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은총과 평화는 사실 언어인가?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찌어다.<1:1,2>



고대나 현대의 모든 편지 형식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보내는 이 편지를 간단한 인사로 시작합니다.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찌어다. 인사로 시작해서 몇 마디 용건을 알린 다음에 적절한 축복의 인사로 끝맺습니다. 이런 점에서 다른 성서에 비해서 빌립보서 같은 서간 형식의 성서는 개인적인 동기가 매우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사실적으로, 혹은 해석학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이 역사적 예수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지만, 이 서간 형식의 성서들은 물론 복음에 기초하고 있긴 합니다만 발신자와 수신자의 매우 사적인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함께 공부하게 될 빌립보서도 바울이라는 한 자연인이 빌립보 공동체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에 불과합니다.  



우선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해봅시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보낸 사적인 편지가 기독교의 경전으로 채택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바울 스스로는 이 편지가 때가 되면 기독교의 경전이 되리라고는, 더구나 2천년 후에 한국 사람들도 읽게되리라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필요에 따라서 보낸 편지에 불과했는데도 이런 결과에 이르게 된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단순히 하나님의 섭리라고 접어버리면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인 필요에 따라서 기록된 서신이 기독교의 경전으로 결정된 사연은 대충 이렇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역사 비평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빌립보서는 원래 두 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바울이 에베소의 옥에 갇혀 있을 때인 55/56년경에 쓴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옥에 풀려 나와 고린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인 56/57년경에 쓴 것이라고 합니다. 이 두 편지가 오늘 우리의 성경인 빌립보서에서 하나로 편집되었다고 합니다. 그닐카). 그들은 자신들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바울이 보낸 편지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들은 이 편지를 몇 번 읽은 다음에 폐기해버린 게 아니라 소중히 간직해두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돌아가면서 읽었습니다. 파피루스에 기록된 이 편지는 세월이 흐르면서 손상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필사본을 만들어서 이 편지의 내용을 계속 보존해나갔습니다. 이런 소문이 다른 지역의 교회에게도 퍼지게 되어 아마 여러 편의 필사본이 회람되었을 것입니다. 백년, 이 백년이 지나면서 이 편지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더욱 큰 영적인 권위를 얻게되다가, 결국 4세기 후반에 경전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바울이 개인적으로 우연한 기회에 기록한 이 편지가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아주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가 된 이유를 우리는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 편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독특한 신앙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안부를 묻는 것으로 끝냈다면, 또는 교회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충고로 끝냈다면 그저 한번 읽는 것으로 족했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 전체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로 채웠습니다. 몇몇 구체적인 사안이 거론되고 있지만 그것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라는 구도에서 설명되고 있을 뿐이지 그것 자체가 주제는 아니었습니다.

둘째, 이 편지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 역사가 아무런 보편적인 근거도 없이 일방적으로 강요되거나 선전되는 게 아니라 충분한 이유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의 주(主)인지, 우리가 어떻게 구원에 참여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저 어느 한 순간에 하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 가운데서 얻어지는 근원적 인식일 것입니다. 아마 빌립보서의 이런 보편적 근거들은 바울이 인간 구원 문제에 얼마나 오랫동안 치열하게 천착해 왔는가 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아주 개인적인 동기에 의해 기록된 이 말씀이 수많은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연이 필연으로 변화하는 순간(카이로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런 원리는 우리의 삶에서도 타당합니다. 우선 우리는 일상적인 것과 우연한 것들을 통해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눈여겨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국가나 세계의 정치, 경제 같은 크게 보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사소해서 우리가 놓쳐버리기 쉬운 일상에서 일어납니다. 아침 이슬, 저녁 노을, 장보기, 가족끼리 둘러앉은 저녁 식탁, 친구와의 대화, 출산 같은 일상에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이런 일상의 소중함을 상실하고, 모두가 국가 경제, 아이 엠 에프, 대통령 선거, 남북 통일에만 관심을 두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일상적인 것들이 소중하고 그것들이 언젠가는 결정적인 의미를 획득한다는 말이 옳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그 무언인가가 전제됩니다. 빌립보서의 내용이 그렇듯이 우리의 일상이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차원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아침과 저녁의 식탁, 책상 위의 꽃 한 송이, 바람, 직장생활, 인간관계가 하나님의 구원론적 섭리와 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이런 일상의 것들이 구원의 지평으로 승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그 일상에 집착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가까워져야 하는데 그 일상 자체에 묶여서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일들이 자기를 확대시키고 남을 지배하기 수단이 된다면 그런 것들은 우리를 황폐화시킬 뿐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쓴 빌립보서가 우연하게 성서가 된 게 아니듯이 우연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 구원론적 지평에 속하려면 구원의 사실들과 끊임없이 연관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성서 공부와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예배는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히 수행해야할 구원의 과정이며 수행의 길입니다.



1) 예수의 종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  바울과 디모데의 이름이 동렬로 거론되었다고 해서 이 편지가 공동의 이름으로 보내진 것은 아닙니다. 아마 이 편지를 쓸 당시에 디모데가 바울을 도와주고 있었고, 빌립보 교회가 디모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인사 치레로 이름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디모데에 관한 내용은 뒤에(2:19-24) 다시 거론되니까 여기서는 접어두겠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서신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칭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종과 사도라는 단어가 동시에 사용되는데, 그것도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그 이외의 거의 모든 서신이 "사도"의 권위로 기록됩니다. 빌립보서처럼 자신을 단순히 "종"으로 표현한 예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사도성을 강조하지 않고 종이라고 자칭한 이유는 빌립보 교회에서는 이미 그의 사도적 권위가 인정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결정적인 이유는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바울이 회심 이후로도 교회의 주류에 편입되지 못했고, 상당히 여러 곳에서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충돌을 빚었기 때문에 사도로서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기 했습니다만, 그러한 이유 때문에만 자기를 표현할 때 종이나 사도 중에서 양자택일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 보다는 오히려 빌립보서의 전체 주제와 연결시켜서 생각해보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물론 "기쁨"이 빌립보서의 주제이기는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강조되고 있는 개념이 있습니다. "낮춤"입니다. 소위 "케노시스"라고 일컬어지는 말씀(빌2:5-11)이 가리키고 있듯이 빌립보서는 그리스도의 낮춤을 매우 중요한 신학적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충고하는(2:3) 바울의 생각을 진지한 것으로 여긴다면 바울이 왜 자기를 사도로 칭하지 않고 종으로 칭했는지 이해할 만 합니다.



오늘 우리보다는 바울 시대의 사람들에게 "종"이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이 훨씬 각별했을 것입니다. 신약성서가 형성되던 1세기는 근본적으로 로마 제국이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지키기 위해서 많은 주변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 전쟁의 수확으로 얻어진 노예의 노동력을 통해 로마 문명을 찬란하게 이룩해가던 때이니까 말입니다. 이집트도 그렇고 로마도 그렇고 고대 문명은 대개가 노예들에 의해서 발전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피라밋이나 콜로세움을 건설할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일반 백성들도 적당한 값을 주고 일을 시키거나 특별법을 제정해서 이런 대규모 건축 현장으로 불러내기도 했겠습니다만, 천문학적 재정과 시간이 소요되는 거대 공사는 그런 합법적 노동력으로만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아주 값싼 비용만으로도 훨씬 많은 생산성을 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고대 제국들은 끊임없이 노예를 확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어떤 제국보다도 로마는 훨씬 많은 노예들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여력으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문명을 구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의 계획대로만 굴러가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로마 문명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끝나버렸습니다. 노예를 부리면서 예술과 오락과 취미생활에 빠져들던 로마 시민들은 인간의 욕망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기들 내부로부터 허물러지고 말았습니다. 로마의 힘이 막강한 기세로 뻗쳐가던 그 시기에 스스로 종처럼 섬기러왔다는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이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역사는 노예를 부리며 기고만장하던 로마를 해체시키고 노예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확산시켰습니다. 역사의 반전입니다.

로마 문명과 기독교는 서로 상반된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세계관적 충돌은 로마 이후의 모든 문명을 통해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노예를 부리는 힘의 세계관과 노예처럼 섬기는 사랑의 세계관입니다. 로마 제국은 겉으로는 관용과 용기를 고귀한 가치로 여기지만 그런 덕들이 거의 자기 입장에서만 강조되고 있을 뿐이지, 자신들의 평화에 지장이 있는 대상이라면 강한 군사력으로 초토화시켜버리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선택도 없는 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늘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의 시대정신에 위배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로마의 정치에서만이 아니라 유대의 종교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노예보다도 훨씬 낮은 자리인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은 이런 세계관적 충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오직 경제적인 힘만이 구원인 것처럼 선포되는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종처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 가야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외형적으로 자기를 지켜주던 로마의 노예 문명을 포기하고 자기 스스로 예수님의 노예가 되기로 했던 바울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사실 두려운 표현입니다. 종은 원래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인의 의지대로만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버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말 그대로 자기의 모든 생각, 모든 가치관, 모든 경험을 버린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빌3:8)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배운 것은 자기의 생각을 확고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나름의 생각을 키워나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교육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교육을 통해서 남보다 공부도 잘하고 처세술도 좋아야 이 세상에서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후천적인 교육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기를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욕망이 정치와 문화와 예술의 옷을 입고 등장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욕망으로 인간이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에 충실하다면 이렇듯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만을 추구해야합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 마음의 혁명적인 변화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말씀이 "회개하라"는 것이었나 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에 의하면 우리의 의지와 생각과 감정이 얼마나 예민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돌아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끊임없이 우리는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립니다. 어떤 큰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에서도 그런 손익계산서가 작동됩니다. 심지어는 신앙생활에서조차 우리는 자기의 생각과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다가 신앙적으로 뜨거워진 경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완전히 무력화되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는 세계가 한 두 번의 신앙체험으로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론적으로도 그렇고 실제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우리의 도덕적, 인격적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일치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만큼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접어두고 그의 뜻을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됨"이라는 말은 기독교 신앙의 어떤 한 특성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그 신앙의 존재론적 기초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

바울이 쓴 빌립보서의 수신자는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입니다. 이런 내용은 이미 그 당시에 감독과 집사들이 빌립보 교회에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런 직분에 대해서는 접어두기로 하고 그들 모두를 일괄해서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로 묶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교회의 이름을 모두 지역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교회 상황은 오늘 우리의 상황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그렇게 단순한 이름으로 불려질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이 바로 교회였으며, 로마에 사는 성도들이 교회였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성도들의 무리, 골로새에 사는 성도들의 무리, 고린도에 사는 성도들의 무리가 교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울에 사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부산에 사는 성도들의 무리가, 광주에 사는 성도들의 무리가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붙이고 있는 온갖 종류의 이름은 오늘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결과입니다. 원칙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직 하나입니다. 로마 가톨릭교인, 장로교인, 감리교인, 성결교인이라는 말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역사적 부끄러움의 결과이지 그렇게 자랑스러운 이름은 아닙니다. 기독교 교회가 일치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향해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만약 기독교인, 혹은 성도라는 이름이 얼마나 절대적이고 철저한가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하루 빨리 기독교의 분열을 치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빌립보 교회의 설립 과정은 사도행전(16:11-4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소위 제2차 선교여행 중에 빌립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차 선교여행 시에 동행했던 바나바와 헤어진 후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우선 소아시아(지금의 터어키)를 순방했습니다. 그곳에는 1차 때 조직된 공동체가 조금씩 제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대충 일을 마친 다음 비잔티움으로 가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드로아 항구에서 밤중에 한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도와달라는 호소를 들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한 바울은 결국 배를 타고 마게도냐의 관문인 빌립보에 들어갑니다. 그것이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20년 만에 최초로 유럽에 전파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대략 기원 후 50년경입니다.    

바울이 유럽에 복음을 전한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첫 발을 내디딘 빌립보 성(城)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12절). 성서학자들이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빌립보는 원래 "작은 우물"이라는 뜻의 "크레니데스"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었는데, 필립 2세가 그 마을을 식민지로 만들고 기원전 356년에 자기 이름을 따서 새롭게 이름을 붙이면서 크게 발전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동서 문화의 거점으로서 상거래도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주로 이런 중요 도시를 거점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아마 오지를 돌아다니기에는 교통 수단도 마땅하지가 않았을 것이며, 더욱이 실제적인 면에서 그의 선교 정책은 그래야만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며칠 동안 기본적인 생활 수단을 구하기도 하고 지리도 익히다가 안식일이 되자 유대인들의 기도처를 찾기 위해서 강가로 나갔습니다(행16:13). 그 당시는 요즘과 같은 주일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직 기독교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전통대로 안식일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정기적으로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상당한 세월이 지나서, 결정적으로는 4세기에 이르러서야 정착되었습니다. 바울은 강가에서 기도 모임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이들 중에 특히 루디아라는 여자는 모든 식구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바울의 선교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움으로써 초대 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자주 빛 물감을 매매하는 일을 했는데, 그 일은 그 당시에 매우 고급스러운 사업이었습니다. 비교적 큰 사업을 꾸리고 있었기 때문에 루디아는 경제적으로 상당한 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소한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를 비롯해서 바울의 선교 활동에 참여한 여러 사람의 숙식을 떠맡는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겠지만 루디아는 기꺼이 이들을 자기 집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원래 바울은 소위 자비량 선교 원칙을 고수하고 있던 사람이지만 루디아의 강권(15절)을 물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루디아의 도움은 빌립보 교회의 전통이 되어 바울의 전도활동을 계속적으로 뒷밭침해 줍니다. 이 결과로 인해서 빌립보서가 기록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기도처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던 어느 날 점을 치는 여자가 바울에게 시비를 겁니다. 그녀는 바울 일행의 뒤를 따라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행16:17)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몇 날에 걸쳐 이런 소란이 계속되자 바울은 그 일로 무척 괴로워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 들린 그 여자의 병을 고쳤습니다. 바울 일행을 가리켜 하나님의 종 운운하는 이 여자의 고함 소리를 듣고 바울이 왜 괴로워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이 실제로는 바울을 조롱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좋은 말도 한 두 번이지 너무 반복되니까 귀찮아졌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주인집에 매여 점이나 치던 이 여자가 바울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점쟁이 여자 사건으로 인해서 바울은 어려운 처지로 내몰립니다. 이 여자의 주인들이 이제 점치는 일을 통해서 더 이상 돈을 벌어들일 수 없게 되자 바울을 고발합니다. 이상한 유대인들이 이 도시에 들어 와서 로마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풍습을 전하고 이 도시를 소란하게 한다는 비난이었습니다. 로마 관리는 바울 일행을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한밤중에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감옥 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몸도 자유로워졌습니다. 감옥을 지키던 간수는 죄수들이 달아난 줄로 생각하고 자결을 시도합니다. 그 당시의 로마법에 의하면 죄수들이 도망갈 경우에 이를 지키던 간수가 모든 책임을 졌습니다. 그러나 바울 일행이 그대로 감옥 안에 남아있는 걸 확인한 이 간수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을 보고 바울에게서 구원받을 길을 제시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간수에게 한 바울의 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31절). 이 간수는 모든 식구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빌립보 교회의 설립멤버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 후에 바울 일행은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로 떠나가는 것으로 빌립보에서의 선교활동이 끝납니다.



빌립보 공동체의 출발이 매우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삶의 매 순간이, 또한 신앙적 활동의 매 순간이 이와 똑같습니다. 만약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 운동이 살아 움직이는지 볼 수 있기만 하다면 우리의 삶에는 이러한 빌립보 공동체 같은 사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서 이런 거룩하고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3) 은총과 평화

바울은 이렇게 인사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화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절).

일반적으로 "은혜", 혹은 "은총"(카리스)은 하나님이 값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신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는 "은사"(카리스마)라는 단어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는 게 아니라 개인에 따라서 특별하게 베풀어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구원과 영생은 은혜이지만 예술적 기능과 지적인 능력은 은사입니다. 어쨌든지 바울이 여기서 다시 한번 역설하고 있는 이 은혜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안에 거할 때만 기독교인다운 삶의 능력이 솟아날 수 있습니다.

잠시만 생각해보아도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기의 능력으로 생산해 내는 게 아니라 모두가 값없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이 명확합니다. 땅과 하늘과 공기와 물, 태양과 달과 별은 우리 인간의 생존 조건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인데, 그냥 주어집니다. 이런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와 기쁨 같은 것들도 사실 우리의 마음이 열리기만 하면 그냥 주어지는 것이지 돈으로 매매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은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오늘 우리 인간 사회가 만들어놓은 질서는 모든 삶의 조건들을 값으로 매깁니다. 인간의 능력과 품위마저 돈으로 계산하려고 합니다. 이러다 보니 은총으로 생각할 수 있나요? 모든 게 자기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마당에 누구에게 감사할 마음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서에서는 구원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은총이 없으면 사랑도 구원도 없습니다.

은혜(은총)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과연 삶을 은총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는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안다면 기독교인다운 삶의 능력들이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평생을 교회에 다녔어도 여전히 불만스럽고 욕망의 불길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건 결코 은총을 아는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 개개인만이 아니라 이렇게 많은 교파가 분열되어 있는 현상은 어떻게 생각해보아도 은혜로운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은총을 은총으로 여기지 못하게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삶의 목표가 잘못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 삶의 목표를 삼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채우는 것에만 마음을 두기 때문에 더 온전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예컨대 50평 짜리 아파트 장만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세운 사람은 자기가 숨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감격할 수 없습니다. 그런 집이 생겨야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겠죠. 물론 거처할 집이 생긴다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이긴 합니다만 그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은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히 깨닫기 위해서는, 혹은 역으로 그런 은혜를 깨닫게 된다면 살아가는 목표가 근본적으로 달아질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에 마음을 둔다고 할는지, 생명에 참여하는 것에 마음을 둔다고 할는지, 하여튼지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하나님의 궁극적 생명과 관련된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이 하는 말은 너무나 이상에 치우쳐 있다."고 말할 분이 있을 줄 압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좋지만 우리 인간의 열심히 노력해서 일단 생산을 많이 해야 가난한 사람도 골고루 먹고살지 않겠느냐,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성서가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일을 해야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일하기 싫어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노동과 그 생산성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노동 자체야 어떤 면에서 구원론적 의미가 있지만, 오늘 우리의 삶은 노동을 통해서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억압당한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습니다. 생산성 제고에만 삶의 목표를 두지 말고,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은총의 왜곡 현상을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은총 편의주의입니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견뎌내야 할 삶의 무게를 너무나 쉽게 은총에 기대어 벗어버리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본훼퍼가 말하는 대로 값싼 은혜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은총 무용론입니다. 이들은 오직 자신의 업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총을 업신여깁니다. 이 결과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자신이 짊어져야 할 운명의 무게에 짓눌려 삶을 소진시킬 뿐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노동과 오락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듯이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은총의 참 의미를 이 세상에 올곧게 되살려내야 할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좀더 노골적으로 질문해 봅시다. 은총의 질서는 실질적인가요? 아니면 단순히 종교적 수사(修辭)에 불과한가요?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생명을 부지하고 살아가는 데는, 이 땅에 존재하는 데는 그렇게 많은 수고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런 토대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혹은 우리의 돈으로 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은 약간 씩 좋은 음식이나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약간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닐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살아있는 것 자체에 중심을 두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그렇게 지나게 수고하지 않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소로우는 "월든"에서 그런 경험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의 실제 경험에 의하면 한 사람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땅은 겨우 2,30평이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물론 자식들이 먹을 것도 있어야 하고, 병이 들었을 때 먹을 것도 비축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많은 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존재를 가볍게 여기고 살아간다면 매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인사하면서 사용한 평화(에이레네, 샬롬)라는 단어는 성서 안에서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이 추구한 가장 완전한 삶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다툼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화려한 문명을 일구어낸 사회라 하더라도 완전한 평화를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에릭 프롬이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라는 책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문명이 발달할수록 평화로운 게 아니라 더욱 파괴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위에서 거론한 로마 문명은 전형적인 군사 문명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녕을 위한 모든 군사적 행동을 세계 평화의 이름으로 합리화했습니다. 에집트의 피라밋은 평화의 상징입니까? 아프리카와 남북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점령한 유럽의 문명은 평화에 토대를 두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의 세계는  평화의 질서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을까요? 아니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는 기독교는 참으로 평화 지향적이었을까요?

오늘 우리의 실존적인 삶에서도 평화는 요원합니다. 온갖 평화라는 평화는 모두 쏟아 부은 것 같은 오늘의 삶에서 오히려 분쟁과 불안이 더욱 팽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면에서나 나쁜 면에서 어느 한 순간도 경쟁 심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무한한 경쟁 구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평화를 경험한다는 것은 아예 근원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만약 평화를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성취에서 오는 아주 짤막한 만족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평화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참된 평화는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누가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천사들을 통해서 이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이들은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달된 다음에 하늘에서 천군 천사의 합창이 울렸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의 오심은 곧 복된 소식, 기쁜 소식, 즉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아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빌립보서의 주제라 할 참된 기쁨을 아는 사람만이 참된 평화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평화는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말은 우리의 죄로 인해서 나뉘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회복되는 길은 죄가 해결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해결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며,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용서받고 구원받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입니다. 이런 복음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고 모든 사람들과도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론의 대강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진부하게 들릴지도, 혹은 그 실질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죄라는 문제에만 한정해서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졌으며, 그로 인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불안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 인간이 실존적으로 불안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죄의식입니다. 현대의 심층심리학도 이런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죄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죄라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는 오히려 작은 부분이며 어떤 뿌리에 근거한 결과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기심, 자기 집착, 욕망을 생각해보면 아무도 죄와 관계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 자신을 성취하려고 애를 쓰다보니까 아주 쉽게 상대방을 파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범죄 행위를 감행하지 않는 것은 어떤 실정법이나 교양과 윤리 같은 질서나 관습들이 우리를 억지로 지탱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 토대가 너무나 빈약해서 순식간에 우리를 내팽개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에 근거해서 살아갈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각 사람과 세상이 평화로운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탄절의 기쁨 안으로 깊이 침잠해야합니다. 그런 기쁨의 영역과 순간이 늘어날수록 평화도 역시 우리의 삶에서 그 날개를 늘려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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