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영성

 

고대교회의 전통인 사순절(四旬節, Lent)이 현대교회, 특히 개신교회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늘과 같은 세속시대에 40일 동안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경건의식에 참여할 수 있는가? 사순절 영성의 실질을 교회에서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가? 경우에 따라서는 사순절 묵상집을 함께 읽거나, 소위 ‘40일 특새’를 열거나 시설을 찾아다닐 수도 있겠지만 이런 교회력에 익숙하지 못한 개신교 신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느슨한 상태로 예수님의 고난이 담지하고 있는 영적 의미를 예배에서 살려내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도 사순절 기간의 설교는 케리그마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케리그마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구원 통치 사건을 가리킨다. 여기에 관계된 용어들은 예수의 고난, 십자가, 부활, 재림, 심판, 은총, 칭의, 창조, 생명, 세례, 성찬 등등이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이런 용어에 관심이 없다. 이런 용어마저 도구적으로 대한다. 다른 모임에서는 몰라도 주일공동예배에서는 케리그마에 철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신학공부는, 특히 조직신학공부는 필수다.

 

3월4일 사순절 둘째 주일/ 막 8:31-38/ 생명이란 무엇인가?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복음서가 설명하는 예수 공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십자가 처형이다. 복음서는 그 사건을 향해서 점층적으로 올라가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리적으로도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말이다. 부활은 십자가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지만 복음서 기자들이 이야기로 담아내기에는 버거운 것이어서 산만하고 소극적으로 다뤄졌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첫 번째 예고다. 여기서도 부활은 소극적으로 다루어졌다. 베드로의 반응이 예상 밖이다. 베드로는 수난과 부활 예고를 부정했다. 그는 바로 앞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고 정확하게 대답했던 베드로다. 베드로가 부정한 것은 주로 수난에 대한 것이다. 34절 이하에 따르면 이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을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기 부인이라는 말씀은 제자를 부르실 때 이미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자기 부인이 운명처럼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는 뜻이리라.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런 근거 없이 하신 게 아니다. 35절이 그 대답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런 경구는 우리가 다른 데서도 흔히 듣는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전투를 앞두고 썼다는 난중일기에 나오는 필사즉생(必死則生)이 그것이다. 죽기를 각오하면 결국 산다는 뜻이다. 이슬람의 과격파인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도 자기들의 행위를 순교로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가미가제 요원들도 똑같았다. 이런 생각과 행동은 대다수가 폭력을 수반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어떤 목적을 이루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모두를 파멸로 이끌고 말았다. 요즘 우리의 삶이 거의 이런 식으로 작동된다. 속된 표현으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모두 죽을 듯이 경쟁한다. 남을 이기기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는 것이다. 청소년들도 그런 식으로 공부한다. 목회도 그런 식으로 한다. 이런 식으로 생명을 얻는가?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은 있지만, 지는 사람도 많다. 지는 사람이 훨씬 많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경쟁원리를, 경쟁에서 이기는 노하우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이 말씀은 기본적으로 생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1) 생명은 자기의 것이 아니다. 36절 말씀을 보라. 세상을 다 얻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세상의 것들을 얻는 것이 바로 자기 목숨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직장, 결혼, 집, 복지, 노후보장, 명성 등으로 자기의 삶을 확인한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삶이 부정된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것들을 다 얻어도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생명은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말이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세상 창조주라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서만 해명이 가능하다. 사도신경의 첫 마디가 바로 이 사실을 언급한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우리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대전제이다. 구약은 인간을 질그릇으로,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하며, 신약에서 예수님은 일상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이 실감이 가지 않으면 100년 전과 100년 후의 자신을 생각해보라.

2) 생명은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38절을 보라.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온다는 것은 종말 사건을 가리킨다. 그때 부끄러움을 당할 사람들이 있다는 말은 생명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종말론적 사건을 막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언제 올지도 모를 종말을 기다리냐고 말이다. 복음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종말이 도적처럼 온다고, 임산부의 산통처럼 온다고, 사람들이 졸고 있을 때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신랑처럼 온다고 말한다. 이런 가르침을 억지로 전할 수는 없다. 생명에 대해서 이미 어떤 고정관념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설명이 공염불처럼 들린다. 이렇게만 보충하겠다. 지금의 삶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알 때만 종말론적 생명이 무엇인지 보일 것이며, 그럴 때만 종말론적 희망을 안고 살 것이다.

오늘의 삶이 허무하다는 말이 아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말도 아니다. 세상을 인간다운 세상으로 만드는 과업이 부질없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생명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할 때만,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 종말론적으로만 완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 일상의 현실이 눈에 들어올 것이며, 일상을 파괴하려는 악한 세력과 투쟁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3월11일 사순절 셋째 주일/ 요 2:13-22/ 성전을 헐라!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에게 오해를 받은 가장 중요한 사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안식일의 상대화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의 상대화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과 성전이 어느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이 안식일과 성전을 상대화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왜곡된 사태를 바로 잡은 것이다. 근본의미를 살리신 것이다. 안식일에 생명을 죽이는 것과 살리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옳으냐,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는 말씀이 다 그런 것이다.

위 본문의 사건은 성전청결에 관한 것이다. 공관복음에 모두 나올 정도로 초기 기독교에 잘 알려진 사건이었다. 그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유월절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 성지순례에 나선 예수님은 성전에서 상거래를 하던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쫓아내신다.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일이나 환전하는 일은 모두 순례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합법적인 것이었다. 명분은 좋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게 관행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그것을 까발린 것이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행위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이런 권위가 예수님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표적을 보이라.’

유대인들의 특징은 표적을 구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전 1:22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표적인 갈라진 홍해, 만나, 무너진 여리고 성, 갈멜산의 불같은 것들이다. 표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세메이온’은 기적을 가리킨다. 어떤 사실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특별한 현상을 말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그런 요구를 대부분 거절하셨다. 마 16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다. 예수님은 그걸 거부하고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도 사람들을 미혹하려고 이런 표징을 행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막 13:22)

표적을 보이라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다. 표적을 거부한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의 부활을 구체적으로 예상했다는 뜻은 아니다. 표적에 대한 거부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허물 수가 없다. 그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성전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적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적인 성전을 허물 수 없었다. 이는 곧 성전이 그들에게 우상처럼 자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이들의 불편한 진실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다.

오늘 은행과 주식시장과 기업체는 예루살렘 성전과 같다. 거기서 모든 상행위가 일어난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거기에 묶어 놓았다. 그것이 당연한 줄로 안다. 거기서 큰 업적을 보이는 사람은 예언자이며, 메시아로 추앙받는다. 서로를 향해서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다. 예수는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신다. 일상의 삶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거기에 물든 우상숭배를, 물질숭배를, 상업논리를 거부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감히 오늘의 시장주의를 허물지 못할 것이다. 그런 시장주의는 현실적인 힘이며, 그 힘에 의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오늘 본문 22절에 따르면 제자들은 훗날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뒤에 예수님이 참된 성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늘 우리도 그들과 동일한 믿음으로 살아간다. 문제는 이런 진술이 우리 삶에 현실로 다가오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은 처세술이나 종교 교양으로 떨어진다. 이런 믿음의 세계로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분간하려면 ‘성전을 허물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는지를 보면 된다. 이게 기독교인의 딜레마다. 실제로 일상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결국은 허물어야 한다는 딜레마를 안고 살아간다. 죽을 때까지 이 딜레마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끊임없이 사람이 우상처럼 떠받들고 있는 성전을 상대화하는 길을 최선으로 추구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허물어야 할 성전에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데서부터 이런 영적인 과정이 시작될 것이다.

 

3월18일 사순절 넷째주일/ 엡 2:1-10/ 구원은 선물이다!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헬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기독교인의 최대 관심은 구원이다. 그러나 구원은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중심 주제다.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모든 행위는 구원론적이다. 의학은 인간의 몸을 구원한다. 여러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구한다. 모든 학문은 인간을 무지로부터 구원하려는 노력이다. 소설과 시, 그림, 음악도 모두 구원론적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 및 인간의 모든 구원 지향적 노력과 선의의 경쟁관계에 있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먼저 기독교의 구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 설교 제목에 그 특성이 나타난다. ‘구원은 선물이다.’ 다른 종교나 학문이나 여러 이념들은 구원을 선물이 아니라 인간이 노력해서 획득해야 할 어떤 것으로 여긴다. 의학을 보라. 질병으로부터 구원받으려는 노력이다. 노력해서 얻은 결과가 의학의 구원론적 실체다. 가장 노골적인 구원론은 경제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이 경제학의 원리다. 사람을 가난으로부터 구원하겠다는 저들의 선전 선동에 모두가 솔깃해한다. 신자유주의 이후로 온세계가 경제적 효과를 얻는 일에 매몰되고 있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사람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본문 9절에 따르면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 8절에 따르면 그것은 오히려 선물이다.

기독교의 이런 구원관이 설득력이 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몇 가지 전이해가 필요하다. 1) 세상이 말하는 구원관의 한계를 보라. 단적인 예로 복지 문제를 보라. 완전 복지가 실현되었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될 것인가? 완전 복지 자체도 사실은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이 경제 대국이 되려면 주변의 나라들이 상대적으로 가난해져야 한다. 2) 기독교 구원관은 세상 구원관에 완전히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복지에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름으로 가치가 있다.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살지만, 밥은 여전히 필요하다. 밥을 공정하게 나눠먹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며, 기독교는 그런 운동과 연대할 수 있다. 3) 기독교 구원관은 값싼 은혜주의가 아니다. 즉 기독교는 역사허무주가 아니다.

위의 사실을 전제하고 오늘 본문이 말하는 중심을 따라가야 한다. 8절은 이렇게 명시적으로 진술한다. “너희는 그 은혜로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바로 구원은 선물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여기서 기독교 구원관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다.

첫째, 하나님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5절) 이것이 바로 은혜의 본질이다. 이런 말씀을 교리적으로만 읽으면 곤란하다. 이 말씀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려면 죽는다는 사실과 산다는 사실의 영적인 깊이를 알아야 한다. 성서는 사람을 단지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살았다거나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적인 죽음과 삶을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괜찮게 살려고 노력해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상대적인 삶에 머문다. 그게 율법 의이다. 이런 것으로는 참된 안식이 불가능하다. 그런 것으로 개인과 공동체가 새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이다. 6절에 따르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고, 우리도 그분 덕분에 그 자리에 갔다는 것이다. 지금은 현실적으로 간 게 아니라 종말에 가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것을 약속으로 받았을 뿐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사건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이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한 칭의론과 같은 의미이다. 여기서 믿음은 구원파 등에서 말하는 일종의 믿음 열광주의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삶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자신의 죄성과 한계를 전적으로 깨닫는 것, 구원의 밖에서 주어진다는 사실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이게 쉽지 않다. 사람은 자기의 노력과 업적에서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생명 사건이라 할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깨달은 사람은 당연히 그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눈에 드러날 수도 있고, 숨어있을 수도 있다. 그런 삶의 변화는 일종의 열매다.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삶의 변화도 억지로 되거나 정형화로 나타나는 게 아니다.

 

3월25일 사순절 다섯째주일/ 렘 31:31-34/ 옛 언약, 새 언약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서를 기록한 개인이나 공동체도 오늘 우리와 똑같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면서 살았다. 역사적 배경을 놓치면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다. 모든 성경이 여기서 예외는 없다. 구약의 예언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하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세기 말에 살았다. 당시는 바벨론 제국이 욱일충천 하던 시대였다. 남유다는 풍전등화였다. 당시의 왕은 남유다의 마지막 10년을 통치했던 시드기야였다. 그는 바벨론 제국의 느부가네살 황제가 세운 왕이었다. 민족의 위기 앞에서 많은 선지자들이 신탁을 받아 예언했다. 그중의 하나가 예레미야였다. 같은 역사적 배경에서 예레미야와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 선지자는 하나냐였다. 렘 28장에 하나냐와 예레미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치시고 유다를 해방시킨다고 예언했고, 예레미야는 해방이 있기 전에 먼저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남유다는 하나냐의 예언에 따라서 허망한 꿈을 꾸다가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끝장난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이 나온 것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았다. 하나님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전한다. 다른 방식이 곧 ‘새 언약’이다.(31절) 새 언약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먼저 옛 언약을 살펴야 한다. 옛 언약은 32절에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율법이다. 율법의 핵심 개념은 조건이 붙은 언약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이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이 언약을 유다가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유다를 지킬 수가 없다. 유다는 왜 율법을 통한 언약을 깨뜨렸나? 그것을 지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바울도 로마서에서 지적한 것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 생존이 불안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가 어렵다. 2)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일종의 시대정신에서 개인이 벗어나기 힘들다. 미국의 노예제도를 보라. 청교도들이었지만 그것이 왜 잘못인지를 알지 못했다. 지금 대한민국의 red complex 같은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토마스 쿤이라는 과학철학자는 패러다임 쉬프트는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 기존의 패러다임에 물든 세대가 죽고 새로운 세대가 오든지, 아니면 혁명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말하는 새 언약은 십계명의 돌 판이나 율법을 적은 양피지가 아니라 마음에 기록된다.(33절) 마음에 기록되는 언약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예레미야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관념적인 것이다. 예레미야는 할례도 그렇게 설명했다.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말이다.(렘 4:4) 마음의 할례, 마음의 언약은 무엇인가? 양심인가, 영적 통찰력인가, 온전한 믿음인가, 아니면 순종인가?

본문 34절이 대답이다. 마음의 언약을 받은 사람들은 이제 이웃과 형제에게 여호와를 알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의 언약에 머물러 있을 때는 계속해서 여호와를 사람들에게 알게 하고, 또 강요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사람이 여호와를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는 어떤 다른 사실을 보고 있다. 겉으로는 여전히 여호와를 몰라본다고 하더라도 내면적으로는 여호와가 모두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세계 역사의 변화를 가리킨다. 유다를 포로로 잡아간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유대를 해방시킨다. 그런 역사를 보면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를 누구나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의 틀에서 역사의 틀로 약속이 변화된 것이다. 이게 예레미야의 신학이자, 신앙이고, 영적 시각이었다.

누가 역사를 볼 수 있나? 하루의 일상에 쫓기고 있는 신자들이 어떻게 역사적 시각을 확보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단순히 한국역사, 세계역사를 전문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건 학자로 나선 이들의 몫이다. 일반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실제적으로 안다면 역사를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예수 사건은 예레미야가 말하는 마음의 언약이 성취된 것이다.

34b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사람들의 악행을 사하고 그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죄의 능력이 폐기되었다.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새 언약이다.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새 언약이다. 우리의 노력과 업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용서하고 생명을 주겠다는 새 언약이다.(인문학적 성서읽기, 2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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