뼈대만 말씀 드리면요,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일은 물론 토요일을 이야기 하는데, 말 그대로 안식한다, 쉰다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구약의 역사적 배경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창조이고, 또 하나는 출애굽이예요. 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 출애굽기, 레위기, 십계명의 그 뿌리를 쭉 따라 올라가게 되면 두 가지 이유와 만나게 되는 겁니다. 창세기와 연관되는 거지요, 이 두 가지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말 중요한 거예요. 창조,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했다, 그리고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이 거기에 숨을 불어넣으시고, 그리고 생령이 되게 했다, 아주 독특한 방식의 생명을 살게 했다, 이보다 더 위대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일반 동물들과는 달리 아주 고유한 방식으로 그런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 거지요, 그 창조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찬양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계를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셨다고 하는 창조사건 앞에서 인간이 해야 될 가장 중요한 것은 뭐라고 하는 거예요? 안식일과 연관시키면 쉬는 거죠, 쉼요. 노동, 자기재산을 늘리는 것, 최소한도 일 주일에 한 번은 쉬어라, 결국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라, 근원으로 좀 들어가 봐라, 그러한 요구입니다. 또 하나는 출애굽기예요. 그러니까 노예생활로부터 너희들을 해방, 자유하게 하신 분이 누구냐, 기억해라, 그러니까 여기 이러한 해방과 자유앞에서도 인간이 해야 될 일은 돈 벌어서 어떻게 하겠다, 그게 아니라 일단 쉬는 것, 인간은 어떤 것으로부터도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일절 모든 걸 쉬게 했습니다. 그게 안식일 전통이거든요? 창조와 출애굽, 이 두 가지가 안식일에 역사적 배경입니다. 이거 창조와 출애굽은 누구만 할 수 있어요?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거죠, 하나님에게만 가능했던 구원사건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어디로부터 온 것, 그건 창조죠. 그리고 우리가 여러 가지 억압, 여러 가지 노예와 같은 구조, 여기로부터 벗어나는 것, 이거야말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구원사건이니까요. 예배는 바로 그것을 기리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오늘 제가 본문 말씀에 들어가기 전에 서론적으로 그 이야기를 한 이유는 표제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찬송시’ 그걸 전제하고, 오늘 본문을 읽어야 되는 거지요. 예배는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를 해방시키신 그 분에 대한 감사 찬양의 모임이다, 그거지요. 결국 예배는 그 강의안에 기록된 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 삶의 가장 깊은 근원으로 들어가는 영적훈련” 이라고 하는 거죠. 이게 여러분들이 실질적으로 느껴지셔야 되는데요, 이런 표현들이요. 인간 삶의 가장 근원으로 들어가는 영적훈련, 이것이 실제로 영성인겁니다. 우리 생명의 가장 심층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거죠, 그게 도대체 뭐냐, 그건 제가 한 두 마디로 끝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먹고 사는 문제도 물론 생명이예요. 여러 가지 차원에서 우리가 지금 살아서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런 것만 가지고 우리가 생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를 이렇게 살아 숨 쉬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하면 성령인거지요,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죠, 그런 차원으로 성령은 바로 곧 하나님이시고 말이죠, 이런 관점으로 두루두루 깊이 들어가는 것이 삶의 심층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거든요, 예배는 바로 그러한 훈련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창조와 해방을 기리기 위해서 안식일에 성전이나 회당에 모여서 불렀던 찬송 중에 하나가 오늘 우리가 같이 읽은 시편 92편입니다. 저는 표제하고는 달리“주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찬양을 해야 되는데, 무얼 찬양하냐, 그러한 질문에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찬양한 거다, 그런 관점에서 이런 제목을 잡았습니다. 오늘 강의안은 전체적으로 4단락으로 되어 있어요.

 

천천히 좀 보시지요, 우리가 결국 안식일과 찬양이 나왔으니까 결국 예배를 중심으로 얘기를 해야 되겠어요. 예배중심은 제가 바로 전에 말씀 드린 대로 주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찬송입니다. 오늘 시편은 다르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제가 서론적으로 말씀드린 안식일에 구약 성서적 배경의 관점에서 볼 때는 주께서 행하신 일이 뭘까요? 창조와 출애굽이죠, 그것에 대한 찬송입니다. 이게 바로 예배자들에게 기쁨이 되는 거죠, 내가 집 한 채 샀다, 사람은 그런 걸로 기쁘거든요? 내가 땅을 샀다, 기쁩니다. 그런 것에서 우리가 완전히 쉽게 벗어날 수는 없는 거지만,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기쁨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아시겠죠? 하나님이 행하신 일만 우리에게 기쁨이 됩니다. 결국 우리는 다 놓아야 되니까, 모든 걸 놓아야 되니까, 정말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뭐냐 하는 것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영적인 안목, 통찰력 이걸, 영성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예배에서 계속 그런 훈련을 해야 하는 거지요. 이게 쉽지 않습니다. 몇 번 깨닫다가도 금방 잊어 버려요. 그걸 기억하다가도 우리는 쉽사리 흐트러지곤 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신앙도 좀 훈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수요일마다 모여서 이렇게 공부를 하는데 이것도 그런 훈련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어떤 바둑의 수가 높아지듯이, 단수가 올라가듯이 그러한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만이 예배자의 기쁨이 되는 거예요. 이 사실로 뛰어 들어가야 되요. 우리는 말로는 그렇게 하는데 실제는 잘 안되죠.

 

그래서 4절에 그렇게 이야기 하잖습니까, 4.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다 찬양인거죠, 예, 우리 기쁘신 일은 주의 행하신 일을 우리가 기쁨으로 주의 행하신 일을 외치자,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그게 예배입니다. 복잡하게 생각 안해도 되요.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쁨으로 찬양한다고 하는 겁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 그것은 좀 앞 절로 돌아가서요, 오늘 우리 성경을 보면 1절에서 3절 구절이 나뉘어지지 않고 쭉 연결되어 버렸어요. 1절에서 3절까지 한 꺼번에 모아졌습니다. 왜 이렇게 했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어요. 제가 다른 성경을 봤는데 1절,2절,3절이 구분되어 있기도 하던데, 특이하게 되어 있어요. 구절을 구분하기 힘들어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구절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없었거든요? 나중에 학자들이 읽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장과 절, 이걸 구분한 겁니다. 히브리어라고 하는 게 주어 목적어, 복잡하게 섞여 있으니까 이걸 우리말로 정리하기가 좀 힘들었던 거 같습니다. 어쨌든 제가 바로 4절 말씀드리다가 1절로 돌아가자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 주님이 행하신 일이 어떤 거냐, 그 성격을 말하지요.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라고 했어요.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정말 인자하시고 성실하신가요? 아니 그렇게 느껴지시나요? 당연한 것 그건 옳은 이야기인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말 인자하시고 성실한 어떤 사건들이 그게 바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예요. 이제 우리는 이걸 하나님이 꼭 내 기대에 맞춰서 해 주셨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기대를 하긴 하는데, 그 기대를 하는 건 좋습니다만, 그걸 가능한대로 내려 놓고, 정말 하나님은 인자한 것과 성실한 것을 주신다, 그걸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틀림없는 사실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우리가 막 흔들리기 때문에 도대체 하나님이 성실하신거야, 인자하신거야, 뭐, 혼란한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는 거죠,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의 성실하심, 이런 것이 우리 영적인 시야에 들어오면, 그 때 예배가 가능합니다. 그런 감격이 좀 있나요? 아, 정말 하나님이 인자하신 분이구나, 성실하신 분이시구나, 이건 인간적인 차원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언어를 통해서 말씀하긴 하지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절대적으로 인자하고 절대적으로 선하고 절대적으로 성실한 그 분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런 경험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되는데, 난파선을 타고 가다가 구호선을 만났을 때 어떤 경험일까요? 그와 비슷한 거와 같아서 제가 강의안에 적었습니다. 정말 기쁜 거 아니예요, 정말 살았다는 생각 되지 않습니까, 그런 경험이예요. 하나님 경험은 살았다, 이거죠, 일체 다른 건 생각이 안 되요, 다른 조건을 따질 필요도 없어요, 아, 지금 내가 생존하고 있다, 이렇게 살아있다, 숨쉬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 그게 전체 우리의 삶을 사로잡는 그런 경험들입니다. 그럼 이제 뭐, 이런저런 내가 기대했던 소소한 그런 일들이 잘 안된다고 하더라도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요? 난파선에 있다가 귀우뚱귀우뚱 막 빠져 있던 순간에 구조선을 만났을 때와 같은 그런 경험들입니다. 예, 그게 우리가 죽을 병에 걸렸다가 다시 살아나야 되냐, 기업이 완전히 파산했다가, 부도에서 건져져야 되냐, 꼭 그러한 큰 사건들만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일상에서 그런 걸 경험할 수 있어야 되요. 매 순간이 살았다 이거죠,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죠? 우리는 우리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크게, 아니잖아요? 굉장히 나이브하다고 할까, 너무 느슨한 거예요, 다른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에 꽉 갇혀져 있기 때문에 살았다, 이런 것을 경험을 잘 못하죠, 하나님 경험이 늘 흐릿해지는 겁니다.

 

5절에 보면 이 사람이 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이 정말 크다 주의 생각이 아주 깊다고 하는거죠, 그런데 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예배에 집중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이제 그런 것 보다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일단 그게 확실하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막연하다고 생각을 하고 말이지요, 지난 주에 설교에 한 마디 나왔나요? 바람 같아가지고 그걸 지금 손아귀에 딱 쥐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이외에 다른 것들은 다 분명하잖아요? 교회만 하더라도 교회가 막 발전한다, 몇 % 늘었다, 이런 것들이 확 들어와서 뭔가 뜨겁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정말 성령이 교회를 통치하신다고 하는 사실은 잘 안 느껴지는 거거든요, 그게 우리가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는 약간의 딜레마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일들이 리얼하고 그것만이 더 크게 들어 옵니다. 당장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에 의해서 우리는 휘둘립니다. 거기서 벗어난 사람들 많지 않아요. 아마 저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어려운 일들이 많으면 아, 왜 이렇게 힘드나,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요, 일반적인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시편기자는 지금 그거,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이 크고 생각이 깊다고 한 사실을 어리석은 자는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걸 모르는 거예요.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그걸 들어도 어렴풋하다면, 우리는 이 성서의 관점에서 보면 어쩌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 우리는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처럼 주께서 행하신 일을 정말 철저하게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 본문을 근거로 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이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우리가 기도하니까 탁 해결 됬다, 이런 방식된다면 뭐, 늘 밥 먹으면 배부르고, 늘 이런 식이라고 한다면 탁탁 해결 되겠지요, 그런데 그거 아니거든요? 오늘 여기 본문에 보면 이런 설명이 나오죠,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실제로 이런 게 이 세상의 원리라고 하는 겁니다. 악인들, 이건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거겠지요, 그게 또 풀 같이 자라요, 장마 끝에 풀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좋겠군요, 쑥쑥 자라요, 한 나절이면 벌써 몇cm 자라고 금방 그렇게 자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악해도 뭐든지 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권선징악 차원에서 이렇게 하시는 분 아니예요, 그런 방식으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무죄한 자도 고난 받을 수 있고요, 악한자, 우리가 악한 자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어쨌든 정말 악한, 그러한 힘이나 권력 있잖습니까,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게 이 세상의 작동원리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크다고 하시는 일을 미처 깨닫기가 힘들지요. 그건 숨어서 잘 나타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악인이 잘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또 부러워합니다. 두려움과 부러움은 거의 같은 현상이예요. 어떤 사회 제도속에서도 굉장히 두려워하잖아요? 뭐, 직장 있는 사람이 상사, 사장, 이런 사람을 굉장히 두려워하잖습니까, 이렇게 저렇게 잘 되는 것을 부러워하잖습니까, 이건 같은 심리적 현상입니다. 그런 것들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책하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많이 있는데요, 이제 이걸 극복해야 되거든요? 이걸 넘어서지 않으면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죠, 다른 게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데, 하나님의 생각이 크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깊다,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냥 말로만, 그냥 상투적으로만, 예배드리고 말죠, 오늘 여기 시편기자는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악인이 잘 된 것 같지만 결국 망하는 거죠, 망한다, 멸망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바로 앞에서 읽은 7절에 풀같이 자라고 흥왕하지만 영원히 멸망당한다, 풀과 같아서 곧 베어지지요, 쑥 자라기는 하는데, 베어지고요, 한 순간에 사라집니다. 9절에 보면 그 이야기를 더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다, 정령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다, 여호와 주님만이 영원하신 분이죠, 다른 것들은 다 지나가 버리니까요. 한 순간에 없어지는 거구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흩으십니다. 9절에 나온 대로요, 결국 하나님이 심판자라고 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시편기자의 이야기가 실감이 나나요? 그걸 여러분들이 더 생각을 하셔야 될 겁니다. 어떻게 보면 실감이 날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 저거는 죽은 다음에 우리가 천국 가니까,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지옥 가니까 그런 걸 이야기하는가 보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서 멸망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 궁극적으로 우리 심판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오늘 우리의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이야기는 또 아닌 거예요. 오늘 저는 그것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한두 번 말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요, 비슷한 이야기는 앞에서도 했을 것이고, 또 앞으로 공부하면서 나오게 될 겁니다. 그건 천천히 우리가 알아 가면 되는 거예요, 그런 생각에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그것과 관계된 두 가지 질문만 여러분을 대신해서 제가 해 보겠습니다. 두 가지예요. 첫째 악인들은 다 사라진다고, 다 패망한다고 했는데, 악인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좀 마찬가지 아니냐, 그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렇지요, 차를 타고 가다가 버스가 절벽에서 구르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남의 것 괴롭히는 사람이나 죽는 것은 똑같으니까요. 예, 우리는 모두 죽는 거지요. 피조물이기 때문에 사람이 선악에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느냐, 거역하느냐 상관없이 순간 사라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한 차이가 있는 거죠, 악인은 자기를 절대화 하는 거거든요? 자기가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여기서 악인이다, 의인이다라고 할 때 거짓말 조금 했냐, 안했냐, 도덕적으로 얼마나 착한 사람이냐, 그런 차원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를 절대화 하는 게 이게 우상숭배인데요, 이게 가장 큰 죄거든요? 악인은 자기를 절대화하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모든 것과 사라지고 말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살아있으면서도 늘 자기를 피조물로 낮추기 때문에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영생을 얻습니다. 이것에 대한 보충설명을 더 하진 않겠어요. 하나님만이 영원한 분이시거든요, 그 분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적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시편하고는 좀 차원이 다른 거죠, 그래도 우리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신약과 구약을 같이 연결해서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여기서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사라지는 건 아닌거죠, 이게 작은 차이 같지만, 절대적인 차이입니다.

 

둘째 여기 시편기자는 원수가 망하는 걸 기뻐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그거 지나친 거 아니냐, 하는 질문인거지요. 11절을 보면 이와 같습니다. 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그러니까 심판받는 거죠, 자기가 잘 못한 걸 그대로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 원수가 완전히 망하는 것을 속에서 아주 고소하고 아주 시원해서 지금 이 시편기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다른 시편에도 이런 이야기들은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거 아닙니다. 이거는, 이 92편은 신학적인 용어로 제의, 그러니까 하나님께 예배 찬송 드릴 때 불렀던 시이거든요? 그러니까 문학적인 거예요. 시라고 하는 것은 사실적인 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더 근원적인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 문학적인 어떤 수사들을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까, 비유, 은유, 직유, 과장법, 등등..이 본문도 그런 거예요. 이 시편기자가 지금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본다 그 이야기는 원수가 골탕 먹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권능과 구원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즐거움에 대한 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권능을 가지고 자기를 구원하신 분, 그 분이 행하신 일이 창조와 출애굽이고요. 그리고 성실하시고 인자하시다고 하는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당연히 그런 분으로부터 나오는 그런 결과로 이 악인들의 멸망, 이것을 이야기 하는 거죠, 이 시편기자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확신이 있는 거예요. 그 분이 성실하시고 인자하시다고 하는 것에 대한 이것은 정확한 그리고 꿰뚫는 그런 인식과 경험이 있는 겁니다. 그것을 이제 이 세계의 악과 의, 이런 것의 소용돌이 속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지요. 이렇게 생각하셔야 되요. 원수가 잘 못 되는 것을 고소해 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본능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이다, 그렇죠, 대충 그렇게 정리가 됬습니다.

 

마지막으로 12절에서 15절에 시편기자는 자신의 확신과 즐거움을 문학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어떻다고 그래요, 나무로 비교하지요? 종려나무와 백향목 같다고 그랬어요. 이거는 앞에 있는 악인들의 풀과는 대조적이죠? 풀은 굉장히 빨리 자라는 것 같아요, 그러나 금방 베임을 당하고 금방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종려나무와 백향목은 그 당시에 그 근동에 있었던 가장 대표적인 나무인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은 모든 나무들 중에서 식물들 중에서 가장 강건한, 튼튼한 것을 대표하는 거겠지요. 의인은 14절에 늙어서도 결실하고,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건 다 영적인 차원이겠지요, 의인이 나이가 들었는데도 육체적으로 꼭 젊어서 얘기도 낳고 힘이 좋고 그런 거는 아니구요. 그의 삶에서 좋은 일들이 결실을 맺는다 그 뜻입니다. 이러한 의인의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 혹은 오늘 주제로 말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신 일, 이 세 가지로 나오고 있습니다. 15절 마지막 구절이예요. 하나님을 온전히 잘 섬기고 그 분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는 사람들, 그런 의인들에게 어떤 일들이 있느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시느냐, 하는 그러한 마지막 이야기지요,

 

세 가지입니다. 여호와의 정직하심, 두 번째는 바위 되심, 세 번째는 불의가 없으심입니다. 정직이라고 하는 것은 속과 겉이 똑 같은 걸 의미하죠, 이런 존재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여호와는 언제나 한결 같으신 분입니다. 한결 같지 않을 때처럼 보일 때가 있지요. 그것은 우리가 몰라서 그런 거지요. 그 분은 정직하시고, 한결 같으신 분입니다. 그런 정직한 존재만이 우리 삶의 바위가 될 수 있습니다. 집을 질 때 바위위에 지어야 튼튼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삶에 토대가 되는 거죠, 그건 여러분들이 인정하시죠? 그게 없으면 우리가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아시죠? 하루에도 수 십번, 복잡해지지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위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의인에게는 당연히 그렇게 해 주시는 분인데, 우리가 그렇지 못했다고 하는 이유는 뭐예요, 우리가 의인이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겠지요. 여호와의 모든 행위는 불의가 없다고 했습니다. 불의가 없음, 세상은 불의가 많은 것 같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시는데, 세상이 이렇게 불의할까, 결국 하나님이 불의한 게 아니냐, 우리가 불만을 터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불의와 거리가 멉니다. 먼 정도가 아니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걸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죠,

 

이 세 가지 하나님의 속성을 이 시편기자가 선포하리로다, 의는 그렇게 선포한다 그렇게 얘기한 것은 자기가 그렇게 선포한다고 하고, 외친다고 하는 거고, 찬양한다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곧, 의인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의 삶에 증명 되야 된다고 하는 거죠. 하나님이 정직하신 존재, 그리고 우리 삶의 바위 되시는 분, 불의가 없는 분이라고 하는 분이라고 하는, 그 사실이 우리의 삶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야 되겠지요.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살게 되는지, 대답은 아시겠지요, 이러한 시편기자의 가르침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요. 하나님은 늘 한 결 같이 정직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 그 사실을 우리가 놓칩니다. 그래서 불안한 거죠,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92편 말씀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하는, 제목이었습니다. 예, 이 일을 조금 더 실질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은 그대로 두고, 세상사는 방식은 따로 놀지 말고 나의 실제 세상 삶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신다, 그것을 붙잡아야 됩니다. 그건 어떤 상황에서도 가능한 거예요. 제가 불치병에 당장 걸린다고 하더라도, 주께서 나에게 선한 일을 행하신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겁니다. 예, 그런 일들을 우리가 선포하고 살아야지요. 그런 일들이 우리 삶에 증명이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 되겠지요. 요기까지 하겠습니다. 잠시 차 한잔 마시고 질문응답 받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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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편 녹취록-주께서 행하신 일 file 박은옥 2010-08-04 1472
66 91편 녹취록-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 file 박은옥 2010-08-04 1463
65 15편 녹취록- 야훼의 장막에 거할 자 file [1] [16] 박은옥 2010-02-15 2164
64 14편 녹취록- 어리석은 자들 file [1] 박은옥 2010-02-15 1203
63 75편 녹취록- 하나님만이 심판자이다 file 박은옥 2010-01-31 1470
62 13편 녹취록- 야훼를 향한 송영 file [1] 박은옥 2010-01-31 1442
61 12편 녹취록- 야훼여 도와 주소서 file [1] 박은옥 2010-01-27 1502
60 74편 녹취록- 성소 파괴와 하나님의 능력 file [2] 박은옥 2010-01-26 1648
59 11편 녹취록 -야훼는 우리의 피난처 file [1] 박은옥 2010-01-20 1514
58 10편 녹취록-하나님을 향한 호소 file [1] 박은옥 2010-01-18 1945
57 8편 녹취록- 창조자와 인간 file [3] 박은옥 2010-01-12 1607
56 7편 녹취록-공정하신 야훼 하나님 file [1] 박은옥 2010-01-12 1819
55 73편 녹취록-하나님의 성소에서 file [4] 박은옥 2010-01-1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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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3편 녹취록-아침기도 file [1] [1] 박은옥 2010-01-05 2014
50 2편 녹취록- 야훼 하나님의 주권 file [1] 박은옥 2010-01-04 1531
49 72편 녹취록-정의로운 재판 file [2] 박은옥 2009-12-24 1323
48 71편 녹취록- 주는 나의 소망 file [1] [13] 박은옥 2009-12-23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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