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회는 복음 공동체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3-11>



인사를 끝낸 바울은 이제 여기 3절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우선 빌립보 교회를 칭찬하면서 그들의 신앙이 더욱 풍요롭게 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말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도 여전히 영적인 가르침으로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1) 복음과 연합한 교회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항상 기쁨으로 빌립보 교우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교회와 그 신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특별한 관계에 기인하기도 한 것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빌립보 교회가 실제로 바울의 가르침에 잘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을 개역 성서는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고 번역했으며, 마틴 루터는 "당신들이 첫날부터 오늘까지 복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감사한다."고 번역했습니다. 이 문장에서 핵심적으로 거론된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기독교 교회가 선포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가장 특징적으로 설명해주는 단어입니다. 이 낱말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기쁜 소리, 참된 소리입니다만 교회에서는 그런 단어에 영적으로 풍요로운 내용과 의미를 담았습니다. 무미건조한 언어에 생명이 담기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났으며,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복음은 바로 예수님의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의 오심, 그의 가르침과 행위, 그의 십자가와 부활, 재림 약속 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초보적 도그마에 대해서는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내용이 복음이라는 사실을 어떤 근거에 의해서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그렇다고 말하니까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실제적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지 아닌지, 그럴만한 이유를 알고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만약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단순히 교회의 질서에 잘 적응해서 어떤 종교적인 위로를 받거나 종교적인 교양을 쌓으려는 게 아니라면, 우리의 실존 전체가 근거하고 있는 그 어떤 절대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복음으로 생각하는가, 또한 그것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우선 쉬운 이야기로부터 시작합시다. 인간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굳이 쉬운 예를 들자면, 사형수에게 특별 사면령이 떨어졌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을까요? 어떤 남자가 오랜 세월동안 짝사랑을 하던 여자에게서 사랑의 응답을 받았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구원받아야만 할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무엇이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가 기다리고 있는 구원이 무엇인지 알면 됩니다. 그 이외의 문제들은 그 사람에게 시시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오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의 모든 행위와 가르침을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구원이 예수님의 일과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또는 반대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생각될지 모릅니다만 우리가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하려고 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의 눈에 익숙한 것을 성취하는 것으로 자기의 삶을 소비합니다. 사회적인 신분을 높이는 일, 사업을 늘리는 일, 오락과 취미활동을 많이 하는 일, 자식을 출세시키는 일에 목숨을 걸어둡니다.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약속하는 내용도 거의 한결같이 이렇습니다. 그런 일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돕는 일이나 남북통일이나 실직자를 돕는 일 같이 그런 대로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의미 있는 일 조차도 그것 자체로는 그 어떤 궁극적인 의미를 획득하지 못합니다. 이미 1990년10월3일에 통일을 이룬 독일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동서독의 통일이 독일 국민들에게 어떤 결정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까? 통일된 독일이 분리된 독일보다는 훨씬 강력한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낙후된 동독 지역을 서독 수준에 걸맞도록 발전시켰으며, 더 이상 베를린 장벽으로 인한 비극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통일 전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고 볼 수 있나요? 부분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궁극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의 정치, 사회적 상황이 우리와 매우 달랐지만 인간들이 겪는 갈등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이런 일을 기다리면서 우리 인생을 보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나 짧을 뿐만 아니라 거의 무의미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최선을 다해 이룩해보려는 이런 정치 구조와 사회 제도의 변혁은 우리가 수행해야할 당연한 과업입니다만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복음은 바로 이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진정한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가 과연 신약성서가 말하는 복음을 복음으로 이해하고 믿고 있을까요? 복음이 과연 우리의 인생 전체를 걸어둘 만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까? 모든 재산을 팔아서라도 보물이 묻힌 밭을 산 어떤 사람처럼, 가장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 그 진주를 손에 넣은 사람처럼 우리는 복음을 우리 삶의 절대적인 근거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서 전도 받은 첫날부터 지금까지 이 복음과 연합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빌립보 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바울의 이 말에 의하면 매우 건실하게 복음과 그 일에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복음과 연합해 있는 것이야말로 교회론적 근거입니다. 교회는 바로 복음 공동체입니다! 물론 각각의 기독교인들도 복음에 연합해 있어야하지만 가시적 질서를 가진 교회에게는 이 문제가 더욱 절실합니다. 집단은 개인보다 훨씬 악마적 힘에 이끌려갈 염려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지나간 기독교의 역사에서 많이 경험했습니다. 이런 일은 과거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일이기도 하고, 불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미래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복음에 진력하는 게 아니라 비복음적인 일에 몰두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비복음적인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복음과의 연합을 일반적으로 교회를 세운다거나 예배를 드린다거나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가시적인 교회 활동을 원활하게 만들고, 그것을 강화시킴으로써 우리가 복음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들이 필요하기는 합니다만 그것 자체가 복음은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에 연합한 자들이 형편에 따라 행해야할 우리의 과업이며, 일종의 율법입니다. 율법은 율법 나름의 근거와 이유가 있습니다만 복음 자체는 아닙니다. 인간의 업적과 행위인 율법은 상대적인 가치만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 안에서 절대화 되다보니 교회가 복음과 위배되는 일들을 서슴지 않고 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서 시급히 정리되어야할 가르침은 교회론입니다. 참고적으로 유르겐 몰트만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몰트만은 오늘의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변화된 사회적 상황에 능숙하게 적응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과 다가오는 나라의 능력에 의해서 교회가 내적으로 갱신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교회를 움직이는 내적인 불안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의 교회에 대해서, 성령의 현재와 능력 속에 있는 교회에 대해서 언급할 때 인식되는 불안을 가리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네 차원에서 교회론 문제를 접근하고 있습니다.

ㄱ.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하고 있긴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고 있는 신학적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체화 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개는 교회를 확장하고 운영하기 위해서 다른 질서가 교회를 지배하도록 방기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지 않으려면 꾸준히 그리스도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아래에 인용된대로 1934년의 바르멘 신학 선언 제1항은 국가에 종속되는 교회론을 거부하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종속되는 교회론을 제창했습니다. "그가 성서에서 우리에게 증언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야 하고, 삶과 죽음에 있어서 우리가 신뢰하고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교회가 교회의 선교의 근원으로서 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 밖에, 그리고 이 말씀과 병행해서 또 하나의 다른 사건들, 권세들, 형태들, 진리들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식할 수 있고 또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거룩한 가르침을 우리는 거부한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의존하는 대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회가 교회 자체를 의존하고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가 국가나 사회 권력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라는 구조를 보존하고 있지만 그것을 상대화하면서 자신을 변혁시켜 나가야 하며, 또한 국가라는 조직을 상대화하면서 정치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야만 합니다.

ㄴ. 선교하는 교회

몰트만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 자체와 교회의 위탁을 세계사의 틀 안에서 서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교회는 선교적인 차원에서 서술될 수 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선교하는 교회가 의미하는 바는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회가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둘째는 선교는 곧 하나님의 선교라는 것입니다. 선교는 오늘의 지평에서 교회가 지신의 기구를 확대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종말로부터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교회 자체의 영광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한 아버지의 영광이 교회의 목적이다."

ㄷ. 에큐메니칼 교회

교회의 본질은 하나의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거룩한 교회에 있듯이 에큐메니칼 개념은 바로 교회의 교회다움을 담보해주는 토대입니다. 갈릴리 호수 근방에서 시작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된 이후 11세기와 16세기에 벌어진 기독교의 대 분열 이후로, 특히 개신교 안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교파 분열의 역사를 보였습니다. 한국의 교파 분열은 아마도 세계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일인데, 이의 극복이 바로 교회다움을 찾아가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몰트만은 논쟁신학(Kontroverstheologie)으로부터 협동신학(Kooperationstheologie)으로 전진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은 신앙고백의 혼합이나 신학적 무관심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교회에 대한 질문과 관심에서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런 에큐메니칼 운동의 길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거부로부터 대화로>, 그 다음에는 <대화로부터 협력으로> 나아가며, <협력으로부터 종교회의(Konzil)>로 전개됩니다. 아마 한국 교회는 이런 에큐메니칼 운동이 구체적으로 일어나야 할텐데, 그러한 조짐이 별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교회의 존재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 둔 채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탓인 것 같습니다.

ㄹ. 정치적 교회

교회가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선교적 교회이며, 에큐메니칼 교회라고 할 때 이런 요소들은 이 땅의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교회를 정치화하자는 게 아니라 교회의 구원론적 업무가 정치적인 형태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속성에 속하는 정의와 평화가 단순히 인간의 정신이라는 범주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삶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사건이라면 정치적인 성격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 확장에 자신의 존재 근거를 둔 교회가 정치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한편으로는 옳고, 다른 한편에서는 틀렸습니다. 세속 권력을 교회가 함께 누리려는 생각에서 정치와 결탁한다면 그것을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교회의 업무가 순전히 인간의 영적인 세계 만이라고 생각해서 정치적인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책임 회피입니다. (몰트만, 박봉랑외 4인 역,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한국신학연구소, 1980, 13-30참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과 그의 행위와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과 그 생명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교회는 오직 이런 일에서만 존재의 의미가 있지 교회 자체를 위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복음이 우리의 삶에, 우리 교회의 전 영역에 충만하게 작용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또한 우리의 삶은 예민하게 복음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이외의 것은 있으면 더욱 좋지만 없어도 되는, 성탄절의 장식품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중요하지 동방박사의 예물이 중요한 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저는 기왕에 복음 문제를 언급했으니까 그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가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잠시 한 마디 지적할까 합니다. 설교는, 특히 주일 대예배의 설교는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이 복음적이라는 말을 반동적인 보수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혹은 편협한 전통으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이 말에 대한 모욕입니다. 이 말은 위에서 밝혔듯이 인간 구원을 선포해야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강단에서 외쳐지는 설교가 많은 경우에 종교적인 잔소리에 머물러 버리거나, 아니면 교회에 대한 열심을 부추기거나, 혹은 윤리와 도덕 문제를 장황하게 늘어놓습니다. 그런 설교를 듣는 신자들은 결국 종교적인 부담을 느끼고 귀를 막아버리든지, 아니면 아주 비현실적인 자기 도취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오!"라는 말을 짜증스럽게 반복하는 게 설교라는 말은 아닙니다. 참된 구원의 기쁨을, 참된 생명의 세계에 대한 희망을 실질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이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의 성서와 전통에 확실하게 서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말하려는 구원의 현실성들을 파악할 수 있어야하고, 그것을 오늘 이 시대의 언어로 되살려내야 하는, 매우 고단한 작업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설교자들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자기 생명을 걸어두고 작곡을 하고 그림을 그렸듯이 구원과 그 생명 세계의 본질을 파헤치고 설명하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설교는 목사에게 싸움입니다. 목사 자신이 구원받는가 멸망 받는가 하는 싸움입니다.



2) 사랑, 인식, 경험

복음에 연합해 있는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바울은 여전히 기도합니다(9-11). 어딘가 부족한 것이 채워지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고 자랑스러운 교회이지만 복음의 더욱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렇듯 다른 이를 위한 기도야말로 성숙한 기도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판넨베르크는 "기도에 대해서"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올바른 간구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며, 또한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기 소원에만 맴돌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에서 볼 때 이런 간구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관계가 포함됩니다. 올바른 기도는 역시 중보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반적인 기도는 거의 우리의 희망 사항을 나열하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이루어지고, 우리 모든 인류 공동체의 구원을 위한 내용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고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특별히 힘을 주어 드리는 기도의 내용은 나와 우리 교회에 대한 것들입니다. 좋은 교회당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 빈자리를 채워달라는 기도를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립니다. 우리는 바울의 기도에서 기도의 태도를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드린 기도의 첫 구절은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곧 인간의 인식과 경험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바울이 그냥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기도하지 않고 인식과 경험에서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문제는 결국 사랑에 대한 성격 규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우선 인식의 차원에서 풍요로워져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론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개념의 성격을 가졌습니다. 만약 책상이나 자동차처럼 사랑이 일종의 사물이라면 모든 사람이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만, 사랑은 사물이 아니라 어떤 관계에서 발생하는, 혹은 그 관계에서 작용하는 힘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마음먹은 대로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즉 사랑은 소유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은 인간의 단순한 감정이나 기분에 속한 게 아니라, 우리의 정신, 즉 영(Geist)에 관계되는 힘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풍요로워지려면 결국 우리의 생각, 우리의 인식이 깊어져야 합니다. 그런 노력 없이 우리 자신을 기분에 따라 움직이게 내버려두면 사랑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질 것입니다.

과연 인식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사랑이 풍요로워지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반드시 지성적이어야만 한다는 말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사랑보다 쉬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 지성이라는 것은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도 얼마든지 손에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식은 단순히 지성적인 능력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사회 심리학, 재료공학, 컴퓨터 공학, 미학, 고고학에 능통하다는 것과 근본에 대해서 깨닫는 것하고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런 지식 일반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더라도 삶의 궁극적 의미, 그 미래, 구원의 세계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그것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깊은 산골에서 평생 동안 농사만 짓고 살던 노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삶의 근본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대학교 선생들보다 훨씬 앞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근본에 대한 인식 능력이 있어야 사랑도 역시 풍부해집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한국 사회에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문제는 이 근본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성과 정보는 넘쳐나고 삶에 대한 요령은 바겐세일로 팔리고 있지만 근본에 대해서 알아보려는 노력은 너무나 미미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많은 대학에서 철학 과목이 교양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뀌고, 대신에 영어회화와 컴퓨터가 필수 과목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근본보다는 주변적인 것들을 통해서 빠른 시간 안에 어떤 수확을 올려보자는 생각의 발로인 것 같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흐름이 결국에는 우리 사회의 기초를 부실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사랑이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풍성해지기를 원한다는 바울의 기도는, 그가 의식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우리에게 좀더 심원한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그리고 여러 다른 곳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볼 때 하나님은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풍요로워져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믿으면 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인식에서 하나님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기록한 신약성서의 모든 내용들은 그것이 아무리 신비하고 개인적인 체험이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럴만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기독론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작업인데, 교부들과 중세기 스콜라 철학자들도 이런 일에 적지 않은 공헌과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로 신학은 완전히 인간론으로 떨어지든지 아니면 인식론적 근거를 무시하는 폐쇄적인 정통주의로 돌아섰습니다. 세상은 인간론적 신학을 불신하며 정통주의 신학을 무시합니다. 전자는 인간 역사의 매 경우마다 변화무쌍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며, 후자는 절대적인 교의에 묶여서 그 내용이 매우 공허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모든 생명의 근거와 미래이지만 우리 인간들에게 인식론적으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이고 설교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사랑이 인식에서만이 아니라 경험에서도 풍요로워지기를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인식과 경험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인식은 홀로 기도하면서, 홀로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깊어질 수 있지만 경험은 세상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야만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인식은 책상머리의 작업이라면 경험은 시장 바닥의 일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인식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그 내용이 검증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사랑은 세상과의 분리가 아니라 일치에서 성숙되어야 합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썩어질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말이 세상의 삶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뜻이라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앙과 사랑은 아주 구체적인 삶의 한 복판에서 풍요로워져야 합니다.



오늘 바울이 기도한 사랑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절박한 문제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우리 교회가 그렇게 많이 힘주어 역설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진실한 사랑의 본을 보인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 사람들보다 우리에게 더 많이 작용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반증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오늘 바울의 기도에 따르면 우리의 사랑이 인식에서나 경험에서 별로 풍요롭지 않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자고 큰 소리로 외치거나 그런 내용의 찬송가를 아름답게 부른다고 해서 실제로 이루어지거나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인식하는 것만큼, 우리의 구체적인 삶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역사 하시는 것처럼, 사랑도 역시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역시 바울처럼 그렇게 기도해야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인식과 경험에서 풍성해지기를 말입니다. 이것 이외에 어디에서 삶의 의미와 목표를 찾을 수 있을까요?



3) 그리스도의 날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을 위해서 기도한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날"(11절)에 온전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앞서서도 바울은 선한 일을 이루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6절)까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 일을 이루실 것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날"은 기독교인의 삶이 지향해나가야 할 목표를 가리키는데, 바울만이 아니라 신구약성서 전체는 이러한 분명한 때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는 곧 기독교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시간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암시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사상의 뿌리라 할 수 있는 히브리 사상은 세상을 시간적인 의미가 담긴 "에온"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은 시작과 끝이 있으며 그 사이에서 인간과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때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이런 시간 개념이 묵시문학에서는 결정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는데, 악한 에온은 곧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되며 새로운 에온이 시작될 것이라고 선포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헬라 사상은 세상을 공간적인 의미가 담긴 "코스모스"라고 불렀습니다. 우주라는 공간 안에서 시작도 끝도 없이 흘러가는 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와 시간이 히브리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때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라면 헬라인들에게는 그 자리에서 돌고 도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세계를 시간적으로 이해하고, 헬라인들은 공간적으로 이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히브리 민족은 우리가 구약성서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바처럼 뿌리를 내릴 곳이 마땅하지 않아서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녔으며,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로도 여러 부족들과의 전쟁이나 주변 제국들의 강압에 의해서 끊임없이 불안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어떤 공간적 보금자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막강한 해상력을 기반으로 주변의 많은 부족들을 자신들의 세력 안에 굴복시켰으며, 이런 힘에 근거해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여러 곳에 찬란한 고대 문명을 가시적으로 건설함으로써 공간적 이미지를 마음껏 표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신에 대한 표상을 보더라도 히브리인들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처럼 히브리인들의 민족 이동과 더불어서 기동하는 신으로 생각했다면, 헬라인들은 올림포스 안에 거주하는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어쨌든지 이들 두 고대 민족은 세계를 시간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함으로써 서양 문명이라는 마차에서 두 바퀴 역할을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세계를 시간적으로 이해했다고 했는데, 과연 시간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태초와 종말 사이에 있는 시간은 무엇입니까? 태초 이전에는, 그리고 종말 이후에는 시간이 사라지는 겁니까? 시간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의 인식일 뿐일까요?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모든 기준은 시간입니다. 학교를 졸업할 때, 결혼할 때, 아플 때, 사업이 성공했을 때, 죽을 때가 있으니까 우리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지 그런 때를 초월해버린다면 우리가 살아있는지 아닌지 확인하기가 힘들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글을 쓰거나 말하는 현재라는 시간은 동시에 과거가 되어버리며, 내일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동시에 현재가 되었다가 다시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물론 실제로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엄격하게 구별됩니다만 100억 년이라는 우주의 시간에 준해서 우리 한 인생을 비추어본다면 과거와 미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미래에 우리가 절대속도인 빛의 속도를 뛰어넘어서 시간을 여행할 수 있게 된다면 시간 개념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아직 어떤 철학자도, 어떤 물리학자도 이 시간의 실체에 대해서 완벽하게 해명하지 못했으며, 사실은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물리학자들이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파헤쳐 보려고 여러 이론들을 세워보았지만 (예를 들어 통일장 이론), 제가 아는 한 여전히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숙제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신비이듯이 결국 시간은 신비로 남아 있을 겁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날"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혹은 어떤 사실을 말하는 겁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구원이 완성되는 때라고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우주의 어느 공간으로 옮기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이루시게 될 그 구원의 미래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게 될 나라가 그 때 시작합니다. 우리가 아직 인식하지 못하는 우주론적인 구원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은 그 때까지만 유효한 잠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역시 그 때까지만 유효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완전히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게 되는 때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신비주의자들입니다. 궁극적인 생명은 신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생명이 완성되는 그 때를 신비하게 기다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신비의 세계를 희망하는 사람은 현재의 잠정적인 삶에 매달리지 않고 그 생명의 세계를 향해서 끊임없이 초월해 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유한한 현재의 삶과 완전하고 신비한 미래의 생명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단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한 우리들은 미래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그리스도의 날에 이미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4) 의의 열매

앞서 본대로 9절부터 11절까지는 빌립보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사랑이 풍성하게 되고, 선한 것을 분별할 줄 알고, 그리스도의 날까지 진실하기를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는 끝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의의 열매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울이 이 구약의 가르침(암6:12, 잠언11:30)과 연관해서 인간의 어떤 선한 행위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구약이 말하는 선한 행위를 직접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겠지요. 그는 무조건 의로운 열매라고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바란다고 중보기도를 한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의(義) 문제로부터 생각해 봅시다.



신약성서에 들어와 있는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의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같은 서신은 인간이 어떻게 의로운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그 이외의 모든 서신도 역시 이 의 문제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의를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삼은 이유는 아마 그의 종교적 바탕이라 할 유대교적 전통과 로마의 법 전통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들과 대립하게 된 역사적 근거는 의와 불의 문제에 그 뿌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악과 불법에서 떠나라고 부단히 강권하고 명령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곧 의로운 분, 의를 행하시는 분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도 인용한 말씀인 창세기 15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이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유대인들과의 관계는 이 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유대의 모든 율법에서 떠났다고는 하지만 율법의 근본 정신마저 버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인간의 의로움에 대한 문제를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로 다루게 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출생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자였으며 당시에 최고의 지성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로마법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입니다. 모든 서양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로마는 대단히 난폭하고 부도덕하게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사실은 매우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런 저런 내부의 문제가 적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런 정도로 입헌적인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이외의 다른 문명에 비해 탁월한 힘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탁월한 힘의 결정적인 요소는 바로 법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오랫동안 대제국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현대의 모든 서양 정신과 문화의 물줄기는 로마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현대법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로마법은 기본적으로 의로움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무엇을 의로운 것으로 판단했는가 하는 점은 또 다른 자리에서 논의되어야 하겠지만 사회 질서를 어느 한 두 사람의 전횡에 맡겨두지 않고 최소한 합법적인 근거에 의해서 유지하려고 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실제로 로마법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편지를 쓰면서 법을 지키라는 의미의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만큼 로마법의 공정성을 믿었다는 것이겠지요. 어쨌든지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로서 의로운가, 불의한가에 대한 의식이 아주 투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바울은 유대의 종교적 전통이나 로마의 법적 전통에서 이 의 문제를 자신의 신앙적 사유에서 일종의 화두로 삼은 셈입니다.



인간이 과연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해봅시다.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과연 실제적으로 의로워질 수는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먼저 질문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비슷한 질문이면서 또한 구별됩니다. 우선 뒤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인간은 도대체 의로워질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정확하고 틀림없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에 대한 의식 자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의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 문제는 두 가지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우선 삼강오륜을 의라고 생각하던 시대와 오늘 우리의 시대에 의에 대한 기준이 같을 수 없는 것처럼 의는 시대적인 한계에 따라 다르게 정의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차원은 의 문제를 인간의 행위만을 다룰 것인가, 아니면 양심까지 다루어야하는가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삼강오륜은 자신의 양심적 판단과 상관없이 자신의 노력으로 실천될 수는 있는데, 그렇게 행위만 따라가도 의롭다고 해야하는지 아니면 양심까지 따라가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우선 해결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인간은 도대체 의로워질 수 있습니까? 유대교의 율법은 인간의 노력에 따라서 의를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서기관들은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는 방법론을 찾는 일에 종사했고,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실제 생활에서 실행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인간의 완전한 의를 이루어보려고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이들에 의해서 유대인들의 율법 종교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뼈를 깎는 수고로 이룩한 의의 세계가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회칠한 무덤이었으며, 낙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어내는 이중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의를 완성해보려고 했던 이들의 수고가 헛수고인 이유는 인간이 이룩할 수 없는 세계를 억지로 이루어보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불가능한 일을 이루려고 고집을 부리다 보니 자신을 과장하게 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고 자신의 노력에 대한 반대급부를 바라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항상 변화 무쌍한 인간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완전한 세계를 이루어보려고 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게 헛수고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칭찬 받을만한 일을 하면서도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에 사로잡히는 경험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괴로워지고 탐욕이 생기고 위선적인 인간이 되어갑니다. 이런 게 바로 인간의 역사가 아닐까요? 그래서 그런지 장자는 이런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근본적으로 부정합니다. 온갖 도덕적인 가르침과 선한 것을 규정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추구하라고 말하는 소위 현자들이 없어야만 큰 도둑이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인간의 의도가 벌써 그 무엇인가의 본질을 훼방하기 때문에 그런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인간의 작위(作爲)를 없애버리고 도에 자신을 맡길 때 참된 인간성이 성취된다는 이런 장자의 가르침은 경우에 따라서 너무 극단적이어서 현실과는 관계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만 근본적으로는 옳습니다. 특히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관계에서만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그의 사상이 그 어떤 사상 보다 훨씬 유용하고 도움이 됩니다. 믿음과 무위는 비슷한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3장, 12를 참조할 것).



인간은 의로워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이게 바로 로마서를 쓴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루터가 말한 "오직 믿음"이라는 슬로건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인간이 의로워지는 길은 온갖 종교적 수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이 명제에 바로 우리 개신교의 칭의론이 토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신교 목사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한 지성인으로서 살아온 경험에 의해서도 역시 인간 스스로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적으로도 어떤 의로운 행위를 실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로운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은 우리를 교양인으로 만들어 줄 수는 있으며, 한 나라의 실정법은, 혹은 어떤 윤리관은 우리를 약간 세련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한 요구들은 이 사회의 틀을 어느 정도 이끌어 나갈 수 있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보이게 할 뿐이지 근본적으로는 전혀 의롭지 않습니다. 의롭지 않은데 의로운 것처럼 보이려고 하다보니까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불거집니다. 위선과 교만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런 노력은 하면 할수록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벌어지게 만듭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를 보십시오. 경건한 모습, 지성적인 모습, 착한 모습, 부유한 모습만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앞서 쏟은 노력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고, 자기 능력에 벗어나는 노력을 하다가 결국 늙어서 죽습니다. 이런 되풀이되는 과정을 우리가 과연 의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구원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다운 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바란다는 바울의 기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윤리적으로 모범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의의 열매는 말 그대로 열매일 뿐입니다. 그런 열매는 그것을 맺을 수 있는 나무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것이지 나무가 "그게 아니올시다"이면 그런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나무이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명제가 우선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열매는 자동적으로 좋게 맺습니다. 결국 우리 기독교의 윤리는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를 문제삼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해서 논의되어야 합니다. 좋은 믿음이면 좋은 윤리가 나온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건전하면 그의 행동도 역시 건전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우상을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으라고 했으며, 신약성서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의 열매라 할 수 있는 행위가 우리의 삶에서 별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윤리가 목표는 아니지만 마땅한 결과로서 기독교 신앙을 분별할 수 있는 징표가 될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는 구별해서 설명할 수는 있지만 이원론적으로 분리해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관계를 이렇게 규정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행위의 존재론적 근거이고 행위는 믿음의 인식론적 바탕이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의의 열매는 한 기독교인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를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감당해야할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단순히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의의 세계가 확대되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세계는 현실적으로 요원하긴 합니다만 우리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할 목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그 의의 세계가 임하기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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