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펴서 붙들라!

살전 5:21

1744년 당시에 신학생이었던 게르하르트 자무엘 힐가르트는 한 친구에게 작은 기악곡집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힐가르트는 4년 후에 바카라흐 교회의 2대 담임 목사가 될 예정이었으며, 동시에 바카라흐 시(市)의 연대기를 집필해야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기악곡집에는 라이프니츠의 어록과 더불어서 사도 바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편지에 들어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데살로니가 공동체에게 보낸 바울의 첫 번째 편지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21절에 쓰여진 그 말씀은 “모든 것을 헤아려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은 영적으로 성숙해지도록 자극하는 초기 기독교의 해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종교와 국가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적 전통을 통해서 정당화된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과는 정반대 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종교의 영역에서 전승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 특히 성서 말씀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정치적 영역에서는 이러한 권위에 대한 비판이 개개인에게 주어진 고유한 권리라는 점에서 성숙한 판단력을 배양시켰으며, 공화주의적 성향으로 교육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화주의적 성향은 그 이상의 조치가 없이는 그 어떤 항구적인 정치 체제를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바울의 이 말씀을 칸트의 유명한 표현형식으로 바꿔보면, 자기의 오성(悟性)을 이용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요구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전반적으로 바울의 생각과 어울립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성과 대립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비합리적인 열심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적 시각은 이와 반대입니다. 우선 신앙적인 면에서 인간은 완전히 영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 이해됩니다. 신앙의 뿌리는 하나님의 이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인간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신앙인들이 세계 사물에 대해서 사려가 깊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국가, 혹은 그 어떤 것을 하나님과 혼동하지 않도록 지켜줍니다. 신앙은 이 세계 사물이 그것 자체만으로는 주목할 만하지 못하다는 점을 가르쳐줍니다. 대신에 세상의 사물을 하나님의 창조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 창조는 자기의 한계 내에서 하나님이 원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기의 모든 개개 피조물에게 사랑으로 대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진지성과 영적인 성숙성에 이르도록 해방시킵니다. 그래서 바울이 “모든 것을 헤아려보고 ....”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과 교회의 선포에서 더욱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헤아리라는 사도의 요청은 이 편지의 맥락에서 볼 때 우선적으로 교회 내에서 발견되는,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미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예언자의 말씀과 관련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바로 여기 교회의 선포라는 관점에서 이성의 판단을 통해서 냉정하게 헤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개신교회의 신앙은 신앙과 이성을 공평하게 연결하는 작업을 새롭게 펼쳐나갔습니다. 이성과의 결합이 없었다면 기독교 신앙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진리라는 사실을 인식시키지 못했을지도 모르며, 또한 유지시킬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만약 참된 이성과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선교를 통해서 자신의 진리를 전(全)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증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확실성을 갱신시킬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가 자신을 설명함으로써 얻은 소득이었습니다.
신앙은 이성을 통한 비판적 시험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비판적 시험은 이성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그리고 실제로 선입견을 부추기거나 시각을 협소하게 만드는 교의나 ‘예언’과 관련되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바로 교회의 설교에서 자주 드러나고 있는 시대의 정신적 풍조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중요한 것은 특별히 심리학과 사회학이 제시하는 약속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논리에서 개인과 사회가 구원받기를 기대합니다. 개개인들의 인간적 정체성과 인간들이 사회적 공생을 통해서 이루어야 할 최고의 정의는 여기서 달성되어야만 할 목표로 여겨집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전혀 없이도 말입니다. 바로 이런 세속적 예언자들에게 해당되는 사실은 그 어떤 단순한 권위적 신앙에도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과 그 어떤 학문적 미신에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특별한 기준이 오늘의 본문 말씀에 들어있습니다. “모든 것을 헤아려보고 ...” 그러나 이성의 이름으로 실행된 하나님과 그 계시에 대한 비판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비판이 필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게르하르트 자무엘 힐가르트는 1792년에 계몽과 이성의 이름으로 등장한 하나님과 그 계시에 대한 거부 앞에서 계시 종교인 기독교를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종교 비판가들로 하여금 이성의 시험에 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 책의 제목대로 이신론자들과 자연주의자들의 ‘어리석은’ 불신앙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는 이성을 신앙과 적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이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사적인 내면세계로 퇴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적인 내면세계로 퇴각하는 일은 유감스럽게도 기독교 신앙의 역사에서 종종 발생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헤아리라는 이 강력한 요청은 사도 바울이 기독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이 요청은 우리가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만할 대단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다른 곳에서 좀더 분명하게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 세계를 판단하며, 더욱이 천사까지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고전 6:2,3). 이 말은 어딘가 도에 넘치는 발언같이 들리지 않습니까? 이성은 우리의 판단이 늘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바울에 의하면 사실상 그 시험은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즉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갈 6:3).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을, 즉 자기의 믿음과(고후 13:5) 자기 행위를(갈 6:4) 비판적으로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시험의 필요성은 신(神)적인 이성의 불빛에서 출발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확실히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시험하고 검증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전체 인생은 우리의 신앙을 확증하는 길이며, 또한 시편 기자가 말했듯이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시험받는 길입니다(시 17:3, 139:23 참조). 특히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과 시련은, 그리고 우리가 감당해야만 할 어려운 결단은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자신의 아들을 희생물로 바치라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시험받은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세 번에 걸쳐서 시험을 받았고, 또한 십자가의 길을 가야한다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 역사를 하나님에 의한 시험의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렘 9:6, 6:27이하 참조). 예레미야에 따르면 이런 시험의 결과는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시험 앞에서 우리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일이, 회개가, 즉 하나님과의 새로운 일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과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써 이러한 일치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받은 기독교인들도 여전히 하나님에게서 시험을 받습니다. 우리의 일생에서 단 한번의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돌아서는 일이 발생하지만 그래도, 또한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자기 시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불빛에서 우리 자신을 판단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 심판과 어긋하게 행할 때가 많으며, 그래서 그 심판의 불은 하나님의 뜻에 상응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든 것을 삼켜버립니다(고전 3:16). 신적인 진리의 불빛에서 우리를 판단하는 것을 우리가 배우게 되면 그때에야 우리는 바로 그 기준에 따라서 다른 이들의 행위와 생각을 시험하기 위해서 필요한 냉정함을 획득하게 됩니다. 우리가 시험받아야 할 그 기준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인간의 죄는, 즉 참된 길의 상실은 인간이 다른 이를 판단하기 전에 하나님의 진리라는 불빛에서 자기 자신을 시험하는 게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모든 것을 헤아리라는 요청은 이 시험이 우리를 시험하는 하나님의 진리의 불빛에서 일단 우리 자신에게서 출발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놓치게 되는 경우에 아주 쉽게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흡사 이성의 자유와 아주 간단히 교체되는 자기 영광이 이를 통해서 정당화되는 것으로 말입니다.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사물과 타인을 정당하게 대하는 일에서만 지장을 받는 게 아니라 이성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거절하게 되고 하나님에게 돌려야할 존경을 거부하게 됩니다(롬 1:28). 이미 게르하르트 자무엘 힐가르트는 이것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또한 매우 비이성적인 것이라고 간주한 바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기 자신을 시험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것을 시험하도록 요구된 이성의 냉철함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있는 이성은 신앙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로워집니다. “진리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오.”(요 8:32). 그 진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그럴 때만 우리는 이성의 냉철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이 시험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해야만 할까요? 이 세계 사물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관계는, 인간과 그 생각들은 어디서 시험받아야만 할까요? 단지 사물과 인간, 그리고 그런 관계가 우리에게 쓸모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에서만 시험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기준에서만 판단한다면 하나님과 그의 뜻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라고 말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좋은 것, 이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것은 곧 우리 인간에게도 좋은 것이며, 공통의 좋은 것이며, 우리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성의 시험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공통의 이해와 타당성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성이 모두에게 필요한 토대를 형성하기 때문에 바울은 이성을 매우 높게 평가했습니다. 따라서 이성은 사랑이나 관용과 매우 가깝습니다. 기독교가 자신을 해명할 때 신앙과 이성의 결합을 갱신함으로써 기독교 역사에서 나타난 관용에 대한 오랜 억압의 역사와는 반대로 관용의 새로운 연대기를 끌어냈는데, 이 일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오늘 여기 모인 가족들과 친척간인 바카라흐 목사의 조상들도 신앙 문제의 비관용과 열광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 경우에 바로 여기 바카라흐에서 벌어진 기독교의 유대인 증오와 기독교의 유대인 박멸이라는 부끄러움을 우리는 기억하게 됩니다. 이 도시에 있는 파괴된 아름다운 교회당은 바로 그것을 기념하는 것인데, 바로 유대인에 의해서 살해당한 소년인 성 베르너 기념교회당입니다. 여기서 이제 신앙적 대립의 열광주의가 제거되었다는 것은 기독교적 계몽의 명예입니다. 이런 연관에서 볼 때 에라스무스 테오도르 엥엘만의 활동은 개신교 사이에서 출현한 대립을 극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좋은 것이 어디서 시작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늘 당연한 게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인이 ‘이성적인 예배’의 대상을 찾아내는가 하는 것이 시험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삶의 문제에 해당되며, 우리가 이 세상과 재물을 필요로 하는 것과 연관됩니다. 또한 이것은 사회의 구성이나 정치질서에도 해당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에 기독교적인 해명은 좋은 것을 판별하는 기준이 전적으로 자주적 판단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에 의해 확증되었습니다. 이 기준은 우리의 외부에서 우리와 대면해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유는 좋은 것의 준거입니다. 이 준거는 하나님의 진리에서 자라며, 또한 노력해서 얻어질 수 있고 보장될 수 있는 좋은 것을 명백하게 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이곳 바카라흐에서 하나가 된 두 가족사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가족사의 가장 결정적인 사건에서 그것을 볼 수 있는데, 즉 독일에서 시민의 자유사상이 억압받았던 1831년 이후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많은 엥엘만과 힐가르트 가문의 결단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향한 추구는 그들이 앞서 있었던 사건과 연관해서 받아들인 신앙과 불가분리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후예인 우리들도 역시 값을 지불할만한 자유를 계속해서 유지해나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과 다른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유와 인권의 원리는 이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사상은 많은 이들에게 아주 진부하거나 공허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상이 하나님의 진리나 복음으로부터 해체되는 바람에 단순히 자의와 방종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반작용은 널리 확산된 무의미성이며, 또한 오늘 우리의 세계를 통해서 발생하는 의미에 대한 모색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서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자시 기억하게 합니다. 즉 참된 자유는 아들과 영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고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고후 3:17). 또한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는 자유를 무시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이 당신들을 자유롭게 하면, 그제야 당신들은 실제로 자유롭게 될 것이오.”(요 8:36).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획득한 자유가 확실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진리에 있는 모든 이성의 토대에 근거해서 새롭게 질문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시험해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을, 사랑에 봉사하는 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일치와 평화로 이끌어갑니다. 자유의 가장 좋은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가족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모험을 통해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특히 우리로 하여금 성서의 하나님과 하나 되게 했으며, 우리 조상의 기독교적 신앙에 공고히 서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하나님 안에 이 시대정신과 변화무쌍한 유행과 달리 고유한 판단과 자명성에 대한 자유와 용기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좋은 것을 붙잡도록 하실 겁니다. 즉 우리 조상의 신앙을 우리의 가족 안에서, 우리의 시민들 안에서 견지해나가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확신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아멘. (1980.6.22, 엥엘만/힐가르트 가족의 날, 바카라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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