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104편 녹취록- 신앙의 두 중심축, 찬양과 기쁨

조회 수 1338 추천 수 0 2010.11.15 00:23:54

시편 104편 강해-신앙의 두 중심축, 찬양과 기쁨

 

시편 104편 1절에서 36절까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돌아가면서 읽겠습니다. 제가 1절 읽고 오른쪽으로 이렇게 돌아가면서 한 절씩 읽도록 하지요. 내용을 잘 생각하십시오.

 

1.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2.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3.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4.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5.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6.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7.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며 주의 우렛소리로 말미암아 빨리 가며

8.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곳으로 흘러갔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9.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10.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11.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12.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13.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

14.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15.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16.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17.새들이 그 속에 깃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18.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19.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

20.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

21.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22.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들의 굴 속에 눕고

23.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24.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 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25.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26.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27.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28.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29.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31.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32.그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을 만지신즉 연기가 나는도다

33.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34.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35.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아멘!! 시편 103편과 104편이 비슷해요.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둘 다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런 말로 시작해서 또 그런 말로 끝납니다. 두 개가 전체적인 그 분위기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요, 주제도 그렇고 다 비슷합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104편이 문학적으로 더 뛰어나다고 해요, 전문적인 부분은 제가 뭐, 여러분들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저도 잘 알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요. 그건 그만 두도록 하고요, 제가 그냥 볼 때 전문적인 관점이 아니라 그냥 상식적으로 볼 때 103편과 104편의 차이 또 104편이 103편보다 혹은 이러한 류의 여러 가지 시편들보다 좀 뛰어난 이유는 이 104편이 그 당시 그 당시 유력한 문학작품들하고 연관성이 많이 있는 거 하고 또 많이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103편은 주로 유대교 전통 신앙의 전통 가운데 그냥 서 있어요. 그걸 이야기 하지요, 이스라엘의 역사, 하여튼 또 그런 등등.. 이게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신앙만을 따르고 있다면 104편은 주변에 그 당시 여러 제국들 중에서 가장 문명이 좋았다고 하는 나라들의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거지요. 문학적으로 세련 됬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기원 전 14세기 초에 이집트 왕, 이크나톤이 쓴 <태양시*=태양찬가>가 이 104편에 많이 인용되었다고 말을 하네요. 영향을 받은 거지요. 그런 것에 대해서 크게 불편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왜 주변의 말씀을 받느냐 그런 것 때문에 좀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없잖아 있긴 있고요, 그런 걸 이야기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좀 끌어 내리는 거라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 필요가 하나도 없어요. 창세기에도 바벨론이나 이런 저런 그 신화들의 영향을 받은 게 있으니까요. 하나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서가 살았다는 거예요. 독단적으로 혼자만 고집불통으로 있는 게 아니라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주변나라, 주변 다른 문화와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 거기 때문에 오히려 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한 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 하나도 불편해 생각 할 것 없구요. 조금 더 나가서 한 마디만 보충 한다면요, 성서에 신화가 있다, 없다, 그런 걸로 논란들을 하는데요, 그런 것도 당연히 있어야 되는 되거든요? 고대사회에서는 신화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거였습니다. 그 방식으로 세계를 읽었어요.

 

오늘의 어떤 자연과학, 물리학이 옛날에는 신화하고 똑 같았습니다. 그게 지나니까 우리가 볼 때 이상하다는 거지, 그 당시에는 그 방법으로 세계를 읽은 거라서요, 성서 안에 신화적인 요소가 있는 거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태양시>를 쓴 이집트 이크나톤이라는 왕은 기원전 1375년에서 기원전 1358년에 제위 했던 이크나톤·아멘호테프 4세(파라오 이집트 제18왕조의 제10대 왕)라고 합니다. 보통 시편이 기원전 500년에서 그 사이 이후에 기록 됬거든요? 이거는 훨씬 더 오래전이지요? 그 시편이 기록 된 거보다 8,900년 전에 이 <태양시>가 있었으니까 그것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영향 받은 거 당연합니다.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을 그러한 것을 통해서 성서가 뭣을 이야기 하려고 하느냐, 하는 거지요, 모든 문학도 그렇고 과학도 그렇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이렇게 서로 역설적인 맥락에 있는 거란 말이지요, 성서와 기독교 신앙이 그런 에세네파처럼 세속을 등지고 굴속에 들어간 게 아니라 이 세계 전체 안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고 하는 점에서 주변의 여러 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이 104편이 비록 신학자가 얘기하는 대로 이크나톤 파라오가 쓴 <태양시>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전통신앙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 문학적인 방식은 좀 필요로 한 거지요. 문학적인 양식, 이것은 그러한 일반 문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근본에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그 이집트라든지 다른 고대나라의 자연숭배는 자연자체를 숭배하는 거예요. 말 그대로요. 잉카문명도 그렇고요, 대개 태양을 섬기지 않았습니까, 로마도 그렇고, 이집트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가끔 자연을 보면 위대하다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게 다 자연숭배거든요?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있을 만한 것들입니다. 자연론자, 혹은 자연 숭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연을 보지요. 그것은 똑 같습니다. 다만 자연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피조물이다, 그걸 창조하신 분이 있다고 하는 그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서 이 시편을 쓴 겁니다. 여기 전체 내용을 5단락, 정확하게 하면 6, 7단락으로 나눌 수 가 있는데요, 중요한 내용들을 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2절에서 4절은 하늘에 대한 이야기예요. 하늘에 대한 이야기, 참, 오늘 같이 읽었습니다마는 문학적으로 세련 됬지요? 아주 이 단어를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비유도 참 그럴 듯 하고요, 옷을 입은 같이 빛을 입었다, 멋지잖아요? 하늘을 휘장같이 치셨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었다, 이건 참 이해가 안가지요? 물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좀 나오겠습니다마는 하늘을 얘기하다가 왜 갑자기 물을 얘기 할까요? 고대 이스라엘은 다른 데도 마찬가지였겠습니다마는 저 하늘을 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아 홍수 때도 창문이 열리고 물이 쏟아져 내려오잖아요? 물입니다. 저 꼭대기도 물이고 여기도 또 물이 있고요, 중간을 창공이다, 창공,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었다, 저 하늘 높은 곳에 하나님의 거처할 자리를 마련했다, 다 문학적인 표현들입니다. 거기 제가 인용을 했군요.(강의안 참조) 창세기 1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이 처음 창조할 때에 물과 물로 나누고, 이 세계 전체는 물이었다고 하는 거지요. 물과 물을 나눴어요. 위의 물과 아래 물을, 그리고 중간을 궁창이라고 했다, 그런 표현입니다.

 

이것을 보면 헬라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인 탈레스가 “만물의 본질,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그렇게 얘기를 했잖아요? 그런 관점하고도 연결 될 수 있습니다. 세계를 다 물로 생각하는 거니까요. 어쨌든 물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늘에 대한 그런 표현입니다. 우리가 지금 읽으면서 참 아름답게 썼다, 얘기를 할 수 있긴 있는데, 이 시각을 강의안에도 몇 번 적었습니다마는 고대인의 시각으로 그걸 보셔야 되어요. 지금 우리에겐 하늘의 우주 물리학적인 정보가 있잖아요? 그러나 고대인들에게는 하늘이 뭐였을까요? 깜깜했겠지요? 참 신비로왔겠죠? 그런 세계를 이렇게 문학적으로 표현을 잘 하고 있습니다. 예, 하늘이고요, (혹시 지금 졸리운 사람 있어요? 괜찮아요?) 예, 두 번째 5절에서 9절, 이 땅입니다. 하늘 했고, 이제 땅이예요. 5절, 하나님이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그리고 6절에 보면 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해일 같은 현상을 말하네요. 산까지 물이 넘치지만, 주님께서 꾸짖으시니까 물은 도망가고 그렇다, 땅이 간혹 물로 인해서 범람하는, 홍수도 있고, 해일도 있을텐데요, 그렇지만 결국 다 물러간다, 그게 정말 신기했던 거예요. 고대인들은요. 물이 영원히 그대로 있을 상황인데 어느 순간에 쏜살같이 나가고 다시 평안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꾸짖으셨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죠, 예, 그 땅이 비록 중간 중간에 이런 저런 일들로 인해서 흔들리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안전하게, 튼튼하게 유지하신다, 그러한 말입니다.

 

5절에서 9절까지 이야기예요. 9절 다시 한 번 읽어 보면 이렇습니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물의 경계, 신비했을 거예요. 바다, 강 경계가 있고요, 참, 바다가 멀까, 얼마나 그들이 신비롭게 생각했을 것이며 두렵게 생각했을까요? 동양에서는 바다에 용왕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할 정도여서 거기에 제사도 드리고요, 때에 따라서는 사람도 바치고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그건 그 만큼 두려워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두려움은 성서에 속해있는 사람들도 똑같이 느낀 거예요. 그러나 성서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자연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다스린다, 그거지요. 요거는 우리의 신앙과 연관을 시키면 마찬가지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살이가 뒤죽박죽 될 때도 많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안정하게 하신다 그런 거지요. 그런 고백가운데 있습니다. 그 다음 10절에서 18절입니다. 여기는 땅위의 생명체들이 쭉 나열 되어 있습니다.

 

10절에서 18절이예요. 들짐승, 들나귀, 새, 풀과 채소, 포도주와 기름, 양식, 물, 산양, 너구리, 여러 가지 단어들을 제가 열거했습니다. 그 단어 하나하나 다 열거 한 건 아닙니다만, 여기 나와 있는 것을 대충 뽑은 거거든요? 정말 귀하지요? 하나하나 보십시오. 들나귀, 새, 풀, 포도주, 참, 이 땅위에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신비한 겁니다. 그게 신비롭다고 느끼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지 못해요. 제가 설교할 때도 가끔 이야기 했습니다마는 그냥 이 세계를 너무 상투적으로 보는 거 말이지요? 마신 물이 있으니까 내가 마신다, 이건 내가 마시고 만다, 도구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우리가 벗어나야지요. 우리가 있다고 하는 자체가 얼마나 신비로운지 대한 영적인 안목들이 필요합니다. 15절을 제가 조금 더 설명을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람의 삶을 지탱해 주는 세 가지 물품이 나와요. 하나는 포도주예요. 이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준다고 하네요. 왜 그럴까요? 포도주가 왜 기쁘게 해 준다고 할까요? 이거는 이제 술을 마시면 어떤 근심이나 걱정, 과민하게 했던 것을 무디게 해 주니까,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거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준다, 여기서는 적극적으로, 좋은 쪽으로 쓴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기름입니다. 기름,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한다, 세 번째는 먹을 양식, 마음을 힘 있게 한다, 이 세 가지예요. 포도주, 기름, 양식, 우리는 이런 것들도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데요, 이건 고대인들의 눈으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주 필수적인 생명의 요소들이거든요, 이것만 있으면 여기 나와 있는 대로 마음도 기쁘고 얼굴이 윤택해지고 마음이 힘 있게 될 수 있습니다. 기본이 그렇거든요? 이런 게 지금 갖춰져 있어도 우리가 그렇지 못하잖아요? 현대인들은 소유를 많이 해야 되기 때문에 최소한도 먹을거리가 있고 등등.. 지금 보면 이런 것들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우리 주변에 늘 있는데도, 얼마든지 가능한데도 우리는 마음이 기쁘지도 않고 뭐, 등등.. 그런 것 같아요. 결국은 우리가 삶의 본질을 많이 놓치고 산다, 그 얘기겠지요. 특히 여기서 물이 중요하게 나옵니다. 제가 아까 설명할 때 저 하늘 꼭대기에도 물이고 이 땅도 물이고 중간에 궁창을 두었다고 하는 창세기 기자의 말을 인용해서요,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물에 누각의 들보를 얹으셨다고 한 것 처럼요, 이 물이 반복해서 이 땅의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적인 요소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조금 아까 얘기한 우리 삶의 세 가지 요소라는 것도 사실은 다 물과 관계 있는 거에요. 식물이 물과 연관해서 포도주도 나오고 기름도 나오고 먹을 양식도 나오지 않습니까, 물인 거예요. 정말 물만 자기가 새롭게 인식한다면, 우리는 삶이 새로워질 수 있을 겁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예요.

 

시편기자가 이 물에 대해서 오늘 이 부분에서,10절에서 18절 부분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10,11,13,16,18절 말이지요. 예, 10절에서 18절까지는 땅 위에 있는 생명체들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 생명현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참 신비롭지요? 이 땅에 언제부터 생명들이 가득했을까요? 제가 어떤 책에서 읽은 걸로 보면 지구가 시작한 지 10억년 후를 가리켜서 캄브리아기(Cambrian period)라고 한답니다. 무슨 기, 무슨 기가 있는데요, 고생대, 신생대는 훨씬 후대고요, 지구가 생기고 10억년 후부터가 캄브리아기인데, 이 때 이 지구에 생명종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박테리아로부터 시작해서 뭐 여러 가지가요, 그 때를 고고생물학자들은 그걸 아주 중요한 시기라고 하는데요, 이 땅위에 바다도 나오겠습니다마는 하여튼 이 지구 안에 있는 온갖 생명의 다양성들, 이건 참 만들어 내려도 만들어내기 힘든 그런 현상들입니다. 아주 과학적으로 완전히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생명의 현상에 들어가면 이건 누구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런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다양한 거지요. 아주 신비로운 거지요.

 

그 다음 네 번째는 19절에서 23절이예요, 달과 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밤에 달과 낮에 해,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밤의 상징인 달, 낮의 상징인 해, 이것이 지구 생태계를 결정하는 근원입니다. 당연히 태양이 없으면 모든 생명이 없으니까 당연한 거고요. 태양이 없으면 아예 지구가 가능하지 않은 거니까요, 근원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고 달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달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그래요. 이 달과 지구의 중력이 서로 작용을 해갖고 지구의 판이 움직인답니다. 이 판이 움직이지 않으면 이 생명이 가능하지 않다고 그래요. 판이 움직여서 바다가 산이 되기도 하고 산이 바다가 되기도 하고 계속 지구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그러한 혹성이 된다고 합니다. 거기에 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는 거예요. 다시 한 번요, 이것도 고대인의 눈으로 보십시오. 태양과 달, 그들이 이걸 보고서 도대체 무엇을 생각했을까, 하는 것 말이지요. 얼마나 신비롭게 생각했을까요? 지금 우리가 그런 것들을 좀 안다고 해갖고 이 세계를 우습게 생각하는데, 이런 점에서는 오늘 현대인들이 더 불행할지도 모릅니다. 생명과 우주, 세계 전체의 신비에 대해서 그러니까 무관심한 그런 상태가 되었으니 말이지요.

 

그 다음 다섯 번 째, 바다입니다. 24절에서 26절입니다. 24절이 이렇게 되어 있네요,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땅이라고 했기 때문에 땅의 생물체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아니냐, 생각할 수 있는데, 문단으로 나눌 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바다에 나오는 이야기하고 연관 됩니다. 25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땅에 가득하다고 했는데요?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예, 정말 많지요. 옛날 사람들은 그 안에 프랑크톤 이런 것이 있는 것을 몰랐을 거예요. 그래도 온 갖 것이 가득하니까요. 지금 시각으로 보면 이 바다도 뭔가로 가득 차 있다고 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26절에 보면 리워야단이 나오는데요, 이건 난외주에 악어로 나오고 있지요? 악어를 그 당시는 불렀던 거 같습니다. 이 악어는 바다에 사는 거 아니잖아요? 예? 민물에 살잖아요? 늪지 이런데, 예, 그러니까 이게 바다이기도 하고 큰 강같이 그런 걸 포함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악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흉측한 그러한 동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이게 어린아이와 같다, 논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기자의 시각이 하나님 차원에 있기 때문에 어떤 그 사나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노는 거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가 생태계에 있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서로 포식자들이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일들이 자주 벌어지잖아요? 일종의 잔인하게 보이기도 하는데 그건 하나의 우리의 시각이고요, 그러한 방식으로 세계는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게 왜 그렇게 되어 있을까, 참 우리의 시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포식자들이 초식동물들을 잡아먹는데, 크고 건강한 건 못 잡아먹고 약한 것, 병든 것, 주로 새끼들을 잡아먹잖아요? 아, 그런 걸 보면 잔인하다 어떻게 먹이사슬이 저렇게 되어 있을까, 좀 안타깝다 생각 될 때도 있긴 있지만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이 세계는 생명의 힘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예, 우리가 모르는 것은 덮어두고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섭리하시고 완성하신다고 하는 시각으로 그런 문제들을 알아봐야 되겠지요.

 

예, 여기까지 중요한 내용들을 정리했습니다. 다섯 가지지요? 하늘에 대한 것, 그 다음에 땅, 세 번째는 땅위의 생명체들, 달과 해, 바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좀 정리를 해 보지요, 이 104편 기자는 이 세상의 생명현상을 놀라운 문학적 수사로 묘사를 하면서 결국 그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 자연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그것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 일을 쭉 이야기하면서 31절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이 세계에 생명이 가득하다고 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겁니다. 영광이 그 이상한 어떤 추상적인 것을 근본에 두고 있지만, 막연한 것은 아닌 거예요. 이 세계에 생명이 가득한 것, 그걸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계속 간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일들로 자신이 즐거워하신다고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즐겁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은, 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찬양을 드린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즐거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오늘 여기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창세기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아름답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반복해서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 성서기자들은 하나님의 행위가 바로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거다, 그 말은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정말 놀랍다, 그런 뜻입니다. 이렇게 쭉 이야기를 하면서 시편기자는 두 가지 사실을 고백합니다. 두 가지 사실을 고백해요, 33절에 있는 내용을 제가 좀 정리 한 겁니다. 여호와께 노래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지요? 찬양 하리로다, 33절이고, 34절에 기쁘다, 기뻐한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면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 이게 오늘 공부의 결론으로 삼은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두 가지 영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거지요. 하나는 찬양이고요, 또 하나는 기쁨,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개는 서로 연결되는 거지요? 기쁨이 있어야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양하는 것은 우리 기쁨의 표현이니까요, 이걸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찬송할 것인가, 제가 설교에 가끔 그런 이야기들을 하지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이런 것이 종교적인 차원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 전체에 대한 문제거든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 영적인 자세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견뎌낼 수 없습니다. 얼마나 허무한지는 잘 아시잖아요? 그리고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이 되지 않는 거 아시지요?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하는 것은 더 근원적인 것에 우리의 생명의 토대를 둔다고 하는 겁니다. 찬양과 기쁨, 이 두 가지가 우리의 삶을 끌어가고 있는 수레의 두 바퀴가 되고 있는지, 이것을 잘 생각하셔야 될 거예요. 아, 그런 것은 성서가 이야기하는 거지,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보신다면, 아직까지 성서의 세계로 완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구경을 하는 걸 겁니다. 이제 그게 왔다갔다, 때에 따라서 좀 흔들리기도 하지만요. 우리가 이러한 성서의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 갈수록 실질적으로 가능한 문제가 됩니다. 어떤 삶의 형편 이던지요, 자식의 문제나, 남편, 또는 가족, 또는 직장, 이런 등등.. 많은 문제에서도 결국 찬송할 수 있고요, 기쁨으로 우리가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이거는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 아주 현실적인 그러한 문제입니다. 시편기자가 아, 세상 아름답다. 정말 보기 좋다, 그런 차원이 아니라고 하는 것, 그 내면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이 어떤 것을 하셨는지에 대한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예, 잠깐 쉬었다가 질문응답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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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106편,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선하심 정용섭 2010-10-13 719
86 105편, 구원의 주체이신 여호와 정용섭 2010-10-06 529
85 105편 녹취록- 구원의 주체이신 여호와 file 박은옥 2011-01-10 1050
» 104편 녹취록- 신앙의 두 중심축, 찬양과 기쁨 file [9] 박은옥 2010-11-15 1338
83 27(2)편 녹취록-하나님의 얼굴 file 박은옥 2010-11-01 1087
82 27(1)편 녹취록 -믿음의 용기 file 박은옥 2010-11-01 1494
81 26편 녹취록-무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10-25 1385
80 25편 녹취록- 하나님의 길 file 박은옥 2010-10-25 906
79 24편 녹취록-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 file 박은옥 2010-10-01 1522
78 103편 녹취록-여호와를 송축하라! file 박은옥 2010-09-25 1217
77 102편 녹취록-탄원과 찬양 file 박은옥 2010-09-25 1058
76 101편 녹취록-제관식 선포문 file 박은옥 2010-09-25 1266
75 100편 녹취록-선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395
74 99편 녹취록-거룩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085
73 98편 녹취록-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file 박은옥 2010-09-23 1142
72 97편 녹취록-의로우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191
71 96편 녹취록-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file 박은옥 2010-09-23 1057
70 95편 녹취록-완악한 마음 file 박은옥 2010-09-23 1453
69 94편 녹취록-복수하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8-31 1501
68 93편 녹취록-하나님의 권능 file 박은옥 2010-08-3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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