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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편 녹취록-여호와를 송축하라!

조회 수 1217 추천 수 0 2010.09.25 17:47:51

시편 103편 강해-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03편, 1절부터 22절까지 있습니다. 아주 귀한 시편이예요. 어느 것 하나 시편에서 귀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만, 이 103편은 훨씬 더 차원이 깊다고 할까, 높다고 할까,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저와 여러분이 교독하는 방식으로 읽겠습니다.

 

〚다윗의 시〛

1.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2.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6.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7.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8.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11.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7.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18.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9.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20.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2.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멘!! 오늘 제목은 “여호와를 송축하라”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으면서 이미 내용에서 ‘송축하라’라는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되었다고 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이 103편은 우리가 읽으면서 다 확인한 그대로입니다. 송축하는, 이건 찬양이죠, 이 시편을 분류할 때 몇 가지 분류방식이 있는데요? 우리가 앞에서도 한 두 번 이야기 한 겁니다. 간구시도 있고, 탄원시도 있고요, 감사하는 것도 있고, 찬양시 등등.. 여러가지 종류입니다. 어떤 부분은 원수 갚아 달라는 탄원하는 내용도 있고요, 등등.. 여러 가지 종류로 분류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여기 103편은 두 가지의 결합이라고 보통 이야기 합니다. 제목에서 나왔듯이 송축, 찬양시이고, 또 찬양하게 되는 이유가 감사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감사시다, 찬송과 찬양시, 찬양시와 감사시, 감사시와 찬양시, 이 두 가지의 결합이라고 합니다. 1절, 2절, 20절 ,21절, 22절에서 송축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반복합니다. 찬양하라고 하는 이야기하고 똑 같은 이야기예요. 그걸 번역 할 때 이렇게 하느냐, 저렇게 하느냐 따라 다른데, 기본적으로 똑 같습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말들을 우리가 그러려니 하고가 아니라 아주 실질적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아요, 우리가 세상살이에 몰두하잖습니까, 열심히 살아야죠. 세상살이를 대충 살아도 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데요. 그러나 거기 너무 빠져 있어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니면 아주 열광주의식으로 나가서요, 세상살이도 필요 없고 무조건 매달리는 식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게 양극단이거든요? 그렇지 않고 우리가 성실하게 이 세상의 삶, 비록 허무하지만, 그걸 열심히 살면서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고 있는가하는 그런 질문이지요? 예, 그건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잠깐 기분이 좋아서 아니면 내가 기도했더니 응답 됬다 이런 방식으로 되서 내 영혼이 즐거워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같지만, 금방 시들해 질수 있어요. 기본적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깊지 않으면 우리는 그 상황에 따라서 들쑥날쑥 합니다.

 

찬송, 송축이라고 하는 말을 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사야서나, 에레미아서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도 다 여기하고 연관되는 것들입니다. 영광이 세상에 가득하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 바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시편기자들이, 성서기자들이 어떠한 영적인 시각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했을까, 잘 생각해야지요. 지금도 여러분들이 혹시 시를 읽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일반 시도 시인의 어떤 정신세계가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놓치게 되면 시를 폼으로 나, 시 한번 읽는다, 그런 정도로 끝나지 실제적으로 시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곰곰이, 그리고 꼼꼼히, 아주 찬찬히, 또박또박 내용을 좀 알고요, 그것이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토대가 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야 되겠지요. 예, 이런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시편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크게 4 단원으로 나눴습니다. 이게 뭐, 다 정확한 구분은 아닙니다. 조금 더 세분화 할 수도 있고, 더 묶을 수도 있는데, 대충 요런 정도로 구분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정리 했습니다. 첫 번째는 1절에서 5절입니다. 사실은 1절과 2절을 따로 떼어 내야 되는데, 그건 송축하라고 하는 이야기거든요? 그래도 그건 너무 세분화 하면, 설명하기도 불편해서 다시 묶었습니다. 1절에서 5절까지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송축해야 될 이유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시작자체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예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내 영혼이라고 얘기 했어요. 어떻게 이러한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시겠어요? 여러분, 자신을 향해서 그렇게 이야기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내 영혼아 자기 자신의 영혼을 객관화시키는 거예요. 정말 영적으로 투명한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하기 힘듭니다. 대개 자기에게 매달려서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잘 못 봅니다. 특히 신앙에서는 더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은 차원이 다르지요? 내 영혼아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곧 이어지는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내 영혼이라고 하는 것 하고, 내 속에 있는 것하고 이게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과연 뭐냐, 이렇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은 우리가 그렇게 계속 하는데요,

 

영혼, 내 속에 있는 것들, 여러분 속에 뭐가 있나요? 어떤 걸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내 감정이요? 내 이성이요? 나의 어떤 것일까요? 속에 있는 것이 뭐라고 딱 끄집어내기 힘들거든요? 이게 우리 인간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 부분이라기보다도 한 관점을 가리키는 것인데요, 인간 삶의 가장 심층의 차원에서 움직이는 생명의 능력, 이런 것들을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뭔지는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이게 점, 점, 점, 점 우리에게 드러나게 될 거고요. 여러분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그게 보일 겁니다. 개인으로도 그렇고요, 기독교 역사 전체에서도 볼 때 보면 지나가면서 그런 것들이 잘 드러납니다. 신학자들이 그런 걸 정리하는 거지요. 예, 지금,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러한 단어들을 여러 번 접했어요, 오늘 공부할 때도 그렇고 설교에서도 그렇고 그 외에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도 접합니다. 그럴 때마다 조금 씩 조금 씩 그 영혼의 세계가 밝혀지는 거예요. 조금 씩 조금 씩 그렇습니다. 어느 단계에 가게 되면 더 확연하게 보이겠지요,

 

이 영혼을 가리켜서 하나님을 찾는 능력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예, 바로 앞에서 설명 드렸는데, 우리 삶의 가장 심층의 차원에서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어떠한 힘을 가리켜서 영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많잖아요? 생물학적으로도 밥을 먹고 소화시켜서 살아야 되고, 감정도 있고, 이성도 있고요, 의지도 있고, 등등..여러 가지 정신적인 세계가 있잖아요? 그걸 조금 씩 구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어디까지가 이성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감정이고, 이건 칼로 물을 자르듯이 할 수는 없습니다. 영혼도 그런 거예요. 총체적으로 사실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구분은 할 수 있는 거지요. 구분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생명인 가장 궁극적인 힘인, 능력인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가 움직이는 속의 어떠한 활동들을 가리켜서 영혼이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여기서 하나님을 송축해야 될 이유를 개인적인 체험에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거 우리가 보통 때도 많이 생각하고 원하는 것들입니다.

 

3절에서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등등 나가잖아요? 이거 하나 하나를 여러분들이 생각하셔야 되요.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요? 하나님만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 이거가 중요한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사람의 죄악을 사할 수는 없는 거예요. 뭐, 잘 못 한 게 있으면 알았어, 내가 용서할게, 서로 사해지는 것, 그건 가능합니다. 그러나 아주 근본적인 죄들 사해지는 것은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어떤 상태일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우리는 우리 죄의 뿌리가 해결 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거는 단순히 교리의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런 거예요. 예, 뭐 그런 정도로 하고 넘어갑시다.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등등..그런 얘기입니다. 그런 게 있으니까 하나님을 송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질문이 가능하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그렇게 고치신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런가 하는 거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만사가 잘 형통되나요? 그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들이 잘 해결된다는 것을 어느 차원에서 놓고 보느냐에 따라서 이 대답은 달라지는 거예요. 사실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면 당연히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근원에서 해결하니까요, 비록 우리가 병에 들어 있어도 그 병이 당장 깨끗하게 낫냐 안 낫냐, 그런 차원에서 보면 그거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당장, 병이 다 낫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병이 낫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병이 나은 거와 마찬가지의 그런 영적인 상태에 들어 갈수 있거든요, 당연히 들어가야 되거든요, 제가 언젠가 예를 들었듯이 바울도 자기의 지병을 안고 한 두 번 정도 기도하다가 아, 이건 내가 안고 가야 되는 거다, 이건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이다, 뭐, 그런 생각하고 받아 드렸다 하지 않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형통인거지요,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삶이든지 다 하나님이 고치시는 거예요. 그리고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는 거 맞습니다. 거기에는 여러분들이 다 동의하실 거예요. 당연히 또 그래야 되고요, 그런 방식이 아니면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만 아니라 아주 실질적인 것이구요,

 

두 번째 단락은 6절에서 11절입니다. 이 시편기자는 역사적인 체험을 통해서 여호와를 송축하라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6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고 하는 겁니다. 어제 다비아 사이트의 매일묵상에 “삶은 공평하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오늘 이 구절을 생각하지 않고 썼던 건데요?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공의를 행하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억압당하는 자를 위해서 심판해 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도 개인에게서 벌어지는 것 하고, 같은 차원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공의롭습니다. 다만, 이제 우리 입장에서 왜,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냐, 그 불평을 하는 것 뿐이지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우리가 몰라서 문제이지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공의롭습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다 정의롭습니다. 물론 그런 말들을 그냥, 즉흥적으로 아니면 직관적으로 그렇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봐라, 세상에 억울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그런 일이 많은데 뭐가 공의로우냐, 그런 질문도 가능하긴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넘어서야지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도 공의로운 분이신 거예요. 보통 우리는 힘을 갖고, 권력을 갖고 돈을 많이 갖고요, 명예를 갖고요, 그런 것만을 행복한 삶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많이 불평을 하게 되거든요? 그게 인간적인 일반적인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그런 것들 많이 가질수록 거기에 더 묶인다고 하는 사실을 아시지요? 예, 그건 이제 불행인거죠, 행복하지 못한 거죠, 이게 우리 자신을 합리화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먹을 게 조금 부족해서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넓은 집에 살지 못하고 전셋집에 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불행한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내가 더 갖지 못해서 그게 불편해서, 더 불행한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투철하게 된다면, 사실은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께서 귀한 삶의 어떤 내용들을 허락하시거든요, 공의로운 거지요, 하나님은 정말 공의롭습니다. 역사 안에서도 그런 것들이 다 나타난다는 것을 쭉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12절에서 18절입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13절에 보시면, 긍휼하시다, 그분이 긍휼이 여겨 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이 시편기자의 깊은 속 마음을 여기서 표현하고 있어요. 그 분이 긍휼히 여긴다고 하는 것은 불쌍히 여긴다고 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고 계시다, 처량하다고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존을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이해하신다고 하는 거예요. 마치 어머니가 자기 품안에 품고 있는 아이를 정확하게 이해하듯이 나를 정말 이해하고 있는 그런 어떤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기쁘겠어요? 우리 사람에게선 그게 불가능합니다. 남편과 아내도 다 긍휼히 여길 수는 없습니다. 한계가 있어요.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사람관계에서는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 우리의 속 중심을 보신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야기였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긍휼이 여김을 받는 그 이유, 그 속 중심, 그게 뭐냐, 자기 실존이 뭐냐 하는 것을 14절, 15절, 16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지라고 그랬어요,

 

14절,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그러니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거지요. 이런 시각이 우리도 좀 필요하지요? 가져야 되겠지요?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서로 아, 먼지가 될 존재들 이라고 한다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될 겁니다. 서로 공연한 경쟁심, 그리고 상대가 가진 좋은 자랑거리 때문에 불편해지거나 이런 것들은 아직 인간의 실존을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닐까요? 그래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걸 넘어서서 이렇게 먼지뿐이라는 시각으로 사람을 보고 이해하는 그러한 차원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니까 귀를 기울여야 되겠지요?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먼지라고 하는 사실을 더 정확하게 알아야 되겠지요. 다음 구절도 비슷한 내용들입니다. 풀과 같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누리는 영화가 꽃과 같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앞서 얘기한 하나님의 공의하고도 연관되는 거예요. 꽃과 같고 들풀과 같은데, 민들레와 같은데, 조금 잘나면 어떻고, 조금 못 나면 어떠냐, 사실은 다 공의로운 거죠, 사람들이 세워놓은 기준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들쑥날쑥 불안한 거지요. 풀과 같고, 들의 꽃과 같다고 하는 겁니다.

 

16절은 그걸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네요.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이게 그냥 단순히 문학적인 수사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정확한 진술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몰라요, 나중에는, 민들레가 많이 폈다가 그냥 바람에 홀씨 돼서 날아가서 없어지고 겨울에 다 죽는 것 처럼요, 다 먼지가 되는 것처럼요,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길고 그렇게 하더라도 그 자리마저도 남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 실존이잖아요? 피할 수 없는 실존이잖아요? 지금 제가 여러분들과 공부를 하고 아직까지 생각도 죽지 않고 준비도 하고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오래는 못합니다. 저도 시간이 금방 지나가서 이런 공부를 한 적이 있었나, 기억이 희미해 질 날이 금방 올 겁니다. 틀림없는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좀 의식을 하면서 살아야 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오늘 삶하고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 깊숙이 관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삶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알 때, 이게 시편기자의 영적시각이거든요?

 

그걸 정확하게 알 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어떤 건지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거지요. 더 나가서 이것은 하나님에게만 긍휼과 자비를 간구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의해서만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 하는 거지요. 이런 말들이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 삶의 내용이 좀 되어야 겠어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간구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실존을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살아간다면 결국 오늘 이 103편의 전체 주제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당연히 송축하는 거죠, 송축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에서만 우리가 짧은 인생도 그렇고 그 다음에 이후에 얻어질 영원한 새로운 생명의 세계와 연결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2000년 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키리에 엘레이송!” 이라고 노래를 불렀다고 하잖습니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건 신세타령이 아닙니다. 한탄이 아니예요. 자기 삶에 대한 비하라고 할까, 그러한 처량한 자기한탄이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고 통찰이고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질 생명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 이런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 4 번째 단락은, 19절에서 22절입니다. 천사와 천군의 송축입니다. 천사들의 송축, 거기에 그런 구절이 나오고 있어요. 20절이죠?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이제 103편 앞 구절에는 내 영혼아,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여기서는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얘기하고요, 21절에,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22절 마지막 절 끝 부분에 내 영혼아 그렇게 나갑니다. 내 영혼, 천군, 천사들아, 그렇게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천사와 천군, 이건 비슷한 이야기예요.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메신저를 가리켜서 천사 천군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의 임재와 거의 똑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유한한 생명을 갖고 풀처럼 사는 인간만이 아니라 천사와 천군, 하나님의 곁에서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들도 하나님을 송축하라, 하는 것은 강의안에 쓰여 진대로 하나님이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송축 받으실 분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강조입니다.

 

존재론적인 차원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아주 근원적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아주 근원적인 차원,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꾸며갖고 아름답게 만들어서 되는 그러한 세계가 아니라 아주 근원에서 있어야 될 그러한 차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그러니까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긍휼하시기 때문에 그게 우리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없이 더 근원적으로 더 존재론적으로 찬송 받으실 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대단히 이 시편기자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근원적으로 아주 깊이 있게 다루어주고 있습니다. 참 놀라워요, 이런 말들은 사실 한 30분정도 강의에서 끝날 문제는 아닙니다. 그냥 쉽게 우리가 듣고 넘어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어떤 한 시에도 보면, 잠깐 그 어떤 분위기를 이야기한 것만 아니라 그 시인의 전체 사상이 담겨지잖아요? 시들에게도요, 그 세계 전체가 그 시에 담겨지는 것 처럼요, 이 시편 한 편 한 편도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 무게가 여기 담겨 있는 거예요. 예, 오늘 말씀의 결론을 교훈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을까, 하는 거지요. 이건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을까요? 내가 정말 하나님을 송축하는가, 아니면 아닌가, 어떤 걸로 드러나는 걸까요? 확인 할 수 있는 길이 뭘까요? 개개인들은 아실 겁니다. 내 영혼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뭐, 그런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한 가지 기준을 말씀 드린다면, 거기 강의안에 제가 이렇게 썼습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피조물을 섬기지 않는 삶, 이것으로 확인 될 수 있습니다. 섬긴다는 말을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이건 예배한다는 거예요. 내 운명을 거기에 거는 것들을 이야기 합니다. 피조물, 인간이 만든 어떤 것, 어떤 질서? 어떤 가시적인 능력들? 그런 제도? 어떤 사물에 관계된 그런 것들? 거기에 내 영혼을 담지 않고 사는 삶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 하냐, 하지 않냐를 확인 할 수 있는 겁니다. 예, 그러니까 이러한 삶, 피조물을 섬기지 않는 삶은 그냥 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약하기도 하고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한데, 상당히 감정적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자아가 너무 강하고요, 그래서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자기중심적으로 삶의 방향들이 다 흔들리게 됩니다. (제가 그것도 다비아 매일묵상에 쓴 거지 모르겠네요.) <신이 된 심리학>이라고 하는 책을 잠깐 소개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신앙이 자아를 숭배하는 방식으로 미국교회가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폴 비츠라고 하는, 굉장히 보수적인, 그러나 굉장히 건전한 그 분이 썼더라구요. 그러니까 그게 굉장히 매력적인 겁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도 뱀의 유혹의 핵심이 그거잖습니까, 너도 눈이 밝아진다, 그거예요. 자아가 우리들에게는 아주 세밀하게 아주 면밀하게 거의 숙명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피조물을 섬기는 일이 우리들에게 자주 일어납니다. 구약에서 그런 이스라엘 사람들이 반복해서 가나안의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고 하는 것이 그게 뭐,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러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 성서가 이야기해 주고 있는 세계를 정확하게 알고요, 부단한 구도적 삶이 필요하거든요? 이런데서 신학적인 공부, 자기성찰, 그리고 기독교의 바른 예배 참석, 이런 것들이 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송축하는 삶이 되도록 우리가 천천히 나가 보지요. 자, 여기까지하고요, 잠깐 쉬었다가 질문응답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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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7(1)편 녹취록 -믿음의 용기 file 박은옥 2010-11-01 1459
81 26편 녹취록-무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10-25 1350
80 25편 녹취록- 하나님의 길 file 박은옥 2010-10-25 905
79 24편 녹취록-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 file 박은옥 2010-10-01 1486
» 103편 녹취록-여호와를 송축하라! file 박은옥 2010-09-25 1217
77 102편 녹취록-탄원과 찬양 file 박은옥 2010-09-25 1056
76 101편 녹취록-제관식 선포문 file 박은옥 2010-09-25 1264
75 100편 녹취록-선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395
74 99편 녹취록-거룩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083
73 98편 녹취록-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file 박은옥 2010-09-23 1105
72 97편 녹취록-의로우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155
71 96편 녹취록-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file 박은옥 2010-09-23 1055
70 95편 녹취록-완악한 마음 file 박은옥 2010-09-23 1425
69 94편 녹취록-복수하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8-31 1467
68 93편 녹취록-하나님의 권능 file 박은옥 2010-08-30 1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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