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라 살림교회]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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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성서 아카데미의 홈페이지에(www.dabia.net)에 실린 오세용 목사님의 글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원래 글은 여기를 클릭해주세요) http://dabia.net/xe/seyoh/733827
우리 말에는 ‘같은 음을 가지고 있지만 뜻이 다른 말’이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동음이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사물을 보는 눈과 겨울에 내리는 눈’은 같은 음을 가졌지만 뜻은 같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동음이어로 보면 전혀 다른 세가지 뜻이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이것의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한문으로 보아도, 영어로 보아도 모두 전혀 다른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라는 단어를 통해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누가복음서 6: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무엇을 하시느냐 하면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뒤에 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企圖). “그 무렵에 예수께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떠나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12-13절)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어떤 일을 행하시기 전(企圖)에 기도(祈禱)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祈禱)하고 무언가를 기도(企圖)해야만 합니다. 어떤 일도 기도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2014년은 우리 모두가 ‘기도’(祈禱)로 무엇인가를 ‘기도’(企圖)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기도(祈禱)로 기도(企圖)하자!’
또한 성경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7절입니다. “남편이 된 이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아내가 여성으로서 자기보다 연약한 그릇임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사람으로 알고 존중하십시오. 그리해야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 ‘기도’(pray)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쉼 쉬는 ‘기도’(氣道)가 막힐 수 있다는 이차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 ‘氣道’가 막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당장 죽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더 ‘기도 확보’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막히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러니 기도가 몸이든 영적이든 막히면 우리에게는 치명적인 위험이 따르게 됩니다. 몸에서 기도(氣道)가 그처럼 중요하듯, 우리 믿음 생활에서 ‘기도’(祈禱)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 몸이 살기 위해서는 ‘기도 확보’(氣道 確保)가 필요한 것처럼, 영적 기도 확보(祈禱確保) 역시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목사님의 글이 회자되고 있군요.
좋은 일입니다.
모쪼록 앞으로 더 극성스럽게 회자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