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허무주의와 삶의 욕망을 넘어서

1:19-26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1) 구원으로의 길

우리가 19절 말씀부터 선택했습니다만, 좀더 엄밀하게 나누려면 18절 후반 절부터 19절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닐카의 주석에 따르면 18절 전반 절의 동사 카이레인(기뻐하다)가 18절 후반 절에 거듭해서 사용되고 있는데, 이 두 번째의 카이레인은 19절 말씀과 연결됩다. 이렇게 번역될 수 있습니다. 18a 그러나 어떻습니까? 하여간에 구실로 하든지 진정으로 하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리스도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 나는 기뻐합니다. 18b 그러나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19 왜냐하면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지원으로 이것이 내게 구원이 되리라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때의 기쁨은 앞서의 기쁨보다 훨씬 강화된 것입니다. 그닐카는 그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뿐만이 아니고 나는 또한 미래에도, 그때에야말로 한층 더 기뻐할 것입니다.(국제성서주석, 한국신학연구소, 124,125).

앞에서 바울이 자신의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반대자들의 활동을 인정할 수 있었던 힘은 자신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관심이 더 컸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그저 단순히 그의 희생정신이나 양보의 미덕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임한 곤란한 상황들이 결국 구원받는 길이라는 점을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압니다. 바울이 여기서 욥기서 13:16을 인용해서 "내 구원"이라고 말한 것이 단순히 감옥에서 석방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살든지 죽든지"(20절)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초월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삶을 구원에 이르는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넉넉한 데나 부족한 데나 아무 상관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빌4:12). 그가 바라보고 있는 구원(소테리아)는 마지막 심판에서 경험하게 되는 최종적인 구원입니다. 사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은 이런 마지막 심판을 통해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세계가 곧 하늘이지요. 어떤 분들은 그런 심판 표상은 기독교인들의 사후 보상 심리가 기재로 사용되어 발생하게된 결과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건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요? 물론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가 생각하듯이 기계적으로, 인과응보 식으로 실행된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생명 현상을 완결하는 그 순간으로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구원을 내다보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저 막연하게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어떤 생각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빌립보 교인들의 기도를 통해서 그에게 구원이 임하게 된다는 기대입니까? 우선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일조를 하게됩니다. 특히 바울의 경우에는 빌립보 교우들과의 신앙적인 관계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의 기도는 곧 바울의 생각과 행동에 큰 밑받침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서 어떤 기도를 드려야할 지 모를 때 성령이 말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 주신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결국 성령론으로 집중됩니다. 우리가 거룩한 영, 생명의 영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면 영적인 일을 위하여 영적인 자세로 기도 드려야 합니다. 그런 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활동하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구원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렇듯이 바울은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지 않고 "내 구원"에 이르는 길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는데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급급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그 일을 해결하는 것이 자신에게 궁극적으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하지도 않고 무조건 그런 문제에 매달려 삽니다. 우리가 바울에게서 배워야 하는 신앙적 자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인생 길을 한 목표로 집중시키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는 푯대를 향하여(빌3:14)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자세가 아니면 우리는 결코 기독교적인 신앙을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우리의 현실을 직관할 수 있다면 바울의 가르침이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역시 참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매 순간에 닥치는 일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바른 목표를 정해서 살아가는 자세가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현대 삶을 지배하고 있는 돈만 해도 그렇습니다. 돈을 많이 가져야만 행복하다는 명제는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역으로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명제도 역시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대개의 경우에 많은 돈은 우리의 소비욕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물론 돈이 있어야 자녀들의 교육도 가능하고, 큰 병이 들었을 때 치료를 받을 수도 있고, 취미생활이나 여가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온갖 취미생활을 즐긴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환호성을 지르던 로마 귀족들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 것처럼 오늘날도 프로 스포츠나 문화활동에 열광한다고 해서 충분히 만족할 수 없습니다. 처음 얼마간은 재미가 있겠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지루해서 못 견디고, 또 다른 것을 찾아 나섭니다. 사실 참된 행복과 기쁨은 그렇게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에 삶의 무게를 놓고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었습니다. 부활의 세계이며, 생명의 세계이며, 기쁨과 평화의 세계였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희망하고 기다리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이런 기다림과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삶의 과정에 연연해하지 않고 오히려 구원에 이르는 길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2) 삶과 죽음

자기가 처한 상황을 구원에 이르는 길로 여긴 바울은 이제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만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20절). 아마 당연한 귀결이겠지요. 그리스도가 바로 자기의 생명이라면 지금 죽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1절).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은 하루 하루의 삶에 매달린 채 여하한 방법을 빌려서라도 자기가 확인할 수 있는 생명 현상을 풍요롭게 하고 연장시키려고 하는데, 바울은 삶과 죽음을 어떻게 인식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놀랍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바로 자기의 생명이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심장과 뇌의 활동이 정상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바울의 이 말은 약간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죽어 가는 사람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사명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계속된다면 그리스도가 항상 살아있는 셈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 보아도 바울이 그런 뜻으로 그리스도가 자기의 생명이라고 말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은 정치가나 예술가들의 활동에 어울리는 말입니다. 바울은 아주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했으며, 이에 근거해서 인간의 보편적인 부활까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런 부활의 세계를 내다보면서 그리스도가 자기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세계는 곧 예수님이 약속한 아버지의 집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생명 현상을 뛰어넘는 궁극적 생명의 세계입니다. 이런 희망에 근거해서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만을 원한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궁극적 생명의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런 세계가 있다는 가능성의 근거들은 설명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의 가르침은 주변을 설득시키지도 못하는 자기 확신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런 독백에 귀를 기울일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근거들을 안타깝지만 적극적인 방식이 아니라 소극적인 방식으로 찾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의 방식으로 설명하셨듯이 우리도 역시 간접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시작해 봅시다. 사물에 대해서 적극적인 방식으로 연구하고 설명하는 과학자들이라 하더라도 생명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게 없습니다. 심장이 피를 돌려야만 인간의 생명이 유지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증명할 수 있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심장 활동이 없이도 생명이 가능한 곤충들이 있고, 피가 없이도 살아가는 단세포 생명체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면, 결국 심장과 피가 바로 생명 자체는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이 지상에 가득 찬 생명 현상들은 왜 이런 모습과 이런 원리들을 갖게 되었을까요? 이런 방식이 아닌 다른 생명 방식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생명은 과학적으로, 적극적으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 신비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신비라는 말은 비합리적이라기보다는 우리 인간이 그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지구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일 억 년 후에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지 전혀 예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가 우리의 척도로 측량할 수 없듯이 생명의 미래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완성된 세계는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미래에 있습니다. 현재의 모든 존재가 그 참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게 될 생명의 세계는 미래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미래의 세계에 우리가 참여할 때만 우리는 영원한 것과 관계될 수 있습니다. 종말에 이루어질 생명의 세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났다고 우리 기독교인은 믿습니다. 그의 부활은 이런 궁극적 생명의 선취라고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생명이라고 한 바울의 고백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을 경험한 바울의 고백에 근거해서 이 사실을 믿고 희망합니다.

이런 부활과 궁극적 생명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지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비록 위대한 능력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라도 아주 짧은 시간 안에서만 잠시 있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50억년 전에 생긴 지구 자체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태양과 함께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별들도 그런 유한한 시간 속에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세계가 아니라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배불리 먹고 즐겁게 노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 자체도 부질없는 일일지 모릅니다.



이런 부활의 생명에 대한 희망 안에서만 우리는 바울이 고백한 대로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의 생명 현상에만 묶여 있다면 그것이 파괴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다면 이 땅에서의 죽음이 오히려 참된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죽음을 신앙의 초석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생명은 죽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과 생명의 관계를 확실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 스스로 지상적인 삶을 십자가에서 끝맺으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기독교 신자들은 세례를 통해서 죽음을 경험했고, 성례전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피를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순교도 많이 당했습니다. 이렇게 죽음과 연관된 일련의 사건과 표징들은 기독교가 어떤 방식으로 생명의 세계를 지향하는지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서 생명을 얻는다고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생명과 죽음에 대해서 이 세상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살려고 하는 자는 죽고, 죽으려 하는 자는 살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희망 안에서 모든 지상적인 죽음의 세력들과 대결합니다. 인간의 계획과 의도를 거슬려서 발생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독교 교회가 생명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는 내 생명입니다."라는 바울의 고백에서 있습니다. 현재 지상에서 교회의 힘을 확장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궁극적 생명의 선취라 할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의지하는 방식에서 교회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감추어진 방식으로, 미래로부터, 현재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 이외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런 자세를 견지한다면 오늘 우리 교회는 "살든지 죽든지" 진리와 생명을 향해서 정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허무주의와 욕망을 넘어서

바울은 어떤 면에서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지상의 삶을 끝장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의 삶을 택하고 싶지만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면 여전히 살아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앞의 선택은 자신에 좋은 길이며, 뒤의 선택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생각에서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을까요? 그는 허무주의자인가요? 심각한 염세주의자인가요? 생명의 환희와 자유를 알지 못하는, 무언가 정신 치료를 필요로 하는 피해망상가인가? 만약 그가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에서 공격적인 사람이었다면 함께 죽자고 주변 사람들을 부추겼을 텐데, 그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이루어가도록 가르쳤습니다. 그가 현재의 삶을 떠나서 다른 생명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 이유는 바울이 보다 궁극적인 생명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런 고백이 어느 정도나 타당성이 있는지, 아니면 그의 극단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검토해 봅시다.

  

일단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사실 우리의 인생살이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하는 일들이 매일 똑같습니다. 매일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그리고 자기의 계획을 성취하고, 취미생활을 열성적으로 합니다. 판넨베르크의 표현대로 사람들은 노동과 오락 사이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오가며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분과 초를 아껴가며 일을 하고 그것으로 인해 얻어진 힘으로 살림살이를 늘리고, 여행을 하고 자녀들을 교육시킵니다. 이것 자체로는 상당히 지루한 인생살이입니다. 이런 일들은 십 년 정도 하면 끝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일 년이면 더 이상 필요 없는 일들도 많습니다. 칠, 팔십 년 평생 동안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며 산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인간의 가장 고급스러운 행위라 할 학문, 예술, 봉사활동이라는 것들도 우리를 완전히 만족시켜주지 못합니다. 나름대로 성취감을 줄뿐이지 인간 실존의 지루함을 근본적으로 해결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지루함을 피해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만 그런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흡사 어린아이였을 때 그렇게도 재미있던 소꿉놀이나 인형놀이가 나이가 들면 시들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우리는 지금 나이만 들었지 정신적으로는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세상살이에 그렇게 열을 올리고 있는지도 모르죠. 태양 아래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헛되다고 말한 전도서 기자의 주장은 우리가 현실을 좀더 냉정하게 들여다본다면 오늘도 여전히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인간의 삶에는 허무주의가 자리잡을 공간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허무주의는 삶의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훨씬 강렬하게 작용합니다. 삶의 의지가 훨씬 강화된 현대에 이르러서 허무주의의 열매가 풍성해졌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면 우선 삶에 대한 지나친 욕망이 극복되어야 합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않고 자기를 확대하는 것에서 채워가려는 이 욕망은 생명력을 강화시켜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허무하게 만들뿐입니다. 예컨대 남녀의 성행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매우 강렬한 욕망으로 작용합니다만 그 욕망이 자기를 만족시키는 데에만 사용되었을 때 대개는 허무합니다. 식욕은 어떻습니까? 그것 자체는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만, 그것이 남을 파괴하고 획득되어지는 경우에는 아무런 기쁨이 없습니다. 스포츠의 경우에도 똑같습니다. 시합에서 승리할 경우에 느끼는 기쁨은 아주 짧습니다. 더욱 큰 승리를 향해서 자기를 힘들게 하고 그것이 달성되지 않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초조하게 되고, 그것이 달성된다고 해도 역시 허무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육체의 삶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을 택하고 싶다는 바울의 말이 허무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허무주의라고 한다면 그가 빌립보서에서 기쁨을 말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는 생명을 우리가 이 땅에서 성취해 가는 그것보다 훨씬 거대한 차원에서 생각했습니다. 지상에서의 삶으로 끝장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생명으로 말입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이었기 때문에 죽는 것도 역시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21절). 이렇듯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에서만 예수님의 행위와 사건은 의미가 있으며, 순교자적인 기독교의 전통도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이나 그것을 떠나는 것이 작은 문제였기 때문에 비록 하루 빨리 부활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을 원했지만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육체 안에 거하는 길을 기꺼이 택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익한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교제를 나눔으로써 서로가 생명의 세계에 깊이 들어갈 수 있다면 살아 있는 게 참으로 유익합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여전히 이렇게 질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사는 게 작은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실제로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하늘 나라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육체로 사는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하며, 또한 바울처럼 영적으로 심원한 차원에 도달해 있지 않은 대개의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생명을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게 아닐까?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합니다만 우리가 기독교 신앙으로 살기를 결단했다면 아무리 현실의 삶이 절실하다고 하더라도 그 삶이 나아가야 할, 더 정확히 말해서 현실의 삶을 결정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생명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 하늘 나라, 그 하늘의 생명을 향한 총체적 노력이 바로 기독교 공동체의 토대입니다.



어쨌든지 바울은 아직은 육체로 살아가는 이 삶을 선택합니다. 비록 유한하고 잠정적이지만 이 지상적 삶 안에 남기로 했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도 역시 자기가 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회 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만 교회 생활에서 이런 선택은 아주 중요합니다. 어떤 것이 자기의 마음에 드는 것인가의 기준이 아니라 어떤 것이 교회의 덕을 위해서 필요한 것인가의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들끼리 모여있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기준으로 판단하게되면 서로 상처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의 성격이나 인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로간에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것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그리스도의 덕이 드러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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