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95편 녹취록-완악한 마음

조회 수 1454 추천 수 0 2010.09.23 15:00:24

시편 95편 강해-완악한 마음

 

시편 95편 1절부터 11절까지 같은 목소리로 이 시간 읽겠습니다.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4.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6.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 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 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아멘! 예, 시편 95편 1절부터 11절까지 우리가 읽었습니다. 참 신기하지요? 이 시편이 최소한도 2300년이나 2500년 전의 시예요. 시간을 뛰어 넘어서 우리가 읽는다는 겁니다. 생생하죠? 2500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더 오래 될 수도 있습니다. 뿌리로 찾아가면 3000년도 될 수 있겠구요. 고대 이스라엘 초창기서부터 시가 이렇게 구전되면서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자리를 잡은 문학입니다. 성(聖)문학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문학서라고 그래요. 구약을 크게 보면 세 가지라고 제가 말씀 드렸지요? 모세5경, 예언서, 세 번째가 문학서입니다. 우리가 읽은 시편이 문학서예요. 2000년에서 2500, 3000년 가까이 전에 고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인데, 오늘 우리가 읽어도 그대로 마음이 전달되지 않습니까, 예, 그러니까 근본적인 것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 밖 에요. 인간이 죽는다고 하는 것이 3000년 전 하고 지금하고 달라진 게 있나요? 우리가 아무리 많은 걸 아무리 배부르게 먹어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고 하는 게 3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차이가 있을까요? 앞으로 2000년 후의 우리 후손들도 그리 차이가 있을까요? 예, 인간이 이 지구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 이런 저런 한계를 갖고 산다고 하는 것은 똑 같습니다. 그런 기본적인 것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시편이 비록 오래전에 노래했지만, 오늘 우리들에게도 바로 우리 스스로가 드리는 기도, 노래일 정도로 친근하게 다가오죠,

 

이 95편은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신년을 기념하는 시라고 합니다. 한 해를 시작할 때 드리는 의식이죠, 뭐 제사, 그런 것에서 불렀던 노래라고 할 수 있고 또 각 가정에서, 유대인들은 각 가정에서 그런 모임들을 많이 가졌거든요. 만찬, 종교의식을 했어요. 그 때 주로 많이 불렀던 찬송이고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년에요. 유대력, 우리도 음력이라고 있잖아요, 유대력이 따로 있습니다. 제가 그걸 지금 자세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네요. 12달이겠지요? 햇수를 나누는데, 닛산 월, 뭐 무슨 월, 있습니다.(1월 니산, 2월 이야르, 3월 시반, 4월 타무즈, 5월 아브, 6월 엘룰, 7월 티수리, 8월 헤시반, 9월 키슬레브, 10월 테벳, 11월 쉬밭, 12월 아다르) 예, 그런데 이스라엘은 10월부터 한 해가 시작합니다. 가을추수를 끝내고 그것을 감사 찬양하면서 신년을 시작하는 거지요. 이렇게 한 해를 시작하는, 그리고 추수를 끝낸 그러한 감격스런 마음으로 불렀던 노래다 이런 얘기입니다. 이제 이런 마음들을 우리는 따라가기는 우리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혀 이것과 상관없이 세속사회에 살기 때문에요. 농사? 우리 젊은이들은 농사짓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할 걸요? 농사라고 하는 건 아예 머리에 두지 않습니다. 컴퓨터만 하면 그냥 살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합니다. 쌀 먹을거리야 슈퍼마켓, 대형마트에 가서 결재하니까 저절로 생기는 걸로 생각하거든요, 이게 큰 오해고 이런 것들이 기본 삶의 바탕에 놓이게 되면 이제 삶이 추상화 되는 거거든요?

 

이제 고대인들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읽으셔야 됩니다. 삶의 형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놓치기 쉬운데요?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되면 고대인들은 어떻게 되요, 일 년 동안 그들은 고생 직사하게 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비교하면 될까요? 저금해 놓은 건 없는데 당장 실업자가 되었다, 그런 정도? 막막한 거죠. 한 해 농사를 잘 지으면 한 해를 살 수 있으니까 얼마나 이 사람들이 감격스러웠을지 아, 상상이 갑니다. 꼭 생존이 가능하냐, 아니냐 여기에 집중한 거죠, 성서는 다 그런 바탕에서 기록된 겁니다. 생존, 지금이야, 생존이 아니라 풍요, 생산, 소비 이런 것으로 우리가 몰두해 있기 때문에 이게 잘 이해가 안 되는 거지요. 오히려 이런 점에서는 북한에 있는 주민들이 더 절실할 겁니다. 거기도 기독교인들이 있으니까요. 그들이 더 생존자체가 더 위태로우니까 이건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이디오피아라든지, 절대적인 궁핍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좀 역설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살아서 좀 더 풍요롭게 사는 게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얘기하잖아요? 이게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게 풍요로워 지면 우리의 영혼은 굉장히 나태해지니까 이게 참 역설적이예요. 예, 그러니까 모든 게 잘 되가지고 떵떵 거리고 사는 게 그렇게 그게 큰 은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그냥 공자 왈 투로 설교조로 말씀 드리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팔복 중에도 나오는 얘기 나오지 않습니까, 제가 다른 때에도 예를 든 이야기입니다. 이게 그냥 그러려니 하는 얘기가 아니라 실질적인 거거든요, 가난해야 어떤 생명, 생존, 삶, 여기에 집중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이 싹 틀 수 밖 에 없는 거지요. 이 시편 95편을 그런 심정으로 부른 거거든요. 81편하고 비슷하다고 합니다. 나중에 한 번 집에 가서 복습하면서 81편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도 비슷한 내용들이 나와요. 95편이나 81편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약속을 아주 중요하게 언급을 합니다. 특별히 두 곳에 다 광야에서 있었던 어떤 사건을 거론합니다. 그게 므리바 사건이거든요. 그것을 지적하면서 완악한 마음을 말씀합니다. 므리바 사건을 제가 조금 후에 설명할 텐데요, 거기서 있었던 사건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악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는 거지요. 신년에 이 제사를 드리면서 이런 기도를 드린 이유가 정말 중요한 것은 완악한 마음을 없애는 것, 완악하지 않는 것, 도대체 완악한 마음이 뭐냐, 완악한 것은 뒤에 나오겠습니다만,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완악한 건 뭐냐, 뭘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있냐, 없냐,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느냐, 아니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그걸 한 번 시험하는 것 이제 그걸 완악한 마음이라고 하고요. 이게 가장 큰 잘못으로 성서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므리바 사건은 출애굽기 17장 1절에서 7절 사이에 나옵니다. 이 병행구가 민수기 20장 1절에서 13절입니다. 이 출애굽기나 민수기나 다 모세오경에 나오는 거예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까지가 다 모세오경이예요. 그건 창조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역사로 따지자면 가나안 들어가기 직전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여호수아가 나오잖아요? 여호수아는 이제 가나안 정복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렇게 구약이 흘러가게 되는데, 모세오경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때, 팔레스틴이죠, 거기에 터를 잡고 살기 이전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비슷한 사건들이 중복되기도 해요, 지금 바로 지적한 대로 출애굽기 17장하고 민수기 20장은 비슷한 이야기구요. 또 그와 비슷한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도 몇 군데 나오고 있어요. 므리바 이야기를 조금 더 봅시다, 오늘 그게 공부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 민족들이 광야로 들어가게 되잖아요. 미디안 광야라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광야에 들어가서 가장 큰 어려움이 뭐였을 거라는 것은 감이 잡히지요? 식수문제하고 먹을거리입니다. 이게 애굽에서의 상황하고는 전혀 다른 거예요. 애굽은, 이집트 말입니다. 나일강을 중심으로 해서 먹을 것하고 물, 이것은 근본적으로 해결 되었어요. 최소한도 생존이 보장 된 곳이 이집트라고 할 수 있고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중에서도 아주 좋은 지역 고센이라고 하는 지역에 요셉이 처음에 국무총리 비슷하게 활동을 해서 파라오에게 그 땅을 불하받았다고 할까, 그래서 거기서 살게 되었습니다. 좋은 땅에 살았어요.

 

그러니까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을 나온 것은 먹고 살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는 거지요. 그런 것을, 어떤 면에서 좋은 조건이예요. 이집트는 그 당시에 최고 문명국가구요. 제국이었지요. 여러 가지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구요. 거기서 학대를 받았다고 하긴 하지만 그러나 성서는 그것을 좀 과장해서 표현한 거구요. 살 만 했습니다. 나쁘게 표현하면 조금 더 나쁜 상황으로 본다면 우리에게 나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라고 할까요, 그보다는 뭐 여건이 좋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한 삼사백년동안 거기서 살아서 비록 소수민족이라고 하지만 상당히 터를 잡고, 안정적인 삶을 산 거예요. 거기를 박차고 광야로 나오죠. 이집트에 있었던 풍부와 물, 그리고 먹을거리 이런 것들이 딱 이제 없어지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당황하는 거지요. 그 이야기가 출애굽 이후 한 달 반 지나면서 한 달 여 언저리에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확하게 일지를 따지기는 힘들지만, 그 때 벌어지게 되는 거예요. 물에 대한 이야기는 두 번 나오고요. 먹을거리에 나온 이야기는 한 번 나옵니다. 물론 다른데서도 문제가 있었지만, 그걸 구체적으로 거론한 부분은 물은 두 번, 먹을거리는 한 번입니다. 먼저 물이 나오고 그 다음에 먹을거리 나오고, 또 다시 물이 나와요. 물을 두 번이나 다룬 걸 보면 아마 사람이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물이여서 그런 거 겠지요?

 

첫 번째 물 이야기, 오병이어 이야기는 제가 줄이고요, 그건 강의안에 있는 걸 보시기 바랍니다. 물 이야기가 두 번이니까, 그 사이에 먹을거리, 만나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거는 일단 접어두기로 하고 중간의 이야기는 빼놓고 물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물 이야기는 두 가지 종류가 나옵니다. 하나는 보통 ‘마라의 쓴 물’이라고 들어 보셨지요, 주일학교 다니거나, 아니면 교사였던 분들은 뭐, 마라의 쓴 물은 유명한 이야기니까 다 아실 겁니다. 그러니까, 마라에 도착했는데, 물을 보니까, 그게 어떤 물인지는 잘 모릅니다. 시내는 아니었을 거예요. 광야에는 시내가 별로 없으니까, 아니면 지하수, 오아시스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오아시스요, 아, 그런데 그게 쓴물이라고 했습니다. 부패한 건지 어떤 건지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한테 원망한 거예요.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좋은 일 있으면 자기가 잘 한 것 같이 생각하고 나쁜 일 벌어지면 남을 비난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똑 같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어떤 나뭇가지를 그 물에 던지니까 그 물이 깨끗해졌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거야 뭐 우리가 잘 모릅니다. 고대인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 관심 없습니다. 이런 걸 아주 기적적인 거다, 초자연적인 거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참고적으로 말씀 드린다면 이 나뭇가지는 해독작용, 정수한 것, 그런 능력이 있는 나뭇가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마 이런 것들은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도 마찬가지인데, 먹을 게 없었다가 만나를 먹게 되지 않습니까, 이거는 어떤 모세의 영적 감수성이 있는 거예요.

 

모세가 광야에서 백성을 끌기 나오기 전에 이미 몇 년 살았던 것 아시지요? 40년 동안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그럼 이 광야지리에 대해서 빠삭하게 다 알겠지요? 그럼 어디에 가면 물이 있고, 어디에 가면 만나가 있는 걸 알 수 있는 있는 거죠, 만나라고 하는 것은 참고적으로 말씀 드린다면 지금도 시나이 반도에 가면 얻을 수 있는 자연적인 먹을거리입니다. 맛이 없는 거죠. 모세는 그런 것이 어디 있는지 다 알고 있었고요. 다른 사람들은 시시해서 눈여겨보지 않은 것을 최소한도 생존의 차원에서 먹을거리를 찾아낼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이 모세에게 있었지 않냐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광야를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까 썩은 물도 많이 볼 것이고 거기에 어떤 나뭇가지를 넣으니까 이게 정화되더라, 그런 것들을 40년동안 살 다 보면 줏어 들은 것도 있고,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이런 문제들을 풀어 나간 것 아니냐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그렇게 다 인간적으로 풀면 되냐 하나님이 다 이끌어 주셔 가지고 다 지시해갖고 해결했다고 해야지 그게 믿음이 아니냐 생각할지 모르는데, 그렇게 생각해도 크게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걸 생각하셔야 되요. 모세가 그런 방식으로 어떤 문제 해결을 찾아 나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행위예요.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 수 있고, 활동하시는 방법인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 공간울림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잖아요? 또 여러분들도 만나게 되는데요, 이것을 생각해 가지고 또 이렇게 저렇게 연결이 돼서 시작을 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신앙적인 각도로 보면 하나님이 하도록 하셨다고 얼마든지 신앙 간증 비슷하게 쓸 수 있잖아요, 성경도 다 그런 겁니다. 그런 것을 너무 요술부리듯이 점쟁이가 하듯이 성서를 이해하면 근본실체를 놓치게 되는 거지요.

 

예, 그렇게 해서 마라의 쓴 물이 단물이 됬다 그런 얘기입니다. 어쨌든 고대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한 거예요. 그러다가 또 얼마쯤 가다가 르비딤에 도착했습니다. 거기는 아예 쓴 물은커녕 물도 없었습니다. 출애굽 했을 때 사람의 숫자가 대략 장정만 해서 60만명이라고 그렇게 표현되어 있는데요, 그럼 어린아이들 까지 다 합하면 수백만명이 되겠지요? 조금 과장된 숫자이긴 할 겁니다. 칠십몇명의 요셉의 형제들이 300년전에 이집트에 갔을 때에 인구가 그렇게 늘어나긴 힘들다고 말하는데 그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고요. 고대인들은 숫자, 이런 거 사람들이 평균 수명이 800살, 900살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 게 틀린다고 한다고 해서 그런 글쓰기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 르비딤에 도착했는데 물이 없었어요. 그것을 두고 백성들이 모세와 다퉜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서 모세는 지팡이를 가지고 와서 호렙산 어느 바위를 치라고 했습니다. 쳤습니다. 그러자 물이 솟아났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곳 이름을 맛사, 혹은 므리바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7장 1절에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므리바라고 하는, 오늘 시편기자가 언급하고 있는 일화가 출애굽기에 나오는 바로 그 이야기지요. 맛사, 므리바 이건 똑같은 지명을 다른 말로 붙인 겁니다. 이런 이름이 붙여진 이유를 출애굽기 기자가 설명을 해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를 시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므리바, 맛사라고 하는 이름은 별로 좋지 않은 거지요? 시험이 무슨 시험이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느냐 않느냐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이게 오늘 우리가 공부한 “완악한 마음”인 거예요. 우리는 완악하다고 하면 반사회적인 폭력범들을 이야기하잖아요? 그것도 완악하지 않다고 말 할 수 없는 거죠? 그러나 성서의 표현들은 더 근원적인 것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마음 그런 이야기죠. 이게 성서기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큰 문제입니다. 가장 큰 불신앙이예요. 그래서 이 일로 말미암아 출애굽 공동체는 대략 장정의 발걸음으로 보름이면 횡단할 수 있는 미디안 광야, 다른 부녀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두달 정도이면 횡단할 수 있는 이 미디얀 광야를 자그마치 40년동안 배회했습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스무살 이상 된 사람은 아무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모세도 못 들어갔습니다. 이게 다 므리바 사건 때문에 그렇습니다. 므리바 맛사사건이요. 성서기자들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아, 그게 뭐 그리 중요하기에 그러냐, 제가 한 말중에서 잠깐 교정해야 할 부분이 있군요. 스무살 이상 된 사람은 하나도 못 들어갔다고 했는데, 두 사람은 예외죠? 여호수와와 갈렙, 두 사람은 특별히 들어갔습니다. 정말 두 사람빼고 다 못 들어갔냐, 글쎄요.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는 질문이니까요. 어쨌든 성서기자들이 그런 관점으로 이 사건을 해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도 못 들어갔어요. 이 출애굽기 말고 이것을 다루고 있는 다른데서 모세가 그냥 한 번 치라고 했는데 두 번 쳤다고 하나, 성질을 내면서 쳐서 못 들어갔다고 하나, 그렇게 해명한 부분이 있는데 지금 제가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왔습니다.(민20:7-13)

 

어쨌든 이 므리바, 혹은 맛사에서는 이 모세까지 포함해서 이스라엘 전체가 시험에 든 거예요. 완악한 마음을 품게 된 거지요. 어떻게 보면 사소한 에피소드인데, 여기에 걸려서 결국은 가나안 땅에 40동안 들어가지 못하고 배회했고 결국 20살 이상되는 마음이 굳어진, 선입관에 물들어 있는 그런 사람들은 못 들어갔다, 그런 일이 거기서 벌어졌습니다. 예, 시편 95편과 이와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시편 81편이 모두 다 이 므리바 사건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시험에 들었다고 하는 것은 크게 이상한 건 아닙니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어요. 우리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이 광야라고 하는 것, 여러분들이 상상력을 발휘해서 보십시오. 어느정도 감이 들어 올 거예요. 잠깐 앞에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 수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생존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예요. 제가 보기에 이 광야에서 계속 버티지 못하고 이집트로 돌아간 사람들도 꽤나 많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논쟁이 많았잖아요. 돌아가자, 우리가 이게 무슨 꼴이냐, 나일강, 이집트에 가면 맛있는 고기도 먹을 수 있고, 얼마나 좋냐, 아, 그 유혹을 떨치기가 사실 쉽지가 않은 거거든요, 그거는요. 이렇게 풍요로운 세상이 됬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30년전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여전히 더 잘살아야 된다고 하는 욕망이라고 말을 붙일 수 밖에 없는데 거기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지금 이 광야에서 생존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 떨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원망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것 없다, 먹을 것 없다, 투덜 되는 게 이해가 되는데 성서기자들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야박스럽게 보여요. 그건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고 이거죠, 생존에 대해서 계속 불안해 하는 것, 이거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고요, 그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그게 이해가 되실까요? 동의하시나요? 당장 먹기 힘든데 염려하는 게 당연하지, 염려할 수 밖에 없지, 염려하는 것 자체를 또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실제적으로 뭐, 그러한 어려움 가운데 있으면 걱정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걱정하는 거 하고, 걱정도 가능하면 하지 않는게 좋겠지만, 무엇을 마실까, 먹을까,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예수님의 말씀을 여기서 끄집어 들기가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사람의 인지상정으로 볼 때 생존이 위태로울 때는 걱정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것마저도 하지마, 하지마, 그렇게 하기는 적절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거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하고는 차이가 있는 거죠. 내가 이렇게 힘들어졌는데 하나님이 안 계신 것 아냐, 나와 함께 하지 않는 것 아냐, 하는 데 까지 나가게 되면 이건 불신앙이고 마음이 완악해지는 거거든요, 이건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는 영혼의 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작은 차이인 것 같습니다마는 큰 차이예요. 왜 그럴까요? 왜 큰 차이가 될까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거야, 않는거야, 하는데 까지 가지 않는 사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고 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 사람은 생존의 위기 앞에서 잠시 걱정하지만, 결국 거기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흔들리는 사람들은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 거예요. 결국 이건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큰 차이가 되는 거지요.

 

예, 이 시편 95편은 신년을 기념하는 의식에서 부르는 노래라고 그랬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자기 이스라엘 민족이 빠졌던 가장 큰 시험, 하나님이 우리 생존을 보장해 주냐, 않하냐, 이러한 근심에 빠졌던 이런 것을 확인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이스라엘 백성들은 확인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시편 95편의 후반부에 나와있는 내용들입니다. 므리바사건을 중심으로 한 완악한 마음이죠, 이제 우리 질문은 이렇게 다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그러한 완악한 마음에 빠질까, 하는 거지요. 예, 이런 질문에 대해서 뭐, 딱 뿌러지는 하나의 대답만은 힘듭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시편 95편을 중심으로 해서 그 대답을 찾는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실제 형편이 어려워서 그런 시험에 든다기 보다도 하나님이 누군가에 대한 그 인식, 그 경험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인 거지요. 그래서 시편 95편에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누군가에 대해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시편기자가 후반부에서는 므리바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완악한 마음 갖지 마라, 이걸 꼭 기억해라 라고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므리바 사건에서 하나님을 시험 할 수 밖에 없었나 하는 것을 앞에서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누군가에 대해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정확하게 알면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거죠. 두 가지예요. 첫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한 분입니다. 그 4절과 5절에 아주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어요, 4절, 땅이 깊은 곳, 그리고 산들이 높은 곳, 깊은 곳과 높은 곳, 그리고 5절에 바다와 육지,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아주 특별한 신앙이예요. 어떤 땅의 깊은 곳, 또 높은 곳, 이런 것들은 다른 통속적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것이 구약에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땅이 깊은 곳, 지하세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거기는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힘, 악한 힘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아모스 9장 2절, 시편 6편 5절, 30편 9절, 8편 10절입니다. 그리고 높은 산들을 신들의 거주지로 보는 통속적 입장도 있다고 그래요. 신학학자들이 하는 걸 제가 빌려 왔습니다. 그런데 시편 95편 기자는 그걸 부정합니다. 땅이 깊은 곳, 산이 높은 곳도 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는 것은 없다, 모두 다 하나님의 소유다 하는 겁니다. 이런 말들을 여러분들이 그냥 지나가듯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일 우리가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믿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시험할까요? 우리에게 어떤 생존의 위협이 온다고 해서 시험할까요? 죽음앞에서도, 죽음이 좀 두렵긴 하죠? 그래도 하나님이 깊은 곳, 높은 곳, 육지, 하늘, 바다, 모든 것, 이미 있다가 없어진 것 까지 아직은 없지만, 앞으로 나타날 모든 것,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지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한다면, 그 사실이 분명하게 우리 영혼 안에 자릴 잡게 된다면, 사실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대수는 아니겠지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 불치병 걸리고 죽음이 임박했다고 할 땐 두렵습니다. 그 두렴움마저 없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를 여실하게 우리가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면 그 두려움이 극복이 되는 거지요. 당연하죠, 이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자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라고 하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우리 모든 염려, 근심,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겁니다. 거꾸로 우리의 소유가 많아진다고 해서 교만해 질 수 있을까요? 거기에 우리가 안주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도 답이 나오는 거죠, 창조신앙, 다시한번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분이예요. 이 말은 곧 거꾸로 해서 세계를 창조한 분이고 성서가 말하는 그 하나님입니다. 그런점에서는 자연과학자들하고 우리 기독교인들하고 쓸데없이 싸울 필요가 없어요. 진화론 있지 않습니까, 생명의 진화도 하나의 생명이 살아가는 생존의 방식 아니겠어요? 하나님이 그 방식으로 창조했다고 하면 간단한 문제인데, 진화론, 창조론 이 문제가지고 쓸데없이 영성을 소진한다고 할까, 신자들의 생각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예요. 세계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그 원초적인 힘과 능력이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7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양이면, 하나님은 목자지요. 목자와 양의 관계는 시편에 많이 나오는 거구요, 요한복음에도 나와 있습니다. 메타포인가요? 은유? 비유? 그런 방식입니다. 적절한 표현이예요. 이러한 목자와 양으로 비유한 것은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래 목축업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경험하고 있는, 그 방식으로 설명하는 거지요. 아마 우리나라 같으면 다른 걸로 설명하겠지요? 이 목자와 양의 관계에, 첫 번째는 창조자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두 번째는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이 핵심의 문제는 생명의 문제예요. 창조도 생명이었는데, 목자와 양의 관계도 생명의 차원입니다. 그냥 돈벌이 관계가 아니예요. 양을 많이 키워서 돈 벌자, 지금은 목축업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옛날에는 먹고살자, 속된표현이기는 하지만, 그런게 아예 없는 게 아니었지만, 이건 사업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에 걸린 문제입니다. 이 목자는 이 양의 생명을 보장하고 자기에게 위험이 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양을 지키는 거예요. 그게 목자입니다. 반면에 양은 목자에게 순종하는 거지요. 절대적인 순종이죠, 목자가 저쪽으로 가라고 하면, 저쪽으로 가면 위험할텐데, 풀이 없을텐데, 그런 것들을 양들은 생각하지 않죠, 절대적인 신뢰관계가 거기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다, 여러분들이 이런 관계를 맹목적인 관계로 생각하고 우습다 그렇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아무 생각도없이 무조건 믿으면 최고다 그런 것도 아닌 거예요.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어려움과 시련들을 때에 따라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할 걸 판단하고 해결할 걸 해결해야지요. 그런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뭐냐, 기본적으로 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적으로 자기백성들을 지키시고, 이 사실을 우리가 정말 우리가 실제로 아는가, 실제로 그렇게 이해하고 그렇게 믿고 있는가 하는 거죠, 그것 없으면 우리가 못 삽니다. 그게 있다면 그런 믿음이 있다면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 지는 거지요. 아예 근본적으로 달라지지요. 우리가 걱정하지 않게 되지요. 당연히, 이스라엘은 무조건 순종해야 됩니다. 이 말이 조금 겉돌수도 있어요. 도대체 무엇을 순종하냐,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순종하지 않냐, 순종하라, 순종하라, 교회에서 많이 이야기 하는데, 목사가 하라고 하는데,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순종이냐, 그런 차원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머리를 돌려 놓고 자기 원하는 대로 해 놓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순종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건 또 우스운 이야기이구요.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뭘까요? 거기까지는 나가지 않겠습니다. 그것도 설명이 필요하긴 한데, 조금 복잡해질 것 같아요. 그래도 한 마디만 하고 넘어가야 되겠군요. 그건 막무가내로 아무 생각도 없이 무조건 교회구조, 내가 원하는 것, 그런 것을 막 해놓고,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난 순종이다, 이건 아니예요. 그런 차원은 아닙니다. 가끔 사이비 이단들에게서 그런 것들이 나타나지요? 전세 같은 것 다 뽑아서 헌금 내고서, 교회 짓는다고 헌금 하고서 이게 순종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그런 걸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더 근원적인 것, 근본적인 것, 생명, 우리의 운명전체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다, 그런 차원에서 순종인 거지요. 그게 실제적인 삶에서는 어떤 거냐, 그런 것들은 우리가 더 영적으로 예민한 어떤 감각력으로 판단해 나가야 되겠지요. 예, 오늘 우리는 시편 95편을 중심으로 “완악한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했습니다. 어떤가요? 우리의 마음이 어떤가요? 이런 것들을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우리 신앙이 성숙합니다.그런 것 생각하지 않고도 신앙생활 가능해요. 교회 형식, 어떤 메카니즘, 여기에 우리가 최소한도 인격적으로 반응하면, 그러면 교회에서도 인정받고 뭐 불편하지 않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 것 하고 신앙이 영성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다른 차원문제입니다. 사람의 체면은 그럴듯하게 넘어갈 수 있지만, 속일 수 있지만, 지혜의 영인 성령을 속일 수는 없거든요, 그 관계가 깊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의 안식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므리바 사건을 기억하지고요, 하나님을 시험하는, 그러한 일이 없고 창조자 하나님, 우리 목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순종으로 살아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잠깐 쉬었다가 질문응답 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87 106편,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선하심 정용섭 2010-10-13 719
86 105편, 구원의 주체이신 여호와 정용섭 2010-10-06 529
85 105편 녹취록- 구원의 주체이신 여호와 file 박은옥 2011-01-10 1050
84 104편 녹취록- 신앙의 두 중심축, 찬양과 기쁨 file [9] 박은옥 2010-11-15 1338
83 27(2)편 녹취록-하나님의 얼굴 file 박은옥 2010-11-01 1087
82 27(1)편 녹취록 -믿음의 용기 file 박은옥 2010-11-01 1495
81 26편 녹취록-무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10-25 1385
80 25편 녹취록- 하나님의 길 file 박은옥 2010-10-25 906
79 24편 녹취록-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 file 박은옥 2010-10-01 1522
78 103편 녹취록-여호와를 송축하라! file 박은옥 2010-09-25 1217
77 102편 녹취록-탄원과 찬양 file 박은옥 2010-09-25 1058
76 101편 녹취록-제관식 선포문 file 박은옥 2010-09-25 1266
75 100편 녹취록-선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395
74 99편 녹취록-거룩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085
73 98편 녹취록-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file 박은옥 2010-09-23 1142
72 97편 녹취록-의로우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191
71 96편 녹취록-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file 박은옥 2010-09-23 1057
» 95편 녹취록-완악한 마음 file 박은옥 2010-09-23 1454
69 94편 녹취록-복수하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8-31 1501
68 93편 녹취록-하나님의 권능 file 박은옥 2010-08-30 152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