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98편 녹취록-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조회 수 1143 추천 수 0 2010.09.23 18:00:37

시편 98편 강해-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시편 98편, 1절에서 9절까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시〛

1.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 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2.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3.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4.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5.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지어다

6.나팔과 호각 소리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소리칠지어다

7.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8.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9.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 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아멘!! 이 98편은 96편하고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구조도 그렇구요. 사상, 어법도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 똑같은 사람이 한 거다 동일인 얘기도 하는데 그거야 뭐 우리가 그걸 어떻게 정확하게 알겠습니까, 꼭 그렇게 보지는 않아도 되요, 96편이나 98편이나 다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어떤 영적인 시인이 글을 썼다 그렇게 보면 될 겁니다. 동일한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제의전통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제의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시편공부하면서 몇 번 나왔고요. 또 어렴풋이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제사를 드린다 그런 뜻도 있고, 의식적인 종교행위다, 그런 뜻도 있고요, 오늘 여기 98편과 96편이 연결된다고 하는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왕권 즉위식에 부르는 찬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그런 유대인들의 종교의식에서 불리던 찬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98편을 간단히 분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절에서 3절은 여호와의 기이한 일에 대한 서술이고요, 4절에서 6절은 세계를 향해서 1절에서 3절에 나온 이야기를 선포하는 거고요, 7절에서 9절은 4절에서 6절과 비슷하게 자연을 향한 외침입니다. 세계나 자연이나 사실은 다 똑같은 거지요. 그러나 이미 시인이 두 개를 구별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 전체적인 주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는 건데,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이 정의로운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지요. 그래서 제가 이 98편의 제목을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렇게 정했습니다. 일단 이 제목을 생각해 보시지요. 그대로 여러분들이 동의가 되시나요? 이런 걸 좀 생각하고 사시나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이 있을 겁니다. 이게 조금 신자들의 삶에서 오는 신앙과 삶에서의 이완이라고 할까요? 이렇게 떨어지는 거요, 긴장감이 이완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신앙이 조금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 기도해야 된다, 말씀을 읽어야 된다. 그런 정도까지 생각을 하고요, 교회 생활 잘 해야 되겠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되겠다, 덕을 좀 보여야 되겠다 그런 정도까지는 생각합니다. 물론 개중에는 그런 것 까지 의식하지 않고 전혀 기독교적인 영성하고는 최소한도 습관적으로라도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현대 지성인 기독교인들일수록 그런 경향을 많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냥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정도가 아니라 더 나가는 게 힘든 거예요.

 

오늘 여기 제목에 나와 있듯이 말이예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삶에서 어떤 신앙적인 주제가 될 때가 있을까, 하는 것 말입니다. 혹은 신앙적인 담론으로 자리를 잡을 때가 있을까 하는 것 말이지요? 그렇지 않을 거예요. 이거는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도 간단한 건 아닌데, 그런 것도 의례적인 데 떨어져 있고요, 심판, 정의로움 이런 것들 까지 다 엮어서 생각하려면 쉽지는 않습니다. 예, 어쨌든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정의롭게 세상을 심판하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한 믿음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는 참 힘든 거예요. 아, 나중에 우리가 죽어서 심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거기까지 나가지 말고 그것은 우리 궁극적인 신앙이고요, 지금 이 삶에서 어떻냐 하는 것이지요. 뭐, 교육이면 교육현장, 장사하면 장사 하는 대로, 금융권이면 금융권대로 자기의 여러 가지 삶의 현장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있는가 말이지요. 거기에 의지해서 내가 살 만 근거가 있을까 하는 거 말입니다. 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경우가 많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어떤 매카니즘 이런 것들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정의로움 하고는 상관없이 능력 있는 사람이 잘 되는 방식으로 처세술이 좋은 사람들이 잘 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그런거죠. 저는 어제 보지 못했습니다마는 집사람은 피디수첩을 보았다고 그러네요, 교장, 교감하는데 커미션이 많이 들어가고 말이지요, 그게 들어나고 그런 얘기들이 많이 있었다고 그러더라구요. 주로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그러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런 제의가 들어온다는 겁니다. 중간에, 중개인인가? 당신 오백만원 낼래? 천만원 낼래? 그래갖고 연결시켜주는,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도 출세를 해야 되냐, 안해야 되냐, 그러한 세태 안에서 도대체 하나님의 정의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실감 있게 오겠냐, 그런 문제들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과연 오늘 현실적인 삶에서 우리가 그걸 얼마나 바르게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이 시편을 우리가 이해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관건이 되겠지요. 오늘 여기 구절이 길지 않기 때문에 한 구절 한 구절 차례대로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절이 다 중요하더라구요.

 

1절에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기이한 일을 행하셨으니 그를 찬송하라 하는 거예요. 기이한 일, 그걸 다른 말로 바꾸면 뭘까요? 놀라운 일, 제 강의안에 썼습니다만 조금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건 제가 여러 번, 여러 번 설교시간이나 공부시간이나 앞의 시편강의에서도 얘기 했을 텐데, 이게 들을 때 만 그런가 하지 실제로 잘 느끼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반복해서 들어야 되요. 여러 가지 경우에서 이럴 때도 듣고 저럴 때도 듣고 해서 이 사태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야 됩니다. 보세요. 예수님의 부활도 기이한 일입니다. 이런 것들, 사람이 죽었다 산다, 재생 한다, 이게 아니거든요, 부활은 정말 기이한 일입니다. 예상 할 수 없는 겁니다. 이건 한 번 밖에 없는 일이고 우리가 그 어떤 상상력으로도 그려낼 수 없는 그러한 사건이거든요. 기이한 일, 그러니까 기인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 이신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기이한 일을 행하시고 기이한 일을 행한 존재가 있다고 하면 그가 바로 하나님이거든요, 그러니까 시편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그렇게 들어가는 거예요. 아, 그분은 기이한 일과 연관된 분이다라고 하는 거지요. 우리에게 복 주고 예를 들자면, 우리가 잘 되고, 이런 방식으로의 하나님의 이해도 물론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해가 상당히 성서 안에는 각양각색인 거예요. 이걸 여러분들이 미리미리 알아야 되는데 쉽지 않은 겁니다. 이건 신학적인 문제고 신학을 공부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데까지 잘 이해를 못하고 그냥 두루뭉실하게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성서 안에 하나님의 표상이 각양각색이예요. 거기에는 바벨론 신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요, 이집트 문명에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 심지어는 가나안 땅에 있었던 여러 이방 원주민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어요. 사실은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서는 헬라철학이라든지, 그런데서도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그러니까 성서가 이야기하는 하나님, 옥황상제처럼 어느 자리에 딱 앉아 있는, 굳어져 있는, 결정되있는, 완료되있는 그런 분이 아닌 거예요. 역사와 더불어서 역동적으로 변화된 그러니까 칼 바르트 식의 표현을 빌리면 되어가는 전문적인 신학용어인데, “되어 짐 속에 있는 하나님” 이렇게 이야기도 했거든요? <참고도서>『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 속에 있다 Gottes sein ist im Werden(부제 :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책임적으로 말한다는 것)』, 에버하르트 융엘(Eberhard Jungel)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좀 우습다, 그렇게 절대적이고 완벽한 분이어야 되는데 역사와 더불어서 변하냐, 이상하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되어 짐 속에 있지만 변하는 분은 아닌 거예요. 예, 그런 맥락을 이해하는 게 간단한 건 아닙니다마는 이렇게 조금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종말까지 완전한 분이시지만, 우리가 그 분을 이해하는 게 너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역사와 더불어서 하나님이 우리의 인식에 맞도록 자기를 계시 하신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되어 짐 속에 있고, 그런 변화가운데 있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간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이한 일이라고 하는 건 말이지요, 예, 그것을 잘 생각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걸 꼭 외워두시면 좋겠네요. 기이한 일, 예상하지 못한 일, 놀라운 일, 아, 그러고 보니까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본 민중들의 반응들이 대개 놀라웠다, 그래서 찬송했다 그런 얘기 있잖습니까, 그런 방식인거거든요, 처음으로 본거와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사건 이런 것들을 기이한 일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일을 경험하시나요? 아이구, 기이한 일은 세상은 뭐 세상은 맨 날 똑 같은데, 어제도 먹고 오늘도 먹고 똑같이 사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더 알 수 없을까요? 결론적으로 그 부분을 정리하면 그렇습니다. 세상에 똑 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늘 새로운 것이고 늘 기이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어떤 습관적인 생각 속에 갇혀서 그것 새로운 면을 못 보는 것 뿐이죠, (첫 구절을 제가 너무 길게 설명을 하고 있네요. 시간조절해서 진도를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과 바벨론 이런 것들은 기이한 일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행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얘기하는 거예요. 1절에서 후반부에 그런 얘기를 합니다. 오른 손과 거룩한 팔로 구원을 베풀었다고 하지요? 기이한 일이 구원인 거예요. 하나님의 오른팔과 거룩한 팔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직접 하셨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시는 거지요, 독자적으로 구원하시는 분, 구원을 행하시는 분인 겁니다.

 

예,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보는 거지요. 아, 그러면 우리가 감나무 밑에 앉아서 감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 뿐이냐, 이런 속담을 통해서 문제제기를 할 수 도 있을 텐데요, 그것 하고는 관점이 전혀 다른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죠, 쓰시지만 하나님의 구원행위자체는 전혀 우리의 도움과 상관없이 그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만 생각해 보시지요. 지구가 어떻게 생겨났나, 우리 도움을 받았을까요? 아니거든요? 그거는 창조능력으로만 가능한 거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지금 먹고 사는 것도 우리가 돈을 벌어서 우리가 어떻게 해서,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시겠지요? 그 다음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구원을 알리시고 공의를 온 나라에 알리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구원과 공의 다른 시편도 마찬가지지만, 특별히 오늘 98편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과 공의, 공의로 구원하신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원과 공의는 앞에서 제가 제목을 설명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이 세상은 별로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구원 이런 것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을 말씀 드렸는데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1절을 전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오른팔과 거룩한 팔로 고유한 방식으로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그걸 전제할 때 이 세상은 공의롭게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그 시각을 갖는다는 게 영성입니다. 예, 저 사람들은 예수 믿지 않는데도 건강하고 잘 되고 우리는 예수 믿었는데도 안 되고 이런 방식으로 자꾸만 생각하면 이건 전혀 기이한 일이 뭔가 하나님의 오른팔과 거룩한 팔이 뭔가를 모르는 사람인 겁니다. 제가 강의안에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아주 놀라운 구원의 일들의 내용이 뭐냐 그 현실이 뭐냐를 봐야 되는데요, 우리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게 하나님 잘 믿는다 믿는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관점으로 그 분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성서의 말씀들을 이해하기는 힘든데요, 극단적인 예를 제가 좀 들었습니다. 불치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이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인데요, 아주 절망적이지 않겠습니까, 시한부 생명을 산다고 할 때 이건 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낫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걸 뭐라고 탓할 수는 없어요. 절망적이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 영적인 시각을 놓치지 않는다면 그런 절망적인 사건 가운데서도 위로를, 정말 다른 것으로 불가능한 다른 좋은 것으로 가능하지 않은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인거예요. 이건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이한 일인 겁니다. 그런데 이게 안되는 이유는 우리가 끊임없이 세상이 말하고 있는 삶의 방식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믿는 사람들이 다 병들고 힘들고 그렇게 되어야 된다는 말씀은 아닌 거예요. 설령 그런 일이 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은 변하지 않는다 그 얘기입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평화, 위로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3절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인자와 성실을 베푸셨다, 그말이죠, 인자와 성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언급되고 있지요? 자기 민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당연히 성서기자들은 온 세계의 하나님을 이야기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이해하더라도 어떤 민족의 틀 안에서 이해했습니다. 하여튼 특수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한 거예요. 그건 특수성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특수한 데에만 머물러 버리게 된다면, 그건 진리가 아닌 거지요,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양면성을 우리가 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성서안에는 그 이스라엘 민족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묻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면 크게 왜곡하는 겁니다. 그렇게 성서를 해석하는 경우가 많이 있잖아요, 예를 들자면 여리고 성 공격하면서 어린아이들, 남녀노소 다 죽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서 이렇게 세상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을 합리화 하는 방식들, 이런 것들은 그런 것들은 여리고성과 아이성 공격에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독특한 역사적 상황 거기에 담겨 있는 거거든요? 그들은 그 역사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했는데, 거기서 특수한 역사적 경험들을 좀 빼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험을 살려내야 되는 거지요.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자와 성실을 베푸셨다고 하는데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베푸셨겠어요? 그건 말이 안되는 거지요. 핵심은 인자와 성실인거예요. 하나님이 인자와 성실을 행하셨다고 하는 것을 이 시편기자는 이스라엘 민족 역사 안에서 확실하게 경험한 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만 그렇게 했겠어요,

 

온 세계 민족에게 인자와 성실을 베푸셨는데, 이스라엘 사람들만 그것을 인식해 나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 진거죠, 하나님의 은총, 인자와 성실을 포함한 이런 것들이 아무리 커도 그걸 못 보는 사람들에게는 무의미 한 건데요,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것을 본 거죠,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점 점 더 확장 돼서 이해가 됬습니다. 예, 이게 조금 복잡한 문제인데 그래도 제 머릿속에서 뭔가 나온 생각을 말씀 드리고 넘어 가야 되겠네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그런 관계입니다. 완전히 정리된 건 아닌데, 잊어버리기 전에 그래도 한 마디를 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인데요, 분명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인자와 성실을 베푸셨고, 온 세계 민족에게 다 베푸셨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험들이 더 깊어졌다고 하는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해되나, 하는 겁니다. 결국 그런 것이 깊어져서 예수그리스도 사건에까지 이르게 된 거거든요, 그렇다면 구약에 구원의 역사, 그것을 구원사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스라엘 역사가 구원의 역사로써 집약이 됬는데, 그 바깥의 역사들, 세계 아프리카나 아시아에 있었던 그 역사들은 다 구원의 역사에서 배제되는가, 이런 것은 또 곤란한 거예요. 배제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얘기를 다 마치지 못하겠습니다. 자꾸만 더 복잡해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중간에 끊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4절 이렇습니다. 시편기자는 노래하고 찬송하라라고 하는 말을 후렴처럼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는 사람만이 아니라 온 땅까지 찬송하라는 거지요. 시적인 표현입니다. 온 땅이여 찬송하라, 찬양하라 멋지지요? 그리고 자주 들었던 찬송가가사에도 나오는 거겠지요? 그런데 이 말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 않습니다. 땅이 찬송할 수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성이 이 시인에게 있었던 거예요.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다른 것이 가득 뒤범벅이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시인들은 땅이 노래하는 것 까지 들을 정도라는 겁니다. 얼마나 자유롭겠어요, 예, 5절에는 노래와 찬송을 더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에게 온 영혼을 기울이라고 하는 이말,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이야기이긴 한데요, 그건 우리의 영혼을 담아내는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러한 찬송을 부를 때 예배시간에도 그렇구요,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시편기자가 수금과 음성으로 온 영혼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 라고 하는 말은 그럴 때만 피조물의 인간이 구원과 안식을 얻는다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분명한 이야기지요. 음악가는 음악과 하나가 될 때에만 구원을 얻는 것처럼 우리 사람은, 피조물은 하나님에게 일치될 때만 안식을 얻습니다. 구원을 얻습니다. 그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지요. 좀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을까요? 이건 다른 것으로 도저히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구원과 안식을 다른 데서 자꾸만 찾으려고 하거든요, 그건 악순환입니다. 불가능한 걸 하려고 하는 거지요. 예, 6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가서 나팔과 호각으로 즐겁게 소리치라고 합니다. 최선으로 하나님을 찬양해라, 하나님께 일치되라 자유로운 성령과 일치되어서 좀 살아라, 너 자신에 대한 걱정 좀 내버려 두고 우리를 창조하고 우리를 완성하실 하나님에게 그냥 수영선수들이 물에다가 자기 몸을 완전히 던져서 이렇게 유영을 하듯이 돌고래가 그렇게 수영을 하듯이 힘을 딱 주고 물 이거 어떻게 하나 생각하면 그 수영이 안 되잖아요? 딱 맡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영이, 성령에 자기를 완전히 맡기는 영적인 태도, 이게 찬송하라 즐거이 노래하라라고 하는 말에서 뜻하고 있는 거지요.

 

7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바다와 바다생물, 세계와 세계생물이 다 외쳐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요? 온 세계에 하나님의 창조, 구원 공의가 가득하다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좀 이상하지요? 똑 같은 세상인데, 똑 같은 세상인데 어떤 사람 눈에는 거기 하나님의 창조와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걸로 드러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투쟁해서 내가 뺏어야 할 대상으로 되잖아요, 왜 그럴까요? 똑 같을 것을 놓고요, 착각은 하지 마세요, 아, 세상은 마음먹기 달렸다고 하는 뜻이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마음먹는 문제가 아니라 가장 궁극적인 현실로 우리가 보는 거지요, 그냥 우리가 심리적으로 위로를 받기 위해서 찬송해라 뭐해라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데 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큰 물도 박수해야 되고 산악이 함께 즐거워해야 된다. 즐거워하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삶, 자연을 포함한 모든 삶들은 다 기본적으로 뭐예요,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거지요. 그러니까 노래를 하듯이 살자, 즐거운 노래를 하면서 살자, 이게 그냥 정신나간 사람의 넋두리가 아닙니다, 이 세상을 낭만적으로 보고 있는 것도 아니예요. 여기에는 고통과 무의미와 투쟁, 모순들이 얼마나 많은지 압니다. 알지만, 그래도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라고 하는 거지요.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냥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아우성과 같은 세상속에서 그리고 정말 비통한 일들이 많고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즐겁게 우리의 삶을 노래하면서 살 것인가, 하는 겁니다.

 

그게 결론이 나와 있는 9절이 말하고 있는 겁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이다. 땅을 심판하신다, 심판인겁니다. 이 시편기자가 심판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이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는 겁니다. 그걸 두 눈으로 똑 바로 보고 있는 거예요.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낭만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막연하게 찬송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하지만, 그러나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해야 되겠군요, 그런 세상이지만, 혹은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므로 그러므로 그러한 세상에서도 찬송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의이며 공평입니다. 이해하시겠지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공평, 이걸 우리의 잣대로 보면 곤란합니다. 하나님만의 의예요, 하나님만의 공평입니다. 그러니까 철없는 아이는 부모의 의로움과 공의를 잘 오해하잖아요? 자기들의 시각으로만 보니까,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런데요, 하나님과 우리와 그렇다면 뭐, 이건 비교할 수도 없는 거지요. 하나님은 불의를 없애시고 의를 세우시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롭고 공평하시다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심판하신다, 시인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뭐냐라고 하는 것을 조금 더 여러분들이 피부에 와 닿게 이해 할 수 있도록 하나의 예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강의안에 나와 있는 거예요. 죽음이라고 하는 거 말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아닐까요? 여기 아무도 죽음을 벗어난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 면에서도 정의롭고, 죽은 다음에 어떤 사람의 시체는 500년동안 생생하고 돈 없는 사람은 금방 썩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 똑같이 시간이 지나면 썩는다고 하는 점에서 공평한 거구요, 살아있는 동안에 사회적으로 대단하게 업적을 많이 남긴 사람이나 그렇게 남기지 못하고 노숙자처럼 살았던 사람이나 똑 같이 죽음이 그를 소멸시킨다고 하는 점에서 이건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로운 심판이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예, 오늘도 우리는 98편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시편을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우리의 삶을 끌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불의를 본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고 또 폐배의식에 빠지지 마시고 즐겁게 찬양하며 사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질문응답 받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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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7(1)편 녹취록 -믿음의 용기 file 박은옥 2010-11-01 1496
81 26편 녹취록-무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10-25 1385
80 25편 녹취록- 하나님의 길 file 박은옥 2010-10-25 906
79 24편 녹취록-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 file 박은옥 2010-10-01 1523
78 103편 녹취록-여호와를 송축하라! file 박은옥 2010-09-25 1217
77 102편 녹취록-탄원과 찬양 file 박은옥 2010-09-25 1058
76 101편 녹취록-제관식 선포문 file 박은옥 2010-09-25 1266
75 100편 녹취록-선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396
74 99편 녹취록-거룩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085
» 98편 녹취록-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file 박은옥 2010-09-23 1143
72 97편 녹취록-의로우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191
71 96편 녹취록-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file 박은옥 2010-09-23 1057
70 95편 녹취록-완악한 마음 file 박은옥 2010-09-23 1455
69 94편 녹취록-복수하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8-31 1503
68 93편 녹취록-하나님의 권능 file 박은옥 2010-08-3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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