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시편 26편 강해-무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가 같이 읽고 공부할 시편말씀은 시편 26편입니다. 1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먼저 제가 읽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눈으로 따라 보십시오.

 

<공동번역>

〚다윗의 노래〛

1.야훼여, 나의 무죄함을 밝혀주소서. 깨끗하게 살며 당신만을 철석같이 믿었사옵니다.

2.야훼여, 샅샅이 캐어보고 알아보소서. 속속들이 내 마음 뒤집어보소서.

3.당신의 한결같은 사랑만을 쳐다보면서 당신의 진리 따라 살았습니다.

4.사기꾼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음흉한 자들과 벗하지 않았습니다.

5.악인들의 모임에는 끼이지도 않았고 나쁜 자들과 함께 앉지도 않았습니다.

6.야훼여, 손을 씻고 죄없는 몸으로 당신의 제단을 두루 돌면서

7.나에게 하신 놀라운 일들 모두 전하며 고마우심 노래로 찬미하리이다.

8.야훼여, 나는 당신께서 사시는 집이 좋사옵니다. 당신의 영광이 깃들이는 곳이 좋사옵니다.

9.이 목숨을 죄인들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 살인자들과 함께 이 생명을 거두지 마소서.

10.그들은 뇌물만 집어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자들입니다.

11.이 몸은 그런 죄를 짓지 않았사오니 불쌍히 여기시고 건져주소서.

12.든든한 자리에 세워주신 일 감사 드리며 예배하는 모임에서 야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아멘!! 요즘에도 아무나 시를 쓸 수는 없잖아요? 시인들은 특별한 시적 영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시인들은 그것에 어떤 깊은 충동, 충격, 감동, 영감 그런 것들을 받아요. 우리가 읽은 시편기자도 그러한 시인이거든요? 일반시인이 아니라 시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깊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시를 읽을 때 두 가지 요소를 다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보통 건성으로 시를 읽으면 시가 들어와요? 안 들어오죠, 그건 아주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하거든요? 언어를 통해서 그 생각과 어떤 뜻, 어떤 세계 그런 것들을 이렇게 보석처럼 만들어 내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시인들의 영감, 그런 것이 필요하고 또 하나는 신앙의 깊이, 이런 게 필요하거든요, 우리들은 어느 정도 신앙의 깊이는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시적인 영감을 갖기는 쉽지는 않지요?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신앙이 있다고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시간 마음을, 어떤 선입관 그런 걸 내려놓고 시인의 이 시를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1.야훼여, 나의 무죄함을 밝혀주소서. 깨끗하게 살며 당신만을 철석같이 믿었사옵니다.

2.야훼여, 샅샅이 캐어보고 알아보소서. 속속들이 내 마음 뒤집어보소서.

3.당신의 한결같은 사랑만을 쳐다보면서 당신의 진리 따라 살았습니다.

4.사기꾼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음흉한 자들과 벗하지 않았습니다.

5.악인들의 모임에는 끼이지도 않았고 나쁜 자들과 함께 앉지도 않았습니다.

6.야훼여, 손을 씻고 죄없는 몸으로 당신의 제단을 두루 돌면서

7.나에게 하신 놀라운 일들 모두 전하며 고마우심 노래로 찬미하리이다.

8.야훼여, 나는 당신께서 사시는 집이 좋사옵니다. 당신의 영광이 깃들이는 곳이 좋사옵니다.

9.이 목숨을 죄인들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 살인자들과 함께 이 생명을 거두지 마소서.

10.그들은 뇌물만 집어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자들입니다.

11.이 몸은 그런 죄를 짓지 않았사오니 불쌍히 여기시고 건져주소서.

12.든든한 자리에 세워주신 일 감사 드리며 예배하는 모임에서 야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참고>개역개정

〚다윗의 시〛

1.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3.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4.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5.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6.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7.감사의 소리를 들려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8.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9.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10.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11.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2.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아멘! 다시 한 번 시인의 시, 그리고 시편 시, 이런 것에 대하여 한 마디만 하고 오늘 이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중요한 문제라서 그래요. 우리가 사는 거하고 똑 같은 문제인데, 우리는 그냥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거예요. 보통 길을 가면서도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뭘 보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속도가 빠르냐, 느리냐 하는 것도 상관되겠습니다만 자기가 어떤 데에 다른 데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면 길을 가면서도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비가 날아와도, 아니면 민들레꽃이 피어 있어도, 그리고 발밑에 흙인지 잔디인지 뭐, 그런 것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다른 것에 완전히 몰두해서 예를 들자면 누구한테 돈을 받으러 간다거나 아니면 내가 어디 시험 쳤는데 합격 여부를 알아보러 간다거나 그런 일들로 생각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면 그런 거거든요? 아주 중요한 것들이야 어쩔 수 없지요. 우리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아주 급박한 일들에는 우리의 마음을 빼앗길 수 밖 에 없는데, 그렇지 않을 때도 빼앗기니까 문제인 거예요.

 

현재 있는 그 자리에서 거기에 전념하는 것, 그러한 삶의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밥을 먹을 때는 그 밥만 생각하는 거죠. 음악을 들을 때는 음악만 생각하는 거구요. 공부할 때는 공부만 생각하고 걸을 때는 걷는 것만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중력을 느끼는 거죠, 걸으면서, 우리는 별로 그걸 느끼지 않고 걷잖아요? 빨리 가서 뭣을 해야 되겠다, 마음이 늘 쫓기고 있습니다. 이 지구라고 하는 있는 하나의 기차라고 할 수 도 있고, 차를 타고 가는 건데, 여행을 하고 있는 건데, 여기에 정말 중요한 것들을 다 놓치고 쓸데없는 것에 우리의 마음이 확 빠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기독교 신앙은 깊어 질수가 없어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평생 동안 신앙생활 하더라도 사실 기독교 영성을 맛보지 못하고 그냥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것을 위해서 기독교 신앙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뭐 그게 한 두 가지가 아닐 겁니다. 오늘 여기 시편 이 말씀을 우리가 조금 더 정말 여기에 전념하는 생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어때요? 읽으면서, 그냥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 시편기자가 조금 자기 잘난 체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예요. 자기가 잘못도 하나도 없이 잘난 것처럼 얘기하는 그러한 내용으로 일단 다가옵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자가 아닌가, 그러한 느낌인거죠, 처음부터 쭉 그 얘기하잖아요? 어떻게 잘했다, 잘 못한 것 없다, 어떻다 이렇게 쭉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의에 대한 문제에 대한 접근이 두 가지인 것 같아요. 의가 중요한 문제거든요? 구약에서, 신약도 마찬가지지만, 조금 차원은 다릅니다. 왜, 의에 문제, 의 Righteousness 의의 문제가 중요하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의롭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도 그렇고, 인간사회에서도요, 불의가 얼마나 횡횡합니까, 시편기자들의 눈에, 구약성서기자들의 눈에 그런 게 다 보인거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불의를 극복하는, 당연히 의로워져야 되는데, 그것이 인간사회에서도 그렇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핵심이라고 생각한 거죠, 율법이라고 한 것은 의로워 지는 어떤 기준들을 설정한 겁니다. 그래서 그건 좋은 거예요. 그런데 이 의 문제에 대해서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율법주의라고 해 갖고요, 좀 부정적인 의미죠. 자기가 어떤 걸 지킴으로써 자기 의를 확대하려는 생각 말입니다. 일종의 모범생이 갖는 자부심, 우월감 같은 거 그런 것들이죠, 내가 이 만큼이나 했다고 하는 자족감에 빠지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괜찮지만, 그러한 일종의 율법주의, 자기 의에 사로잡히게 되면 또 하나의 당연한 결과로 나타나는 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또 무시하게 될 거거든요, 그러면 이제 공동체도 깨지고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될 수 없는 거지요.

 

이제 그런 게 하나가 있고,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이야기하는 이 의의 접근은 조금 다른 거죠. 이건 자기 의에 사로잡힌 게 아니라 다른 거예요. 그리고 호소 할 수 밖 에 없는 어떤 어려운 상태에 빠져 있는 거예요. 자기가 상당히 나쁜 놈 취급을 당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욕을 먹고 있는 상태입니다. 바로 앞서 이야기한 바리새인 율법주의 이런 것들은 자타가 인정하잖아요? 괜찮은 사람, 십일조 어떻게 했고, 하루에 몇 번 기도했고, 그래서 모두가 다, 자타가 존경을 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의가 자기 의가 되어 버린 건데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게 아니라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상태인 거예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아주 코너로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 것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불의하다고 평가 받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서만은 나의 옳음, 나의 의를 말해야 되지 않느냐, 하나님만은 나를 인정해 주셔야 되지 않냐, 그러한 하소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는 다르지요. 겉으로 보면 비슷한 거 같은데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문제가 오늘 여기에 자세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음, 1절과 2절 이거는 하나님에게 검증받으려는 시인의 호소입니다.

 

1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야훼여, 나의 무죄함을 밝혀주소서. 무죄함을 밝혀 주소서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일종의 무고를 당하는 거지요. 이유 없이 고소를 당한 겁니다. 이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 사람에게서 인정받을 수 없는 자기가 무고를 당하고 있지만, 어디에서도 오해를 풀 길이 없는 그러한 상태에 빠져 있는 거지요. 그래서 이 사람은 친구를 찾아 가지도 않고 그 마을에 장로를 찾아가지도 않고 하나님에게 매달리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자기를 완전히 드러 내는 거지요. 2절에 보면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야훼여, 샅샅이 캐어보고 알아보소서. 속속들이 내 마음 뒤집어보소서. 하나님에게 검증을 받고 싶다고 하는 그러한 절박한 상황입니다.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기서 또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들은 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점에서 그래요. 이건 뭐, 제가 일일이 설명하질 않겠습니다. 일상생활 모든 것들이 인정받으려고 하지요. 그렇게 노력을 많이 하고 그렇게 되면 성공한 인생이다, 그렇게 많이들 이야기 합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에게만 자기를 맡기는 하나님의 검증, 하나님의 어떤 시험 그런데서 통과하고 싶다고 하는 호소예요. 이러한 상태, 이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데 쉽지는 않지요? 하나님에게만 나를 검증받고 싶다고 하는 그러한 어떤 영적인 경지가 있는 사람만 이런 기도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는 정말 이런 상태까지 가야만 우리가 영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거 이런 것들은 아주 흔한 이야기인데, 금방 변하거든요, 우리가 우리 관심을 하나님에게 더 집중시키는 그러한 우리 삶의 신앙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여기 1절과 2절에서 이 시인이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들에게는 억울한 일 당하고 무시당하고, 여러분들 못 참겠지요? 조금만 손해 보더라도 못 참겠지요? 그러나 이 사람은 그래도 그런 건 접어두고 하나님이 나를 판단해 주셨으면 좋겠다, 얘기합니다. 그렇게 일단 서론적으로 기도한 다음에 3절에서 5절에 시인은 자기를 변호합니다. 자기를 변호해요. 사람 앞에서 하는 변호가 아니예요. 그러니까 정직한 거죠. 사람 앞에서 그러면 좀 뻔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변호합니다. 하나님에게 자기를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로 영적인 노출, 자기를 완전히 드러 내려고 하는 거지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3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만을 쳐다보면서 당신의 진리 따라 살았습니다.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오지요? 사랑과 진리입니다. 고대인들,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통해서 선민이 된다고 하는 그런 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의 본질이 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사랑과 진리예요. 사랑과 진리,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리에 철저하게 따랐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만 하면 조금 막연하긴 합니다. 도대체 뭐가 하나님의 사랑이고 뭐가 하나님이 진리인가, 하는 거지요. 그건 아직까지 완성된 건 아닙니다. 어려운 문제이긴 한데 분명히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진리, 진리는 옳은 거예요. 사랑, 사랑은 뭐라고 얘기해야 될까요? 그것도 참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애틋한 마음 갖는 것? 이런 낭만적인 생각 갖는 거, 이걸 사랑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아니면 부모가 자식을 그렇게 사랑하는 거? 부모 자식 간에 사랑 혈연중심이죠? 이것도 사랑의 한 속성이긴 한데 그러나 그러한 부모자식간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건 여전히 우리가 기다려야 될 하나님의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성령을 가리켜서 ‘생명의 영’이라고 여러 번 강조 했던 것처럼 사랑도 그렇게 말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감성적인 낭만 이런 차원이 아니라 생명 지향적, 능력 그렇게 봐야 될 거예요. 성령과 사랑의 영 이런 것은 하나인 거지요. 이건 오늘 시편 말씀하고 직접 연관되는 건 아닌데, 이 사랑과 진리가 뭐냐 하는 것을 좀 알아야 되겠어서 좀 참고적으로 말씀 드렸습니다. 결국 이것의 궁극적인 사실은 종말에 가서 다 드러나게 될 겁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이 부분적으로 우리들에게 알려 주실 것이고 그건 각양각색으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자세를 열어 놓으면 성령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지요. 이렇게 자기를 변호하고 그 다음에 4절과 5절에 이건 조금 네가티브한 거예요. 3절은 조금 포지티브한 거구요. 적극적인 거고 4절 5절은 조금 네가티브한 차원에서 자기를 변호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이라고 하면 000어떻게 했다 그거지요? 네가티브하다고 하면 000하지 않았다고 하는 뜻이죠.

 

4절과 5절에 어떤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고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 4종류의 사람들이 나오네요, 사기꾼, 음흉한 자, 악인, 나쁜자들, 되어있습니다. 아마 이 사람들이 바로 자기가, 이 시인이 어울렸다고 하는 그러한 사람들 일겁니다. 그렇게 고소당한 내용이 있는 사람들 일거예요. 그러니까 이 시인을 고소한 사람들은 너 사기꾼하고 다녔지? 너 음흉한 자, 나쁜 자하고 어울리지 않았냐, 이렇게 고소를 했겠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이렇게 자기를 변호합니다 이 말씀 읽으면서 저는 예수님 생각이 나더라구요. 예수님에 대해서도 주변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이런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했냐하면 당신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먹고 마시고, 그렇게 함부로 살지 않았느냐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시편 이 시인 상황하고도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대로 산다고 해서 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걸 전제하고 살아야 되겠지요.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들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사회참여도 하고 예를 들자면 또 교회 속한 일만 아니라 다른 일들도 적극적으로 하다 보면 왜 교회가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느냐 그러한 얘기들도 많이 들을 수 있겠지요. 이게 다 똑 같다는 얘기는 아닌데, 여기 시인이 자기를 변호하는 내용에 나오는 이러한 사건들이 예수님에게 그대로 나타났던 그런 거하고 비슷합니다. 그 다음 6절에서 8절 자기가 앞에서 한 자기변호를 전제하면서 일종의 정결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이렇게 했다 하는 거하고 이렇게 하지 않았다, 자기의 무죄한 것을 변호 했잖아요? 그게 확실하다고 하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할까요? 그런 차원에서 정결의식을 행하는 내용입니다. 야훼여, 손을 씻고 죄없는 몸으로 당신의 제단을 두루 돌면서 6절에 나와 있잖아요? 일종의 정결의식이죠, 정결의식, 예배라고도 할 수 있고요. 7절에서는 나에게 하신 놀라운 일들 모두 전하며 고마우심 노래로 찬미하리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전하고 찬미한다, 내용들이 참 중요한 것들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예배의 우리가 드리는 오늘의 예배에서도 핵심개념이 아닐까 싶어요. 죄 없는 몸으로, 우리 스스로 죄 없는 게 아니라 죄 없다 인정받는 우리지요? 그러한 자세로 하나님의 제단을 행진하면서 고대인들의 제사 드리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들, 감사한 일들을 찬미하는 것, 그리고 8절에 보면 야훼여, 나는 당신께서 사시는 집이 좋사옵니다. 당신의 영광이 깃들이는 곳이 좋사옵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것이 좋고 영광이 깃들이는 곳이 좋다, 그렇게 신앙고백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좋다, 감사하다, 그런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3가지가 나왔네요, 사죄, 용서함 받음으로 성전 안에 들어가고, 행진하고, 하나님의 집안에 거하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일을 찬양하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이 좋다는, 그리고 감사하다는 신앙고백 이런 것들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우리가 왜 예배를 드려야 될까, 혹 또 더 나가서, 여기는 하나의 예전(禮典)적이죠? 찬양하고 행진하는 이런 것들이 다 예전인데, 우리는 왜 예전적으로 예배를 드려야 될까, 우리는 한 번 질문할 수는 있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예배학을 강의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나 여기 그런 내용이 나와 있어서 한 마디 짚은 겁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예전예배보다는 열린 예배 형식으로 나가잖아요? 이게 더 대립되는 건데 예전 새크라멘트(Sacrament) 어떤 예전적인 예배를 드리는 거하고 열린 예배의 가장 큰 차이는 뭐냐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전예배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는 예배라고 한다면, 열린 예배는 거기 참여한 사람들, 회중들의 은혜 받는 것에 중심이 모이는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필요하지 않냐, 사람들이 얘기를 해요. 전통적인 예배는 좀 이렇게 청중들의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청중들이 확 참여할 수 있도록, 그러한 예배 지루하지 않는, 재미있는 순서로 끌어가야 된다, 뭐, 율동을 하면서 찬양을 부른다거나 뭐, 이런저런 거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주장이 가능한데 그거는 큰 착각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은혜 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거든요? 예를 들자면 설날에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절하잖아요? 자기 기분 좋으라고 절하나요? 그게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예를 갖추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법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기분이 좋다고 땅에 머리를 대는 것까지 절하지 않고 그냥 반쯤만 하고 만다거나 자기 맘대로 하면 자기 기분은 낼지 모르지만, 혹은 춤추면서 절을 한다거나 그럴 수도 있겠지요. 자기 기분만 따른다면 그건 참된 경배가 아니듯이 열린 예배가 자칫하면 사람 중심으로 떨어져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예배가 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그렇게 정결의식을 말한 다음에 9절과 10절에 하나님께 다시 기도를 하는데요, 내용은 하나님의 그 공동체에서 제거되지 않기를 바라는 겁니다. 9절, 10절에 그런 내용들이 절절하게 나와 있지요? 이 목숨을 죄인들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 살인자들과 함께 이 생명을 거두지 마소서 나를 그렇게 제거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런 거지요. 그 다음 마지막으로 11절과 12절,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사죄기도와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 서론적으로 이 시편기자가 자기 잘난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겉으로 보면,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실제로는 그게 아니라고 제가 말씀 드렸지요? 그게 여기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11절에 보면 거짓말하고, 나쁜 살인자들 이런 사람들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결국 불쌍히 여기고 건져 주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기도드리지 않아요, 감사합니다. 영광스럽습니다. 내가 이 만큼 뭐 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불쌍히 여기시고, 이렇게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있지요, 세리는 골방에 앉아서 하나님께 두 손도 드리지 못하고 무릎 꿇고 불쌍히 여겨 달라 그렇게 기도하는 것 하고 마찬가지거든요?

 

그러니까 이 시인은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거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12절에 그렇게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감사기도를 드리는 건데요, 찬양을 하는 건데 참 귀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든든한 자리에 세워주신 일 감사드리며 예배하는 모임에서 야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감사와 찬양이예요, 그런데 어떤 일로 감사하냐 하면 든든한 자리에 세워주신 것을 감사한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게 참 역설적이죠? 이 사람은 지금 억울한 일을 당했어요. 그래서 어디에 찾아가서 위로 받을 때도 없고 하나님에게만 하소연하는데 든든한 자리에 세워주셨다고 지금 이야기 합니다. 이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시인의 영적인 상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좀 맛이 갔다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지요. 지금 완전히 코너로 몰려 있는 상태인데 어떻게 든든한 자리냐, 하는 겁니다. 이게 신앙의 역설, 패라독스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내가 의지할 데가 많을수록 사실은 우리의 근본적인 토대는 허물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완전히 없게 되면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거든요? 이게 우리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대로 생활조건이 좋아지길 바라고 힘들 일 없기를 바라고 우리 자식들도 잘 되길 바라긴 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신앙적인 깊이에 들어가게 되면 그러한 기도는 사실 드릴 필요가 없어요. 잘 안되어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럼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더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거든요? 인제 그런 게 안 될 경우에는 예를 들자면 돈이 좀 넉넉하다고 그러면 거기에 점점 의지할 수 밖 에 없습니다. 주식사고 노후보장 들고 계속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안전장치 그런 것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든든한 자리가 안 되거든요? 그런 것들이 전혀 없다면 아예 그런 걸 포기하고 하나님에게만 삶을 맡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경험한 그러한 경험들이 그런 것들이 아닐까 싶어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거와 같은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할 수 있고 그 때에 우리의 영적인 자리가 든든해지는 게 아니냐 하는 겁니다. 여기서 영적이라고 하는 말을 실제적인 삶하고는 상관없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실제적이고 든든하다고 생각했었던 그 구체적인 삶의 조건들이 이것이 오히려 추상적일 가능성이 많이 있어요.

 

어떻게 예를 하나 들고 오늘 말씀을 마쳐야 되겠네요, 밥 먹는 이야기 합시다, 흔한 이야기입니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늘 늘 먹게 되면 계속 맛있는 것만 찾습니다. 더 영양 있는 거, 요즘 말하는 식으로 웰빙 식사, 계속 그 쪽으로 신경을 쓰겠지요? 그러나 정말 절식할 정도로 어려울 때 먹는 것 조차 어려운 상태에 있다고 한다면 그럼 자포자기해서 인생을 막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영적으로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루에 한 끼를 먹으면서 어떻게 생명의 희열을 깊이 느끼게 될 겁니다. 웰빙 식사 하면서 늘 그렇게 이만하면 됬다, 참 나는 행복하다, 그런데 떨어져 있는 사람하고 하루에 한 끼 밥하고 김치하고 물에 말아 먹으면서 그 먹는 힘이 생존에 대한 깊은 기쁨에 들어가는 사람하고 누가 더 든든한 토대에 서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이 다 아실 겁니다. 오늘 여기 시편기자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서도 하나님께 자기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하나님께 호소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을 찬양하고 겸손하게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리고 자기의 삶의 토대를 든든하게 세워준 것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러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시겠지요? 이 사람이 어떠한 영적인 깊이에 들어갔는지, 참 부럽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정말 인생이다, 삶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요, 우리는 온통 다른 것에 집중하느라고 자기 연민에 빠지든지 자기가 성취해야 될 것에 너무 매몰되어 버린다든지 이런 것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들을 다 놓치고 사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을 같이 생각하면서 주님께서 가르친 기도를 같이 드리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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