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102편 녹취록-탄원과 찬양

조회 수 1058 추천 수 0 2010.09.25 17:45:42

시편 102편 강해- 탄원과 찬양

 

시편 102편, 조금 깁니다. 1절에서 28절까지 있습니다. 이 내용을 우리가 기도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또 그러한 자세로 함께 읽겠습니다.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

1.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2.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3.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4.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5.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6.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7.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8.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9.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는 눈물 섞인 물을 마셨나이다

10.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셨나이다

11.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12.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13.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14.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

15.이에 뭇 나라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16.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17.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

18.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9.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 보셨으니

20.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21.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22.그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함께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23.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24.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25.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26.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28.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아멘!! 우리가 같이 공부할 시편 101편입니다. 좀 길지요? 제목은 “탄원과 찬양”이렇게 정했습니다. 물론 다른 제목을 정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제가 이 방식으로 정했어요. 내용을 좀 간추린 제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02편은 전체적으로 세 단락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절에서 11절은 '탄원'이고요, 12절에서 21절은 조금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거로 '찬양'입니다. 탄원에서 찬양으로 나가요, 그리고 22절에서 28절은 '고백'입니다. 마지막 단락, 이것은 사실은 두 번째 단락하고 연관되는 거예요. 12절에서 28절까지가 다 연관되는 건데, 그래도 제가 좀 구분한 이유는 조금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절에서 11절까지는 하소연 이예요. 정말 죽겠다. 이런 하소연이고, 12절부터 마지막까지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찬양과 고백은 비슷한 내용이긴 하지만, 다음과 같이 제가 쭉 구분해서 봤어요. 찬양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고백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자신의 실존적인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차이가 있지요? 겉으로 보면 비슷해요, 하나님은 놀랍다, 그에게만 영광을 돌려야 된다, 그거는 말 그대로 찬양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내가 살길을 찾았다. 이렇게 나가게 되면 그건 고백이 되는 겁니다.

 

그런 차이를 두고 구분해서 보시면 되겠습니다. 큰 틀에서 보명 이 시편 102편은 탄원과 찬양 이예요. 이 두 가지는 대립적이지요? 탄원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정말 죽겠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거구요, 찬양은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그 분의 높으심을 노래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게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원래 1절에서 11절까지 탄원시가 있었는데, 나중에 이 찬양, 찬송 부분이 보충된 것이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냥 내용으로만 보자면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어요, 그러나 꼭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탄원과 찬양이 좀 다른 내용이지만, 조금 대립적이긴 하지만, 이 102편을 쓴 시편기자의 고유한 영성 안에서 그 두 개가 같이 결합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게 가능하겠지요? 아주 깊은 고통, 고난, 한탄 속에 들어가는 데 오히려 거기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더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쉽지는 않은 거지요. 우리들은 그렇게 못합니다. 우리가 시편을 지금 계속 공부하고 있는데,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고요, 이 성서를 기록한 사람, 혹은 기록한 공동체에 속한 여러 사람들은 영적으로 좀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둑에서도 아마추어가 있고, 프로가 있잖아요? 그리고 음악 하는 사람들도 동네 아마추어 선생들도 있고 전문연주자가 있는 것처럼 여기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정말 Professional한 그런 영성가들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따라가기 힘들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 사람들의 말씀, 이런 신앙고백을 읽으면서, 우리도 그 쪽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거지요. 우리가 클래식 음악이 처음에 낯설고 어렵게 느껴져도 자꾸 들으면 그 세계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처럼 이 성서의 세계도 비슷합니다. 이 탄원과 찬양이 하나로 결합된다고 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고도의 영적인 세계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거지요. 그렇지 않고 조금 좋다고 해서 너무 좋아하고 어렵다고 해서 맨 날 저 밑바닥에 떨어져 있고, 그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잖습니까,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하는 이유가 어떤 상태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상태로 발전? 혹은 참여하게 하는 거지요. 그 세 단락으로 나눠져 있는데 우리가 차근차근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단원은 1절에서 11절인데, 탄원입니다. 그래서 보통 탄원시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에게 부르짖는 거예요. 부르짖는 거, 1절에서 11절까지 계속 그런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1절만 보더라도요.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지금 우리가 보통 이런 기도를 많이 드리잖아요? 탄원하는 겁니다. 이 사람이 상당히 고통 가운데 있었던 거 같아요. 그 고통이 뭔지는 잘 모릅니다. 어쨌든 그는 말 할 수 없는 고통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이런 어려움, 시련, 고통 이런 걸 피하게 해 달라 기도는 하는데 양면성이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건 분명해요. 자칫하면 거기서 신앙마저도 약화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고난이 오히려 우리를 신앙의 아주 깊은 차원으로 끌어 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우리 삶에 아무 걱정 근심이 없다. 눈곱만큼도 없다, 손톱만큼도 없다, 그러면 우리 삶이 행복할까요? 조금 더 일상적인 걸로 말하면, 우리가 전혀 배고프지 않다, 나는 항상 배가 부르다, 배고픈 것을 면키 위해서 먹지 않습니까, 늘 배부르면 먹는 것에 대한 기쁨을 느낄 수 없는 거거든요? 고통과 시련 이런 것들이 참 견디기 힘들고 가능하면 피하면 좋겠지만, 그걸 견뎌 냈을 때에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훨씬 더 고도의 혹은 좋은 뜻으로 고상한 그러한 신앙의 세계를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시편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경험하지요. 이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것인지 혹은 바벨론 포로를 얘기하는 건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분명해요. 우리가 사실은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것은 별로 많지 않죠? 특별한 경우 있습니다. 자식이 큰 어려운 병, 난치병에 걸렸다거나, 본인이 그럴 수도 있고요, 아, 이건 정말 절망적이다, 그럴 때가 우리가 살아오면서 만날 수도 있는데, 그건 또 상대적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신앙의 깊이로 들어갈 기회가 없는 건지도 몰라요. 이 사람은 아주 절망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에게 부르짖습니다. 3절을 보면 그가 죽음직전까지 몰렸던 거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참 시적으로 멋있게 썼어요. 연기 같이 날아간다, 소멸 한다, 내 뼈가 숯 같이 탔다, 자기가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린 상태입니다. 4절에 보면 그는 음식 먹기도 잊었다,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요즘 말로 하면 금식기도, 단식기도를 했다고 하는 거지요?

 

7절에 보면, 밤을 새웠다고 그랬습니다. 너무 견딜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 부르짖기 위해서 보통 철야기도라고 하는 것 있잖아요? 식음을 전폐하고 잠까지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께 매달릴 수 밖 에 없는 그런 상태, 이 시인이 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요, 이 시인이 주변에서 원수들이 자기를 조롱거리로 만들고요, 그건 8절 이런데 나와 있습니다. 그게 이런 거죠, 주변에 있던 이웃사람들이 시편기자를 생각하면서 저 녀석, 망 하는 꼴 내가 보지 않으면 밥 안 먹겠다 라든지, 저 놈이 사라지지 않으면 나는 잠자지 않겠다든지 옛날에 그런 맹세들을 좀 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분위기가 그럴 때, 완전히 왕따 당하는 상태요,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10절에 보면, 이 시편기자가 그 고난과 아픔, 외로움, 절망 이런 것들을 인간적인 어떤 관계에 놓지 않고, 하나님의 어떤 그 상태에 까지 올려놓고 이야기를 해요, 10절에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주위 분노와 진노였다, 이런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던지셨다고하는 겁니다. 예, 이러한 시편기자들의 영성은 원수들로부터 받는 수모까지 여기서 원수는 어떤 사람일수도 있고, 어떤 상황일 수도 있어요. 정말 자기를 수모에 빠지게 하는 어떤 힘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그런 것까지 하나님과 연결 시켜서 생각한 겁니다. 아, 이거는 하나님 채찍이야, 하나님의 손길이야, 이게 이해가 되시지요? 하나님의 손길이라면 당연히 어떤 겁니까, 사랑의 손길이지요, 아프긴 하더라도 부모가 자식에게 아주 특별한 경우에 아주 따끔하게 회초리로 한 대 때리듯이 그걸 맞으면서도 그 아이들은 느끼잖아요? 굳이 제가 부모와 자식 간으로 예를 들어서 말씀 드린 겁니다. 하나님관계는 더 깊은 거지만,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말씀 드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시편기자는 자기가 고초를 당하고 맞고 얻어터지고 따돌림을 당하는데도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향한 거다, 그렇게 생각한 거죠,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요, 당연히 어떻습니까, 그런 상태까지 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제는 저 놈, 원수 갚아야지, 그런 증오심에 떨어지지는 않는 거지요. 또 절망하지 않는 거지요. 하나님이 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주신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까지 우리의 영성이 나가게 되면 결코 어떤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말씀 드린 거예요. 절망하지 않는다는 거 하고 또 인간적인 원수 앙갚음, 증오심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성서기자들의 영성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된다면, 영적인 상태가 된다면 우리의 영혼은 죄와 악으로 인해서 파괴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되겠지요? 힘든 일도 힘든 일인데, 그걸로 원한에 사무쳐 가지고 우리 영혼이 점점 훼손당하면, 그 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예, 여기까지가 탄원이고요,

 

두 번째는 12절에서 22절까지 찬양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져요, 그렇게 힘들게 자기 하소연을 하다가요, 11절에서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그렇게 까지 말하는 사람이요, 갑자기 12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비탄에 빠졌다가 기쁨으로 나가고요,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가고 탄식에서 노래로 바뀝니다. 이 내용은 뭐, 우리들이 쭉 읽었으니까 다시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게 무엇을 이야기 하는 걸까요? 우리가 절망할 수 밖 에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그래도 우리가 살아 날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내가 당했으니까 그만큼 갚는다든지 그런 방식으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고 또 그걸 경험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되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근본적인 우리의 치료라고 생각합니다. 상담이나 심리치료도 치료 맞거든요? 그런데 그게, 더 근원적인 것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결합되는 겁니다. 일치하는 거지요. 그게 이제 성령 충만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다른 방식으로는 치료되었다가 또 반복되고요, 임시적인 것이고 또 상황이 나빠지면 또 우리가 그런 어려움 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풍성해지면 그럼 세계가 달라지니까요, 어린아이의 세계에서 어른의 세계가 되는 거죠, 어리아이들 구슬치기 하면서 서로 싸우잖아요? 어른 되면 그런 거 시시 하니까 그렇게 상관하지 않아요, 물론 이러한 말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금방 다 해결 할 수 있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른이 되는 길이거든요? 가장 바른 어른이 되는 길은 하나님과의 일치지요. 그 이외 다른 것으로는 우리가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높다, 하나님이 사랑이다, 하나님이 창조자다, 하나님이 구원자다, 하나님이 참된 진리다, 그런 이야기지요? 그것을 분명히 알고 그 분을 찬양하는 삶으로 돌아서는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상투적인 게 아니라고 하는 거를 아시지요? 아주 실질적인 삶의 내용들입니다. 17절에서 시편기자가 앞서 말한 걸 바탕에 두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리고 20절에서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신거지요. 빈궁한 자의기도, 지금 이 시편기자의 상태입니다. 빈궁한 자, 갇힌 자의 탄식, 이 시편기자의 상태입니다. 들으신다,

 

예, 그게 어떤 뜻일까요?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고,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신다고 했는데, 바로 그것이 온 세계가 주님의 영광을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주되심을 경외하고 찬송해야 될 이유라고 했는데, 과연 그게 뭔가, 돌아보신다고 하는 것 하고 들으신다고 하는 것이 뭔가, 그리고 그것이 확실한 건가, 그런 질문입니다. 이러한 성서의 이야기를 그냥 문자적으로만 생각하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기도를 돌아보시고 들으신다고 하셔서 즉시즉시 모든 일이 다 풀린다, 가난한 사람이 돈이 많아지거나 아픈 사람이 금방 낳는 다거나 그런 말로 여러분들이 이해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런 해결책, 그런 것들은 세상이 말하는 겁니다. 세상이 요구하고 또 그런 방식으로 유혹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으로는 우리 삶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만 우리가 생각하고 있으면 실망 이예요. 그건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는 것이 기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만 그런 것을 요구하고 매달리다 보면 실망하고 우리 영혼이 충분한 영적인 공급을 받기 힘듭니다. 하나님은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탄식하는 사람들을 지키십니다. 그 다른 방식으로 한다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되요.

 

하나님은 응답 하시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방식하고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그걸 놓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든요? 내 자식을 위해서 기도라든지, 나 자신을 위해서라라든지 어떤 여러 가지, 물론 우리가 기도해서 그렇게 될 수도 있고요,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거는 그게 됬다, 안 됬다, 그런 차원으로 하나님이 응답하셨다, 안하셨다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신다는 것, 그러니까 그걸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을 들어 주시는 분이죠.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밖 에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뭐, 앞에서도 대충 어느 정도 설명 드린 겁니다마는, 우리가 어떤 선입관에 콱 박혀 있는 거예요. 우리 머릿속에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무엇, 무엇이 있어야 되, 내가 사람들하고 어떻게, 어떻게 해야 되, 이 세상이 요구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채워 나가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고 생각하면 그게 선입관이거든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지병을 안고 가면서도 영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에 들어 갈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사도바울 아시잖아요, 그가 큰 병, 지병이 있었거든요? 평생 병을 앓고 살았어요, 예, 그걸 위해서 두 번 기도 했다고 하나요? 그리고 아,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구나,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로구나 생각하고 그 병을 안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뛰어난 영성가이고, 신학자이고 선교사이신 그러한 분이 왜 그랬겠어요. 그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고 하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거든요, 세 번째 단락은 23절에서 28절까지입니다. 고백이예요. 첫 번째 단락에서 탄원하던 사람이, 그러니까 탄식하다가 정말 힘들어서 내 기도를 좀 들어 달라고, 그렇게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세 한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참 놀라운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조건이 어떻든 지간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겁니다.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내 신세는 형편없지만,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자, 그게 아닙니다. 억지로가 우러나오는 찬송이 가능한 거예요. 어떻게 가능한가, 앞에서 우리가 쭉 보면서 한 번 짚기도 한 건데 이 세 번째 단락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예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겁니다. 거기서 가능한 거예요. 다시 예를 들면요, 아이들이 아버지 어머니를 아는 것, 그래서 그 관계가 돈독해지면 자기가 조금 배고프거나 조금 아프거나 하더라도 그렇게 걱정하지 않거든요? 하나님과의 관계도 뭐, 예로 그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누구냐, 이런 것들을 그냥 들은 풍월 같은 상태로 남겨 두지 말고 아주 깊숙이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이 누구냐, 오늘 여기 시편지자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25절,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주는 땅의 기초를 놓으시고 하늘을 지으신 분이다, 예, 천지, 땅과 하늘을 지으신 분, 세계를 다 지으신 분, 천지는 없어지겠지만, 주는 영원하다, 참 놀라운 고백이죠? 예, 이게 이 세계가 있기 전부터 존재 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에 이 세계가 없어져도 그 분은 영원하신 분, 그리고 27절에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시간은 무궁하다, 우리는 다 유한하게 살지만 그 분만은 무궁하다, 몇 가지를 얘기 했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었고, 영원하시고, 시간이 무궁하다, 그 이세상의 모든 것, 우리 인간의 삶까지 포함해서요. 우리가 한 점처럼 살다 가지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한 20년 세월이 확 지나가면 아, 20년 전에 여기서 이렇게 몇 명이 모여서 성경공부를 했지, 샘터교회가 조금 더 자라고 어떤 체계가 갖추어지게 되면 아, 그 때는 참 그랬는데, 어떻다, 그런 것들을 회상하게 될 겁니다. 20년도 금방 이예요. 그건 아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음,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순간적이고 사라지지만 하나님은 영원하다고 하는 사실에 이 시편기자는 집중하고 있었어요. 그게 가능한가요? 그래야 됩니다. 그게 잘 되지는 않죠, 늘 우리는 우리를 키워나가는 것에 모든 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집중으로부터 하나님 집중으로 우리의 어떤 삶의 토대를 옮기느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사람이 되냐, 안되느냐에 대해 관건인거지요. 예, 오늘 강의안 마지막 부분 잠깐 읽어 보겠습니다. 밑에서 6째줄 부터 읽겠습니다. “영원한 분 앞에서만 우리의 삶은 안전하고 든든할 수 있다. 이런 신앙이 당연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그런 부분들을 그러려니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생각하셔야 되요.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변화무쌍한 것들에 일희일비하면서, 좌고우면, 두리번거리면서 어떻게 보면 우리는 세상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잖아요? 크고 작게, 그런 것들에 의존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떠날 수도 없습니다. 몸을 갖고 사는 사람이 인간관계 속에서 또 우리가 어떻게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힘들다고 하는 겁니다. 예, 이제 그것은 넘어서야 한다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부활을 믿으면서도, 기독교 신앙인 가장 중요한 대목인 부활을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지금 당하는 육체적인, 경제적인 고난이 조금만 있어도 못 견뎌하고 있습니다. 예, 여러분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데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일일이 이런 조건들을 다 해결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시겠습니까, 끝이 없습니다. 그것은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거 해결해 놓으면 두 번째 문제가 오고요,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반복되는 거지 끝이 없습니다. 그냥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우리가 안고 살아야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생명의 주인이신 그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대한 그러한 깊은 이해, 그런 과정을 통해서, 또 그런 경험을 통해서 이러한 오늘 시편기자처럼 아주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리고 마음의 기쁨과 평화, 이런 것을 누릴 수 있죠, 그리고 억지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로 그렇게 누리는 것이고 그게 삶의 진면목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사실은 어쩌면 그림자와 같은 것들이지요. 오해는 하지 마세요. 우리의 이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게 하나님 안에서 그 모든 것이 의미를 갖는다는 그런 말씀이지요. 예, 오늘 마지막 성경구절을 같이 읽고 공부를 마치겠습니다. 이 사람이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고요, 그리고 자기의 극심한 고난의 실존이 어떻게 승화 되는가, 그런 것을 결론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28절, 같이 읽겠습니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은 오래 전, 유대에 있었던 한 영성가, 한 영적인 시인의 시를 읽었습니다.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어떻게 저렇게 놀랍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있습니까, 주님, 우리가 이런 말씀을 읽으며 그냥 남의 것으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으로 새겨듣도록 인도해주옵소서, 우리 각자에 처한 여러 가지 형편들을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여러 가지 다른 형편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자세가 하나님과 일치,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일임을 저희들 믿습니다.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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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105편 녹취록- 구원의 주체이신 여호와 file 박은옥 2011-01-10 1048
84 104편 녹취록- 신앙의 두 중심축, 찬양과 기쁨 file [9] 박은옥 2010-11-15 1337
83 27(2)편 녹취록-하나님의 얼굴 file 박은옥 2010-11-01 1086
82 27(1)편 녹취록 -믿음의 용기 file 박은옥 2010-11-01 1487
81 26편 녹취록-무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10-25 1379
80 25편 녹취록- 하나님의 길 file 박은옥 2010-10-25 906
79 24편 녹취록-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 file 박은옥 2010-10-01 1517
78 103편 녹취록-여호와를 송축하라! file 박은옥 2010-09-25 1217
» 102편 녹취록-탄원과 찬양 file 박은옥 2010-09-25 1058
76 101편 녹취록-제관식 선포문 file 박은옥 2010-09-25 1266
75 100편 녹취록-선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395
74 99편 녹취록-거룩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084
73 98편 녹취록-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file 박은옥 2010-09-23 1136
72 97편 녹취록-의로우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183
71 96편 녹취록-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file 박은옥 2010-09-23 1055
70 95편 녹취록-완악한 마음 file 박은옥 2010-09-23 1446
69 94편 녹취록-복수하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8-31 1494
68 93편 녹취록-하나님의 권능 file 박은옥 2010-08-30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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