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란 무엇인가?

 

금년은 4월8일이 부활절이다. 5월20일까지 일곱 주간동안 부활절 절기가 계속된다. 부활은 어떤 기독교인들에게 뜨거운 감자다. 그것을 신앙의 토대로 삼긴 해야겠지만 부활 사건이 현대인들에게 어필하기 어렵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 부활의 실체를 잘 모르기 때문에 부활에 관심을 기울이는 신자들은 많지 않다. 기껏해야 어렴풋하게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할 뿐이다. 세속적인 가치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도 부활 신앙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부활 신앙은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한 사람의 태도와 비슷하다. 궁극적인 생명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현실의 손익계산을 초월할 수 있다. 완벽하게 초월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부활 신앙의 깊이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선 생명의 신비에 마음을 연다는 것이다. 생명의 신비에 마음을 연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고정관념을 넘어서서 종말론적인 차원으로 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신학과 영성의 심화가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1) 부활의 예수는 왜 당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만 현현하셨나? 부활은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신앙을 전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인의 눈으로만 세상의 사물들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2) 부활의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늘은 어디인가? 승천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승천 없이 계속해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면, 즉 지금도 실제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부활이 더 확실하게 증명될 수 있지 않겠는가.

부활은 기독교의 고유한 생명 인식이며 경험이다. 구약에는 부활 신앙이 없다. 부분적으로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묵시문학에 약간의 흔적이 나올 뿐이다. 예수의 부활은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생명 사건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생명 현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궁극적이고 종말론적 생명의 선취다. 그 선취된 부활이 증명되는 과정이 바로 역사다. 역사가 끝나면 부활의 현실성이 확실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 부활 생명을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4월1일/ 사순절 여섯째 주일/ 마가복음 15:1-15/ 십자가 처형 선고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마가복음 15:1-15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선고에 대한 설명이다. 내용은 두 장면이다. 하나는 산헤드린에 의해서 고발된 예수가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는 것이며(1-5), 다른 하나는 민중들이 바라바를 유월절 특사로 살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압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1)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는 두 집단이 공모한다. 하나는 종교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집단이다. 빌라도에 의한 사형선고 앞서 예수는 산헤드린의 종교재판에서 사형당해야 할 범죄자로 선고받았다. 죄목은 신성모독이었다. 예수가 메시아를 참칭했다는 것이다. 산헤드린이 오해할 만하다. 심문과정에서 성전을 허물라는 사실에 대한 증인들이 나왔고,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것처럼 오해 살만한 발언도 나왔다. 산헤드린 의원들이 믿음이 없다거나 식견이 없어서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몬 것은 아니다. 예수에게는 하나님 아들, 또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할만한 표적이 없었다는 게 문제다. 예수는 표적을 부정했다. 예수는 자칭 그리스도가 아니다.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대해서도 예수는 직접 답하지 않고 ‘네 말이 옳도다.’ 하고 간접적으로 대답했을 뿐이다. 예수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권위에 의존해서 말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확신했다면 그가 겟세마네에서 잔을 물리쳐 달라는 기도를 드리거나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운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산헤드린은 기존의 메시아 관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발언과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메시아 논쟁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2) 이 상황에서 빌라도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유대교의 메시아 논쟁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특사 제도로 개입할 수 있었을 뿐이다. 빌라도가 예수를 구하고 싶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종교적 논쟁에 의해 벌어진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의를 세울 의지는 없었다. 민중들은 대제사장들의 사주에 의해서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압력을 행사했다. 민중들은 역사의 정의를 세우기도 하지만 이용당하기도 한다. 역사를 바르게 변혁할 수 있는 깨어있는 민중은 도대체 누구인가? 본문은 빌라도의 책임을 이렇게 묻는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15절)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인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 처형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런 논리라면 십자가 처형에 관계된 이들은 모두 인류 구원에 한 몫을 감당한 것이다. 위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 빌라도, 민중들도 하나님의 섭리를 따른 것뿐이다. 이런 논리는 잘못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결과적으로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지만 그걸 획책한 이들은 메시아 살해자들이다. 그걸 구분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도 선으로 이끄신다는 사실과 인간의 악은 어디까지 인간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메시아 살해에 가담한 세 부류의 인간이 오늘 우리 자신일지 모른다. 산헤드린 의원들은 종교적인 편견으로 메시아를 십자가에 달았다. 빌라도 총독은 정치적 이득에 마음이 기울어져서 정의를 실현하지 못했다. 민중은 판단력이 없어서 대제사장들에게 세뇌당해 메시야를 거부했다. 우리는 어느 쪽에 해당되는가?

 

4월8일/ 부활절/ 고린도전서 15:1-11/ 부활의 확실성

 

4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고린도전서는 모두 16장이다. 중반까지는 교회 생활 전반에 대해서 충고하고 후반부는 중요한 주제를 한 장씩 다룬다. 12장은 은사, 13장은 사랑, 14장은 방언, 15장은 부활을 다룬다. 16장은 편지를 쓰게 된 이유와 편지를 끝내는 인사다. 고린도전서는 15장이 절정이다. 모든 내용이 부활을 향해서 치달린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부활은 핵심 중의 핵심이다. 그것은 종교 일반론에서 볼 때 위태로운 사태다. 이유는 몇 가지가 된다. 1) 부활은 이해하기 힘들다. 2) 증거가 없다. 3) 마음의 평안, 축복, 도덕성을 핵심 주제로 하는 게 안전하다. 그런데 기독교는 왜 예수 부활을 복음의 중심에 놓았나?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부활 경험이 명백했다는 것이 대답이다. 그렇다고 해서 위태로운 사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바울 공동체도 마찬가지였다.

헛되게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2) 헛되게 믿는 사람들도 믿는 사람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헛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초기 기독교는 지금보다 훨씬 혼란스러웠다. 바울은 그 문제를 갈라디아서에서 정확하게 다루었다. 갈라디아 지역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따랐다.(갈 1:6)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저주가 내리라고 말했다.(갈 1:9) 사실 이들은 이단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파송한 이들로서 예수를 믿되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나름으로 일리가 있는 말을 바울은 다른 복음으로 규정했다.

본문이 말하는 헛된 믿음은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다.(고전 15:12) 기독교는 부활 공동체다. 그런데도 그 안에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다. 부활 신앙이 없어도 예수를 믿을 수 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교회생활을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부활 신앙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게 더 편리할 수 있다. 부활 신앙은 지금이나 당시나 지성인들과 실증적인 세계관을 고수하던 이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종교성이 있어서 그것에 약간만 자극을 받아도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여긴다. 사이비 이단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흔하게 나타난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신앙은 헛된 것이다.

그렇다면 헛되지 않은 참된 믿음은 무엇인가? 복음의 진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복음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역사 과정에서 주어졌다. 바울도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서 받았고, 바울은 받은 그것을 고린도 신자들에게 전했다. 그것을 굳게 지키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2절)

바울이 받은 복음의 핵심은 부활이다. 그것을 바울은 3절 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사건을 가리킨다. 이런 전승이 초기 기독교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찬송과 기도의 중심이기도 한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늘 이 사실이 전파되었다. 복음의 모든 것은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죄의 용서와 부활 생명이 구원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다른 축복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다른 은사가 아무리 많아도, 아무리 건강하게 오래 살아도 죄의 용서와 부활생명이 없다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부활의 증인 목록을 제시한다. 이 목록 역시 초기 기독교의 전승이다. 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가 그들이다. 바울은 부활 사건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이런 증인 목록으로 확실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고대사회는 증인이 어떤 사실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바울은 이 목록에 자신을 포함시킨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8절)

바울은 부활의 확실성을 세 가지 차원으로 변증했다. 첫째는 성서(3절), 둘째는 목격자(5-7절), 셋째는 자기 자신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성서의 놀라운 세계를 깊이 알아야 하고, 부활 공동체인 교회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자신의 경험도 있어야 한다. 이 세 차원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성서를 알고 교회의 증언을 들어야만 한다. 즉 신학적인 세계를 알아야만 개인 경험도 가능하다. 개인 경험에 근거해서 성서와 교회의 역사도 깊이 이해할 수 있다.

 

4월15일/ 부활절 둘째 주일/ 요한복음 20:19-29/ 안 보고 믿는 자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복음서에는 예수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는다. 이에 반해 예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은 자세하게 나온다. 그 이유는 십자가와 부활의 성격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실증적인 사건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확인될 수 있다. 빌라도나 대제사장도 그걸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부활은 실증적으로 확인될 수 없는 사건이다. 빌라도나 대제사장들과는 거리가 먼 사건이다. 예수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이들에게만 경험되었다. 그들의 경험도 어떤 보고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 부활은 초기 기독교에서도 늘 시빗거리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위 본문은 예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경험을 다룬다. 두 대목이다. 하나는 부활의 주가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문을 닫아 두었는데 졸지에 예수가 나타나 평화의 인사를 건넸다.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부활의 주가 역사의 예수와 일치한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부활의 주가 도마에게 나타난 것이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함께 있었다. 이때도 문이 닫혀 있었다. 예수는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손으로 확인해보라고 말했다. 도마가 실제로 그런 식으로 확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활체는 그런 방식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이것도 앞서의 장면처럼 부활의 주와 역사의 예수가 일치한다는 뜻이다. 도마에게 하신 두 마디 말씀이 중요하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말은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전제하고 읽어야 한다. 예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의 숫자는 원래 많지 않았다. 고전 15장에 따르면 최대 5백여 명이다. 그들은 모두 예수 생전에 추종하던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복음이 이방인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예수 부활을 전해들은 것뿐이다. 그들이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이 좀더 흐른 뒤에는 부활을 목도한 이들도 죽어가기 시작했다.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로 교회가 채워졌다. 요한복음이 기록된 90-100년 어간에는 생존해 있는 부활 목격자들은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활의 예수를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가능한가?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믿기 힘들다고 말하는 게 솔직한 거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을 확인할 수 없다. 부활은 단순히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다. 종말이 되어야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될 생명 사건이다. 무조건 믿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보지 않고 믿으려면 보이지 않는 현실성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한다. 만약 보이는 것만을 현실적인 것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부활을 믿을 수 없다. 세계 전체는 우리가 볼 수 없다. 시간 전체를 확인할 수도 없다. 1억년 후에 지구가 어떤 상태로 변할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궁극적인 생명을 실체로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보지 못하고 믿는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부활은 실증적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실증적으로 대면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보지 못하는 부활을, 확인할 수 없는 부활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무조건 믿는 것은 광신이다. 어떤 사람은 자식이 병이 들었는데도 안수 기도로 낫게 하겠다면서 치료를 하지 않다가 죽게 만들었다. 광신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은 삶을 파괴한다. 이와 달리 볼 수 있는 것만 믿는 것은 불가지론이다. 광신과 불가지론 사이에 바른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은 도마의 고백처럼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4월22일/ 부활절 셋째 주일/ 요한일서 3:1-6/ 하나님 자녀의 미래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위 본문 1절과 2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자녀’로 보았다. 이 말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보았다. 비슷한 개념이다. 도대체 하나님의 자녀, 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자녀를 두거나 백성을 둘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라는 점에서 생각해보라.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인 셈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영지주의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영지주의는 세상을 선악, 또는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으로 접근한다. 성서에도 비슷한 관점이 있다. 천사와 악마가 그것이다. 나름으로 일리가 있다. 세상에 선과 악이 현상적으로 나타난다. 영지주의는 그것을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사상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인성마저도 부정했다. 왜냐하면 인성은 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자녀와 대립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빛의 자녀이고, 세상의 자녀는 어둠의 자녀들이다. 초기 기독교는 이런 영지주의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그건 어쩔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을 박해하는 이들은 세상의 어둠에 속한 이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초기 기독교가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았지만 영지주의에 머물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영지주의는 하나님의 자녀가 현재 완전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하게 살기 위해서 그들은 끊임없이 육체의 삶을 부정했다. 신비주의적인 방식으로 신성에 참여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삶에서 신성을 드러내려고 노력한 것이다. 한국의 구원파는 영지주의를 뿌리로 한다. 마치 육체가 없이 사는 것처럼 행동한다. 자신들에게 실제로 나타나는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자기가 아니라 악한 영의 활동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한다. 귀신론에 빠져 있는 성락교회의 김기동 목사도 근원적으로는 영지주의적인 사상을 선포한다. 모든 문제를 악한 영인 귀신으로 돌린다.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이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이해가 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과 그렇게 살기 힘들다는 현실 앞에서 그들은 영육 이원론, 선악 이원론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요한1서는 이 문제를 전혀 다르게 전한다.(2절) 종말론적 관점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드러날 영적 사건이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영지주의자들은 지금 이미 나타났다고,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요한1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사람은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과 같이 세상과 삶과 역사에 대해서 예민한 영성으로 관심을 기울인다.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인지를, 증거인지를 꼼꼼하게 살피는 것이다. 종말에 하나님의 자녀가 완전하게 된다는 사실을 희망하는 사람은(3절) 자기의 삶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구도적인 삶의 태도를 가리킨다.

여기서 죄의 문제가 현안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죄 문제를 쉽게, 즉 자기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처리한다. 그들은 오직 영적인 의만을 추구하면 된다는 식이다. 요한1서는 그리스도와 죄의 문제를 직결시켰다. 죄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 것이다.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6b)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도 그럴 능력은 없다. 죄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범죄 행위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죄다. FTA 체제를 오늘 기독교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가난한 동남아나 아프리카와 경쟁해서 대한민국이 잘 사는 게 정말 의로운 일인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영지주의자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4월29일/ 부활절 넷째 주일/ 사도행전 4:5-12/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위 본문은 고대 이스라엘 법정의 풍경에 대한 묘사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당했다. 그걸 집행한 기관은 유대교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법원이다. 거기서 벌어진 심문 과정의 일부다. 최근에 법정과 관련된 영화가 상영되었다.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이 그것이다. 수년 전에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김두식 교수의 <헌법의 풍경>도 비슷한 주제다. 법이 늘 정의를 세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겉으로 정의의 보루라고 하는 집단의 이면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더 심각하게 다가온다.

산헤드린 공회의 관심은 베드로와 요한의 권위에 대한 것이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 권위를 가진 사람은 늘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짜는 것이다. 일반적인 싸움에서도 ‘너 몇 살이냐?’ 하고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베드로의 권위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베드로는 권위를 말하지 않고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이 곧 권위라는 뜻이기도 하다. 베드로의 자기 변론이 위 본문의 내용이다. 이 내용은 단순히 베드로의 자기 변론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자기 변증이며, 복음의 핵심 콘텐츠다. 구성은 세 항목으로 되었다.

1)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가 치료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서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고친 일이 있다.(행 3장) 그때 그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했다. 초기 기독교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말했지만 그것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된다는 점에서 차별화되었다.

2) 예수는 버린 돌로서 모퉁이 머릿돌이 된 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된 나사렛 예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서 버림을 받았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가리킨다.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토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누가는 시 118:22절을 인용했다. 버림받은 자가 이제는 구원의 주체가 되었다. 이 역설적 구원론이 초기 기독교의 기독론적 토대다. 이런 영성의 리얼리티를 오늘 우리는 확보하고 있을까?

3)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에 대한 성격을 규정한다. 코끼리는 코끼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과 같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기본적으로 메시아니즘에 대한 질문이다. 인류 역사에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메시야를 자처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추종했다. 종류도 많다. 성인들은 사람들의 삶을 나름으로 풍요롭게 했다. 히틀러 같은 인물은 많은 사람들의 삶을 광분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스티브 잡스는 현대판 메시아다. 긍정적인 역할을 한 이들도 궁극적으로는 메시아가 아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생명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예수에게만 이런 생명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생명을 파괴하는 죄 문제를 해결하고 종말론적 생명인 부활의 주체가 되셨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유일한 구원의 능력이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뜻인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만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면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의 구원은 보편적이고 우주적이다. 인류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유일한 구원론적 토대다. 초기 기독교는 이 사실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고, 해명해나갔다.(인문학적 성서읽기, 3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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