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2장 전적인 헌신

인도가 바라는 선교사 조회 수 2608 추천 수 0 2014.02.27 09:30:05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86: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선교 일선에서 사역하는 일군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 사항중 하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에서 나오는 전적인 헌신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이며, 삶 가운데 어떤 여지도 두지 않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며, 성령으로 충만함 받는 것이며, 매순간의 삶에 그 분을 기꺼운 마음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며 신실하고 조건 없이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 선교사가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는다면 이 책에 언급된 다른 모든 자질은 소용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이고 이 선교에 관여하는 이는 모두 하나님께 선택받고 승인받은 자들입니다. 그것은 한 치의 여지도 없이 그 분께 전적으로 헌신할 것을 요구합니다. 오스왈드 샌더스는 말합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주님이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이 아닙니다.”

 

헌신의 상이한 차원들

선교사는 헌신에 있어 다섯 가지 차원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한 헌신

둘째, 그의 가족에 대한 헌신

셋째, 그의 소명에 대한 헌신

넷째, 그의 사역에 대한 헌신

여섯째, 그의 교회 또는 선교단체에 대한 헌신

 

이 다섯 가지 차원의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선교사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부르심, 사역, 또는 선교 단체와 동등시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의 특정한 사역과 선교 조직에 대한 헌신은 오직 하나님과 그의 부르심에 대한 헌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선교사는 비록 그가 사역의 성격과 장소가 바뀌더라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진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한 조직으로부터 사임할 때나 사역의 성격이 변화될 때 그것이 하나님과 그의 부르심에 대한 선교사의 헌신이 퇴보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됩니다.

 

첫째, 하나님을 향한 선교사의 헌신

하나님을 향한 선교사의 헌신은 성령의 전적인 통제아래 자신을 완전히 내어놓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적인 굴복 또는 하나님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것과 성령의 충만함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전자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고 후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선교사는 성령의 충만함과 그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그 자신을 비우고 성령에게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아무에게도 그의 통제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 같은 성령 충만한 삶은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의 경험이 되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에게 우리 자신 즉 우리 몸과 마음을 내어주는 예배라고 권면합니다. (12;1,2) 이 의미는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의지로 결단하여 드리는 전인격적인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예배는 또한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면 무엇이든 자원하여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같이 자신을 내어주고 하나님의 방향에 순복하는 삶을 살 때 그의 영광과 그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효율적으로 쓰실 수 있습니다. 데어도어 윌리암(Theodore Williams)'십자가의 종'이라 명명된 선교사들의 자서전에서 이 진리를 강조합니다. 그는 그 책의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만약 선교사가 자신을 삶을 전적으로 예수님께 내어 준다면 그리스도는 그의 삶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전적인 헌신은 성령 충만함으로 이어집니다. 선교 현장은 선교사에게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오스왈드 샌더스는 그의 책 영적인 지도력(Spiritual leadership)에서 이것을 크리스천 지도자의 필수 불가결의 요구사항으로서 정의하였습니다. "영적 지도력은 오직 성령 충만한 사람에 의해 발휘될 수 있다. 영적 지도자에 위한 다른 자질은 요망사항이나 성령 충만함은 필수사항이다." 선교사는 지도자로서 새신자와 현지인 복음 전도자뿐만 아니라 동료 선교사와 같은 사람들을 인도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과 통제를 받지 않는 한 그는 그의 사역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각기 다른 선교 조직에 보다 많은 일꾼이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반쯤 헌신된 아예 자신을 전혀 헌신되지 않는 사람이 다른 목적을 가지고 선교 일선에 뛰어들 위험이 있습니다. 그 같은 사람은 반드시 전적으로 헌신된 삶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현장의 선교 행정에서 끊임없는 문젯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헌신은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그를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원하신 바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9:23) 이 전적인 헌신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삶을 포함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2:20)

 

하나님은 일말의 여지없이 하나님에게 완전히 자신을 내놓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하나님은 마음이 항상 하나님을 향하여 있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준행할 마음을 가진 남녀를 찾고 계십니다. 무디(Dwight L. Moody)세상은 헌신된 영혼을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지 보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화이트필드(Whitefield)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즈음 저는 특별한 크리스천으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모든 선교사가 이 기도를 자신들의 헌신된 기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울은 그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오스왈드 샌더스는 말합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 줌으로서 한 세대 내에 한 사람이 최고로 이룰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고무적인 인물의 전형을 발견합니다.” 데오도어 윌리암스는 사두 선더 싱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전부를 포기한 인물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많은 생각과 기도 후에 그는 그리스도에게 자기 포기의 삶으로 자신을 헌신하였습니다. 그의 책과 사적인 소유는 다른 이에게 주어졌고 그는 넝마옷을 입었습니다. 맨발로 걸었고 그의 손에는 성경(신약)이 있었고 아무런 인적 후원 없이 그의 주인을 섬기러 떠났습니다."

 

둘째, 가족에 대한 선교사의 헌신

선교사 가정은 선교일선에서 주님께서 임명하신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입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 둘 다 그들의 올바른 가족 관계를 세우기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여야 하고 경건하고 모범적인 가족이 되도록 분투해야 합니다. 가족 관계는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서로가 힘을 얻는 친밀함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선교 문제가 결혼 관계를 파괴하거나 방해하도록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족에 대한 선교사의 헌신은 그의 선교사로서의 부르심과 사역에 우선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선교가 아닌 결혼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 관계는 그들의 부르심과 선교사역에 대한 헌신보다 결혼식 때 하나님 앞에서 가진 결혼 서약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그들의 소명과 헌신이 결혼으로 그들을 인도했을지라도 그 결혼 관계 자체는 그들의 소명과 헌신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로서 서로간의 영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질병과 같은 어떤 강력한 이유로 선교 사역을 포기해야 할 때 그들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끝내게 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특정한 사역에 대한 자신들의 부르심을 존중하고 영접해야만 합니다. 둘 다 같은 선교 사역에 부르심을 받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나 만약 둘 다 같은 사역에 부르심을 받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결혼과 가족관계로 인해 남편과 아내로서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수많은 가족들이 다양한 직업을 갖고서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편은 의사고 아내는 대학 교수, 또는 남편은 선생님이고 아내는 간호원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교사 가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남편은 선교사요 아내는 학교 선생님으로 또는 남편은 목사요 아내는 의사가 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선교사 또는 목사이나 아내가 아닐지라도 행복한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선교사나 목사여서가 아니라 남편이기 때문에 남편을 도울 수 있습니다. 행복한 가족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남편과 아내 둘 다 이 질서를 존중하고 영접해야 합니다.

 

사탄의 전략은 가족을 파괴하는 것으로 사역을 파괴합니다. 사탄이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파괴하기 위해 진행해온 효과적인 전략중 하나는 하나님이 임명하신 크리스천 가족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전략에 성공을 거두어 왔습니다. 그는 선교사 가정을 파괴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이로 그는 선교 사역 또한 파괴할 수 있습니다. 가정 내의 분열, 오해, 불신, 남편 또는 아내 사이의 도덕적 실패 등은 선교사 가정, 나아가 선교사의 사역까지 파괴하게 이르는 사탄이 과거에 사용해왔던 몇 가지 전술들입니다. 남편과 아내 들다 기도, 교제, 영적인 성숙, 따스하고 늘 살아있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이 같은 위험들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야 합니다. 선교사 부부의 가족관계의 효율성은 선교 사역의 효율성의 큰 기초가 됩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 서로와 자녀들과 가족 구성원에게 헌신해야만 합니다.

 

셋째, 선교사의 부르심에 대한 헌신

모든 선교사들은 그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선교사는 선교 일선에 뛰어들기 이전에 그 또는 그녀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분명히 서 있어야만 합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은 곤경, 문제와 핍박의 시기에 선교사를 또 다시 견고하게 세워 줍니다. 구약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황폐한 상태를 보았을 때 그의 부르심에 대해 강하게 확신했습니다. 그 자신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은 그로 자신의 백성들에게 분명한 소명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2:17)

 

선교 지도자는 자신의 부르심에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선교사가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 혼동하면 그는 자신의 선교 기관내의 사역자들을 혼동하게 만듭니다. 느헤미야는 그의 부르심에 명확했고 그의 추종자들은 일어나 건축하자.” 라고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인도는 우리나라의 복음화를 향한 명확한 부르심의 소리를 낼 수 있는 느헤미야와 같은 선교와 교회 지도자들이 필요합니다. 이 부르심은 국가 비전, 전략, 목표와 행동 계획 등입니다.

 

바울은 그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방인 복음화를 향한 그의 부르심은 매우 특별했고 추호의 실수가 없을 정도로 분명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이것을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떠나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22:21)

 

부르심과 은사의 특수화가 중요합니다. 수많은 크리스천 사역분야가 있기에 선교사는 그의 부르심과 은사에 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4:11) 선교사는 또한 특정한 과업과 자신의 전 생애를 헌신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부르심을 갖고 있습니다. 선교사는 그것을 위해 살아야만 하며 그것을 꿈꾸고 밤낮으로 그것을 위해 일해야만 합니다. 선교사는 결코 그의 부르심에 있어 요동해서는 안 됩니다.

 

선교사는 부르심의 목적에 전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더글라스 하이드(Douglas Hyde)에 따르면 공산주의자의 드러나는 특징 중의 하나는 그들의 목적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의 책 헌신과 지도력에서 그는 만약 당신이 목적에 합당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요구되는 조건은 당신이 반드시 그 목적에 투신해야만 합니다.”고 말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지상의 목적에 헌신하는 한편 선교사는 영원한 목적에 자신을 드리는 것에 추호의 모자람도 없어야만합니다.

 

선교사의 부르심은 선교 사역지에서 전도와 교회 건축, 목양, 가르치는 사역, 지도자 양성, 성서 번역과 같은 사역 중 하나 또는 둘을 포함합니다. 선교사가 무엇을 하든 그의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선교사는 그의 부르심에서 돌아서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그 같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데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9:62) 그의 부르심을 이루어 가는 과정가운데서 선교사는 후원교회나 파송기관의 변경이 되거나 선교지나 사역의 형태가 변경될 수 있을 지라도 부르심으로부터 돌아서서는 안 됩니다. 그의 주된 헌신이 하나님과 그의 사명이지 기관이나 장소가 아니기에 선교 기관이나 선교 지역의 변경 자체는 자신의 부르심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아닙니다.

 

실라와 나는 1984년 우리들의 사역지가 구자라뜨에서 남인도로 옮겨졌을 때 그런 유혹에 직면했습니다. 우리가 베델 성서 학교에 선교사들을 훈련하려고 합류했을 때 그 유혹을 이겨내고 우리의 사명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1990년 또다시 우리가 친선 선교사 기도 밴드(Friends Missionary Paryer Band)에서 사임했을 때 다른 직업을 택하고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에서 돌아서라는 강한 유혹이 있었습니다. 나는 전국 위원회 서비스(Consul On National Service: CONS India)의 전국 조정관 자리에 임명되었고 6개월 후 비하르 선교사로 가기로 결단하였을 때 그만 두었습니다. 지난 24년동안 선교사의 부르심에 신실하도록 우리를 지키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넷째 선교사의 사역에 대한 헌신

선교사는 전심으로 그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사역이 무엇이든 선교사는 전심으로 이일을 해야만 합니다. 가장 탁월하게 그 일을 완수하고자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려야 하는 최상의 것을 드리기를 요구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역량을 드려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기 작가 캐롤 그라함(Carol Graham)은 아자리아 감독(Bishop Vendanayagam Azariah)이 그러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모든 일의 본질을 살피며 그것을 영적인 측면에서 통찰할 수 있는 빼어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어떤 사소한 일도 그냥 넘어가거나 그 일에 전심을 기울이지 않고 토론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어떤 주제에서든 그는 결코 피상적인 생각이나 저급한 아이디어와 편법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는 어떤 일을 하는 그 자체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항상 그 결과를 내야만 합니다. 일이 크든 적든 최선을 다해 그 일을 완수하고자 가진 역량을 다해야 합니다. 그는 모든 일 즉, 밤 모임을 인도하거나 보고서를 쓰거나 음식을 요리하거나 무엇을 하거나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특별한 목적을 두고 그일을 하도록 부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모든 선교사는 '섬김에 있어 성실'이란 좌우명이 있어야 합니다. 선교 현장의 대부분에는 선교사를 직접 통제하는 감독이 없습니다. 이것은 선교사로 그의 사역에 불성실하도록 유혹합니다. 예를 들면 선교가 매일 기도하도록 방향을 주었는데 평소 기도하는 것처럼 한 시간 또는 6시간을 기도하고서는 매일 기도했다고 보고합니다. 또 다른 예로 그가 마을을 방문했을 때 임무는 하루 종일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인데 한 시간만 있다가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병가를 갖는 문제에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선교사가 머리가 아프면 그는 약을 먹고 일터로 가거나 병가를 얻어 침대에 누울 수 있습니다. 선교사가 그의 일에 헌신되지 않는 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유혹들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반드시 인간의 지휘와 통제가 없을 때 성령의 감찰하심을 의식해야 합니다.

 

때때로 선교사들은 그들이 기대한 만큼의 봉급, 편의시설, 작업 조건을 얻지 못했을 때 낙심합니다. 때때로 그들은 돈을 좀 더 벌 수 있는 안정된 직업을 얻도록 유혹 받고 그 결과 사역에 적은 시간을 투자하게 됩니다. 선교사는 반드시 자신들이 영원한 상급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고 어느 날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는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나는 너로 많은 것을 다스리게 하겠다. 너의 주님의 즐거움에 동참하라."(25:21)는 말씀을 주님으로부터 듣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선교사의 선교기관에 대한 헌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역에 대한 임무뿐만 아니라 사역을 함께 하기 위한 단체도 포함합니다.

선교사 사역에 독립의 영이 설자리는 없습니다. 선교사는 '하나님과 함께한 동역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고전 3:9) 주님의 통솔아래 일해야 합니다. 케넷드 라운드힐(Kenneth Roundhill)오늘날의 선교사들을 위한 안내란 책에서 강하게 이 진리를 전합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크리스천의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은 상상할 수 있는 특정한 경우에 그가 소속되어져 있는 특정한 기독교 단체의 목적에 대한 충성도와 그의 동료들에 대한 충실함에 의하여 측정된다. 나는 항상 그가 소속된 단체를 입심 좋게 비판하는 기독교인은 그의 주님도 손댈 수 없는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선교사는 반드시 그의 조직에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선교사는 반드시 그 조직의 관심사를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조직의 목적과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조직 안에서 사역을 하는 한 그 조직에게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조직을 떠나고자 할 때 선교사는 반드시 즐거운 영과 이해로 그의 동역자들과 개종자들사이에 아무런 분리나 혼동을 만들지 말고 떠나야 합니다. 선교 기관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세워졌고 그들을 대적하는 자들은 누구든 하나님 자신을 대적하는 것이니 만큼 이것은 반드시 조심스럽게 피해야만 합니다.

 

한 톨의 의구심 없는 투철한 사명감

하나님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한 사람의 시간, 재능과 보화의 헌신을 포함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와 같이 너희중 누구든 이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요구하십니다. (14:33) 선교 역사는 우리에게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이 같은 요구사항을 이상적으로 충족시킨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찰스 스터드(C.T. Studd)는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막대한 돈을 드린 다음 그의 신부를 위하여 3400 파운드를 예비해두었습니다. 그의 신부는 그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찰리, 주님이 부자 청년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지요?" "모든 것을 팔라고 하셨지" "그래요, 그러면 우리 결혼은 주님과 함께 깨끗하게 시작해요." 그리고 모든 돈을 기독교 선교단체에 기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교사의 온전한 굴복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찬송가 작가 아이작 왓츠(Issac Watts)가 그의 유명한 찬송가, "놀라운 십자가를 내가 바라볼 때에" (새찬송가 149- 역자주)에서 표현한 것처럼 말입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투철한 충성심- 100%, 일말의 여지없이, 이것이 선교사의 표식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그의 헌신은 전적인 동시에 일생동안 계속되어져야 하며 매 순간마다 새롭게 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과거의 경험이 되어서는 안 되며 현재 신선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같은 헌신은 지속적인 성령의 충만함을 요구하고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5:18)고 말한 그 의미입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책,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설명합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말할 때 현재형 명령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충만함을 받아야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충만은 우리가 한번 받으면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 일회적 경험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믿고 순종할 때 새롭게 할당받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함이 필요하며 매일 계속 충만 되어야 하고 매순간 충만 되어야 합니다."

 

끝까지 인내를 요구하는 전적인 헌신

실제로 선교사가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는가에 대한 시험은 선교사가 끝까지 인내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9:62) 선교현장에서 종종 발생하는 선교사의 좌절과 낙심은 선교사로 하여금 부르심과 헌신에서 떠나게 합니다. 그러나 아래 따르는 말은 우리가 그 같은 유혹에 직면했을 때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되돌아가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키소서.

나의 쟁기의 손잡이는 눈물로 젖었으나,

가위는 녹이 슬어 망가졌으나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되돌아가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키소서.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4.02.27 23:21:16
*.94.91.64

잘 읽었습니다.

전적인 헌신, 

선교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가르침이네요.

내가 젊었을 때 이런 글을 읽었으면 낭만적으로 느꼈겠지만

지금의 나이에 읽으니 삶의 진정성이 느껴지네요.

남은 시간만이라도 전적인 헌신의 자세로 살아야 할 텐데...

 

profile

[레벨:38]클라라

2014.03.01 11:53:42
*.34.116.82

사티야선교사님,

저, 이 글 무쟝 숨 가쁘게 읽었어요.

할딱이며 읽고 났더니,

휴~깊은 심호흡을 하게 되네요.

 

사실, 어제 하루종일 저를 우울하게 했던

뉴스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헌신..

그 진정한 속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

그리고 사람에게 헌신하는 것을

꼭 이분법으로 나눌수 있을까,

어제 그런 생각을 내내 했었어요.

마음이 많이 착잡해서요.

선교현장에서 발로 뛰시는 선교사님들은

이 문제가 문제도 아니겠지만,

저는, 형편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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