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복음 전파의 비밀



1:12-18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모든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 바울의 고난

빌립보 교회를 향한 따뜻한 인사와 간절한 기도를 드린 후 이제 바울은 자신이 처한 형편을 약간 씩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소위 옥중서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바울은 지금 감옥 속에 있습니다. 12절의 "나의 당한 일"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미 7절에서도 "나의 매임"이라는 말로 이 사실을 암시하고 있으며, 14절에서 다시 "나의 매임"이라고 썼습니다. 바울은 세 번에 걸친 선교여행 중에 여러 번 투옥된 경험이 있습니다. 이미 ㉠1빌립보에서도 한 번 투옥되었으며(행16장), 결정적으로는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들어갔다가 유대인들의 무고로 로마 정부에 의해 투옥 당했습니다(행21장 이하). ㉢예루살렘에 임시로 며칠 간 감금당했다가 유대 총독의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로 호송되어 2년 간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그 사이에 그는 여러 번 심문을 당하고 유대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당할 위기에 몰리기도 했습니다만 그 모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변상의 위기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급기야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원했습니다. 그 당시에 로마 시민권자들은 로마 황제들에게 상소할 특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만 만약 바울이 상소하지 않았다면 십중팔구는 가이사랴에서 석방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지 황제의 직접 심문을 원한 탓에 그는 로마까지 압송 당했습니다. 지중해를 통해 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오가는 무역선을 타고 항해하는 바울의 이야기는 사도행전에 매우 상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로마에 도착한 바울이 어느 정도 자유로운 감옥생활을 하는 것으로 사도행전이 보도하고 있는 바울의 이야기는 끝납니다. 사도행전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바울이 ㉥에베소에서 투옥되었다는 게 일반적인 사실입니다. 바울에 관한 그 뒷 이야기는 없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라는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듯이 로마에서 순교 당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자기의 소원대로 스페인까지 가서 선교했을 수도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쓸 당시에 어떤 감옥에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일단 로마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는데, 학자들에 따라서는 에베소라고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던 바울이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 이후로 당한 고난은 이루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고백은 신앙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처럼 기탄 없이 한번 말하는 것이라는 단서를 달고 고백했습니다. 상당히 격정적인 상태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그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고백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였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8).

우리는 바울이 당한 고난에 대해서 들을 때 어떤 생각을 합니까? 역시 바울은 위대한 사람이라는 생각일까요? 아니면 뭐 그렇게 미련스럽게 살았을까 하는 연민일까요? 혹은 이런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까요? 바울에 비해서 내가 너무나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과 불안한 마음을 갖는 걸까요? 모든 사람이 바울 같은 수는 없으니까 우리가 바울의 고난에 똑같이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렇게 불안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기독교의 신앙과 고난의 관계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매 순간마다 기억했으며, 기독교 역사는 영예와 부러움이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십자가와 고난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즉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고전1:23)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거림직스럽게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게 생각하는 것을 우리 삶의 토대로 삼고 있으니 그 사이에서 갈등이 없을 수 없습니다. 갈등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 신앙의 참된 능력을 잃어버린 경우이거나 아니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완전히 받아들인 경우에 해당될 텐데, 후자의 경우는 종말에서나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세상과의 갈등과,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고난을 다음과 같은 경우로 생각합니다. 교회당을 건축하려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방해한다거나, 아니면 교회 문제를 세상의 매스컴에서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을 기독교의 고난으로 생각합니다. 혹은 시어머니나 남편의 방해로 교회에 나갈 수 없는 며느리, 부모님의 반대로 교회에 나가지 못하는 자녀들의 경우를 그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고난도 역시 고난이기는 하고, 세상과의 갈등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약간의 지혜와 인내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우리는 정작 도전적으로 판단해야할 부분에서는 항상 뒤로 물러나고 어느 정도 양보해도 될 문제에서만은 끝까지 투쟁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컨대 경제적 가치만을 우선적으로 여기는 이 시대 정신과의 투쟁에서는 너무나도 유연한데 반해서 교회의 이해타산이 걸린 사안에서는 너무나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교회 이기주의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을 고난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아직 완료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인간의 고집으로 점철되는 이 세상에서 여전히 투쟁하고 고난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정치, 경제 구조에 일일이 간섭하자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표징들을 내보임으로써 인간의 힘을 과시하려는 모든 세력들이 전횡을 일삼지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참여하고 있는 각각의 삶에서 이렇게 살다보면 결국 감수해야할 고난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경제적인 불이익이나 사회적인 고립감 같은 것들이 우리를 압박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을 촉진시키게 되었다는 사실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설명합니다. 아마 바울이 감옥에 갇힘으로써 여러 사람들이 더욱 용기를 내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설명은 아주 사실적으로 들립니다. 가능한대로 고난을 피하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모두들 사태 추이를 관망하고 있는 차에 바울의 투옥은 분명히 강력한 자극이 되었을 것입니다. 큰 고난이 현실로 나타나면 작은 고난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법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한 일과 복음의 촉진을 연결시켜서 바라볼 수 있었다는 데에 위대한 점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만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에 감정에 치우치거나 이해타산에 기울어지기 마련입니다만, 바울에게는 복음의 일이 자기의 일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집중해서 살았다는 말인데,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 복음이 어떻게 촉진되고 있는지 눈여겨볼 수 있도록 자신을 초월하는 힘입니다. 이럴 경우에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본능적으로 자기 중심에 묶여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우리 인간이 과연 자기를 초월해서 복음의 일에 우선권을 두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이 실제로 가능합니까? 단순히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요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물론 이런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니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일에 온전히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마6:33). 그런 하나님의 나라에 연관되지 않는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너무나 미미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인생 전체를 소비하면서 이룩한 일이라고 해도 바닷가의 모래 알 하나만도 못합니다. 그것이 비록 엄청난 과학적 발견이었든지, 세계 정치사적 사건이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 이후의 부활을 선포하는 기독교의 복음이 아니라면 어떤 사건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런 부활의 희망 안에서 자기가 당한 고난을 오히려 복음이 촉진되는 계기로 보았습니다.



2)바울의 적대자들

15절-17절의 내용은 약간 의아하게 들립니다. 바울의 입장이 아주 미묘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이 투옥됨으로써 복음이 촉진되는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한데, 바울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대한 이들과 적대적으로 대한 이들이 서로 제 각각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15절) 그리스도를 전파했다고 합니다. 투기와 분쟁으로 일하는 이들은 투옥된 바울을 괴롭히고자 했으며(17절), 착한 뜻으로 일하는 이들은 바울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서 했다고 합니다(16절). 우리가 볼 때 그렇게 위대했던 바울에게도 기독교 내에서조차 적지 않는 적대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면서도,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진리라고 해서 늘 어디서나 인정받는 게 아닙니다. 그게 바로 인간 세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반론적 시각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고,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도 종종 언급되고 있듯이 좋은 뜻이건 나쁜 뜻이건 적지 않은 이들이 바울을 대적하게 된 요인이 무엇인가를 잠시 검토해 보겠습니다.



첫째,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반대하게 된 요인의 하나는 그의 변신입니다. 바울은 원래 유대교에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거의 근본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유대교에 열성적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변신했다는 사실은 그의 주변에서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특히 바울과 함께 기독교를 박해하던 이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의 변신은 유대교 측 인사들만이 아니라 사실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그를 경계의 대상으로 여기게 했습니다. 그가 다메섹 회심 사건을 통해서 기독교로 개종한 다음에 사도들이 중심으로 이루어진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을 때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고향인 다소로 돌아가서 은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본다면 오히려 냉대를 받았을 가능성이 몹시 큽니다. 사실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바울의 변신은 그렇게 수긍이 갈만한 일은 못됩니다. 나이가 어린 사람도 아니고 이미 장년이 된 사람으로서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중에 부활한 예수님을 보았다는 한 가지 근거로 자기의 삶을 완전히 뒤바꾼다는 것은 그를 신뢰하기 힘든 사람으로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전력 때문에 다른 사도들에 비해 훨씬 어려운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사도 바울의 신학적 극단성이 주변에 많은 적대자들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거의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던 초대 기독교 교회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종교적 기반인 율법을 신앙 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철저하게 반율법적인 입장에 섰습니다. 이런 율법 문제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대립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중에 할례자들이 그 자리에 오자 그들을 의식해서 자리를 떴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나무랐습니다(갈2:11이하). 예수님의 수제자요, 예루살렘 교회에서 명실상부하게 일인자였던 베드로를 책망할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에게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율법을 통한 경건 생활은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신앙적 전통이었기 때문에 초대 교회 당시에 논란이 된 율법 문제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한 다음에 사도들은 여전히 성전을 드나들며 기도 시간을 지켰으며 여전히 율법을 지켰습니다. 사실 바울도 경우에 따라서는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하기도 하고 다른 제자들에게 정결 예식을 실행하게 했습니다. 바울이 주장하는 바는 유대파 기독교인들의 율법 준수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만큼은 그런 부담을 덜어주자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책망할 때도 역시 그런 논지를 폈습니다. 어쨌든지 이렇게 미묘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공연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바울은 일관되게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율법 문제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예루살렘 종교회의(행15장)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촉발된 이방인 기독교인의 율법 문제는 예루살렘 종교회의에서 이렇게 매듭이 났습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 이상의 네 가지만 멀리하면 그 이외의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 기독교 안에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누가 하라 말라 말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아마 심정적으로는 바울의 주장을 따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평생 동안 이런 율법주의와의 투쟁에 몸을 바친 바울 덕분에 오늘 우리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율법의 강제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굳이 트집을 잡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행동하면 안되겠지만 복음의 본질을 수호한다는 점에서는 비록 적대자들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철저하게 행동하는 게 옳습니다.



자기를 반대하는 이들의 복음 전파를 바울은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어떤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말입니다. 바울의 투옥은 그를 반대하는 이들의 입장을 보장해 주는 단서가 되기에 충분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생각했겠지요. 보라. 잘난 척 하던 바울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우리가 옳았다는 사실이 증명된 게 아니냐? 그러니 우리는 이 기회에 더욱 열심히 그리스도를 전하자. 바울과 적대적이었던 이들과의 갈등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자세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근본에 대한 갈등이라기 보다는 인간적인 대립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바울은 언젠가 2차 선교여행을 떠나면서 믿음의 동지인 바나바와 아주 사소한 문제로 다투다가 결국 각자 제 갈 길로 간 적이 있습니다. 바나바는 1차 때 동행했던 마가를 이번에도 데리고 가고 싶어 한 반면에 바울은 그가 성실하지 못한 젊은이라는 이유로 제외시키자고 주장하다가 각각의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헤어진 것입니다(행15:36-41). 아무리 신앙적인 깊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역시 이런 자기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대립했다기 보다는 그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교회의 일치라는 점에서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경우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본문의 경우도 이런 정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모로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니까 기뻐한다는 바울의 자세는 오늘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외모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일은 그런 방식으로도 일어난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오늘 우리가 어떤 자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참여해야 하는가에 대한 시금석입니다. 즉 복음 전파의 비밀을 전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 전파는 우리의 방식, 우리의 계획대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도 진행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약 이런 비밀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교회는 자기들 뜻에 맞는 사람들만, 저 잘난 사람들끼리만 서로 몰려다니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외모로 일하는 이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참견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격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그분의 방식으로 하시는 그 일에 우리가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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