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강 하나님과 인간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5312 추천 수 0 2012.06.16 12:36:08

제 36강

하나님과 인간

 

우리는 앞에서 몇 번에 걸쳐 하나님과 인간에 관해서 질문했습니다. 오늘은 이 두 주제를 하나로 묶는 이야기예요. 큰 제목으로는 하나님 경험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바로 앞서 말씀드린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가리키고, 경험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죠. 하나님과 그 하나님에 대한 인간 경험의 관련성이에요.

이렇게 질문해야겠군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나요? 오늘은 조금 진솔하게, 그리고 실질적으로 질문을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거나 혹은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제가 만나봤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실질적으로 들어가면 아는 게 없어요. 하나님의 나라, 부활, 창조, 성서, 믿음, 칭의, 성화, 성만찬, 세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죠. 기독교 신앙을 거의 알지 못합니다. 물론 이런 문제들은 신학을 공부해야겠지만, 정식으로 신학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도 어느 정도 기독교 신앙의 연조가 깊으면 당연히 생각해야 할 부분들인데, 별로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러다 결국 속이 텅 빈 신앙인들이 되어 버리죠.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아요.

이런 문제는 결코 인격이 좋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신앙과 인격은 어떤 부분에서는 비례해요. 인격이 좋아야 신앙도 원만하다는 거죠. 그러나 신앙의 본질로 치고 들어가는 것은 인격이 좋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인격이 일반적으로 원만하고 괜찮거든요. 특별히 모난 성격이 아니라면 대개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의 인격은 괜찮습니다. 기본 바탕은 괜찮다는 거예요. 그러나 인격이 있다고 해서 신앙의 본질로 들어가는 건 아니거든요. 그렇게 계속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이가 오십 육십 칠십이 된다고 해도 속은 비어 있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용이 채워지지 않으면, 영성이 빈곤해져요. 텅 빈 상태의 결과가 영성의 빈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신앙의 문제만이 아니라 삶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도 다 경험하겠지만 젊었을 때는 다 출발이 비슷해요. 삶에 대해서 유연하죠. 민감하게 반응하고 굳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큰 차이가 나게 되고, 칠팔십이 되면 거의 비슷한 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떤 사람은 풍요로운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전혀 그러지 못하게 됩니다. 신앙에는 형식과 내용이 있는데, 내용이 채워져야 형식이 유지됩니다. 그런데 내용 없는 신앙생활에서는 형식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가요. 이 두 가지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해하겠죠? 내용을 계속 풍요롭게 채워나가는 것과, 형식만 강화시키는 것의 차이 말이에요. 이 둘은 전혀 다른데, 신자들이 그 차이를 별로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실존적 경험

솔직하게 여러분 자신에게 대답해 보세요.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나요? 경험했나요? 보통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을 많이 합니다. 특히 복음주의 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그걸 많이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해서 그분과 함께 뜨거운 마음으로 산다고요. 그분을 믿고서 전적으로 삶이 변했다고요. 좋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은 있어요. 과연 그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 예수가 누군가 하는 거죠. 도대체 예수는 누구입니까? 물론 세례 문답을 받을 때 우리가 전해들은 건 있어요. 하나님의 아들, 다윗의 후손, 다시 오실 분, 대심판자, 인자, 그리스도 등의 여러 가지 표현으로 이야기를 해요. 그런 것들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신학적 의미는 모른 채 말이죠. 이런 용어들은 평신도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도 있기 때문에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걸 전혀 모른 채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면, 대개는 그 신자의 실존적 신앙 체험일 가능성이 많아요. 실존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거죠.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납니까?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있던 분인데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실제로 만날 수 있겠어요? 만날 수 없거든요. 지금은 예수님이 없으니까요. 지금 이 자리에 예수님이 함께 있다고 믿을 수는 없잖아요? 물론 이 말은 어떤 걸 강조하기 위해서 조금 극단적으로 이야기한 거고요. 삼위일체론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건 맞습니다. 그건 제가 뒤에 조금 더 설명하기로 하고요. 예수님 영접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하는 가장 일반적인 신앙 형태가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서 질문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대개는 실존적인 건데요. 실존적인 것은 어떤 면에서는 심리적인 겁니다.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한창 CCC가 한국 대학교 청년운동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어요. 그 때 그런 식의 영접 운동이 많았고, 빌리 그래함 목사의 전도 집회 등도 거의가 이런 방식들이었죠. 이게 다 미국 신앙이거든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근거로 개인의 회심을 크게 강조합니다.

이런 것들은 심리적 차원으로 떨어질 때가 많아요. 제가 심리적 신앙의 위험성을 몇 번 이야기했는데요. 인간에게는 심리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심리보다 더 중요한 부분들이 있는데 그걸 놓쳐 버리고 심리에 매몰되는 위험성을 지적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청년들이 특별 집회에 많이 참석하잖아요? 거기에 가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정신적으로 억압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 그렇다고 매도할 수는 없지만요. 또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해서 집을 뛰쳐나왔던 사람이 집회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순수성이나 진정성 등을 제가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으로 예수 영접을 내세우지만 심리적으로 아버지와의 갈등 해소 수단이 된 겁니다. 이미 니체나 프로이트 같은 사람들이 이런 현상에 대해 많은 비판을 했고요.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영접을 하려면 그분이 과연 누구인지 알아야 하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정말 무엇인지 소상하게 알고 그 예수님을 믿은 것인지, 아니면 간단하게 몇 마디 듣고 그냥 내 마음의 심리 작용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여러분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말고 여러분은 하나님 경험을 언제 하나요? 보통 하나님을 경험했다고들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제가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하나님 경험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너무 쉽게 생각해버려요. 하나님을 믿는 게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경험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그분의 구원 사역이고 생명 사건인데, 그런 것들을 나의 주관적인 작은 경험 안에 가둬 둔다는 말이죠. 아버지와의 심리적 갈등을 산상집회에 와서 해소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하는 어떤 청년의 이야기처럼, 내가 가진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하나님 경험이라는 것을 앞세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겁니다.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구원의 확신도 많이 이야기하죠. 도대체 구원의 확신이 뭘까요? 사실 구원도 잘 모르면서 확신에 강조를 두거든요. 기독교 신앙에서 확신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인 확신은 광신입니다. 확신이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진리론적 해석, 혹은 진리론적 근거들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런 것 없는 확신은 좀 우스운 거죠. 제가 말하고 싶은 게 바로 이런 부분이거든요.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하는 것,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과연 어떤 근거에서 나왔는가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으로만 몰고 가거든요. 그래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공식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런 걸 강렬한 방식으로 신자들에게 주입시키는 신앙이 오늘날 만연되어 있잖아요. 그것이 어떤 진리론적 근거가 있는지, 왜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 기독교 신앙이 외골수로 나갈 수밖에 없는 위험성이자, 병든 영성이에요.

한 사람의 심리적인 부분을 이용하거나 때로는 그 사람의 약점을 파고들면서 강요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흡사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아놓고 늙음과 병,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약점을 파고들면서 건강식품을 파는 것과 같은 거죠. 약을 팔 때 우선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아주 재미있고 즐겁게 해줘서 그들의 방어기제를 다 해체시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듣더라도 솔깃하게 되는 거예요. 당신네 아들, 딸들을 믿을 필요가 없다, 지금 살아 있을 때 당신들 건강이나 챙겨라 하는 식으로 미끼를 던집니다. 그래서 그 비싼 건강식품을 사게 만들어요. 그것과 기독교의 복음 선포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가끔 생각해봅니다. 건강식품을 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중에 그걸 먹고서 속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많은 신자들이 복음을 듣고 처음에는 솔깃하다가 나중에는 내용이 채워지지 않아서 속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을 겁니다. 자기가 속았다고 인정해 버린다면 얼마나 허무해요? 그래서 자기가 속은 게 아니라고 자기를 세뇌시키게 됩니다. 심리적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요. 평생 동안 얼마나 헌금을 많이 하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요. 그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어요? 십일조 한 푼이라도 떼어 먹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거라는 말을 사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일종의 종교적인 노이로제 현상이에요. 이런 강박관념이나 심리적인 자기 확신이 도덕주의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경험에 대한 다른 현상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도 있습니다. 예수님 믿고 기쁨과 평화가 가득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좋습니다. 어떠한 통로를 통해서 들어갔든, 자기가 평화와 기쁨 등을 심층적으로 경험한다면 그것도 아마 하나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다만 그런 기쁨이 얼마나 지속적인가? 진통제를 먹듯이 잠깐 즐겁다 마는 건 아닌가? 자기도취에 빠져서 평화라고 하는 건 아닌가? 그런 질문을 우리는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진리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참된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경험하는 그 근거가 과연 진리인가 아닌가를 우리가 질문해야 합니다.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질문, 진리론적 근거를 찾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어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말이죠. 무슨 예를 들까요? 옛날에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종교처럼 받아들였잖아요. 그게 진리론적 차원에서 보면 허구가 많은데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요. 매달리게 되면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사이비 이단들도 진리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자기들은 진리라고 이야기하죠. 그러나 그들이 일반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과 진리론적 근거를 갖고 있는 것과는 천지 차이가 납니다. 의처증에 걸린 남편, 혹은 주기적으로 가족을 구타하는 남편과 살면서도 행복하다고 기쁘다고 말하는 여자가 있다면 모르겠어요. 그런 기쁨과 경험들이 그 여자에게는 진리로 경험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걸 진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경험,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과연 진리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그치지 말아야 하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말이죠.

 

기독교 신앙의 근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차원에서 질문을 해야 할까요? 또 어떤 근거를 찾아야 할까요?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나는 믿습니다’라고 하는 항목의 중간쯤에 판넨베르크가 기독교의 신앙 문제, 즉 믿는다고 하는 그 사실에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요. 재미있어요.

첫째는 현존 세계 안에 있는 가시적인 근거입니다. 이게 중요한 말이에요. 다른 강의보다 판넨베르크의 이 대목을 공부하는 게 훨씬 더 영양가가 높습니다. 현존 세계에 있는 가시적 근거가 바로 우리의 진리 인식과 믿음이 연결되는 세 지평 중에 첫 번째라는 거예요. 이것은 창조의 세계와 역사적 예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만든 세계예요. 그리고 지금 창조가 유지되는 것은 성령의 활동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살았던 역사가 분명히 있어요. 예수, 창조의 하나님, 창조를 유지하는 성령, 이 삼위일체적론인 관점에서 나타나는 가시적 현존의 세계, 그 근거들, 이게 우리가 믿는 대상이 진리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제 표현이 좀 신학적인데, 이해가 되나요? 정말 중요한 겁니다. 이런 것들은 교회 안에서 자주 듣지 못했던 개념이라 낯설 텐데요. 이런 것들이 일상적으로 아주 쉽게 여러분 생각 속에서 정리가 되어야만 여러분이 신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영성이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신학과 영성은 일치되는 거예요. 이 문제를 빨리 극복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신학은 자꾸 이론적이고 딱딱하고 관념적이라고 생각하고, 영성이나 믿음은 정말 실질적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코미디 같은 말입니다. 신학적 통찰이 없으면 도저히 영성에 도달할 수가 없어요. 제가 여러분과 함께 6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좀 낯선 개념이 있더라도 자꾸만 듣다보면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창조는 성령과 하나님이고, 역사의 문제는 예수예요. 따라서 우리가 창조 세계와 역사 문제를 등한히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 안에서 왜 기독교 신앙이 바라고 신뢰하는 대상이 옳은가를 설명해야 하는 거죠.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시적 근거입니다. 이건 분명하게 우리 앞에 놓여 있어요. 창조의 세계에 대해서는 우리가 과학자나 물리학자나 생물학자 등이 말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요. 역사의 문제에 대해서는 인문학자나 철학자들이 말하는 내용에 근거해서라도 하나님과 성령과 그리스도가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해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슈뢰딩거나 하이젠베르크 같은 사람들이 말하는 양자역학에서 볼 때, 성령이 왜 근거가 있는지를 오늘의 현대 신학이 말하고 있거든요. 이런 것에까지 기독교의 해명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한국교회에서는 그런 거 안 하죠. 이게 우리의 신앙이 개인의 주관성 안에 매몰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껏 해봐야 우리는 매일 기도한다고 하고요. 기도도 자기 확신에만 머물러 있어요. 우리가 기도할 그 대상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이 자기애만 있는 거죠. 그게 깨져야만 여러분의 신앙이 새로워집니다. 이건 틀림없이 자기 연민이에요. 신앙의 모습들이 다 여기에 놓여 있어요. 어린 청년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모두 다 자기 연민에만 빠져 있고요. 개교회주의도 사실 자기 연민이거든요. 우리 교회만이라고 하는 것, 자기중심적인 겁니다. 엄격히 말해서 이게 죄예요. 성서에서 말하는 죄, ‘하마르티아’가 자기중심성이거든요. 따라서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한 우리는 성령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라는 말을 하더라도 자기의 심리적 작용에 불과한 것이지, 창조와 종말과 역사를 향해 열려 있는, 삼위일체의 한 존재방식인 성령과의 소통은 아닌 거죠. 기독교 신앙은 상당히 풍요롭습니다. 우주론적이고요. 이걸 빨리 눈치 채야 해요. 마마보이처럼 엄마 치마폭에 싸여 있는 상태로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둘째는 이 가시적인 근거를 토대로 해서 우리의 신뢰가 실제로 관계되어 있는 불가시적 현실성입니다. 좀 어렵죠? 신앙의 깊이로 들어간다는 것은 껍질을 깨고 자꾸 밑으로 파고 들어간다는 거예요. 이런 용어가 좀 낯설어도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길밖에 없어요. 여러분이 힘들더라도 뚫고 나가야 해요. 가시적 근거(visible ground)는 꼭 필요해요. 이걸 토대로 해서 기독교 신앙이 실제로 불가시적 현실성(invisible reality)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판넨베르크가 말한 불가시적 현실성에 대해 느낌이 오죠? 보통 사람들은 가시적이어야 확실하다고 생각하는데, 기독교 신앙은 가시적 근거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 근거가 불가시적이라고 해서 결코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의 오감은 아주 제한적인데, 우리의 오감에서 벗어난 것을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잖아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의 오감 안에 들어오지 않는 불가시적인, 그러나 확실한 것, 리얼리티죠.

판넨베르크는 이것을 다시 세 가지로 나누는데요. 앞서 첫 번째 근거를 설명하면서 삼위일체론적이라고 말했죠. 여기에서도 삼위일체론적으로 설명해요. 첫째는 불가시적 현실성에 하나님의 현실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현실성은 불가시적이에요. 하나님을 본 자는 죽습니다(출 33:20). 우리는 이 땅의 생명으로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어요. 따라서 우리가 하는 하나님 경험은 간접적인 거예요. 하나님은 현재 불가시적이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혹은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은 창조부터 종말까지 이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와 종말 안에서 살아가고 있죠. 여기에 있는 우리는 지금 이것만 경험하잖아요. 아주 일부죠. 그 일부인 우리가 어떻게 전체인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호랑이 털 하나를 경험하고서 호랑이를 안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진데, 우스운 거죠. 우리의 경험은 그런 겁니다. 하나님의 현실성이 불가시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막연하거나 추상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전체를 통해서만 자기를 나타낸다는 의미예요. 그런 하나님의 현실성이 불가시적이라는 거고요. 둘째는 불가시적 현실성에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이 있습니다. 삼위일체론적인 측면에서 설명하니까 당연히 예수님이 나오겠죠.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 있었던 분이긴 한데, 지금은 들림을 받았습니다. 들림 받은 예수의 현실성이 불가시적이죠. 역사 안에 있었을 때는 가시적인 근거예요. 그러나 부활과 승천, 이것을 우리는 들림을 받았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다른 생명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불가시적이죠. 셋째로는 누가 나와야 할까요? 성령입니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셋째는 교회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비밀이 충만한, 심층적 차원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현실성’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현실성이 불가시적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제 강의를 들으면서 자주 듣는 용어가 있었을 텐데 그중에 하나가 현실성이었죠. 이것만 이해해도 여러분이 낸 수강료는 아깝지 않아요. 성령의 현실성은 물론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전제 하에 교회 안에서 비밀 가득한 심층적 차원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현실성은 불가시적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것들입니다. 지금 제가 말한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겠죠? 기독교의 하나님 경험은 그냥 믿는다고 하는 자기 확신에 빠지는 게 아니라 진리론적인 근거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광신주의자들이 아니라 진리에 근거한 신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러한 우리의 믿음이 진리 인식의 세 가지 차원에서 연관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중입니다. 첫째는 가시적 근거, 둘째는 불가시적 현실성이었어요.

세 번째 근거는 판넨베르크가 말한 것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신뢰는 의지할 만한 것에 대한 확신을 기대하는 것과 연관된다.” 무슨 뜻인지 쉽게 전달이 안 되죠? 우리가 의지할 만한 것에 대한 확신을 기대한다는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미래적 희망이라고 하는 게 좋겠네요. 아마 이런 의미일 겁니다. 우리의 신앙은 의지할 만한 것에 대한 확신을 기대하는 것과 연관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사도신경에서 세 가지 항목으로 나온다고 해요. 첫째는 죄의 용서, 둘째는 죽은 자의 부활, 셋째가 영생입니다.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할 만한 것들에 대한 확신을 기대한다는 것은 일종의 기대인데요. 죄의 용서는 나중에 일어나게 될 일이고, 지금은 우리가 용서받았다고 인정만 받는 거죠. 실제로 용서를 받았다고 믿기는 힘들잖아요. 우리가 세례를 받아도 또 죄를 지으니까요. 죄 문제가 신학적으로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은 겁니다. 궁극적인 죄의 용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지만, 이미 그것이 우리에게 세례를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믿는 것이거든요. 이미 우리에게 성취되었지만 아직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종말론적으로 우리가 그것을 기대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은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건데요. 우리는 부활을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것으로 희망하고 있을 뿐 아직 부활의 실질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는데 그걸 기대하는 거고요. 영생도 마찬가지죠. 영원한 생명에 대해 우리는 어렴풋이 이해할 뿐 그게 뭔지는 잘 모릅니다. 그냥 영원하다고만 말한다면 정확한 표현이 아닌데요. 그냥 영원하다고 하면 얼마나 지루하겠어요? 그리고 영원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감이 잡히지 않아요. 계속된다는 게 뭡니까? 따라서 이 영생은 무조건 계속된다는 게 아니라 참된 생명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한 생명은 유한하고 잠정적이고 불완전하잖아요. 그걸 뛰어넘는 생명을 가리켜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데 그걸 기대하는 거죠. 우리의 신앙이 진리라는 사실을, 이러한 근거들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설명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다시 돌아가서요. 첫 번째 근거를 가시적 근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시제로 보면 과거라고 할 수 있어요. 이미 된 것이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 근거인 불가시적 현실성은 현재의 심층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세 번째 근거는 미래에 대한 것이고요. 제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전체 시간으로 구도를 짜보았는데 판넨베르크가 말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말하는 것을 따라가다 보니 이런 형식으로 구분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이렇게 설명한 거예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질문하신 분이 있네요.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비밀 가득한 심층적 차원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현실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모든 교회의 삶이 그렇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늘 샘터교회에서 성만찬을 했는데요. 매월 한 번씩 합니다. 떡과 포도주, 그게 어떻게 예수의 몸과 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신뢰하고 받아들이죠. 그것은 심층적인 차원을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성령이 그러한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에게 심층적인 생명 경험을, 혹은 구원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이죠. 물론 여기에 여러 가지 문제도 있지만요. 그렇게 성령이 우리 교회의 삶에 심층적으로 활동합니다. 싸우고 볶고 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교회 공동체 안에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성령이 활동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 경험에 대해

다시 본줄기로 돌아와서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어떻게 경험합니까? 아까 제가 말한 형식적인 것들 말고 실질적으로 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고 하는데, 그걸 느끼나요? 감정으로만이 아니라 아주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걸 우리가 얼마나 리얼하게 인식하고 경험하느냐는 겁니다. 예배 시간에도 그게 없으면 우리는 집중할 수 없어요.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생각을 하죠.

예배 순서들도 자칫하면 사람들이 앞에 나서는 것에만 치중하게 됩니다. 이게 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자기과시일 수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면 들으면서 딴 생각을 하는 것과 같아요. 독서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약간만 어려운 내용이 나오면 집중하지 못해요. 하나님 경험도 그렇거든요. 우리가 그냥 믿음만 좋으면 되지, 즐겁게 살고 봉사하면서 살면 되지, 하는 정도로 넘어가고 그 중심으로 들어가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물론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시골에서 일자무식으로 사는 분들도 하나님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걸 부정하는 건 잘못입니다. 그렇지만 왜 우리는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하는 걸까요?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자는 차원에서 한 질문입니다. 일종의 영성가가 되어야 하니까요. 하나님과 삶에서 신비주의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미 다 아는 것 같지만, 삶과 죽음 시간 같은 그런 근본적인 질문에 다시 직면하자는 겁니다.

지금 여기 제가 강의하고 있는 이 작은 방 안에도 하나님이 성령으로 저와 함께 한다고 믿는데요. 실질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나요? 대답이 뭘까요? 어떻게 경험하세요? 대답은 생명 경험입니다. 하나님 경험과 생명 경험은 일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듯이 생명도 우리에게 전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어요. 종말에 가서 우리가 부활을 직접 경험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겁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도 부분적으로 알고 있듯이 생명도 부분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종말에 가야 다 알게 되죠. 그렇다면 이렇게 잠정적이고 무상한 이 생명에 어떻게 영원하고 참된 생명이 개입해 있는 걸까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입에만 붙어있을지 모릅니다. 느끼지를 못해요. 느꼈다고 해봐야 자기의 개인적인 어떤 경험, 뭐가 안 되었던 게 잘 되었다는 방식의 기도 응답쯤으로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하거든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경험할 때, 아버지나 어머니가 용돈을 주면 군것질을 하면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경험했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건 아버지 어머니 경험이 아니잖아요. 그것으로만 만족하겠다면 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혹은 그런 훈련이 아예 되어 있지를 않아요. 그래서 좀 더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그 속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도 하나님이 다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벌써 시간이 지났군요. ‘하나님과 생명’이라는 화두를 던지는 것만으로 끝나도 될 것 같습니다. 이게 한두 시간에 끝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우리가 지금 숨을 쉬죠? 숨이에요. 인간관계에서는 악수를 합니다. 접촉하면서 인간애를 느끼는 것도 생명 경험일 수 있어요. 이런 경험들은 생물학적 차원에서부터 시작해 많이 있겠죠.

우리가 지난 두 주간 동안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공부했는데요. 인간을 흙과 영이라고 했고, 이 두 구성 요소가 통전적 관계라고 했어요. 생물학적으로 단백질로 구성된 게 인간의 몸이고, 영은 이런 것들을 초월하는 힘인데, 이런 것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을까요? 이런 현상으로부터 우리는 생명을 경험합니다. 이 생명 경험이 하나님 경험이에요. 출애굽 사건 있죠? 유대인들이 왜 그것을 역사적으로 보존해 왔을까요? 그게 자신들의 생명 경험이었던 거예요. 생명은 삶이죠. 쉽게 생각해서 살아 있다는 걸 경험했던 겁니다.

살아 있다니, 뭐가 살아있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이에 대한 질문이 많이 남아 있는데요. 지난번에도 이야기를 했는데요. 바위덩어리가 있어요. 이건 생명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바위는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우리가 전제한다면, 우리의 오감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생명을 자기 후손을 번식하는 것으로만, 뇌와 신경이 살아 있는 것으로만 생명으로 축소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우리가 늘 호흡을 하듯이 생명을 진지하고 리얼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이것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오늘의 역사에 심층적으로 활동하는 성령의 전체적인 관계 속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그러나 세속적이지 않고 물질적이지 않은 생명의 차원으로 돌입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영성입니다. 우리가 보편적인 진리의 토대에서 신앙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심화해 갔으면 좋겠어요.


[레벨:12]삶의 과제

2012.06.18 05:47:32
*.14.224.150

목사님,

'기독교가 뭐꼬'를 통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장에서  '기독교 신앙의 근거' 단락에서 목사님께서는 '가시적 근거, 불가시적 현실성,  의지할 만한 것에 대한 확신을 기대하는 것'을 과거, 현재 미래의 구도로 설명하셨는데,

저는 귀납적 경험(창조주, 역사적 예수), 잠정적 결론도출 (삼위일체 하나님), 연역적 확장 (재림, 부활, 영생)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이해해도 가능한 지 궁금합니다.

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2.06.18 23:54:49
*.185.31.7

삶의과제 님,

여기까지 와서 글을 읽으시는군요. ㅎㅎ

귀납적 경험 운운 하신 대목이 재미있습니다.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네요.

어떻게 보면 신앙(신학)은 영적 상상력이랍니다.

그런 상상력을 깊이, 넓게 펼쳐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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