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105편 녹취록- 구원의 주체이신 여호와

조회 수 1048 추천 수 0 2011.01.10 00:34:22

시편 105편 강해-구원의 주체이신 여호와

 

시편 105편, 오늘은 돌아가면서 읽겠습니다. 시계방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1.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2.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3.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4.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5-6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7.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8.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고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10.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

11.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에게 할당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12.그 때에 그들의 사람 수가 적어 그 땅의 나그네가 되었고

13.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떠돌아다녔도다

14.그러나 그는 사람이 그들을 억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그들로 말미암아 왕들을 꾸짖어

15.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

16.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20.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21.그를 그의 집의 주관자로 삼아 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하고

22.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23.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의 땅에 나그네가 되었도다

24.여호와께서 자기의 백성을 크게 번성하게 하사 그의 대적들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25.또 그 대적들의 마음이 변하게 하여 그의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들에게 교활하게 행하게 하셨도다

26.그리하여 그는 그의 종 모세와 그의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27.그들이 그들의 백성 중에서 여호와의 표적을 보이고 함의 땅에서 징조들을 행하였도다

28.여호와께서 흑암을 보내사 그곳을 어둡게 하셨으나 그들은 그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29.그들의 물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그들의 물고기를 죽이셨도다

30.그 땅에 개구리가 많아져서 왕의 궁실에도 있었도다

31.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파리 떼가 오며 그들의 온 영토에 이가 생겼도다

32.비 대신 우박을 내리시며 그들의 땅에 화염을 내리셨도다

33.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그들의 지경에 있는 나무를 찍으셨도다

34.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황충과 수많은 메뚜기가 몰려와

35.그들의 땅에 있는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들의 밭에 있는 열매를 먹었도다

36.또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력의 시작인 그 땅의 모든 장자를 치셨도다

37.마침내 그들을 인도하여 은 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의 지파 중에 비틀거리는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38.그들이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그들이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

39.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

40.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

41.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42.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43.그의 백성이 즐겁게 나오게 하시며 그의 택한 자는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44.여러 나라의 땅을 그들에게 주시며 민족들이 수고한 것을 소유로 가지게 하셨으니

45.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아멘!! 이 시편 105편, 우리가 한 30분 정도 묵상을 하면서 같이 그 내용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목은 “구원의 주체이신 여호와”입니다. 뻔 한 이야기 같지요? 이 제목자체가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쪽으로 생각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대개는 하나님이 구원자라고 우리가 얘기를 하고 있긴 있지만, 여전히 내가 주인 일 때가 많습니다. 내 관심으로 하나님의 일들도 규정할 때가 많고요, 구원의 주체가 여호와라고 하는 것은 구원이 뭐냐 하는 그런 것까지 하나님이 자유에 속한 거라고 하는 걸 전제하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이 뭐다, 하는 것을 우리 생각 안으로 끌어들여 놓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만, 명분으로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라고 하지,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여기고 신앙생활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 여기 전체적으로 시편기자가 이야기 하려고 하는 핵심이 구원의 주체이신 여호와이신 것을 기억하고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내용은 사무엘하와 역대상에도 나옵니다.

 

거기 강의안에 제가 기록해 놨듯이 사무엘하 6장 12절- 22절, 역대상 15:25-16:6사이에도요, 이것과 연관된 역사적 배경이 나오고 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기는 그런 장면입니다. 역대상에는 특별히 여러 가지 행렬이 가겠지요? 법궤를 끌어 오려면요? 그런 걸 쭉 설명한 다음에 16잘 8절-36절까지 감사 찬양이 나옵니다. 그 찬양의 한 대목이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05편 1절에서 15절입니다. 뒷부분은 또 똑같은 건 아니고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다고 하는 게 이스라엘 배경에서 어느 부분에 속하는지를 아시겠지요? 다윗이 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정복한 다음에 이런 일을 한 것이거든요? 그 전까지는 이 법궤가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다른 데 있었어요. 아, 내가 그걸 조사하지 않고 왔습니다.(혹시 아시는 분 계세요? 지명을 머릿속에 다 넣었다가 또 사라졌다가 들어왔다가 그러거든요? 예, 그걸 제가 확인하지 못하고 왔습니다.)

 

이 예루살렘 성이 처음부터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복하지 못한 땅이었습니다. 가나안에 여러 이방민족들이 있었는데요, 본토인, 원주민들이지요. 맨 마지막까지 거기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이 예루살렘입니다. 천연요새라고 하고요, 거기 있었던 민족을 여부스족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이제 다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다 평정한 거죠, 다윗이 했습니다. 사울 왕일 때도 거기를 완전히 평정하지 못했습니다. 그거야 여러 가지 형편들이 있었겠지요? 어쨌든 다윗이 예루살렘을 명실상부하게 이스라엘의 수도쯤으로 만들어 놓고, 당연히 가장 중요한 법궤를 모셔오는 장면이에요. 거기서 부르는 찬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105편은 일반적인 찬송이 아니라 여호와 공동체 축제의식에서 사용되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 자체가 학자들이 쓴 것이라서 좀 낯설지요? 시편 105편은 여호와 공동체 축제의식에서 사용된 것이라 했어요. 여호와 공동체가 있고 다른 공동체가 있냐, 굳이 그런 말을 붙이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뭐, 공동체라니,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이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이면 이스라엘 백성이지 거기서 뭐, 이런저런 다른 표현들이 많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정이 다 있어서 붙이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늘 똑같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는 전통들도 있었구요. 또 하나님을 엘로힘이라고 부르는 전통도 있었고요. 등등.. 여러 그리 많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로 통일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명칭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그 학파가 다르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공동체라기 보다도 여호와 학파? 여호와니까 이니셜 따갖고 “J학파”라고 할 수 있어요. 구약문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때는 그것을 “J문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야훼, 여호와라고 부르는 학파가 있었어요. 하나의 신학운동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거기서 축제의식 때 부르던 찬송이라고 하는 겁니다. 참고적으로 한 말씀 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구약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 그 안에서 하나님이 처음부터 딱 정해져서 아주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인식되지는 않았습니다. 천천히 여러 갈래로 쭉 내려 왔어요.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통치에 대해서도요, 역사가 진행되면서 많은 사상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서로 많이 다투기도 했고요,

 

요즘 제가 설교공부, 목사님들과 신학생들, 혹은 일반인들, 평신도지도자들을 위한 설교공부, 인문학적 성서읽기 그런 모임을 10월서부터 서울에서 1번, 대구에서 한번 하는데 그건 이제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음 달에 할 설교 4편을 지금 쓰고 있습니다. 미리 준비해 놓으면 다음 설교할 때 시간 여유가 있을 것 같네요. 세 번째 주일에 하는 게 예레미아서인데요, 쓰다가 그런 장면을 확인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확인 했어요. 예레미야하고 하나니야 라고 하는 예언자가 막 싸웠습니다. 이단 투쟁 비슷하게 싸웠어요. 노골적으로요. 성전에서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서로 싸웠습니다. 두 사람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싸웠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엔 누가 참된 예언자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드러나지도 않는 거구요. 이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인 거지요. 누가 옳은 말 하는지를 제 3자가 딱딱 망치 두드려서 확인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예레미야는 그 당시 하나니야 이런 사람보다 오히려 인기가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로요,

 

어쨌든 그래도 예레미야 선지자 말씀이 역사에서 살아남은 거잖아요, 역사가 심판하는 거다 그 얘기입니다. 하나니야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그렇고 등등 여러 많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그 중에는 옳은 말도 있고, 틀린 말도 있고, 역사가 진행되면서 걸러지고, 살아남은 게 그게 구약 성서 안에 들어 와 있는 말씀들이지요. 이 105편, 하나님을 야훼, 여호와로 부르는 그러한 지파 혹은 학파 그런 사람들이 축제 때, 축제의식으로 부르던 것이다. 개인의 세밀한 신앙경험이라기 보다도 공동의 신앙경험인 거예요. 하나의 의식화 된 거예요. 우리가 사도신경을 암송하듯이 찬송가를 부르듯이 의식적으로 하는 거지 않습니까, 공동의 신앙이 여기 다 녹아 있는 거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대서사시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시대부터 시작해서 애굽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출애굽하고 광야시대까지 전체적인 걸치는 구원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의 손길을 펴셨는가에 대한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어려운 길을 쭉 거치는 가운데서 그 많은 일들을 다 하나님께서 행하셨구나 그렇게 미리 준비하셨구나 그렇게 구원하셨구나 하는 고백입니다.

 

전체적으로 다섯 단락으로 나눠보겠습니다. 1절에서 6절입니다. 이게 전체 주제의 서론부분인데요, 하나님에 대한 찬양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6절이에요. 이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기초적인 걸 이야기하는 거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일을 알리고 그를 노래하고 찬양하라 기이한 일들을 말하라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여호와시죠, 특별히 5-6절이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5-6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 할지어다 기억이라고 나오지요?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과 그의 판단을 기억하는 것, 이게 구약성경의 핵심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기억이 잘 안 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성서기자들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러한 전통들을 이어온 사람들이 바로 앞서 이야기한 여호와 공동체 속한 사람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기억하는 거 아시지요? 우리 인생살이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자기합리화에 우리가 굉장히 빠르고요, 하나님자체를 기억한다고 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런 기억들이 지난 기독교 2000년 역사의 신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걸 기억하는 과정 이런 것들이 신학이라고 할 수 있지요. 7절에서 11절은 “언약조문”이라고 학자들이 이름붙인 대목이에요.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셨다고 하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여러 가지로 특징화 할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언약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약속을 하셨고요, 계속되는 약속들입니다. 요셉하고도 약속하고 모세와의 약속, 끊임없이 그러한 약속입니다. 재미있는 표현이에요. 8.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여기서도 기억이라고 나오네요. 기억하라, 기억하라,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출애굽입니다. 하나님이 노예상태에서 구해내셨다고 하는, 그런 걸 밑바탕에 깔고 구약성서가 기록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라고 해야 되겠네요. 하나는 방금 말씀드린 출애굽에 관한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고요, 출애굽과 거의 비등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 아시지요? 뭘까요? 역사적으로 훨씬 후대인데, 그 비슷한 사건을 우리가 뭐라고 하지요? 출애굽과 비슷한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요,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 석방, 해방입니다. 포로 귀환이에요. 예, 그렇습니다. 제가 몇 달 전에도 다른 공부를 하면서 수요공부에서 그런 얘기를 했을텐데요, 구약성경을 하나의 집으로 비유하자면 두 기둥이 있다, 두 기둥위에다 집이 세워졌다고 얘기 했습니다. 하나는 출애굽이고, 하나는 바벨론귀환이거든요, 이 두 경험이 구약성서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 경험가운데서 창조의 하나님, 무슨 하나님이 다 새롭게 그들의 신앙 안에 들어온 겁니다. 예, 약속을 맺으셨어요. 쭉 계속, 그러한 분이십니다. 그 약속이 가능할까요?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아, 그렇지, 약속의 하나님이시지, 그냥 쉽게 생각하는데,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우리는 완전히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시고요, 무엇이든지 자유한 분이시고요, 우리는 피조물인데요, 우리의 생명도 그 분 안에 들어 있는데요, 어떻게 언약을 맺어요?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대등한 관계에서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 성서는 아브라함의 등등의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이 약속을 맺으셨다고 얘기를 했을까요? 그 약속의 주체도 우리는 아닙니다. 하나님이시지요.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성, 절대성,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없을 때만 약속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약속하지, 절대적인 사람이 약속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이미 자기가 맘대로 할 수 있는데 거기서 무슨 약속이고 말고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약속을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절대성을 제한한다는 그러한 이야기예요. 그런 정도까지 하나님이 언약에 성실하신 분이다, 지금 바로 말씀드린 자기제한, 자기낮춤이라고 하는 것을 다 기억해 두세요. 하나님의 절대성은 난폭한 왕처럼 자기 맘대로 모든 것을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궁극적인 절대성입니다. 자기를 제한하는 거죠, 자기를 낮춤이죠, 십자가에 순종했다고 하는 그러한 것들이 다 거기에 연관되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을 전능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슈퍼맨에게 요구하듯이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제한하면서까지 언약을 하시는 분입니다. 예,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역사를 성취하시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 생각대로 성취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그 분의 방식으로 성취를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에는 그리고 어느 짧은 시간 안에는 성취가 되지 않은 것 같아요. 언약이 파괴되는 것 같은 일들도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은 성취하신다, 그 이야기지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사실은 하나님의 이 약속이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계 질서의 재편을 메시아니즘에 하나의 표시로 이야기하지만, 그건 하나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몰락하고요, 그건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고요. 신약시대에서 이제 하나님의 약속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성취되었다고 믿는 거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게 유대교와 우리 기독교의 차이점이기도 하고 갈등이기도 하고 앞으로 풀어야 될 숙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메시아가 와서 자기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계를 이루실거라고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미 메시아가 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유대교하고 차이가 있는데요, 그러나 우리는 또 (오늘 영남신학대 신학입문 시간에 간단하게 얘기한 건데요) 여전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기다린다고 하는 점에서는 유대교나 우리나 지금 똑 같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하는, 그러나 우리는 2000년 전에 오셨던 그 분을 이미 오신 메시아로 믿고 있는 거고요, 하나님께 들어 올림을 받았다가 마지막 때 오신다고 하는 겁니다. 메시아성이 이런 거죠. 유대교는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미 메시아가 왔다, 그러나 아직도 기다려야 된다, 이 긴장관계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alredy 이미 왔지만 아직은 not yet 아직은 성취, 기다림 그런 것은 우리가 남겨 두고 있는 거지요. 그러한 관계에서 유대교와 우리가 신앙적인 대화를 어느 정도 까지 끌어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앞으로 종교사의 대화에서 특별히 유대교와 우리는 가까우니까요, 숙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23절에는 이스라엘 씨족시대와 애굽으로의 이주가 다뤄지고 있습니다. 가나안에서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에서 등등 쭉 야곱까지 나그네처럼 살았고요, 애굽으로 간 다음에도 거기 요셉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요? 구약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짤막짤막하게 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애굽에 가서도 역시 나그네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게 하나님을 경험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어요. 나그네 됨, 혹은 나그네 실존이라고 제가 표시했습니다. 나그네 됨, 자기의 정체를 나그네로 인식하는 게 유대인의 고유한 인식이고요, 사실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많은 민족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도 그렇고요, 유목민들은 더 떠돌이처럼 실제로 살았으니까 뭐, 동양이나 서양이나 그런 사람들 많이 있었고요, 그런 것들이 하나님 신앙하고 깊숙이 연결된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그네라고 하는 것은 계속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고 하는 거잖아요? 결국은 떠나야 되는 것, 어디 정주할 곳이 없는 그러한 영적인 상태를 이야기 합니다. 유목민이에요. 그것을 노마드사상이라고 하나요? 요즘 가끔 책에서 읽은 것 같은데요? 그런 것들이 이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사람들은 여호와를 향한 희망이 강렬했습니다. 이러한 나그네 실존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이어가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우리의 나라, 우리의 영적인 고향은 하늘나라다 그런 이야기가 있잖아요? 결국 이 땅에서의 삶이 나그네라고 하는 거, 사실은 이건 기독교적인 가르침만이 아니라 웬만큼 인간의 삶을 좀 통찰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말하지 않는 경우가 없고 그걸 깨닫지 못할 경우가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세상의 삶을 두 가지 면으로 바라봐야 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생명이 정말 소중하다고 하는 것, 그러니까 여기서 기쁨, 평화를 충만히 누려야 한다고 하는 건 분명한 거구요. 그러나 여기가 계속 머물러 있어야 될 곳이 아니니까, 여기 재미에 푹 빠져서 연연해하는 그런 것이 아닌 거예요. 두 가지가 긴장관계에 있고, 그 안에서 고유한 영성을 경험해야 됩니다. 기독교인이 자학적이고 염세적이고 그건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생명이 충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풍요롭게 누리고, 그러나 다시 반복되는 얘기지만 여기에 어떤 재미에만 몰두 하는 삶은 또 안 된다고 하는 거지요. 삶의 재미에 빠지지 않는 것은 현실도피나 허무주의가 아니고요, 현실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서 나온 고백이고, 결단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것들은 뭐, 심심찮게 생각을 하겠지만, 그런데 그렇게 살기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것은, 그런 나그네 실존, 그런 나그네 됨, 그거 자체를 견뎌내는 게 힘든 거예요. 불안한 거거든요? 뭔가 안정적으로 모든 게 갖춰져 있고, 이게 계속 되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좀 있어야 마음이 여유가 있잖습니까,

 

쉬운 예로 들면, 월세로 자기 집 없이 살게 되면, 사람이 심리적으로 좀 불안하고 그런 거 있잖아요? 자기 집이 있어서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그러니까, 나그네로 산다고 하는 것이 좀 불안하기도 하고요, 뭐, 같이 연결되는 거지만, 안정적인 삶으로부터의 유혹이 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이게 우리 기독교인들이 오늘 현대 삶에서 풀어야 될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복지를 향상시키는 것이 모든 현대 문명국가의 아주 중요한 요소 아니겠어요? 물질적으로나, 주거나, 교육이나 건강 이런 점에서 정말 인간다운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것을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거구요. 그건 당연히 해야 되는 거구요. 그런데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결국은, 어떻게 거기서 벗어나느냐, 하는 게 숙제입니다. 기본적으로 나그네 실존이 아니면 자유도 없습니다. 그게요, 안정적이면 참 편안하고 자유도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곧 떠나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직시 할 때 자유가 주어지죠, 그러니까 이 성서가 말하는 이런 나그네 됨, 이런 것들이 그냥, 그렇게 하면 좋으려니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갈망해야 된다, 그런 뜻으로 그냥 주는 게 아니라 아주 정확하게 인간의 삶을 뚫어 본 영적 통찰력에서 나온 바람직한 삶의 길입니다.

 

24절에서 41절까지요. 여긴 긴데요, 그건 그럴 수 밖 에 없어요. 출애굽 과정들, 열 가지 재앙들 쭉 나오고요, 그 광야 시절에 있었던 만나, 메추라기 뭐, 등등.. 구름기둥, 불기둥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쭉 나열되는데 마지막 장자까지 죽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뛰어 넘어서 구원을 이루신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야기죠. 그런데 이런 것들을 문자적인 차원에서 무조건 아,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까 하나님이 대단하다, 이런 쪽으로 보는 건 좀 핵심을 놓치는 겁니다. 고대인들은 그런 것들을 초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실제는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닌데도, 그렇게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어떤 것들을 읽어 내려고 했었거든요, 제가 언젠가 설교한 적도 있었듯이 만나 이런 것도 미디안 광야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아주 최소한도의 먹을거리인데요,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시시해 보였고 먹지 않았는데 거기서 40년 동안 목동으로 살았던 이 모세에게는 자기 민중들이 기아를 면할 수 있는 먹을거리로 봤다고 하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의 은총으로 깊이 깨닫는 거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런 방식을 통해서 성서기자들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이고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신다고 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가, 이건 계속해서 숙제이고 생각해야 되겠지요. 광야시절에 있었던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 메추라기 그것은 반석에서 물이 흘러 나왔다고 하는 것, 등등..쭈욱,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일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42절에서 45절입니다. 이 결론 부분은 앞의 서론 부분에 나온 아브라함 부분으로 다시 돌아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억하셔서 아브라함 후손들에게 땅을 주시고, 즐겁게 살도록 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시편은 이런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말을 하면서 결국 이스라엘이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것이다, 얘기 했던 거지요. 억지로 의무적으로 따르는 건 아니죠? 왜 따라야 될까요? 하나님이 구원자시니까,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이시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따르는 거죠, 예, 그리고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을 그렇게 옥죄이기 위해서 나온 건 아니고요, 분명한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경험한 이스라엘 민족의 고유한 통찰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두루두루 많은 이야기가 있었네요. 오래 전 이스라엘 민족중의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던 그러한 학파에 속했던 사람들의 축제의식에서 불려진 찬송, 혹은 기도인 시편 105편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구원의 주체이시지요. 그 분의 자유로 인간과 온 세계의 구원을 이루시고 열어 가십니다. 예, 잠시 차 한 잔 하고 질문응답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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