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철학적 사유와 신학적 사유의 기초문제

철학이 사유라는 사실은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말이지만 신학도 역시 사유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신학은 인간의 사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능한 대로 정확하게 인식하려면 인간의 사유행위가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가 주관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심화하거나 확대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본래 ‘로고스’로 존재하면서 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차원에서 인간의 사유는 신학에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단순히 믿음만 필요하다는 강요만 난무할 뿐이지 그 믿음의 토대인 인식을 위해서 사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간과된다. 만약 앞으로 한국교회가 이런 철학적 사유와 신학적 사유를 계속해서 배척하거나 무시한다면 결국 이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유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가 희망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를 명확하게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1장에서 우리의 신학적 사유가 어떤 성격인지 최소한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주제를 검토해보자.

1. 존재

1929년 7월4일 하이데거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교수 취임 강연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Was ist Metaphysik?)라는 제목이었다. 거기서 그는 이미 오래 전에 라이프니쯔가 제기한 명제인 “왜 존재자는 있고 무(無)는 도대체 없는가?”(Warum ist überhaupt Seiendes und nicht viel mehr Nichts?)를 중심 주제로 삼았다. 보기에 따라서 말장난 같기도 하고, 또는 아주 당연한 말 같지만 이게 그저 당연하다고 치부해 버리고 말아도 될 만한 진술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오랜 동안 문제의식을 갖고 천착해온 존재 해명에 대한 근본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왜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하고 없는 것은 없는가?
이 질문은 근본적으로 ‘있음’과 ‘없음’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나 자신을 시작으로 해와 달, 나무와 돌, 온갖 생명체와 문화유산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물론 분명히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연히 그렇게 있어야 할 필연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우연하게 존재하게 되었을 뿐이다. 나에게는 딸이 둘 있다. 그 애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나의 아내와 내가 결혼하고 육체적인 관계를 가짐으로써 딸아이들이 존재자가 되어서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만약 내가 내 아내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혹은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다면 이 아이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의 존재 근원은 바로 나와 나의 아내, 그리고 육체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더라면, 또는 내가 내 아내와 다른 시기에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더라면 지금의 바로 그 딸아이들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이 태어났을 수도 있다. 또한 내 몸에서 배출된 정자 중에서 우리 딸아이들의 생명이 된 바로 정자가 아니라 다른 정자가 착상되었더라면 또 다른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존재 근원은 또 다시 옛날로 소급된다. 어디까지 소급되는가? 어쨌든지 나의 두 딸이 이 세계 안에 들어와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엄격히 말해서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존재자들만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존재할 수 있었지만 존재하지 못하게 된 것들은 도대체 무엇이며, 왜 그러한가? 예컨대 이 세상에는 왜 토끼라는 종만 존재하게 되었고 그것과는 약간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는가? 토끼와 거북이의 중간쯤 되는 그런 것들은 왜 없는가? 진화의 과정이 왜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어서 현재 존재자들만 존재하고 없는 것들은 왜 없는가?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오래 전 고은 시인이 티브이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시청한 적이 있다. 그는 진행자의 질문에 따라서 자기의 인생관과 문학관을 풀어가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대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원래 서정주 시인의 문하생이었던 고은은 출가하여 산사에서 수행하며 시작(詩作)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의문에 휩싸였다. 왜 이런 것들은 여기에 있고 그 이외의 것들은 없는가? 그런 사유의 혼란 중에 서정주 선생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아랫목에 앉아 있는 서정주 선생을 보면서 저 사람이 왜 저런 모습으로 이 시간에 저렇게 앉아있을까? 그 생각을 하게 되지 웃음을 참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방안이 떠나가라고 웃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서정주 선생은 “이 사람아, 웃지 마시게나.” 하고 말렸다. 그래도 고은 시인은 참지 못하고 그 서정주라는 존재가 너무나 우스워서 계속 웃어댔다.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서 젊은 사람이 무례하게 웃음을 참지 못하니까 결국 된통 혼쭐이 나서 쫓겨났다. 그 이후로는 서정주 선생 댁에 발걸음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2001년 여름 고은 시인은 고인이 된 서정주 선생을 비판하는 글을 썼는데, 이로 인해서 문학계 안에서 논란이 분분했던 적이 있다. 이런 사건을 고은의 사유 발전과 연관시켜서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시인의 정신적 세계가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데까지 확대되어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모든 현상하는 실체들의 근원을 탐색하는 사람들은 결국 존재 문제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왜 오늘의 세계는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 것일까?
철학은 존재론이라고, 즉 형이상학적인 존재론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은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존재하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해서 질문할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 앞에서 신학이 하나님의 존재를 언급할 때 주먹구구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의 존재론과 인식론이라는 틀을 완전히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외칠 수는 없다. 신학적 사유도 역시 존재에 대한 그들의 깊은 사유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그 미래를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만약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흡사 산신령쯤으로 생각한다면, 또는 권선징악의 원리쯤으로 생각한다면 그 집단에 속해있는 이들에게는 어떤 위안이 될지 몰라도 삶과 세계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가장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물질의 세계는 실체로서 설명되지 않는다. 물질은 공간과 에너지의 결합이지 무엇이 실체로서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물리적 사실 앞에서 과정철학은 이 세계를 운동과 변화로 설명하려고 했다. 만약 기독교가 하나님을 여전히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실체로 주장한다면 오늘의 물리학과 철학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받아들여야만 기독교의 가르침이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 범주 안에서 하나님을 설명해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다. 물리학과 철학에서 논의되는 존재론이 10리 앞을 달려가고 있는데 우리가 5리만 가면서 그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강요한다면, 그러면서 이것을 신앙이라고 우긴다면 선교적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고, 진리론적 차원에서는 더더욱 타당하지 않다. 오늘의 학문이 존재의 문제를 어떻게 사유하고 있는지 잘 살펴서 우리의 사유가 그 보편적 타당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존재 사유는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일단 이 차안의 세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는 이 세계가 무엇인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여기서 존재 문제를 새로운 지평으로 부각시킨 하이데거의 존재 이해 문제를 좀 더 자세하게 접근해 보자. 그의 설명에 따르면 존재 개념을 이해하는 길은 네 가지다. (H. Ott, 사유와 존재, 144 이하 참조)

1) ‘있다’ 개념으로부터.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는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존재는 어떤 자립적인 그 무엇이 아니지만 “존재자에게 있는”, 모든 존재자에게 있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우리는 ‘있다’를 다룰 때 첫째, 존재를 존재자와 구별해야 하며, 둘째, 존재라는 말로 우선 ‘있다’는 근본 개념을 이해해야하고, 셋째, 이 단어가 단지 사유에 의해 ‘발견된’ 개념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존재자를 사유함으로써 그것을 확인할 수 있긴 하지만 그 사건은 사유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존재의 교량적 기능에 속한다. 존재는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사유될 수 있도록 하는 전제다. 즉 존재는 사유 일반이 가능하다는 조건이다. 존재는 사유의 선험적 전제이다. 존재자의 존재를 통하여 존재라는 사유에 대하여 언제나 어느새 과제로 부과되어 있다. 존재 덕분에 존재자는 사유 가능한 것이 되고 존재라는 사유에 대하여 외면적으로 남아 있지 않고 사유에 의해서 ‘내면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2) 무(無)개념으로부터
하이데거에게 무는 근본을 이해하기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현존재(Dasein)인 인간 존재는 “무(無)속에 걸쳐 있음”(Hineingehaltsein ins Nichts)이다. 인간은 무의 간수자다. 무는 인간에게 존재자를 존재자로 계시한다. 즉 무는 존재자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계시한다. 무를 접하면서 인간은 “왜 존재자는 있고 무는 없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는 존재의 너울이다. 무는 근본적으로 존재 자체다. 무(無) 속에서 인간은 존재를 경험한다. “모든 존재자 가운데서 오직 인간만이 존재의 음성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존재자가 있다는, 모든 기적 중의 기적을 경험한다.”(42 쪽). 따라서 존재는 그 자체적으로 경이로운 사건이고 그 자체적으로 “존재자가 있다”는, 모든 기적 중의 기적이다.

3) 형이상학 개념으로부터
서양의 존재 개념은 존재의 본래적 본질을 묻는 질문을 가로 막는다. 존재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할 뿐이지 그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서양의 형이상학이 망각하고 있다. 존재는 사유를 가능케 한다. 따라서 진정한 사유는 단지 존재의 드러남으로부터만 존재한다. 존재는 사유에 대해 사유해야할 사상(事象, Sache)을 송달한다. 그래서 사유는 늘 존재의 역운(歷運, Geschick)으로부터 살아간다.

4) '사유되지 않은 것'이란 개념으로부터
헤겔은 이전 사유자들의 사유에 집착한 반면에, 하이데거는 그들에게 사유되지 않은 것을 질문한다. 사유되지 않은 것은 단순히 무가 아니라 모든 사유의 전제이다. 사유되지 않은 것은 사유된 것보다 우선한다. 말하자면 존재는 사유되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한쪽의 이론이 다른 이론을 정복하는 게 아니라 서로 어울려 참된 사상(事象, Sache))에 접근하게 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운반 수단이 곧 존재다. 참된 대화가 가능하려면 대화자들이 남과 더불어서 사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대화는 ‘사상의 요구’가 실제로 타당성을 획득하는 데서 결국 하나의 선물이고 순수하게 단지 ‘발생사건’이고,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은사이다. 하인리히 오트의 해설을 직접 들어보자.

하이데거의 사유는 신앙의 결단 없는 철학이고, 이미 모종의 신학을 몰래 포함하고 있지 않은 철학이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미리부터 신학자들이 한정해 놓은 테두리 안에 있어 단지 형식적인 면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강조되어, 신학적인 진술을 앞질러서 형식적으로 결정하는 철학이 아니다. 도리어 그의 철학은 세계 안에 있는 인간의 사실적 상황을 소박하게 숙고한다. 사유하는, 즉 철학하는 인간의 상황을 숙고한다. 그의 철학은 바로 그렇게 탁월한 의미로 단적으로 역사적인 세계 속에 있는, 단적으로 역사적인 인간 존재의 철학으로서 모든 역사의 작동자인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비운다.(H. Ott, 176).  

2. 세계

모든 인간이 직면해서 살고 있는, 그 안에 살고 있는, 그렇게 피투되어 있는(Geworfensein) 이 세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현상의 궁극적 토대는 무엇인가? 대개의 사람들은 이 세계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갖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가고 경험하고 있는 산과 강과 숲과 도시에 매우 익숙하게 적응하고, 거기서 평안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약간만 시야를 다르게 하면 이 세계는 놀랍도록 ‘황홀’하기도 하고 충격적으로 ‘불안’하기도 하다.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생명의 유일한 보고이기 때문에 황홀하지만, 그 생명의 토대가 너무나 빈약하다는 점에서 불안하기도 하다.
일단 우리의 세계를 지구에 한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만약 다른 별에 살고 있던 어떤 생명체가 지구를 방문했다고 하자. 그의 눈에, 그에게 눈이 있을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지구는 어떻게 보일까?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서 지구의 어른들은 모두가 고정 관념 가운데 빠짐으로써 결국 실상을 올바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어느 별에서 온 어린 왕자는 사물의 참모습을 직관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시각이 고착화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아마 외계인에게 이 지구는 놀라운 세계로 보일 것이다. 생명 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찬란한 색깔은 지구에서만 가능하다. 이 색깔을 처음 본 외계인의 경험은 아마 수술을 통해서 시각장애를 극복한 사람이 이 세상을 처음 본 것과 비슷할 것이다. 바다 깊은 곳에서부터 깊은 숲 속에 이르기까지 온갖 생명체로 가득한 이 지구가 얼마나 경이롭게 보이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생명 현상이 지구 자체에 확실한 토대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어느 것에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우리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결정적으로 지구는 태양에 의해서만 생명을 생산해낼 수 있다. 태양으로부터 아주 절묘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구에는 이런 생명이 등장하고 보존될 수 있다. 만약 태양 빛의 10%만 줄어들거나 늘어난다면 이 지구는 전혀 다른 별이 되고 말 것이다. 지구는 태양의 수명이 끝나게 될 50억년 후까지만 생명을 생산할 수 있다. 어쩌면 그때까지 갈 필요도 없이 빙하기가 되면 이 생명 현상에 또 다른 결정적인 변화가 있게 될 것이다.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렇게 화려하고 풍요로운 생명 현상의 토대가 자기 자신에게 놓여 있지 않고 다른 것에 의존해 있다는 사실은 이 지구의 한계를 드러내 준다.
우리의 관심을 좀 더 넓은 곳으로 확대해보자. 지구만이 아니라 태양계까지 확대시켜보자. 은하계를 비롯해서 우주 전체에까지 시야를 넓혀보자. 그 우주는 무엇인가? 왜 그렇게 있는가? 언제 시작했고 언제 끝나는가? 시작하기 이전은 무엇이고 끝난 다음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런 궁극적인 의문점을 완전하게 풀어낼 길은 없다. 오늘의 첨단 우주 물리학이 우주여행을 시작하긴 했지만 그것을 풀어낼 길은 아주 요원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태양에 가장 가까운 별이 2-3광년 거리에 있다고 하는데, 어느 세월에 그 별을 탐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구의 형제들인 금성과 목성을 알기도 힘든 마당에 말이다. 1광년의 거리는 60초(분)×60(시간)×24(하루)×365(일년)×300,000km이다. 9조4천6백8억 키로 미터다. 우주 탐험이라는 것은 모래 한 알로 사막 전체를 해명하려는 작업보다 훨씬 힘들다. 그러나 언젠가 먼 미래에, 광속에 가까운 비행체를 만들어서 그런 연구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주의 비밀이 벗겨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참고적으로, 우리가 광속의 비행체를 만들 수 없는 가장 근본 이유는 무한에 가까운 질량의 물질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 에너지가 개발된다고 하더라도 광속을 현실화시키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필요하다. 예컨대 현재의 비행기 소재로는 아무리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더라도 초속 30만 키로 미터를 낼 수는 없다.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한 이후로 40여 년이 흘렀어도 지구와 달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다만 달에 대한 몇 가지 지질학적 정보를 얻었을 뿐이지 지구와 달의 근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앞으로 백만 년 후에 가장 가까운 별을 여행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역시 우주를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거시(巨視) 물리적 세계만이 아니라 어쩌면 미시(微視) 물리의 세계를 아는 게 더 힘들지도 모른다. 거시의 우주는 너무 멀어서 실증적인 확인이 쉽지 않은 반면에 미시의 물리 세계는 너무 작아서 접근하기 어렵다. 소립자의 세계가 약간씩 벗겨지고 있지만 그것으로 물질의 세계가 완전히 드러났다고 믿는 물리학자는 없다. 작은 세계는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는 것만큼 우리에게 드러날 뿐이다. 우주가 무한히 큰 것처럼 미시 세계도 역시 무한히 작다. 무한한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현재 우리의 지식에 비하면 무한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자연과학의 작업이라는 것은 그것이 활발하면 할수록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뿐이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더욱 많아지는 세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거시든지 미시든지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과학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과학이 존재자의 근원을 완전히 밝혀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할 아무런 근거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세계와 자연, 그리고 그것을 현상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존재는 인간의 활동인 과학을 근본적으로 넘어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미 구약성서 기자들도 이런 세계에 대한 무지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주변의 다른 종교들처럼 자연을 신으로 섬기지 않고 신의 피조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자연의 광대함 앞에서 그들은 놀라워했고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놀라움으로 이어졌다. 태양, 바다, 화산, 지진, 홍수, 전염병 앞에서 성서 시대의 고대인들이 어떤 두려움을 가졌을는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모든 세계의 존재가 얼마나 신비한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신비의 힘이 바로 하나님에게 있었다고 생각하고 그런 신앙을 키워나갔다. 비록 오늘의 과학이 이런 자연 위력을 상당 부분이 설명해주었지만 고대인들이나 우리가 가릴 것 없이 여전히 이 세계와 그 존재의 신비 앞에서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다.

*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적 실존은 놀라움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사실 앞에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충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사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런 놀라움은 루돌프 오토가 말하는 ‘누미노제’의 경험이기도 하다.(R. Otto, Das Heilige) 이 ‘세계’와 연관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 앞에서 놀란다. 욥기서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의 근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창조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게 곧 창조신앙이다.

다시 한 번 더 질문하자.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이런 세계*는 과연 무엇인가? 우연하게 이렇게 존재하게 되었나? 아니면 어떤 인격체의 의지에 의해서 이렇게 되었나? 철학자들은 이런 세계의 보편적 근거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려고 애를 쓰는 이들이다. 동양 철학자들은 일단 접어두고 서양 철학자들만 잠시 살펴보아도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데는 충분하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를 말했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연원하고 있는 그 어떤 실체가 있다는 의미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또는 반복적으로, 혹은 우연하게 있음과 없음을 반복하는 이 세계가 바로 이데아에 의존되어 있다는 말이다. 한편 탈레스 같은 이들은 만유의 본질을 물이라고 했으며, 헤라클레토스는 불이라고 -이는 곧 변화와 생성이라는 뜻인데- 했으며, 데모크리토스는 원소라고 했다. 헬라 철학자들은 물, 불, 흙, 공기 등, 이런 저런 방식으로 이 세상을 설명해보려고 했다. 그들만이 아니라 오늘의 철학자들도 역시 그렇다. 중세기의 유명론과 실재론 논쟁을 비롯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나 로크 같은 이들의 경험론도 역시 이 세상의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을 밝히고 인식해보려는 철학사와의 연관 선상에 자리하고 있다. 칸트의 선험적 이성이나 헤겔의 절대 정신도 역시 이 세계 현상 앞에서 겪게 되는 인간의 당혹감을 나름대로 해결해보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은 모든 현실적인 것들의 창조적 근원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모든 현실적인 것들, 즉 인간과 코스모스의 유래와 연관래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유는 여전히 실제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나님과 모든 현실적인 것들의 전체가 공속적이며 서로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공허한 낱말이 될 뿐이거나, 아니면 사실적인 바탕이 없는 빈 표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표상은 예를 들어 신인동성동형론이나 종교적인 투사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판넨베르크, <신학과 철학> 18쪽)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런 철학사적 궤적을 따라잡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 인간 사유의 토대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세계라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 혹은 질서들을 늘 새롭게 사유의 토대로 삼아야만 그 사유가 바른 길에 놓이게 된다. 특히 신학이나 설교 행위에서 이런 세계성을 놓침으로써 매우 극단적인 추상성으로 떨어져버리는 경우가 많다. 다른 한편으로 이 세계를 직관하고 사유함으로써 신학은 주변의 모든 학문들과 보편적인 대화를 수행해 나갈 수 있다.

3. 인간

이 세계를 말할 때 앞서 언급한 자연과 그 현상만이 아니라 더 중요한 요소는 인간 자체일 것이다.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서의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이런 인간을 가리켜서 현존재라고 했는데, 그만큼 존재 해명에서 인간의 역할이 핵심적이라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계를 역사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세계에서 아주 독특하게 존재하고 있는 동물이다.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세계를 의식함으로써 세계를 변형시켜 나간다. 이 변형이 곧 문화다. 창세기에 보도된 인간 창조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에게만 독특한 과업이 주어졌다. 아담은 다른 동물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는 곧 인간에 의해서 동물의 속성이 부여되었다는 말이다. 창세기 설화에 의하면 인간이 죄를 범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간이 세계를 관리하게 되었다. 사실 다른 동물들에게는 죄라는 말이 성립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주어진 본능에 따라서 서로 먹고 먹히며, 탐욕이 아니라 생존 원리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그런데 인간만은 생존 너머에 있는 어떤 실체를 향해서 치열하게 행진한다.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진다는 욕망에 의해서,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세계를 알게 된다는 것인데, 선악과를 선택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있었겠지만 자기를 파괴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알고 싶었다. 이런 밝은 세계를 향한 열망은 결국 타락의 길이면서 동시에 문명을 개척하는 길이기도 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문명의 길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에 토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멸망*의 길이기도 하다.

* 2005년 한 해는 황우석 박사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로 한국사회 전체가 열병과 홍역을 앓았다. 그 해가 저물어가는 11월까지만 해도 그의 연구는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희망으로 받아들여졌지만 12월부터 세기적 사기사건으로 급전직하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오늘의 문명이 신의 영역이라 할 생명 문제까지 접근하고 있는 인간의 기술이 인간을 구원으로 끌어가는 기회가 아니라 파멸의 길로 빠져들게 하는 유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눈이 아무리 밝아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진리를 이해하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자기를 성취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한 결코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문명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신에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고 있는 소수 종족 중에서 내면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종족들이 있는 걸 보면 인간의 삶에서 눈의 밝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도대체 인간은 세계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있을까? 인간 역사의 특징이라 할 문명의 본질은 무엇일까? 은폐되어 있는 이 세계는 아주 유약하고 자기 연민에 자주 사로잡히고 욕망 덩어리인 인간에 의해서 조금씩 탈(脫)은폐의 길에 들어섰다. 그 탈은폐가 바로 헬라어로 진리를 가리키는 “알레테이아”의 근본 의미다. 밝은 눈을 갖고 싶다는 아담의 염원이 지금까지 인간종(種)을 지배해 왔다. 즉 인간에 의해서 이 세계는 노출되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역시 그런 길을 가고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인간에 의해서 불이 참된 모습으로 등장했다. 인간 이외에 어떤 동물이 불을 통해서 물리적, 화학적 변형을 모색할 수 있는가? 불에 의해서 이 세계는 열려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자기 자신과 세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이 존재론적으로 자기를 들어내는 게 바로 언어 현상이라고 하는데, 이런 문제는 2장에서 자세하게 언급할 예정이니까 여기서는 접어두자. 어쨌든지 인간은 언어라는 매개로 인해서 아주 특별하게 존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고 변형시켜 나갔다. 언어에 의해서 자연과학의 세계까지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불과 언어만이 아니라 인간의 특성은 여러 요소로 설명될 수 있다. 도구를 사용한다거나, 종교를 갖고 있다거나, 사회적이라거나, 놀이를 한다거나, 여러 부분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이성이 인간 특성의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보아서 ‘호모 사피엔스’를 거론한다. 그런데 약간 특이하게도 이 모든 인간의 특성이 ‘호모 에렉투스’에서 출발했다는 주장도 있다.(졸저, 기독교를 말한다, 213 이하 참조). 인간의 조상 중에서 우연한 기회에 직립의 자세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이들이 있었는데, 이런 직립의 결과로 뇌의 용량이 늘어나고 성대도 발달하게 되어서 결국 다른 동물들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생각을 할 수 있고 의사교환을 다양하게 할 수 있게 되면 당연히 탁월한 경쟁력을 확보하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헬라 철학 시대부터 인간은 모든 사유의 기본이며 척도였다. 피타고라스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고 일컬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달이 달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그것을 달이라고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동물이 오직 인간뿐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인간이 모든 존재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도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인간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지배받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인지는 종말에 가 보아야만 알 수 있지만, 어쨌든지 현재는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세계 안에서 참으로 특별한 위치에 있는지, 아니면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서 유기적으로 한 사슬의 역할만 하고 있는지 계속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만약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 비해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고 한다면 오늘의 이런 문명 현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다른 생명체와 별 다를 게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만 한다. 물론 현재 드러난 현상만 보면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인간의 제왕적 자리가 당연한 듯이 보이지만 약간만 눈을 돌리면 그렇지 못한 부분이 너무나 많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지구의 나이가 현재 45억 년쯤 되는데, 인간이라고 부를만한 종이 지구에서 명실상부하게 다른 동물들을 제압하고 살게 된 2,3백만 년 정도 될 뿐이다. 그 이전에는 다른 동물들이 지구를 지배했다. 인간의 문명만 생각한다면 1만이나 될까? 앞으로 인류가 계속적으로 지구에서 이런 위치를 유지한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어떤 아주 사소한 문제로 인해서 멸종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책의 주제이기도 한 것이지만, 세균과 인간의 싸움에서 결정적인 승리는 결국 세균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인간과 그 문명이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개미가(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인간> 참조) 이 지구의 진정한 주인일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문명을 바탕으로 목청만 높이는 이들인지 모른다.
이런 궁극적인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인간은 이 세계 안에서 아주 특별한 자리에 놓여 있는 건 분명하다. 자신의 운명을 예측하고 받아들일 줄 안다. 죽음을 의식한다는 건 그것을 초월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죽음을 초월할 수 있을 때만 단순한 생명 현상이나 물리 현상을 뛰어넘는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만의 특별한 기능이 있다. 이런 점에서는 종교가 감당해야 할 아주 확실한 역할이 있다. 인간의 모든 학문적, 실천적 노력을 하나로 집약시킬 수 있는 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그 방식은 다른 이들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지평에서 전개되어야 하며, 따라서 철학적 사유는 그것의 기초라 할 수 있다.
이런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한 전(前)이해를 바탕에 두고 신학은 인간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꾸준하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저 단순하게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을, 죄인이라는 점을, 구원받아야 한다는 점을 일방적으로 외치기만 해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훨씬 근본적인 자세에서 철학적, 생물학적, 종교적 인간론과의 대화를 통해서 기독교의 사유를 심화시켜나가야 한다. 말하자면 인간론은 철학적 사유만이 아니라 신학적 사유에서 기초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시간

위에서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초월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는 곧 인간이 시간을 의식한다는 뜻이다. 동물들은 현재에 묶여서 살지만 인간은 과거와 현재를 통시적으로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 미래까지 생각한다. 이렇게 인간의 인간적 특수성을 가장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간이 무엇인가? 시간은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되는가? 시간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실체인가, 아니면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불과한가? 이 시간의 문제는 기독교가 역사적 종교라는 점에서도 신학적 사유에서도 특별히 중요하다.
우선 우리의 작은 경험에 대한 직관으로부터 풀어가자. 우리 각자는 20년, 30년, 또는 40년 동안 각각의 세월만큼 이 지구에서 살아왔다. 우리는 그런 인생의 세월을 길다, 혹은 짧다고 표현을 하지만 그 시간의 양을 측정할 방도는 그 어디에도 없다. 50년도 역시 과거이며 하루도 역시 과거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많고 적은, 길고 짧은 문제가 아니라 지나갔다는 사실만 남는다. 인생을 정리해야할 나이에 이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빨리 지나갔다고, 또는 참으로 허망하다고 말하게 되는데, 이처럼 시간이 덧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시간은 단지 우리가 주관적으로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주관적 문제이지 어떤 객관적 실체로 존재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삼십 년 전이 바로 어제 같을 수 있고, 어제가 바로 삼십 년 전 같을 수 있는 게 바로 시간이라는 말이다.
이 문제를 약간 과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해보자. 우리에게 측정되는 시간은 태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이 바로 일 년, 365일이다. 지구의 자전이 하루, 24시간이다. 이런 자전과 공전이 지속됨으로써 시간이 흘러간다고 여긴다. 만약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없다면 시간도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시간이 진행될까? 우리가 시간을 숫자로 표시할 때는 이렇게 자전과 공전이지만 시간을 체감하는 것은 어떤 사물의 변화에 있다. 꽃이 피고 진다거나 인간이 늙으면 시간이 흘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사물의 변화가 없다면 시간도 없어지는 것일까? 늙거나 죽는 게 없는 천국에는 시간이 없는가? 시간은 절대적인가, 아니면 상대적인가? 시간은 어떤 공간에서나 일정하게 흐르는지, 아니면 다르게 흐르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시간이 장소에 따라서 다르게 흐른다는 것은 납득이 안 된다. 아인슈타인이 시간을 빛의 속도 안에서만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그 빛의 속도를 극복하면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것이 상대성 이론에 담겨 있는 내용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런 문제는 우리의 실제 삶에서는 경험될 수 없는 일종의 선험적 물리의 세계에서나 타당하다. 실제로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고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적 세계를 훨씬 뛰어넘는 현상에 불과하다.
*어느 선승에 얽힌 이야기다.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매일 용맹정진 하던 선승이 어느 날 잠시 쉬러 앞마당으로 나왔다. 그 마당에 서 있는 나무에서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일이야 늘 있어 온, 그런 일상사였다. 그런데 이 소리가 얼마나 좋았든지 이 선승은 선방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그냥 그 소리에 푹 빠져 버렸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수행하던 선방에 들어갔더니, 바로 얼만 전까지만 해도 함께 수행하던 도반(道伴)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모두가 낯선 이들 뿐이었다. 이 선승은 깜짝 놀라 한 사람을 끌고 나와 아무개 아무개가 어디 가고 당신들만 있는가 하고 물었다. 이 질문을 받은 그 사람은 그 아무개라는 사람은 이미 30년 전의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이 선승이 잠시 새소리에 정신을 빼앗긴 그 순간이 30년이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선승에 얽힌 이야기들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서 빗겨날 때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의 본질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시간은 그렇게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순간이 영원일 수도 있고 긴 시간이 순간일 수도 있다. 동시에 이 문제는 시간과 공간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질문과 연관된다. 공간은 시간과 더불어 완전히 사라지는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정한 방식으로 여전히 존재하게 될는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질문인 것 같다. 최후의 심판 때 우리의 모든 일들이 밝히 드러난다는 예수의 비유에 따르면 공간이 시간과 별개로 자리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예수의 비유를 이렇게 비약적으로 읽는 것은 올바른 해석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물리학의 통찰과 더불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도 우리에게 이런 사유의 지평을 열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문제는 기독교 신학에서 ‘종말론’에서 언급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역사철학이라 할 종말론은 이 세상을 시간의 차원에서 바라보면서 아직 우리에게 당도하지 않은 종말의 지평에서 이 세계 전체의 역사를 역망(逆望)하는 신학적 관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시간과 역사 문제를 논의할 때 과거와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 차원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어쩌면 세계와 인간과 시간에 대한 사유에서 가장 근본적인 차원은 오히려 미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여전히 결정되어 있지 않고 미래를 향해서 열려져 있기 때문이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세계에 대해서 과거와 현재의 사태만 기준으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완전히 결정될, 그 참된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게 될 미래야말로 사물과 현상을 논의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재판정이다. 특히 기독교 사상은 종말론이라는 교의를 통해서 이런 미래에 대한 전망을 열어왔다. 이런 종말론적 지평이 일종의 추상적 교의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을 실제적으로 견인해나가는 역동성으로 작용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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