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27(2)편 녹취록-하나님의 얼굴

조회 수 1087 추천 수 0 2010.11.01 07:45:41

시편 27편(2) 강해-하나님의 얼굴

 

오늘 우리가 읽고 공부할 성경 말씀은 시편 27편 7절에서 14절입니다. 지난 번 27편을 공부할 때 1절에서 6절까지만 나누어서 봤습니다. 27편은 좀 독특해서 전편과 후편이 완전히 구별된다고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지난 번 공부할 때 제가 한 번 지적해 드렸어요. 저자도 다르고 내용도 많이 다릅니다. 27편 1절에서 6절까지는 시편 23편과 비슷하게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에 대한 찬양이라고 한다면, 7절에서 14절까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움, 그리고 주변에서 다가오는 적대자들의 모함, 이런 불안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그런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7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공동번역>

7.야훼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소서. 불쌍히 여기시어 대답하소서.

8.이렇게 내 마음 그대로 아뢰옵니다. "나를 찾으라." 말씀하셨사오니 야훼여, 이제 당신을 뵙고자 합니다.

9.당신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그 동안 이 종을 도와주시었사오니, 진노하지 마시고 물리치 지 마소서.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이 몸을 저버리지 말아주소서.

10.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야훼께서는 나를 거두어주실 것입니다.

11.야훼여, 당신의 길을 가르쳐주소서. 원수들이 지키고 있사오니 안전한 길로 인도하소서.

12.원수들이 독기를 뿜으며 거짓 증언하러 일어났습니다. 이 몸을 그들의 밥이 되지 않게 하소서.

13.그러나 나는 살아생전 이 땅 위에서 야훼의 은덕을 입으리라 믿사옵니다.

14.야훼를 기다려라.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라. 야훼를 기다려라.

 

<참고>개역개정

〚다윗의 시〛

1.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7.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10.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12.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이 내용을 시로 쓴 시편기자의 영성이 참 놀랍다고 하는 사실을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내용의 제목을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얘기 할 수 있어요. 혹은 “야훼를 기다려라”라고도 할 수도 있고요. 혹은 “나를 찾으라.”그러한 말로도 할 수 있겠습니다. 각각 그러한 특징들이 이 시편에 잘 숨어 있네요. 우리가 이러한 말씀들을 읽을 때 너무 익숙한 단어들과 문장들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시편기자의 영성 안으로, 수영하는 사람이 깊은 물속으로 뛰어 들 듯이 들어가야 되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오늘 저도 이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하긴 해야 될텐데, 이 시편기자의 영성을 제가 사실은 따라가기가 쉽지 않거든요, 영성도 영성이기도 하고 또 그것이 문장으로 나타나서 그 문장을 제가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또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두 가지의 문제가, 아니면 두 가지의 차원이, 성서를 읽는데 특별히 이러한 시편과 같은 문학적 양식으로 된 이 텍스트를 읽는데 중요합니다.

 

하나는 이 시인들의 영성에 닿아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 영성의 경지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준비되지 않았을 때는 우리가 아무리 문법적인 내용을 따라간다고 하더라도 그걸 우리가 충분하게 포착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하나는 이게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문장구조, 실질적으로 문학적인, 문법적인 그러한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건 하나의 텍스트를 읽는, 해석하는 메소돌로지(方法論, methodology)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두 가지가 사실은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 되겠지요? 하나는 성서기자의 영성만큼의 독자들에게 영성이 필요하다고 하는 거하고, 또 그것이 구체적으로 언어로 되어 있어서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 말이지요. 그래서 신학공부는 이 두 가지를 함께 훈련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가 다 충분하게 신학교에서 훈련되지 않죠, 모든 부분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한 경우에 그렇습니다. 주로 텍스트를 문법적으로 그 이해하는 메소돌로지, 방법론은 조금 주어지긴 합니다.

 

그러나 그게 영성으로, 영적인 이해, 영적인 경험, 이런 것으로 와 닿지 않는 경우에 훈련이 잘 되지 않은 거예요. 이거는 하나의 방법론으로만 되지 않는 거거든요, 이게 일반적인 책을 번역 할 때도 그러한 경향이 있긴 있어요. 예를 들자면, 괴테의 시를 독일어에서 우리말로 번역하는 어떤 번역가가 있다고 할 때요, 그가 아무리 독일어를 아무리 잘한다고 하더라도 괴테와 같은 시적 감수성 그런 것들을 갖추지 못할 때에는 그 시가 가지고 있는 그 미묘한 뉘앙스, 그런 것들을 우리의 말로 풀어내기에는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학공부가 많은 경우에 그냥 아주 건조하게 텍스트를,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론에만 떨어져 있어서 영적인 관점들이 근거, 토대로 받쳐주지 못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거꾸로 될 수도 있어요. 학문적인 접근, 문법적으로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이론적이고 학문적이고 신학적인 부분인데, 이런 것들을 거의 무시하고 뭐, 기도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영성을 또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균형감각을 잘 맞춰서 정말 살아있는, 내면적으로 영적으로 살아 있으면서도 텍스트를 아주 엄중하게 객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가 같이 이뤄져야 될 텐데, 그것이 신학교에서는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그런 신학생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경험하고 있는 바인데요, 그런 것만이 아니라 지금 신학생들을 보더라도 뭐 그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시인의 편지들을 우리가 어떻게 따라 가느냐,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제가 말씀 드리기 위해서 서론적으로 다른 것을 예를 들은 것 같습니다. 7절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야훼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소서. 불쌍히 여기시어 대답하소서. 하나님을 향한 그런 부르짖음이 무얼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 산에 가서 소나무 뿌리를 뽑는다, 그런 표현들이 많이 있는데, 그만큼 절박하게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긴장감, 치열성, 그러한 것을 유지한다고 하는 그런 뜻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이제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내면, 영적인 자세 그런 것들을 이야기 하는 거겠지요.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다른 시편을 공부할 때도 말씀 드린 걸로 기억합니다만, 사람에게 기대할 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부르짖지 않습니다. 주변에 자기를 도와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된다기 보다도 그래도 형식적으로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정말 하나님만을 향해서 자기 영혼을 위해서 그런 부르짖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많을 때는 잘 주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눈여겨봐야 되고요, 8절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내 마음 그대로 아뢰옵니다. 하나님에게 자기의 마음을 그대로 내 보인다고 하는 거지요, 이런 경험들이 순수한 그리고 분명한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대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사람 앞에 서면 일단을 자기를 방어하게 되거든요? 혹은 지나치게 자기를 노출시키거든요? 그런 것은 정직하게 자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노출시킨다고 하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를 또 확인하려고 하는 하나의 심리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인은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그대로, 그대로 꾸미지 않고 그리고 과하지 않게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거지요, 그럴 때만 진정한 자아, 자기를 들여다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다음 나오는 문장이 중요합니다. "나를 찾으라." 말씀하셨사오니 야훼여, 이제 당신을 뵙고자 합니다. “나를 찾으라” 이러한 표현들은 성서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찾으라 하는 거지요, 하나님을 찾으라, 제가 참고하고 있는 성서주석에 보면 그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성경구절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어요. 에레미아서 29장 13,14절, 이렇습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13)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이거예요. 이러한 영적인 자세지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고 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는 과감하게 이제 당신을 뵙고자 합니다.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뵙고자 한다는 이 말이 어떤 걸까요? 그 시인의 영적인 깊이가 어떤 걸까요? 사실은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하는데, 여기서 이 뵙고자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말은 아니지요? 볼 수도 없구요. 그러나 하나님을 우리가 직접적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고 하는 것은 또한 분명한 거거든요? 이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하는 것은 무얼까요? 아, 이런 문제들을 우리들이 그렇게까지 들어가지는 말도록 합시다, 어쨌든 오늘 여기서 시편기자의 영적인 그러한 자세를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뵙고자 한다고 하는 이러한 영적인 긴장감, 이걸 우리가 확인하면 되겠지요, 과연 그게 뭘까요? 그러한 시편기자의 영적인 자세가 뭘까요? 또 우리에게는 영적인 요구가 있을까요? 이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확실하게 주어지지 않으면 그러한 영적인 욕구가 없다면 우리들은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이런 것들을 아, 내가 마음에 평화를 누려야 되겠다 라든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분명한 계시를 받아야 되겠다 라든지, 뭐 그러한 것과 연관시켜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될 것은 그 하나님, 이 시편기자가 뵙고자 열망하고 있는 그 하나님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직접적으로 우리가 볼 수 없는 분이고요, 그의 등만 볼 수 있고요, 그래서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처럼 그런 흔적만 우리가 경험 할 수 있는 그런 분이십니다. 아, 이 말이 여기서 그렇게 필요한 건 아닌데,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중심이 잘 전달이 되지 않네요. (예, 지금 제가 시편 공부를 앞서 까지는 수요일 날, 몇 명이 모여서 공부하는 방식으로 했고요, 그건 지난번으로 그건 끝나고 이번 서 부터는 제가 직접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생동감이 좀 줄어드네요. 이런 게 좀 한계가 있군요. 저는 앞에 청중들이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이 말씀을 잘 강해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드는데,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듣는 사람들이 바로 앞에서 그런 반응이 크거나 작거나 소통되는 그런 일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이 있다면 그 흐름을 제가 잘 따라 갈 수가 있는데, 그냥 이 화면만 보고 하다 보니까 그 맥락 속으로, 흐름 속으로 들어가기가 조금 어렵네요. 집중력이 좀 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편기자가 당신을 뵙고자 합니다. 라고 하는 그 요구, 종교적 열망, 욕구, 그것이 뭐냐, 하는 것을 말씀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실체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닌데, 그 분속으로 우리가 들어 갈 수는 있는 겁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시겠지요. 왜 하나님을 결정적으로 탁 소유하고 딱 끝나버리는 결정된 대답으로 되는 건 아닌데,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활동, 그런 것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경험은 분명하게 있는 거거든요, 거기까지 가겠다고 하는 거지요. 그 두 개가 좀 차이가 있는데, 이해하시겠지요? 하나님이라고 하는 우리 삶의 결정적인 대답을 완전한, 완료된 방식으로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러나 그 분의 통치 안으로 우리가 빠져 들어갔다고 하는 그 경험은 할 수 있는 거예요. 거기까지는, 그게 우리가 살아 있을 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하나님을 향한 영적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그걸 이제 하나님을 뵙고자 합니다는 시적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제가 드린 이 말씀이 다음 구절과 연관되는데요, 잘 보십시오. 9절, 당신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그 동안 이 종을 도와주시었사오니, 진노하지 마시고 물리치지 마소서.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이 몸을 저버리지 말아주소서. 당신 얼굴을 숨기지 말라고 지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종종 아니, 어떤 면에서 늘 숨어계신 거지요. 하나님을 뵙고 싶은데, 하나님이 이렇게 확 와 닿지 않는, 그 표현도 정확하지 않고요,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그런 상황에 빠져 들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과연 뭘까요? 이 사람이 왜 하나님이 그 얼굴을 숨긴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폐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험들, 하나님의 그 사랑과 그 평화 통치 안에 들어 있다고 하는 경험이 있으면서 그럴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이 나에게서 얼굴을 가린다고 하는, 숨긴다고 하는 경험, 이런 것들이 아마 우리 일생에 계속 반복될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있다가도 없는 거냐, 없다가 있는 거냐, 나타났다 없는 거냐, 구름에 달이 나타나듯이 하나님이 그러시는 거냐, 그건 아닌거거든요, 하나님이 어떻게 안 계시겠습니까, 이 문제는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 은폐의 방식으로 우리 옆에 계시는 거거든요, 그걸 이제 놓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나타내는 것도 확 당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그 같은 구절, 끝 문장이 그렇네요. 이 몸을 저버리지 말아주소서. 꼭 저버리는 것 같은 상황 속에 빠져 있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숨는 방식으로 우리 옆에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숨어 계시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에 근거이면서 동시에 동반자시고 우리의 목자처럼 함께 하는가, 우리가 그것을 빨리 포착해야 되거든요? 그게 이제 우리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일들이 풀리지 않잖아요? 그럼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끼지 않습니까, 또 우리의 일이 풀리지 않는 것도 그렇고, 또 우리가 허무하거나 또 외롭거나 또 절망적인 상태에 빠질 때가 많이 있잖아요? 그럼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은 거거든요? 우리의 삶의 어려운 일들이 먹구름과 같은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한테 심판 받는 거와 같이 생각이 되더라도 거기 이미 하나님의 은총이 동시적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그것을 빨리 알아야 되죠, 그거는 보통은 잘 못합니다. 그냥 거기에, 어려움 가운데 매몰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게 우리 삶의 전체처럼 받아 드려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절망이죠,

 

다른 분의 이야기를 들어서 미안합니다마는 며칠 전에 최진실씨 자살 사건 때문에 상당히 혼란스러운 일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그 분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네요. 두 남매를 데리고 교회도 열심히 나가고 했다고 하는데, 자살이라고 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 분이 왜,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혹은 전에 목사와 그러한 문제로 상담을 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문이 좀 들어요. 그 분에게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뭘까,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절박감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대충 우리가 이해를 하고 있긴 있습니다마는 예, 어쨌든 기독교 신앙이 그 분에게는 별로 실질적인 삶의 내용으로는 담겨지지 않은 게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 죄송합니다. 이렇게 그런 방식으로 생명을 접은 어떤 분을 제 3자가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는 것은 큰 잘못인데요, 저도 그 분에 대해서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기독교신앙인이었다고 하는 그 부분하고 연관된 그 아주 작은 것만 제가 짚은 겁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거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은총의 빛을 내려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놓치는 거예요. 그건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은총이 있거든요? 그걸 놓치는 겁니다. 그 은총의 빛을 놓치지 않는 어떤 신앙적인 경지 이런 걸 우리는 기독교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까요?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걸 놓칠 수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훈련, 그리고 영성,영적인 디스플린(Disciplines),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은총을 놓치는 순간이 짧아지는 거지요. 점점점점 예, 하나님의 은총 자체가 우리 삶 전체를 덮게 되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우리의 삶이 완전히 몰입되게 되면 그러면 이제 신비주의자들, 영성가들, 이런 사람들처럼 일체화 되는 거지요. 오늘 여기 시편기자도 거의 그와 버금갈 정도의 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지나왔던 그러한 어려운 순간들을 이렇게 문자로 다시 한 번 지적을 하면서 그 은총의 세계로 이미 돌입한 그러한 자신의 신앙을 여기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험들이 어떠냐, 하는 것이 10절 뒤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10절 다음과 같습니다. 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야훼께서는 나를 거두어주실 것입니다. 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일들은 별로 많이 없어요. 아주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요, 이것은 실제적으로 그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시적인 표현이죠. 가장 인간이 견디기 힘든 그러한 상황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야훼께서는 나를 거둬 주신다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어둠속에서도 여전히 은총의 빛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지요? 또 그런 경험들을 하시지요? 이거는 그냥 신앙의 값싼 낭만주의, 감상주의 그런 것들 아닙니다. 그냥 혼자 자기기분에 도취되어 가지고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런 복음성가에 있는, 뭐, 그 내용자체가 무조건 잘 못 되었다고 하는 건 아닙니다마는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 있는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한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 있으면 조금 어려운 일이 벌어지면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마는 거예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최근에 벌어진,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마는 연예인들의 자살사건이요, 다 기독교인들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그들이 CCM이나 그런 걸 통해서 자기 신앙의 기분에 들어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은 작은, 작다는 표현보다도 자신들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했었던 어떤 거요, 그게 물질일수도 있고, 명예일수도 있고, 자존심일수도 있는데요, 그런 것들이 조금이라고 손상되면 못 견디는 거지요. 그러니까 사랑받기에 태어났다고 하는 그런 기분에 빠지게 되면 늘 그러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야만 자기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야훼 하나님이 나를 거둬준다고 하는 것은 이건 아주 실질적인 이 세상에서의 그런 시련과 어려움, 그러한 것 속에서도 야훼 은총을 그가 놓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은 전제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가능한 거예요.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아, 이런 삶의 자세는 자기합리화다, 세상에서 힘든 일들, 그거 뭐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잘 안되니까 이솝우화에 나와 있듯이 여우가 포도를 먹으려고 하는데 키가 작아서 안 되니까요, 저거는 시어서 맛이 없을거야 이렇게 하듯이 자기합리화 아니냐,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천만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지 않은지는 이 시간에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기자들이 왜 야훼 하나님에게서만 이런 생명의 빛을 발견했는지를 알아야 되는데, 그게 왜 자기합리화가 아닌지를 제가 설명하지 않겠어요. 앞에서도 말했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런 이야기들은 많이 할 거구요, 또 그거는 말을 해도 전달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알아야 되는데 물론 설명을 듣긴 들어야 되겠지요? 기회가 되는 데로 하긴 하겠습니다. 한 마디만 하고 지나간다면 우리가 결국은 살다가 죽어야 되는데, 모든 것들을 놓고 가야 되거든요? 우리가 좋다고 생각해서 신나했던 그런 것들을 다 정리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온전한 생명의 힘으로 작용하진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준다고 하는 것이 과연 뭐냐하는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나를 지켜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잘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꾸만 자기가 의존해야 되는 것들을 하나님의 은총인 것처럼 생각하는 거지요. 이 두 가지가 혼동되고 있습니다. 이런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기도를 많이 해서 열심히 그렇게 신앙적으로 사니까 가족도 잘되고 나도 잘되고 만사가 잘되고 복 받고 노후도 보장되고 이렇게 되더라, 비록 힘들지만 열심히 잘 했더니 그렇게 잘 되더라,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내 삶이 안정이 되는 것을 일치시키거든요?

 

이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신앙, 성서적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은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기는 그렇습니다마는 아, 전혀 다른 거죠. 분명하게 말하지만 전혀 다른 겁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질적으로 다른 생명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전혀 유비(類比)가 가능하지 않은, 아날로기아(analogia)가 가능하지 않은 그런 어떤 생명의 빛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것들이 뭐냐 하는 것들을 공부하는 것이 신학공부이기도 하고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고요, 그렇습니다. 예, 11절에 시편기자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야훼여, 당신의 길을 가르쳐주소서. 원수들이 지키고 있사오니 안전한 길로 인도하소서. 전혀 다른 안전한 길이지요. 전혀 다른 길인데 안전한 길입니다. 사람들이 훼손할 수 없는 그런 안전한 길이 뭐냐 하는 거죠, 이렇게 말을 하게 되면 자꾸만 이게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 욕먹는 거 아니냐,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하는 걸 이제 경험한 사람들만 이게 이해가 되는 건데요,

 

<사도신경 해설> 지난번에 공부한 대목에 그러한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사도신경해설 7강-나는 믿습니다.(5)>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에 대한 신앙, 참되다고 하는 인식인데 그걸 근거로 해야 되는데 그것이 세 가지 지평에서 보증되어야 된다, 확실해야 된다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중의 하나가 불가시적 현실성이에요. 판넨베르크가 얘기한 두 번째 요소입니다. 첫 번째는 창조의 세계, 그리고 역사적 예수의 사건, 그거는 이미 분명한 것, 실증적인 그러한 현실들이구요. 불가시적 현실성입니다. Unsichtbarkeit Wirklichkeit, 두 번째가요. 우리의 신앙이 종말론적으로 기대할 만한 것들이 참되다고 하는 그런 요소라고 해요. 그건 구체적으로 우리 죄의 용서, 우리의 부활, 그런 것들입니다. 그건 아직 오지 않았지만,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종말론적 생명완성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른 건 접어두고 두 번째 불가시적 현실성, 이게 사실 손에 잘 안 잡히게 되거든요? 이러한 것들 안으로 아주 깊이 한발 한발 들어가야만 우리가 생산해 내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 그것이 실증적인 그런 방식은 아니지만, 아주 참되게 리얼하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거지요. 제 설명이 좀 어렵군요. 대충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10절부터 13절까지 이 시편기자가 야훼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 나를 도와주신다, 그러한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14절, 다음과 같습니다. 야훼를 기다려라.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라. 야훼를 기다려라. 참 놀랍지요? 정말 놀랍습니다. 놀라운 표현이예요. 앞부분에서 나를 찾으라라는 말씀과 당신을 뵙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절실한 거예요, 저도 하나님을 뵙기를 원합니다. 그 안에 들어가고 싶어요. 하나님의 생명통치라고 하는 고유한 그 세계 말이지요. 그런 것들이 순간순간 경험되기도 하는데 아직까지는 멀었지요? 완전히 이룬 것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약속을 믿고 그 쪽으로 나갈 뿐입니다. 마지막 구절에 지금 얘기 한 것을 전제하면서 이렇게 대담하게 선언합니다. 야훼를 기다려라.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라. 야훼를 기다려라. 그날이 오는 거지요? 야훼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자기를 계시하는 때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 사랑하는 우리 성도들과 또 대구성서아카데미 동영상 다비안 회원 여러분, 오늘 여기 2500여 년 전, 고대 이스라엘의 어떤 영적인 시인이 노래했던 이 시편의 말씀을 여러분의 신앙적 구도의 길에 좋은 지침돌로 삼기를 바랍니다. 야훼를 기다려라.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라. 야훼를 기다려라.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87 106편,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선하심 정용섭 2010-10-13 719
86 105편, 구원의 주체이신 여호와 정용섭 2010-10-06 529
85 105편 녹취록- 구원의 주체이신 여호와 file 박은옥 2011-01-10 1048
84 104편 녹취록- 신앙의 두 중심축, 찬양과 기쁨 file [9] 박은옥 2010-11-15 1337
» 27(2)편 녹취록-하나님의 얼굴 file 박은옥 2010-11-01 1087
82 27(1)편 녹취록 -믿음의 용기 file 박은옥 2010-11-01 1488
81 26편 녹취록-무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10-25 1380
80 25편 녹취록- 하나님의 길 file 박은옥 2010-10-25 906
79 24편 녹취록-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 file 박은옥 2010-10-01 1518
78 103편 녹취록-여호와를 송축하라! file 박은옥 2010-09-25 1217
77 102편 녹취록-탄원과 찬양 file 박은옥 2010-09-25 1058
76 101편 녹취록-제관식 선포문 file 박은옥 2010-09-25 1266
75 100편 녹취록-선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395
74 99편 녹취록-거룩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084
73 98편 녹취록-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file 박은옥 2010-09-23 1137
72 97편 녹취록-의로우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184
71 96편 녹취록-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file 박은옥 2010-09-23 1057
70 95편 녹취록-완악한 마음 file 박은옥 2010-09-23 1447
69 94편 녹취록-복수하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8-31 1495
68 93편 녹취록-하나님의 권능 file 박은옥 2010-08-30 151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