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보편사적 해석학

-판넨베르크를 중심으로-

 

1. 판넨베르크 신학의 자리

기독교 신학은 지난 2천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세상을 해석하고 인간의 구원을 선포해 왔다. 특히 자연신학적 전통을 갖고 있는 로마가톨릭 신학과는 달리 개신교 신학은 거의 말씀실증주의에 근거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이런 말씀중심적 신학의 전통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코자 했던 소위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풍성한 신학적 체계를 세우게 되었다. 이런 작업은 주로 말씀신학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칼 바르트에 의해 수행됐는데, 그의 영향력은 오늘에 이르기 까지 신학계에 있어서 일종의 ‘핵우산’처럼 작용한다.1) 칼 바르트는 불트만, 브룬너, 틸리히 등과 더불어 20세기 초반만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까지 개신교신학 전반에 걸쳐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과 함께 독일어권 신학계에서는 헬무트 골비쳐(H. Golwitzer), 허버트 브라운(H. Braun), 에른스트 푹스(E. Fuchs), 게르하르트 에벨링(G. Ebelling), 하인리히 오트(H. Ott), 에버하르트 융엘(Eberhard Jüngel) 등이 많은 신학적 논의를 연장시켰다. 이들은 대개 신앙을 하나님의 객관적 관점에서 보려했던 바르트의 말씀객관주의 신학, 그리고 인간의 주관적 입장에서 보려했던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신학에 뿌리를 두고 신학작업을 펼쳤기 때문에 개략적으로 바르트주의자이거나 불트만주의자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말씀과 실존이라는 신학범주, 더 좁혀 말하자면 성서범주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바르트와 불트만 이후로 유럽신학, 특히 독일신학의 새로운 흐름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로 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전후시대에 찾아온 새로운 시대정신 가운데서 이전의 신학방법론으로는 충분한 대답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대표적으로는 ‘희망의 신학자’로 일컬어지는 몰트만(J. Moltmann)과 ‘역사신학자’로 일컬어지는 판넨베르크(W. Pannenberg)다. 이들은 말씀범주로 부터 역사범주로 신학의 장을 이전 내지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다른 신학자들과 구별된다.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사신신학의 에피소드를 제거하고 기독교 신학의 종말론적 희망을 다시 신학의 무대로 올려놓았다.2) 그는 변증법신학 이후로 표류하던 신학의 흐름을 형이상학적 지평으로 부터 역사적 지평으로 궤도를 수정함으로써 종말론을 대우주의 파멸로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희망으로 해석한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 역사적으로 진술하는 일”이며 “종말론은 기독교의 희망론을 의미한다.”는 그의 진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통한 역사의 종말론적 희망이 그에게 중요한 신학적 테마였다.3)

판넨베르크는 몰트만과 같이 역사문제를 신학적 주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앞선 세대의 말씀중심적, 변증법적 신학을 극복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몰트만과는 달리 관념주의적 독일철학과 신학의 전통에 그 바탕을 두고 세계와 우주를 종말론적인 각도에서 해석하고 설명함으로써 신학의 근거를 말씀에서 역사로 옮기고 있다. 판넨베르크는 1959년에 이미 “역사는 기독교 신학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Geschichte ist der umfassendste Horizont christlicher Theologie.)”4) 이라고 진술한바 있는데, 우리는 그 명제에서 그의 신학적 단초를 읽을 수 있다.

역사를 신학의 가장 포괄적 지평으로 간주하는 판넨베르크에게 하나님은 “만사(萬事)를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말하는 기독교 신학은 단순히 전통적 교의학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고 세계, 인간,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논의되어야만 한다. 이런 신학적 자기 정체성은 보편사적 해석학이 추구하고 있는 보편성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에서의 보편성을 초월하여 독단적으로 자신의 진리성을 선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보편성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하나님의 보편적 신성을 위한 증거로서 헬라철학을 수용하게 된 그것이기 때문에, “성서적 하나님의 보편성으로 부터 역사적 연구가 끝없이 확장될 수 있다.”5) 고 보아야 한다. 결국 판넨베르크는 말씀객관주의와 실존적 주관주의를 극복하고 역사를 신학의 포괄적 지평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앞선 시대의 학자들, 그리고 동시대의 학자들과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서론적으로 지적한 판넨베르크 신학의 기본골격을 전제하고, 그의 신학체계와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해석학적 성격들, 즉 보편사적 해석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신학적 해석학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2. 진리론적 지평으로서의 해석학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이 갖는 특징은 신학 자체가 근본적으로 성서말씀의 해석학이라는 전제에서만이 아니라 철학과 언어학 등 인문과학에서 보다 확대 논의된 차원에서의 해석학적 학문으로서 자기 자리를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해석학적 특징을 갖는다.6) 판넨베르크는 “오늘의 기독교 신학은 그 과업의 해석학적 성격, 그리고 현실적으로 항상 수행되어야 할 방법의 해석학적 성격을 인식함으로써, 언제나 해석학적 방법으로 작업하는 다른 정신과학과 이웃 관계에 놓여있다.”고 피력한 바 있는데,7) 우리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실재성(Realität), 혹은 현실성(Wirklichkeit)이 얼마나 확고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검증을 해석학은 요구하며, 이러한 해석학적 근거를 충분히 소유할 때에만 그것의 학문적 타당성은 인정받게 된다는 말이다.

판넨베르크가 신학의 해석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다. 신학이 유지하고 있어야 할 진리성이라는 관점에서 신학은 해석학적이어야 한다. 신학도 역시 역사와 세계 안에 발생한 사건과 논의된 주제를 대상으로 작업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정경이나 외경, 혹은 교회의 여러 문서, 그리고 인간의 다양한 진리경험에 대한 기록에 접근하는 신학이 해석학적 기초를 제거하고, 다만 권위적 자세로만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건 진리론적 측면에서 볼 때 타당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판넨베르크가, 신학이 해석학적인 작업을 통해서 해석학적인 방법으로 작업하는 다른 학문과의 학문적 연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즉 신학의 해석학적 성격을 확보함으로써 신학이 보편적 학문으로서의 자리를 상실하지 않게 된다는 주장은8) 타당하다. 여기서 진리론적 논의란 대체 무엇인가?

판넨베르크의 경우에 신학은 이미 기독교가 진리를 소유했다는 이른바 실증적 계시신학9)으로부터가 아니라 기독교 교회의 그 진리성 자체에 대한 논의로 부터 시작된다. 만약 기독교의 가르침이 진리를 이미 완전하게 소유했다고 전제한다면 신학에 있어서 해석학은 필요하지 않다. 해석학이란 의미이해, 즉 진리이해의 방법론이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 곳에서만 그 기능과 필요성이 인정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크는 기독교 신학을 진리에 관한 논의지평으로 끌어 올림으로써 신학의 해석학적 성격을 분명하게 요청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서 진리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은 이미 교의학적 주장에서 진리가 전제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낸 계시개념을 통해 진리가 기독교의 가르침 안에 이미 절대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전통에 따라 신학은 진리문제를 주제화 하여 논의하지 않고, 다만 실증적으로 혹은 확증적으로 증명할 뿐이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가르침이 말하는 진리요청(Wahrheitsanspruch)이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것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어 버린다. 판넨베르크는 과연 이런 진리선소유권 주장이 타당한가를 묻고 있다. 자기주장이야 얼마든지 해도 좋지만 만약 그런 주장이 보편적인 설득력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서적인 근거도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학방법론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가르치고 선포하는 기독교의 교의가 진리성을 소유하지 못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참된 진리라는 것은 일종의 교의적 자기주장이라기보다는 충분한 보편적 논의를 통해서 획득될 수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도 자신의 진리성을 그런 논의로 부터 제외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판넨베르크는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의 진리성을 결정적으로 증명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사, 세계와 인간의 본성, 그리고 모든 사물의 신적인 근원의 본질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10) 아직도 완료되지 않은 잠정적 세계가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교의도 역시 진리론적 차원에서 논의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의 입장이다.

판넨베르크의 생각에 따르면 개신교 신학은 오랫 동안 교의학을 통해 자신의 진리성을 실증적으로 선포했는데11) 그 실증적 선포가 오늘의 시대에 상응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 교회와 신학은 이런 실증적 선포로 부터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그 길은 다름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성을 조직신학적으로 논쟁의 자리에 올려놓는데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교의학이 기독교 교리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주제화 하지 않고 전제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기독교교리의 진리요청이 명시적으로 또한 조직적으로 그 문제성 안에서 논의되지 않고 일방적으로 확고하게 인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세계, 인간, 그리고 역사는 그 실증적 성격에서라도 하나님에 의해 주제화 되어야 한다.12)

이처럼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신적인 권위에 의존해서 주장된다고 해서 참된 것으로 증명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인간과 세계와 역사에 드러나는 전체 현실과의 관련 가운데서 대답될 경우에만 진리의 통전성이 확보될 수 있게된다. 이런 작업이 판넨베르크에게는 다름 아닌, 뒤에서 다루게 될 보편사적 해석학이다. 그가 말하는 바는 결국 기독교 신학이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진리론적 질문 앞에서 정직해야하며 또한 당당하게 자기답변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13)

 

3. 해석학적 원리로서의 이성과 종말

 

진리론적 근거에서 신학의 해석학적 성격을 요청하는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해석학이 갖고 있는 해석학적 원리는 <이성>과 <종말, 혹은 희망>이다. 이성과 종말이라는 전망으로 기독교적 진리가 논의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렌쯔는 이렇게 판넨베르크 신학을 이렇게 규정한 바 있다. “이 두 주제인 이성과 희망(Vernunft und Hoffnung)은 판넨베르크 신학의 결정적인 요소를 구성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 훈련은 자연적으로 신앙 공동체와 이 세상 안에서 기독교적 희망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지향한다.”14)

앞서 말한 대로 판넨베르크가 신학을 근본적으로 진리에 대한 질문이란 지평에서 해석학적으로 설계하고 있는 것은 신학을 타학문과 같은 보편적 방법론의 체계 안에 설정코자 한 것인데, 이러한 작업은 당연히 무엇보다도 이성의 기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판넨베르크는 헤겔의 보편적 역사관을 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만큼이나, 인식론에서 칸트의 이성주의적 사고를 따른다고 할 수 있지만,15) 그렇다고 순수이성이 작용하듯이 이성의 무시간적 가능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16) 또한 이성이 모든 현실을 실증적으로 주관하는 유일한 잣대라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에게 있어서 이성은 보다 궁극적인 진리를 해명하고 알리는 길이며, 도구라는 점에서 해석학적 원리가 된다.

그런데 이성이 목적하고 있는 이 궁극적인 진리는 판넨베르크의 해석학적 원리에서 볼 때 <마지막 때>에 관한 것, 즉 그 종말에 대한 희망이요, 신앙이기 때문에 이성과 종말-희망-은 상호 순환적 기능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렌쯔는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이 희망의 이유를 제공하는 것(벧전3:15)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얀 롤즈와 군터 벤쯔가 <신앙의 이성>이라는 저서에서 판넨베르크 신학의 기본적 사고를 유대교 묵시문학의 보편사를 철학적 이성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듯이17) 판넨베르크는 이성과 종말개념을 통해 자신의 신학적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이 두 주제를 잠시 나누어 설명해 보도록 하자.

판넨베르크는 신학방법론에 있어서 이성의 기능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그의 초기 신학으로 부터 분명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판넨베르크 신학이 이성을 그 특징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판넨베르크의 사상발전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그의 이성에 대한 특별한 신뢰를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는 올리브의 주장을18) 구태어 인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문제를 1960년대 초에 있었던 알트하우스와의 논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19) 알트하우스는 판넨베르크의 <역사로서의 계시>에 대한 반론으로서 <판넨베르크의 계시개념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역사로서의 계시와 신앙>라는 글을 통하여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에 대해 판넨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현대신학에 있어서 만나게 되는 생각들은 다음과 같다. 신앙의 기초와 내용 안에서 이성적 통찰은 사실적으로만 우리에게 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에 있어서도 해로운 것이라는 생각들이다. 또한 신앙은 모험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는 주장들이다. 본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대하였다. 만약 자기의 근거에 대한 이성적인 증거가 인정되지 못하고 부정된다면 결국 신앙의 본질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으며, 신앙은 선포된 사신(使信, Botschaft)의 권위요청에 대한 맹신으로 떨어질 뿐만 아니라 보다 확실한 이해에 근거되지 못하고 위선적인 논리에 근거한 미신으로 … … 전락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의 근거에 대한 이성적 인식의 의미는 신앙의 순수성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하나님 대신 인간 안에 신앙의 기초를 놓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20)

 

위에서 판넨베르크가 주장한 것에 근거해서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기독교 사신은 결국 인간을 신앙으로 부르는 것인데 과연 어떻게 이 신앙으로 부르는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전통적인 입장은 신앙자체의 권위로 그것이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판넨베르크는 이성을 통해 보다 확실한 이해에 도달했을 때 거기서 기독교적인 참된 신앙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로 계시한다는 성서적 견지에서 볼 때 그 계시는 비밀스럽거나 신비한 사건이 아니라 확연한 사실들이라고 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진리가, 그것을 깨닫던지 그렇지 못하던지의 문제는 차치하고, 모든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와 있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에 대한 확증은 비밀이 아니라 자연적인 결과라는 면에서, 진리이해를 위해서 요청되는 유일한 가능성은 이성적 작업인 셈이다.21) 전통적인 의미에서 기독교는 의심스러운 사실을 확실하게 선포하기 위해서 신앙을 향한 비약을 강조했는데, 이는 바른 자세라 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사건과 사물의 확실성을 선포하기 위해서22)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사실에 대한 이성적 이해와 판단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 판넨베르크의 주장이다.

한편으로 판넨베르크가 역사계시의 교의학적 명제를 설명하면서 계시는 시작에서가 아니라 역사의 종말에서 발생한다고 피력하고 있듯이,23) 그의 신학적 해석학은 종말의 원리에 근거하여 개진되고 있다. 성서적 종말론이란 이 세상의 역사가 소멸되는 초자연적 사건으로서만 이해될 수 없다. 묵시문학적 표상들을 사실적인 언어로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 판넨베르크는 엘리아데가 기독교의 종말론을 세계도피(Weltflucht)와 같은 신화적 요소로 규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24) 성서의 세계 도피적 종말론은 구원사적 의식과의 관련 속에 놓여 있는 일종의 신화적 표상에 불과한 것이며, 그 표상들이 의미하는 보다 중요한 관점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종말을 역사경험 속에서 구원의 의미를 현실화 시키려 했다는 것, 즉 종말론적 희망의 내용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종말론적 역사경험이라는 관점에서 기독교적 종말론을 이해하고 있는 판넨베르크의 종말론적 사고는 전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묵시문학적 전통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25) 비록 묵시문학이 이원론적 역사이해에 터하여 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드러나는 새로운 세계의 전적인 돌입을 대망한다는 점에서 신약성서 시대에 이르기 까지 강력한 영향을 끼친 역사이해이다. 판넨베르크는 묵시문학적 종말론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 숨겨져 있는 것의 종국적인 계시가 하나님 자신의 <주권>(Herrlichkeit)이 실제로 드러나는 것(In-Erscheinung-Treten)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기계시 사고는 미래의 사건을 통해 근거를 갖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26) 따라서 가장 확실한 것의 근거는 미래의 사건인 동시에 종말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신학적 해석학은 항상 종말론적으로 논증을 전개해야 한다.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종말론적 논증이란 그 누구에 의해서도 가능하지 않은 종말의 현상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신학은 끊임없이 성서가 표상하는 종말에 대한 희망의 원리에 따라 현실을 해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종말론적 희망 가운데서만 오늘의 모든 사건들은 의미를 담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의 현실이 아직 완전하게 그 진리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며, 이런 면에서 모든 인간의 인식과 이해와 해석은 그 잠정적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인문사회정신과학은 물론이고 자연과학적 인식도 역시 하이젠베르크가 밝히고 있듯이 불확실한 심연 위에서 맴돌고 있으며, 또한 확실한 출발점을 소유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27)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크의 종말론적 관점은 진리의 잠정적 성격 앞에서 가장 궁극적인 해석학의 자리를 종말론적 미래로 돌리려는 의도라 볼 수 있으며, 진리와 그 인식의 엄밀성을 전제한다면 정당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이러한 해석학적 원리가 철학이나 역사학과 같은 주변학문으로 부터 얼마나 지지를 받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신학의 우주성과 보편성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논증함으로써 블로흐의 희망의 철학이나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등에서 피력하고 있는 미래적 관점, 혹은 미래적 존재론을28) 신학적으로 대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학의 종말론적 대답의 당위성 내지 정당성을 변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공헌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4. 보편사적 해석학

 

여기서 다룰 문제는 진리론적 질문을 제기하는 학문이며 이성과 종말의 구도 속에서 해석학적 원리를 갖고 있는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해석학적 내용과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그는 쉴라이에르마허, 딜타이, 하이덱거, 불트만, 가다머, 그리고 푹스나 에벨링에 이르는 해석학적 전통 가운데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지만 보편사적 해석학(die universalgeschichtliche Hermeneutik)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구별된 신학체계를 말하고 있다.

 

1) 실존론적 해석학의 지양

판넨베르크는 신학의 해석학적 과업을 축소시킨 두 가지 전통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 하나는 사이비 정통주의 언어학(die pseudoorthodoxe Terminologie)29) 이며, 다른 하나는 소위 실존론적 해석학30) 으로서 판넨베르크가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상이다. 실존론적 해석학은 역사를 현재적 실존으로 용해시켜 버림으로써 참된 현실성에 도달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는 불트만이나 고가르텐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역사를 역사성으로 해소시켜 버렸다고 진단한다.31) 그의 진단은 일단 정당하다. 여기서 우리가 굳이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불트만이 사실적 역사가 아니라 실존적 역사만을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불트만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그의 실존적 해석학의 핵심적 내용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보편사에서 너를 찾지 말라. 오히려 너의 고유한 역사 안에서 보아야 한다. 항상 너의 현재 속에 역사의 의미가 있다.”32) 그는 역사의 객관적 사실과 의미를 엄격하게 구분하므로써 역사적 사건의 현재적 의미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오늘의 인간이 과거의 사건, 특별히 성서의 사건을 명확하게 재현할 수 없으며, 충분한 자료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개체와 갖는 관련성은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없고, 다만 개체 인간이 그 사건을 주관적으로 이해하므로 그 사건은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는 말이다. 결국 불트만의 신학에 있어서 역사와 사실은 뒤로 물러나게 되며,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만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불트만의 신학적 해석학은 신학적 인간학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역사는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의 실존적 경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우선 불트만의 해석학적 특징을 한 두 가지 더 짚어보도록 하자. 불트만의 해석학적 신학은 그의 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33) 논의에서 부터 특징적으로 고찰될 수 있다. 고대인들의 세계관은 신화적 표상인데, 성서가 채택하고 있는 것도 역시 그런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오늘의 독자들에게 전달되기 위해서, 즉 해석되기 위해서 신화적 표상이 탈신화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불트만의 주장이다. 그렇다고 불트만이 성서세계의 신화를 모두 제거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신화는 신화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상이 오늘의 과학적 사고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재해석의 과정을 통해 신화가 함축하고 있는 본질적 내용과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방법은 신화의 구도를 밝히는 작업, 즉 탈신화화를 통해서 수행될 수 있다. 신화적 구도를 과학적 구도 가운데서 해석하려면 당연히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한데, 그것이 불트만의 경우에는 실존적 해석학이었다. 불트만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도 그 하나님을 신앙하는 인간을 알지 못하면 가능하지 않다는 전제로 부터 생각하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인간의 신앙, 즉 인간의 하나님 인식이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야스페르트는 ‘자기 인식으로서의 신앙의 인식’이라고 바르게 정의하고 있다.34) 인간의 신앙이 표출된 고대의 신화적 표상으로 부터 현대적 사고로 이해의 가능성을 열기 위해서는 바로 성서 본문의 현대적 해석이 문제이다.35) 이처럼 불트만이 신화적 본문을 오늘의 과학적 인간들에게 해석해 주기 위하여 탈신화화 논의를 전개했다는 것은 신학의 해석학적 관점을 보다 본질적인 작업으로 올려놓았으며, 이를 통해 결국 신학의 해석학적 지평을 확대시켰다고 볼 수 있다.36)

판넨베르크는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을 쉴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 같은 이들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불트만이 인간현존에 관한 질문을 전승된 본문에 대해 질문하는 전제로 보고 그것을 인간존재와 자기 자명성의 가능성으로 고양시키려는 것이 바로 딜타이의 정신적 해석학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37) 판넨베르크는 “쉴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의 정신적 해석학에서 처럼,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은 과거에 대한 현재적 의미를 찾음에 있어서 전승된 본문에 표현된 인간에 대한 질문 안으로 축소되어 있다.”38) 고 비판한다. 정신적이고 실존적인 해석학은 사실의 역사로 부터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만을 고려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세계와 역사에 대한 진술을 인간 실존이해의 유일한 표현 안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쉴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 그리고 하이덱거 등의 해석학적 구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불트만의 해석학을39) 판넨베르크는 인간론적 축소라고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인간 현존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그 명료화를 위해서 세계, 사회, 그리고 이 양측에서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으로 항상 되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인간이 자신에 대한 질문의 대답을 세계와 사회와 역사와 하나님에 대한 이해 없이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자기이해는 선행하는 세계이해에 대한 역망(Rücksicht) 없이, 그리고 당연한 의미에서 선행하는 하나님 이해 없이 주제화 되어질 수 없다.40)

 

이처럼 판넨베르크는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이 인간의 주관적 이해에 머물고 말기 때문에 참된 이해에 도달될 수 없다고 판단하는데, 불트만에게서 제기된 실존론적 해석학의 문제들이 소위 해석학파라 불리는 푹스와 에벨링에 의해 발전되어 나간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들을 불트만과 같은 해석학적 범주에 놓고 평가하고자 한다.41) 판넨베르크는 쉴라이에르마허와 불트만, 그리고 푹스와 에벨링에 이르는 일련의 신학적 해석학의 기도를 정신적, 실존적, 그리고 결과적으로 인간 중심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의 해석학적 전통에 의하면 본문과 사건의 당시적인 특수성이 현재적 실존성으로 상실되고 만다고 비판한다.

판넨베르크는 역사가 실존으로 상실되는 실론론적 해석학의 한계를 가다머의 지평융해(Horizontverschmelzung) 개념에 근거해서 극복하고자 한다.42) 해석자의 지평과 해석된 본문의 지평이 구분되지만 이는 다만 해석과정의 출발점일 뿐이고, 고유한 지평은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해에 있어서 고유한 지평이 확장되어 아직 이해되지 못한 그 낯선 사건이 자기의 지평과 함께 이해의 확장된 지평 안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43) 여기서 해석자가 본문과의 만남에서 역사적 의식을 자신 안에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새로운 하나의 유일한 지평(ein einziger Horizont)을 형성하게 될 뿐만 아니라,44) 또한 서로 다른 지평이 융해되면서 참된 이해가 가능케 된다는 것이다.

가다머에 의하면 해석학적 순환에 있어서 이해란 “전승의 운동과 해석자의 운동의 교환관계”인데,45) 여기서 중요하게 기능하는 것은 이른바 전승사(Überlieferungsgeschichte)와 영향사(Wirkungsgeschichte)다.46) 과거의 본문지평은 오늘의 지평역사에 어떠한 방법일지라도 전승되어 있으며, 또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본문지평을 제외한 상태에서 오늘의 지평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해석학적 정황을 위해 전체적으로 규정된 역사적 거리에서 하나의 역사적 현상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이미 영향사의 영향 아래 놓이는 것이다.”47) 가다머는 서로 다른 지평이 융해되려면 당연히 실존론적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며, 오히려 역사적 이해를 통해 그 현실성에 도달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크는 가다머의 지평융해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겠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추려 본다면, 판넨베르크는 역사의 전승개념을 간과한 실존적 해석학이 역사를 하나의 역사로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역사가 개인의 실존에서 단절될 뿐이기 때문에 더 이상 참된 이해에 도달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러한 실존적 해석학의 극복은 역사를 하나로 이해하는 전승사로서 가능하다고 본다. 이 전승사적 해석학은 신학적 해석학에도 적용되는 방법으로서 다음에 다루게 될 보편사 개념에서 더욱 확실한 판넨베르크의 해석학적 특징으로 확대된다.

 

2) 보편사적 해석학으로의 정향

실존론적 해석학이 상실한 역사의 회복은 전승사적 역사의 단일성 가운데서 가능하다고 본 판넨베르크는 가다머의 지평융해 개념을 통해 그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는 전승사로 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보편사 개념을 통해 가다머의 해석학을 극복코자 한다. 우선 판넨베르크가 어떻게 가다머의 해석학적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판넨베르크는 가다머의 해석학적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본문의 지평과 현재의 지평이 만나 새로운 지평을 형성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가다머는 불행하게도 역사적 관점으로 부터 언어과정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해에 있어서 언어성의 이론을48) 발전시키고 있는 가다머는 이해에서 발생하는 지평융해는 언어적 표현 없이 표상화될 수 없다고 보며, 사건(Sache)의 이해는 반드시 언어적 형태 안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가다머의 관점에서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건을 다른 이에게 표상화하는 대화 상대자나 본문이 문제가 되든 그렇지 않던 상관없이 사건이 자체를 언어화 하는 것(das Zur-Sprache-Kommen der Sache selbst)이다.49)

가다머에게 있어서 언어는 사실상 이해가 실행되는 우주적 매개(das universale Medium)이며,50) 이것이 언어의 매개 안에 존재하는 전승의 본질인 것이다.51) 그러나 전승된 것에 대한 해석은 어느 누가 거기서 나에게 말한다는 것을 통해서 언어사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번역자가 그것을 본문과 엮어내는 그 언어를 발견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언어사건이 된다. 본문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 앞에 서 있는 번역자가 본문의 사건을 고유한 현재지평으로 요약하는 언어적 표현을 찾음으로 이해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본문의 사건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언설(Aussage)이다.52) 가다머에 의하면 이 언설을 명확히 함에 있어서 보편사는 언급되지 않은 것을 추상화시키기 때문에 “언설 안에서 본래적으로 언급되어야 할 것의 의미지평이 방법적 엄밀성으로 숨어버린다.”53) 따라서 가다머는 보편사적 해석학을 거부하고 언어적 개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즉 가다머가 언설에 우선권을 두는 것은 이해가 항상 언어 안에서 진행된다는 것(sich-in-der-Sprache-Verständigen)을 의미한다.54)

언어의 진술기능을 통해서 이해의 언어사건을 해결하려는 가다머는 역사와 현재의 전반적 관계를 취급하기 보다는 해석학적 체험의 언어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말하자면 가다머에게 지평융해를 통한 또 하나의 새로운 지평은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개념과 달리 언어성이 되어 버린다. 가다머는 언어를 해석학적 경험의 매개로서 이해하므로 결국 해석학적 존재론의 지평에 서는 것이라 할 수 있다.55)

이처럼 본문과 현재의 지평적 간격이 실존 안으로 상실되지 않고 온전히 유지되어야만 새로운 또 하나의 지평이 창출된다는 가다머의 지평융해개념이 언어성의 사유로 전개되기 때문에 판넨베르크는 더 이상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판넨베르크는 두 지평의 간격을 메우는 일은 언어성의 사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지평과 현재의 지평 그리고 미래의 지평을 다함께 포함하는 보편사적 지평인 역사의 전체성 사고(Das Totalitätsdenken)에서 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보편사적 해석학이야말로 판넨베르크가 시도하는 신학설계를 가장 독특하게 그려주고 있는 신학개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일단 판넨베르크가 가다머의 해석학을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 좀더 살펴보도록 하자.

판넨베르크가 볼 때 가다머가 언어성으로 빠져든 이유는 역사를 통해 현재적 진리를 헤겔식으로 중재하려는 시도를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56) 이러한 가다머의 노력은 완전한 앎 안에서 결코 지양될 수 없는 인간경험의 유한성에 대한 암시에 기초한 것이다. 역사의 미래는 항상 거듭하여 놀라운 경험들을 가져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보편사 개념은 미래의 우연성을 무시하고 일반적인 것 아래서 개체의 의미를 간과하고 있음이 사실이기 때문에 가다머가 지평융해 개념을 보편사가 아니라 언어성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을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철학의 과업과 보편사적 신학이 포기되어 질 수 없다고 판넨베르크는 확신하다.57) 해석학적 사건을 새롭게 구성한 가담머의 지평융해 개념이 오히려 그가 회피해 보고자 했던 보편사적 지평을 증명한다고 판넨베르크는 주장한다. 해석학에 있어서 당시성과 현재 사이의 관계가 문제라면, 그래서 지평융해 개념이 추구한대로 해석학적 가교에서 그 사이의 상이성이 보존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해석자가 역사적 지평을 설계해야만 한다면, 해석자의 현재와 맺는 본문의 역사적 상황은 당시 상황과 맺는 현재의 역사관련이 질문된다는 방식에서 실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본문은 당시적인 것을 현재와 묶는 전체역사의 연관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더구나 오늘 손 안에 있는 것과의 연관만이 아니라 현재적 가능성이 갖고 있는 미래 지평과의 연관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현재의 의미는 미래의 불빛에서 밝혀지기 때문이다.”58) 이에 반해 가다머는 본문과 해석자 사이의 관계를 언어성으로 해결함으로써 지평융해의 가교로 부터 다시 두 지평의 역사적 간격으로 향해 버렸기 때문에 결국 두 지평 사이에 가교를 놓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59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사고는 가다머의 해석학적 언어성에 대한 비판으로 부터 원래 가다머가 제기한 지평융해의 실행을 위하여 전체역사 사고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는 해석학의 기초적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이해가 요청하는 것은 가다머가 주장하는 두 지평의 언어관계, 즉 언어성이 아니라 사건(Sache)의 역사설계이며, 이러한 역사설계의 지평에서만 역사적 차원으로 구성된 본문의 실재전망(Sachperspektive)과 번역자의 현재적 실재전망이 연이어 연관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역사설계 만이 아니라 모든 상이한 실재영역의 변화하는 관계를 포함하는 보편사적 설계의 지평이라고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보편사의 관계 속에서만 본문의 당시(Damals)가 해석자의 오늘과 연결될 수 있으므로, 그것의 시간적이며 역사적인 상이점이 상실되지 않고 양측에 연결된 사건연관<Geschehenszusammenhang>이 보존되고 가교가 놓일 수 있다.60)

 

이와 같은 보편사적 사고에서 실재의 진리는 현재적 실재지평(Sachhorizont)에서 만이 아니라 현재가 지향하는 미래지평으로 끌고 가는 것이 해석학적 요청의 의미가 될 수 있다. 물론 전승된 본문의 현재에 대한 요청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61 동시에 오늘의 의미를 획득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가다머가 강조한 대로 전승된 것이 현재적 관점에서 언어적으로 적용되며 그 현실성이 획득되려면 미래지평을 포괄하는 보편사에서 전망되어야 한다고 판넨베르크는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

과거의 지평과 현재의 지평이 미래의 지평에서 통전된다고 보는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해석학은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역사의 종말론적 이해, 그리고 예수의 부활사건이 가리키고 있는 종말의 선취구조 가운데서 그 기초를 형성한다. 모든 세계와 역사가 온전히 드러나게 될 종말의 전망, 그 미래적 존재론이야말로 역사의 의미를 온전히 밝혀줄 수 있다.62 결국 판넨베르크는 과거의 역사가 오늘의 역사를 결정하고, 오늘의 역사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변증법적 역사철학의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종말이 오늘의 역사를 결정한다는 종말론적 이해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따라서 이 보편사는 개방된 미래의 지평이며 기독교 전통이 갖고 있는 종말론적 관점이고, 동시에 현재적 행위가 갖는 가능성의 지평을 함께 열어가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아직도 완료되지 않는 역사, 미래로 개방되어 있는 전체 역사 설계만이 인간과 세계와 하나님에 대한 현실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해석학적 진리이해의 바른 길이라는 사실을 판넨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강변한다.

 

시간의 간격이 어떻게 다리 놓이는지, 그리고 본문과 해석자가 공동지평을 통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해석학적 문제는 보편사 질문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보편사적 사고는 그 근원을 성서적 하나님 사고 안에 갖고 있다. 성서적 하나님으로 부터만 전체 현실성(Gesamtwirklichkeit)은 최종 목표를 지향하는 항상 새롭고 유일한 사건들의 역사로서 이해되는데, 이는 역사적 사건을 항상 같은 질서로 이해하는 헬라적 사고와 반대되는 것이다. 유대 묵시문학과 기독교 종말론을 통해서 현대 역사철학의 보편사적 주제가 유산으로 자라집게 되었다.63)

 

결론적으로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해석학은 쉴라이에르마허로 부터 이해의 기술로서 취급된 해석학적 신학의 흐름을 수용하면서, 말씀의 해석학과 실존적 해석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참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본문과 해석자의 지평이 현재적 실존으로 해소되는 것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간격이 고유하게 보존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는 전승사 개념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단일성 안에서 보고자 하는 이 전승사 개념은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전체역사 사고인 보편사에서 확장되어 그의 역사신학설계를 구성하는데 기여한다. 이 보편사 개념은 본문과 현재의 지평이 미래의 지평과 더불어 전체 역사적 전망을 통해서 참된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판넨베르크는 가다머의 지평융해 개념에서 실존적인 해석학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점을 찾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가다머의 언어과정이라는 언어존재론적 해석학을 비판하면서 헤겔의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자신의 보편사적 해석학의 구도를 만들어 가고 있다.64)

오늘의 신학이 만약 말씀신학이 의도한 방향에서만 자신의 자리를 규정한다면 21세기를 눈앞에 둔,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화의 사회에 살고 있는 오늘의 인류를 향해 설득력 있는 대답을 줄 수 없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생명의 시초를 밝혀내고 있는 오늘의 새로운 물리학은 오늘의 세계이해를 변화시키고 있는데, 이는 자연과학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철학이나 윤리학에 이르기 까지 본질적 변화를 요청한다고 볼 수 있다.65) 이런 변화 가운데서 현대신학이 보편사적 지평을 소홀히 하고 자기 안에 들어 있는 전통의 소리만 스테레오타입으로 확산시키려 한다면 그것의 진리성은 큰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현실성과 성서적 종말론을 보편사적 관점에서 엮어가는 그의 신학적 시도는 교회와 신학의 자리가 점차 축소되어가는 오늘의 시점에서 교회가 반드시 새겨보아야 할, 그리고 어떤 면에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어야 할 일종의 거대담론이다.66) 기독교 신학이 이러한 보편사적 전망을 어느 정도로 확대 심화시켜나갈 수 있는가에 따라서 신학의 미래가 달려 있을 것이다. 그 중의 한 부분인 철학과의 관계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과 세계의 현실성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는 점에서 공동의 주제를 갖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신학이나 철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방식들은 이러한 근본 과업을 뒤로 미루어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당연히 철학은 이런 근본 과업을 감당함으로써 자신들의 거대한 전통에 적합한 자리에 서게 된다. 또한 이럴 경우에만 철학은 그 어떤 개체 학문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기능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신학은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다루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인간과 세계의 현실성에 대한 전체 이해와 연관시킬 때만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신학은 철학의 비판적이고 교도적인 반성과 상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종교가 주제로 삼는 신적인 현실성으로부터 인간과 세계가 전체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데, 철학이 이러한 인간과 세계의 전체적인 구성과 인간의 본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종교와 그 종교의 의미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세계 속의 인간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이 경우에 철학은 종교를 일종의 순수 철학적인 신론으로 대체해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더라도 신학과 철학 사이의 긴장은 늘 충분할 정도로 상존한다. 왜냐하면 신학은 하나님과 그의 계시로부터 인간적 현존의 전체와 세계 전체를 숙고해야 하지만, 철학적 사유는 인간과 세계 경험으로부터 절대라는 자신의 토대로 돌아가기 때문이다.67)

 

 

설교와 보편사적 해석학

 

진리론 문제

누가복음 6:6-11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예수의 갈등에서 우리는 진리론적인 차이를 읽을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전통, 즉 안식일 수호라는 율법주의를 진리라고 생각한 반면에,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에 따르는 것이 바로 진리라고 생각했다. 어떤 면에서 손 마른 사람을 굳이 안식일에 치료할 게 아니라 하루 지난 다음날 치료해야 한다는 바리새인들의 논리가 아주 상식적인 면에서 진리일 수 있다. 이런 정황을 모를 까닭이 없는 예수가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는 질문을 들이밀면서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범한 이유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진리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전통이야말로 진리의 준거라고 생각한 반면에, 예수는 그런 전통(상식)이 담고 있는 생명이야말로 진리의 준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예수의 생각이 십자가로 죽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안식일 논쟁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는 여러 종류의 진리론이 있을 수 있다는 것과, 잘못 설정된 진리론은 모든 사유와 행위를 오류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전통, 율법, 상식은 진리를 고착시켜 버렸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아마 모세 시대에는 당연했을 율법이 역사의 과정 속에서 아무런 변화도 없이 문자대로 고수되었다는 사실은, 더구나 더욱 폐쇄적으로 고수되었다는 사실은 이것이 진리의 개방성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그런 전통에 묶이는 게 아니라 미래로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모세가 “가”라고 말했어도 “나”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주 잠정적인, 부분적인 진리를 밝히고 있을 뿐인 전통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진리 자체가 탈은폐하는 그 빛에 의존해 있던 예수는 자신이 본대로 자유롭게 그 세계를 말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더 정리하자면 진리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진리 자체의 존재론적인 능력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진리의 잣대가 아니라 진리 자체가 자신의 잣대일 뿐이다. 우리는 늘 그 진리에 의존해서 자신을 규정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이미 진리를 소유하거나, 더 나아가서 독점한 것처럼 불을 토하듯 설교한다. 무엇이 참된 것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흡사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묶여서 안식일을 범한 예수를 처치하려고 음모를 꾸몄듯이 전통만 수호한다.

오늘의 현실 교회에서 볼 때 예컨대 안식일(주일)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성수주일 합시다.”는 설교를 할 게 아니라 안식일이 무엇인지를 설교해야 한다. 교회에 나오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아주 복잡한 삶의 정황에서 본인이 결정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구체적인 사안까지 결정해버리는 설교는 율법적인 설교다. 많은 목사들이 직장이나 친지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교회에 나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어떤 경우에는 어느 나라 대통령이나 장관이 주일학교 선생 일을 위해서 국가 업무까지 뒤로 미룬 이야기들을 자랑스럽게 풀어놓는다. 더 나아가서 그렇게 주일을 지킨 사람들이 다 잘되더라고 덧붙인다.

똑같은 율법을 두고도 바리새인과 예수가 서로 다르게 해석했다는 사실 앞에서 개방적인 진리론이 설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풀어서 말하자면, 그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주관주의적 실존성의 극복

성서의 주관주의적 해석은 앞서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학을 다룰 때 충분히 언급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략하게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데카르트 이후로 서양 사상사는 인간의 주관적 사유를 매우 중요한 요소로 간주했다. 모더니즘을 거치면서 주-객도식은 이 세계를 해석하는 결정적인 구도로 받아들여졌다. 즉 이 세계를 대상으로 경험하고 해석하는 인간의 주관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사실 하이데거는 이런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극복하고 오히려 존재 자체의 탈은폐성을 강조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현존재 개념에 영향을 받은 불트만에 이르러서 실존문제가 신학계 안에 크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물론 불트만이 고전적인 의미에서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말하는 게 아니라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현존재의 실존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주관주의적 역사경험은 여전히 인간의 실존성에 떨어져 있다. 이러한 주관주의적 실존성은 불트만만이 아니라 유럽의 경건주의와 각성운동, 그리고 북아메리카의 부흥운동의 토대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흐름은 개개인의 종교적 실존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았다는 감격 속에서 개인의 뜨거운 신앙경험이 주제로 등장한다.

신앙경험이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것만 일방적으로 강조되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과 그의 세계에 대해서는 별로 할말이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믿을만한 대상을 믿는 게 신앙이지 무턱대고 믿는 게 신앙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하나님이 신뢰할만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과정이 훨씬 중요하다는 말이다. 신학의 역사는 이 점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다.

설교 행위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설교는 인간의 가능성이나 그 한계를 말하는 것이기보다는,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자고 결단을 촉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 세계는 오늘 우리의 실존적 경험을 뛰어넘는 능력이다. 물론 하나님의 세계가 우리의 실존적 경험과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는 우리의 실존적 경험보다 더 큰 능력이다. 우물 안에서 보는 것만을 하늘이라고 할 수 없듯이 우리의 실존에서 경험되는 것만을 하나님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인간에게 믿으라는 설득보다는 믿어야 할 대상을 설명하는 데에 모아져야 한다. 실제로 믿을만하게 생각되면 믿지 말라고 하더라도 믿는다. 그런데도 우리의 설교는 설득되지 않는 내용을 우격다짐으로라도 믿게 만든다. 고전13장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며 ...”라고 진술되어 있듯이 인간의 믿음보다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사랑(하나님)의 현실성이 우선한다.

 

보편사적 지평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해석학이 말하려는 핵심은 텍스트의 당시 지평과 해석자의 오늘 지평만이 아니라 아직 손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미래의 지평까지 포함된 전체 역사연관을 토대로 해서 텍스트가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종말론적 지평이 역사 안으로 선취된다는 사유방식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신학과 해석학은 예수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세계의 역사가 끝나는 그 시간이 바로 계시가 완전히 드러나는 때이니까, 그리고 그때까지는 이 세계의 역사가 우연한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그 종말이야말로 해석의 아킬레스건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보편사 기획은 설교 행위에서도 역사와 종말의 변증법적 관계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적으로 성서의 모든 주제가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이 말은 곧 인간의 모든 계획들이 잠정적인 의미만 갖는다는 뜻이다. 교회당도, 그 조직도, 국가도, 그 어떤 것이라도 인간의 행위는 종말이 올 때까지만 잠정적으로 유효하다. 오늘 우리의 설교는 이러한 잠정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오히려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인간의 성과에 대한 절대화가 곧 우상숭배이며, 업적신앙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모든 인간의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종말이 절대적인 근거이기는 하지만 그 종말은 또 다시 역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죽은 자의 보편적인 부활이 예수의 부활사건에서 선취되었듯이 오늘의 역사는 그런 종말의 선취로서 의미를 갖기 때문에 비록 잠정적이지만 중요하다. 예를 들어 코스모스 씨앗을 생각해 보라. 그 씨앗은 아직 꽃을 피워내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 씨앗이 자신을 파괴해버린다면 꽃은 현실로 나타나지 못한다. 부활이라고 하는 꽃은 역사라고 하는 씨앗에 담겨 있다(고전 15:35이하 참조).

오늘 우리의 설교가 지향해야할 분명한 방향은 오늘의 현실을 보편사적 지평에서 해석하고 적용하는 작업이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 설교자는 다른 학문과 보편사적 대화를 준비해야 한다. 모든 학문은 바로 이런 보편사 내에서 나름대로 종말과 역사의 관계를 파악해보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그들과의 정상적인 대화는 설교자로 하여금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님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우리의 과업은 이 세상의 학문으로 하여금 이런 종말과 그것의 선취라는 구도 속에서 자신들의 작업을 펼칠 수 있도록 궁극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작업은 설교를 듣는 평신도 전문가들이 각각 자기의 영역에서 창조와 종말의 시각에서 활동하도록 돕고 자극할 것이다.

 

*이 글은 졸저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5>의 2장 ‘역사신학적 해석학 분석’을 기초로 해서 다시 엮었음을 밝혀둔다.

 

<각주>

1 바르트의 말씀실증적 신학은 종교사학파를 비롯한 소위 자유주의신학의 인간론적 접근을 타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당시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요즘과 같은 종교다원적 시대에 바르트식의 말씀실증적 접근을 주장한다는 것은 신학이 감당해야할 변증과 선교적 차원이라는 점에서 충분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지만, 바르트가 하나님 말씀을 신학의 존재론으로 삼았다는 건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신학적 힘으로 작용한다. 어떤 면에서 볼 때 바르트의 말씀중심적 신학이 여러 방향에서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모든 신학적 경향들이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할 표준석 역할을 하고 있다. 예컨대 해방신학이나 정치신학도 역시 말씀의 정치경제 사회적 해석이라는 점에서 바르트신학의 우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2 J. Moltmann, Theologie der Hoffnung. Untersuchungen zur Begründung und zu den Konsequenzen einer christlichen Eschatologie, Chr. Kaiser Verlag, München 1964. 몰트만은 이 저서의 서론에서 이르기를 ‘희망에서 시작한 신학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정향된 신학이 그 주제에 대해 어떻게 숙고할 것인가?’,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희망의 근거에 대한 질문, 또한 세계적 사고와 행위 안에 있는 이 희망의 책임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을 목표로 집필한다고 하였다.

3 J. Moltmann, The Experiment hope, Fortress Press, Philadelphia 1975, 46; J. Moltmann, Theologie der Hoffnung, 11. “실재의 기원은 시작에 있지 않고 그 종국에 있다.”고 피력한 블로흐는 몰트만의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신학적 사유에 결정적으로 사상적 동기를 부여했는데, 몰트만은 철저하게 종말론적 희망을 제기하므로써 그리스도교적 역사의 확실성과 하나님의 현실성을 확보해 보고자 하였다. 몰트만은 변증법 신학이 상실한 신학의 역사적 지평을 확고히 한다. 그 역사가 초월적인 세계로 넘겨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인 종말론적인 희망 안에서 -이는 곧 메시야니즘적 접근이라 할 수 있는데- 해석되고 적용된다.

4 W. Pannenberg, Heilsgeschehen und Geschichte, in: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Vandenhoeck & Ruprecht, Göttingen 1979, 22.(이하 GsTh Ⅰ로 약함). 판넨베르크는 1959년 1월5일, 부퍼탈에 있는 Bethel, Wupertal 신학대학 교수모임에서 이 내용을 강연한 바 있다.

5 GsTh Ⅰ, 78.

6 해석학(Hermeneutik)이란 용어는 원래 <해석의 기술>, 즉 <본문들로 부터 해석하는 기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W. Hochkeppel에 의하면 해석학은 <전승된 본문들로 부터 불을 지펴내는… … 기술>이다. 해석학의 어원학적 유래와 그 파생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으며, 다만 어근을 통해 볼 때 라틴어 vervum 혹은 sermo와의 관련 속에서 <sprechen>이나 <sagen>을 뜻한다. <참조> G. Ebeling, Hermeneutik, in: RGG, Bd.2, 243; H.G. Pöhlmann, Abriß der Dogmatik, Gütersloher Verlag, München 1960, 30.

7 W. Pannenberg, Über historische und theologische Hermeneutik, in: GsThⅠ, 123.

8 GsTh Ⅰ, 123.

9 K. Barth, KD Ⅰ/1, 1,7참조. 바르트는 <교회의 기능>으로서의 신학이 신앙적인 순종 안에서 급박한 하나님의 계시의지를 선포하는 운동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신학의 대상은 하나님의 계시 안에 있는 하나님,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는 이해한다. 따라서 바르트는 모든 신학의 출발점과 회귀점과 종착점을 말씀계시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0 W. Pannenberg, Eine philosophisch-historische Hermeneutik des Christentums, in: Theologie und Philosophie, H.4, 1991, 492.

11 W. Pannenberg, Wissenschaftstheorie und Theologie, Suhrkamp, Frankfurt am Main 1987, 265.(이하WTh으로 약함.)

12 W. Pannenberg, Systematische Theoligie, Bd.Ⅰ, Vandenhoeck & Ruprecht, Göttingen1988,59.(이하 SThⅠ로 약함). <조직적으로>(systematisch) 논의해야 한다는 말은 기독교의 진리성 문제를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현실성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의 정당성 여부를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적으로 바르트는 자신의 주저를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이란 이름으로 출판했으며, 판넨베르크는 <조직신학>(Systematische Theologie)으로 출판했다는 데서도 그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바르트는 KDⅠ/1의 1장에서 말씀론(The Word of God as the criterion of Dogmatiks)을 다루고 있으며, 판넨베르크는 SThⅠ, 1장과 2장을 진리론(1장:Die Wahrheit der christlichen Lehre als Thema des systematischen Theologie, 2장:Der Gottesgedanke und die Frage nach seiner Wahrheit)에 할애하고 있다.

13 W. Pannenberg, Was ist Wahrheit?, in: GsTh Ⅰ, 202, 222 참조.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미 확고한 진리를 소유했다고 가르쳤다. 경우에 따라서는 종교재판이란 명목으로 자연과학적 진리를 판단하려고 하였다. 계몽주의 이후, 그리고 오늘의 다원적 시대에 직면해서 교회는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학문과 진리론적 차원에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런 노력은 기독교의 진리를 상대화 하는게 아니라 세계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성서적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으로 살려는 자세이다.

14 Stanley J. Grenz, Reason for Hope -The systematic theology of Wolfhart Pannenberg,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1990, 10.

15 칸트는 기독교를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종교>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맹목적인 계시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이성의 검증 안에 있는 기독교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이성주의적 사고에 판넨베르크가 무조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하나님 인식에 이르는 길이 신앙에만 있다고 주장하므로써 진리의 보편적 지평을 상실했기 때문에 판넨베르크는 이성을 통한 하나님 인식을 신학적 해석학의 원리로 회복하려 할 뿐이다.

16 Brice R. Wachterhauser, aaO. 17. 이런 면에서 판넨베르크는 헤겔의 역사이해를 따른다. 헤겔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칸트 처럼 이성의 무시간적 가능성에 달려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인간의 인식을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현실성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헤겔의 입장에 서 있는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이성은 시간을 초월하는 순수이성이 아니라 역사적 이성(die geschichtliche Vernunft)이다. 판넨베르크는 이성을 다음과 같이 셋으로 구분하고 있다. 선험적 이성(die apriorische Vernunft), 인지하는 이성(die vernehmende Vernunft), 역사적 이성. GsTh Ⅰ, 244..

17 S.J. Grenz, aaO. 10; Jan Rohls, G. Wenz, Vernunft des Glaubens - Wissenschaftliche Theologie und kirchliche Lehre, Vandenhoeck & Ruprecht, Göttingen 1988, 5 참조. 본서는 판넨베르크의 60회 생일을 기념하여 출판되었는데, 서른 두명의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 네 가지 전공영역 별로 논문이 담겨있다. 이 저서의 제목인 <신앙의 이성>이 암시하고 있듯이 그들은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사유의 특징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성적인 변증>이라고 보고 있다. 판넨베르크는 이미 1965년 <Glauben und Vernunft>라는 글에서 이성적 이해가 제거된 신앙을 망상적 자기 구원이라고 지적했다. GsThⅠ, 202-222 참조.

18 Don H. Olive, Wolfhart Pannenberg, Word Books, Waco, Texas 1976, 13 참조.

19 W. Pannenberg, Einsicht und Glaube -Antworten Paul Althaus, in: GsThⅠ, 223-236. 판넨베르크의 이러한 입장은 최근의 저술인 <조직신학>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SThⅠ, 29ff., 86ff., 102ff., 138f., 239f.,243ff., 369f., 376f., … … ; <참조> Paul Althaus, Offenbarung als Geschichte und Glaube. Bemerkungen zu Wolfhart Pannenbergs Begriff der Offenbarung, in: ThLZ 87, 1962, 321-330. 알트하우스는 이 글에서 판넨베르크가 이성적 판단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계시는 이성만으로가 아니라 신앙적 기능을 동시에 요청한다고 피력하였다.

20 GsThⅠ, 227.

21 W. Panennberg(Hrsg.), Offenbarung als Geschichte, Vandenhoeck & Ruprecht, 5.Aufl., Göttingen1982, 99ff.(이하 OaG로 약함). 판넨베르크는 <역사로서의 계시>에 실린 “계시론의 교의학적 명제” 셋째 항목에서 말하기를 신성의 특별한 출현과는 달리 역사계시는 그것을 볼 눈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열려져 있다고 했다. 이 역사계시는 보편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에 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눈이 필요한 것이다.

22 OaG, 101./ 23 OaG. 95ff.

24 M. Eliade, Der Mythos der ewigen Wiederkehr, 1953, 162 참조. 엘리아데는 기독교의 종말론을 역사의 소멸이라고 간주한다. 이에 대해 판넨베르크는 엘리아데가 기독교의 종말론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SThⅠ, 204.

25 GsThⅠ, 227ff./ 26 GsThⅠ, 228.

27 W. Heisenberg, Die Einheit des naturwissenschaftlichen Weltbildes, Leipziger Universitätsreden Ⅷ, 1942, 32.

28 미래적 존재론에 대해서 각주 62를 참조할 것.

29 W. Pannenberg, Über historische und theologische Hermeneutik, in: GsThⅠ, 130. 판넨베르크는 루터주의와 경건주의 전통이 바로 이것이라고 하며, 이는 하나님 말씀신학이란 의미에서 권위적으로 전제된, 그리고 비판적 전망을 통해 근본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계시이해와 연관된다고 비판한다.

30 판넨베르크는 여러 곳에서 실존론적 해석학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변증법 신학을 향한 것 보다 더 분명하게 실존론적 신학을 비판한다. 그 이유는 실존론적 신학이 역사의 문제를 제기하기는 하지만 그 역사의 사실적 언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역사는 개인의 실존으로 폐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WTh, 169-173, 282-284; GsThⅠ, 100-103, 131ff. 참조.

31 GsThⅠ, 22.

32 R. Bultmann, Geschichte und Eschatologie, Tübingen 1964, 184.

33 R. Bultmann, Neues Testament und Mythologie, Das Problem der Entmythologisierung der neutestamentlichen Verkündigung, in: Kerygma und MythosⅠ, (Hrsg.) H.W. Bartsch, Hamburg 1967, 22.. <Entmythologisierung>은 <비신화화>, 혹은 <탈신화화>로 번역이 가능한데, 한국신학계에서는 비신화라고 통칭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어 <Ent->라는 접두어는 <脫>이라는 의미를 보다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탈신화화>로 쓰도록 하겠다.

34 B. Jaspert, 황현숙 역, 루돌프 불트만 신학의 재조명, 한국신학연구소. 서울 1991, 21-32 참조. 야스페르트는 불트만의 <Glauben und Verstehen> 제Ⅰ권 89와 90쪽에서 다음과 같은 불트만의 진술을 인용하여 불트만 신학의 실존론적 인식론을 설명하고 있다. “신(神)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신학이 이 대상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신앙이기 때문에 신학은 신앙을 전제하고 진술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 따라서 신학은 단순한 신앙 속에 있는 그것을 학문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신학은 신앙 자체의 움직임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여기서 일컬어지는 신앙이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이기 때문에 그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이해로 부터 출발하게 된다는 말이다.

35 R. Bultmann, Jesus Christus und die Mythologie, Hamburg 1964, 47 참조.

36 R. Bultmann, Das Problem der Hermeneutik, in: Glauben und Verstehen, Gesammelte Aufsätze, Bd. Ⅱ, J.C.B. Moher, Tübingen, 1968, 21-235; R. Bultmann, Wissenschaft und Existenz, in: ebd. Bd Ⅲ, 1965, 107-121; Ist voraussetzungslose Ezegese?, in: ebd, 141-151; Geschichte und Eschatologie, aaO. 참조.

37 Hermeneutik und Universalgeschichte, in: GsTh Ⅰ, 100.

38 AaO, 101.

39 R. Bultmann, aaO. Das Problem der Hermeneutik, 227, 235 참조. 불트만은 쉴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 그리고 하이덱거의 사유에 동조하는 반면에, 바르트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논박한다. 그는, 신화적 세계상 안에 있는 타당한 의미를 실존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그런 해석학적 과정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주장할 뿐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40 GsThⅠ, 102.

41 Georg Eichholz, Die Grenze der existentialen Interpretation. Fragen zu Gerhard Ebelings Glaubensbegriff, in: Tradtion und Interpretation, München 1965, 218; H. Zahrnt, Die Sache mit Gott, 1972, 263-266 참조. 에벨링에게는 역사적 예수를 실존적 관점에서만 이해하려 한 불트만의 사고가 남아 있다고 짜른트는 진단한다.

42 H.-G. Gadamer, Wahrheit und Methode, J.C.B. Mohr, 3. Aufl., Tübingen 1986. 307-312 참조. (이하 WuM으로 약함). 가다머의 책명 <진리와 방법>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해석학을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해석방법 내지 이해기술로만 생각하지 않고 근원적인 진리차원에서 접근하므로써 해석학의 지평을 매우 포괄적인 자리로 끌어올린 셈이다.

43 GsThⅠ, 107./ 44 WuM, 309./ 45 WuM, 298.

46 가다머의 영향사에 대해 WuM, 305 ff. 참조. 전승사와 영향사는 실존론적 해석학의 지양이라 할 수 있는데, 판넨베르크는 전승사를 단일성의 요청(Das Einheitspostulat)으로 해석한다. Peter Eicher, Offenbarung, Prinzip neuzeitlicher Thelogie, Kösel Verlag, München 1977, 439-453 참조.

47 WuM, 305./ 48 GsThⅠ, 106./ 49 WuM, 384./ 50 WuM, 392./ 51 WuM, 393./ 52 GsThⅠ, 112 참조.

53 WuM, 473.

54 WuM, 384; GsThⅠ, 115; 하이덱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근원적인 존재지평에 있어서 언어와 사유의 문제를 적절하게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과 해석자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히 언어이기 때문에 해석학을 언어학으로 생각할 만도 하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그 언어가 아무리 정밀하다고 하더라도 전체 역사를 뜻하는 보편사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조> M. Heidegger, Brief über den Humanismus, Weke Bd.9, Frankfurt am Main 1976, 319.

55 WuM, 387-494 참조; 하버마스는 가다머가 언어의 존재론화를 승인했다고 비판한다. J. Habermas, Zu Gadamers “Wahrheit und Methode”, in: Mermeneutik und Ideologiekritik, Frankfurt 1973, 212 f. 참조.

56 GsThⅠ, 116./ 57 GsThⅠ, 120 f. 참조./ 58 Ebd./ 59 GsThⅠ, 117./ 60 GsThⅠ, 118.

61 GsThⅠ, 119 참조. 전승의 현재적 요청은 불트만 이래로 신학적 해석학에서 적용된 원리이다.

62 클레이톤과 메켄찌는 판넨베르크의 초기 사유가 미래적 존재론에 착상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비판한 바 있다. 말하자면 판넨베르크가 하나님 인식을 미래로 의존케 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판넨베르크에게 하나님은 미상적 존재자다. Gott ist noch nicht, sondern wird erst sein.(SThⅠ, 397). 미래적 존재론이라 함은 참된 존재가 미래에 드러난다는 말인데 판넨베르크의 경우에 이런 미래 우위의 존재론은 묵시문학과 종말론을 존재론적으로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Philip Clayton, The God of History and the Presence of the Future, in: Journal of Religion65, 1985, 105; David Mckenzie, Pannenberg on God and Freedom, in: Journal of Religion60, 1980, 307-327참조.

63 Die Krise des Schriftsprinzips, in: GsThⅠ, 19.

64 판넨베르크는 헤겔의 보편사 이해에서 현실성을 찾고자 한다. 세계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놓여 있다는 헤겔의 이해가 기계적으로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사유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사는 예수계시에 의해 규정받아야 한다고 판넨베르크는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성을 보편사적 구도 안에서 찾고자 한다는 면에서 이 두 사람은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GsThⅠ, 139 참조.

65 현대 원자물리학과 우주물리학의 발전은 성서시대 사람들의 상상력이 미칠 수 없을 정도 까지 나아가고 있으며, 그 발전의 속도는 오늘 우리가 예측하거나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이미 사물과 물질은 어떤 실체로서가 아니라 공간과 운동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심지어 우주의 대폭발 이론도 확고한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면에서 신학이 물리학을 외면한 상태로 하나님에 대해 진술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신학이 과학이나 과학철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며, 다만 우리 삶의 현실인 물리학을 고려할 때 신학작업의 보편사적 지평이 요청된다는 말이다. 신학은 다음과 같은 하이젠베르크의 주장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현대 물리학이 철학적이며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이르기 까지 새로운 문제점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W.K. Heisenberg, 김용준역, 부분과 전체, 지식산업사, 서울 1989, 2.

66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해석학, 즉 역사를 가장 포괄적 지평으로 삼는 그의 신학적 방법론은 신학이 변두리 학문으로 내던져지지 않고 세계, 역사, 하나님, 인간문제의 중심부에서 주도적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갈 수 있다.

67 판넨베르크, 정용섭역, 신학과 철학, 435,436


[레벨:6]유희탁

2005.06.13 10:58:37
*.230.164.96

"설교는 인간에게 믿으라는 설득보다는 믿어야 할 대상을 설명하는 데에 모아져야 한다." 이 글이 저의 마음에 남았습니다. 설교는 설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라는 사실...그분을 소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잠시 느껴봅니다.

[레벨:0]섬돌

2007.04.20 20:16:44
*.106.110.177

해석학을 읽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네요^^
한편으론, 좀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있고...
가다머까진 잘 왔는데... 판넨베르크에서 걸리네요..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택스트의 당시지평과 해석자의 오늘지평만이 아니라, 미래의 지평까지 포함된 역사연관을 통한 것이 종말론적 지평이고, 보편사적 지평이라면,,, 쉽지 않은 일이네요.
종말까지 계속 은폐된 해석이 남는다는 건데, 그럼 한편으론, 오늘까지의 해석은 불완전하다는 말이 되니, 보편적이라고 할 수없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불완전한 해석을 전해야하는 사람들은 참 답답하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혹, 종말로 열려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보편사적 해석인가라는 생각을 얼핏해보네요.
또 한가지 의문이 드네요. 보편적이란 말은, 시공을 초월해서, 어디서나 참이라는 말인데,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택스트해석은 곧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보편적인 택스트해석과 동일한건지... 전혀 상이한 것이 없는? 존재론적 진리가 스스로 드러나는데, 혹 개개인의 편차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개별적인 편차가 존재한다면, 곧 보편적이란 말을 거둬들여야할 듯하고, 아님, 판넨베르크의 해석만 유일한 보편적 해석이고 나머진 다 주관적 경험적 해석이라는 것인지?
즉, 그 편차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곧 동시대인 개개인의 택스트해석이 동일하다는 결론인데... 이게 가능할까요? 수많은 다른 해석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다 헛수고 헛구원인지?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4.20 23:49:31
*.150.14.71

섬돌 님,
이런 구석에 있는 따분한 글 까지 읽으셨군요.
감사하고, 미안하게두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은 내 설명이 정확하지 않거나
나도 모르는 걸 썼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논의를 지금 다시 전개하기는 힘들고,
보편사 문제를 이렇게만 간단히 정리하겠습니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개념의 배경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이 세속사와 구속사로 나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판넨베르크가 볼 때 그런 구분이 의미가 없는 거지요.
역사는 역사일 뿐이지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랍니다.
물론 보편사 개념은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지만
기초는 위와 같습니다.
보편사적 해석학이 역사 안에 등장한 모든 해석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양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보편사는 말 그대로 우주론적 역사인데,
그 역사는 과거와 현재가 아니라 미래까지를 포함하는 거지요.
과거와 현재의 사건이나 해석들도 모든 역사가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될
미래, 종말로 지양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누가 옳으냐 그르나 하는 건 불필요한 겁니다.
종말이 오기 전의 현재 우리가 행하는 것들은
개방된 역사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시도들입니다.
오늘 우리의 해석에 따라서 종말은 달라진다고 할 수 있지요.
물론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역사는 어느 순간에 단절되는 겁니다만,
그 단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연속적인 단절이라고 보아야겠지요.
자꾸 말에 꼬리를 물고 있네요.
결론- 보편사는 구속사의 극복이다. 아멘!

[레벨:0]섬돌

2007.04.21 00:40:11
*.106.110.177

헛, 놀랬어요 목사님 ㅜㅜ
혼자 독백을 한건데 글을 다시다니 하하~~^^
몇 년 후나 답을 볼 거라면서 단건데요 ^^;;
. 노장사상 생각하면서.... 일체개공을 떠올렸습니다..
기독교의 영혼과 육신의 거리가 얼마나 될지 떠올렸구요..
수많은,,, 실존을 벗어난,,, 존재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 공이자 무인가요?
실존의 형해화가 곧,,,, 공인가요?
조승희씨는 육을 소멸하여 영육의 거리를 단번에 좁혔네요...
아니 근본적으로,, 영과 육의 대칭적 소멸점이 공인지.... 합일인지?
혹은 비대칭선에 있는데,,, 헛고생하는 것은 아닌지?

성육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네요..
존재 본질 이전의 신성이.... 본질로 내려와서 육을 입은 사건인가요?
그렇다면 비대칭선상에 있는 것인데...
왜 도를 깨닳았다고 하는지....
그리스도교와 타종교가 갈라지는 지점인 것 같은데.... 자신이 없네요..
불교를 모르니 도교를 모르니...

다만, 예수님의 성육신이 결국 분수령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종교의 화룡정점이구요..
반면에,,, 육을 취해서 오신 예수님도 있다는 생각에 희망을 가져보구요

넉두리 좀 했습니다 ^^;;

목사님의 작업이 아주 중요한 거라는 걸 직감합니다.... 기도하고 있고요^^
동시에,,, 산골 아낙네가 구원받는 종교가 기독교라는 걸 압니다^^;;
존재의 본질은 스스로 드러내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유무식은 상통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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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해석학 11장: 보편사적 해석학 -판넨베르크를 중심으로- [4] 2004-06-30 5310
10 기독교해석학 9장: 지평융해의 해석학 -게오르크 가다머를 중심으로- [1] 2004-06-30 6625
9 기독교해석학 8장: 언어사건의 해석학 -게르하르트 에벨링- 2004-06-30 6380
8 기독교해석학 7장: 실존론적 해석학-로돌프 불트만- 2004-06-30 6048
7 기독교해석학 6장: 해석학적 현상학 -하이데거를 중심으로- 2004-06-30 6525
6 기독교해석학 5장: 역사경험의 해석학 -딜타이를 중심으로- 2004-06-30 6576
5 기독교해석학 4장: 이해의 기술-쉴라이에에르마허- [2] 2004-06-30 5660
4 기독교해석학 3장: 해석학의 세 기능에 관해서 [2] 2004-06-30 5471
3 기독교해석학 2장, 해석학과 신학 2004-06-30 5401
2 기독교해석학 1장, 해석학과 성서 [17] 2004-06-30 8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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