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신앙은 투쟁인가?



1:27-3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칭찬만 하거나 위로만 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으로 권면하고 도전했습니다. 칭찬과 위로는 듣기 좋은 말이지만 도전은 부담스러운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른 길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그는 고난과 싸움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바울의 경우에 기독교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고난이며 싸움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에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삶은 이 세상에서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복음에 합당한 삶

기독교인의 본질이 싸움이라고 해서 사사건건 문제를 만들고, 공연히 트집을 잡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분쟁이 있는 곳에서 화해를 일으키고 나누인 곳에서 일치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싸움이라는 것은 대단히 포괄적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제한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 경계는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싸움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복음(유앙겔리온)에 합당한 삶을(1장, 2 참조) 아래와 같이 두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완전한 경건생활입니다. 성수주일, 십일조, 기도생활, 전도, 교회봉사를 복음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행위들은 물론 신앙생활에서 권장되어야할 요소들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의 복음 자체는 아닙니다. 복음은 그야말로 인간의 어떤 능력이나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은 하나님의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소식이지 우리의 온갖 수고로 채워가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상당한 경우에 이런 경건 생활을 복음의 내용으로 간주하다보니 교회와 신앙생활에서 억지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며, 기쁨이 아니라 부담만 가중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을 편히 쉬게 해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는데, 교회는 오히려 신자들에게 그런 짐을 무겁게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복음의 왜곡입니다.

둘째는 완전한 도덕성입니다. 어느 정도 현대화되었다고 생각하거나 지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교회에서는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책임을 강조합니다만, 이런 윤리와 도덕도 역시 권장될 사항에 불과하지 복음 자체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정말 복음이라면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타당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복음은 윤리를 뛰어넘는(metaethic) 문제라는 말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에게도 유효한 사건이며, 생존에 급급하여 고급한 윤리 문제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유효한 사건이어야 합니다. 이마누엘 칸트는 실천이성 비판에서 이런 윤리적 지평에서만 하나님의 존재가 당위성을 갖는다고 말했습니다만, 이는 아마 그가 기독교의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종교적 경건과 도덕적 실천에서 거의 완벽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런 경건이나 도덕의 지평과 얼마나 근본적으로 다른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품위를 가장 고상하게 드러내주는 종교와 윤리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만 예수님이 볼 때 그런 행위는 인간의 자기 확신이었으며, 따라서 위선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경건과 도덕은 그것이 강화되면 될수록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의지하게 할 뿐이지 인간과 생명을 사랑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이런 율법주의적인 패라다임이 극복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회가 신자들을 이런 종교적 경건과 도덕적 실천에 머물게 한다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서 너무나 쉽사리 경건성과 도덕성으로 떨어져버리는 이유는 복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반면에 그것들은 너무나 분명하게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재산을 다 바쳐서 교회당을 짓는 일은 눈에 확연히 드러나며, 40일 금식 기도를 한 사람은 교회에서 주목받습니다. 정기적으로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방문하는 일도 우리 손에 확실하게 잡힙니다. 원래부터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이런 일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십계명의 첫 머리에 하나님을 위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세계가 외면적으로라도 여전히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힘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도 역시 이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원과 생명의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에서 해방되고 죽음에서 부활한다는 희망에 관한 사실입니다. 누가 더 잘 사는가, 누가 더 세련되었는가, 누가 더 아름답고 건강한가, 누가 더 착한가, 누가 더 기도를 잘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되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임했다."는 소식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까이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로서 오직 한 가지만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시오. 하나님이 나라가 가까이 임했오.(마3:2, 막1:15). 이 예수님의 요청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멍에는 너무나 가볍습니다. 그 당시에 무식했던 사람들, 경건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만, 반면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준비를 많이 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쾌한 소식이었습니다. 그저 회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자신들이 평생에 걸쳐 쌓아놓은 모든 업적은 휴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의 명예와 부는 물론이고, 경건과 도덕, 종교와 사회 체제까지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밑지는 장사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기준이 다만 "회개"라는 말씀은 사실 쉬운 게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회개라는 단어로 번역된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행한 몇 가지 부도덕한 행위를 뉘우치거나 교회생활을 등한히 한 것에 대해서 반성하는 일은 아주 쉽지만, 하나님을 향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은 자기의 능력과 업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기도 시간을 대폭적으로 늘릴 수는 있고, 헌금을 세상이 깜짝 놀라게 할 수도 있고, 봉사 생활을 뼈가 부서질 정도로 할 수는 있습니다만 자기의 업적과 능력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일은 근본적으로 회심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쉬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심으로(헤니 프뉴마티) 서서 한 뜻으로(미아 푸쉬케)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라(27후)고 말합니다. 우리 개역 성경에는 "일심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원래는 여러분이 한 영 안에 굳게 서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영적인 삶이 필요하며, 또한 결과적으로 신자들이 같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2) 복음을 위한 싸움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바울이 정의하고 있는 대로 일종의 "싸움"입니다. 복음을 위한 싸움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복음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율법의 범주로 격하시키는 이들과의 싸움에서 선봉에 선 바울만이 아니라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할 빌립보 교인들도 역시 이런 싸움에 나서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 약간 격한 어조로 호소하고 있는 이 싸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실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충분하게 동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이 우리의 상황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마틴 루터가 처한 상황이 바로 바울과 같았던 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칭의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위로 보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을 경우에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적 실존을 "싸움"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전투적인 자세가 없으면 대세에 휘말려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대적하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복음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지만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구원의 증거라고 웅변조로 강조합니다(28절).



비록 우리의 상황이 율법주의자들과 첨예하게 대립했던 바울의 상황에 비해서 훨씬 원만하다고 하더라도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우리 신앙의 초석으로 삼는다면 오늘도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싸운다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두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율법적인 가치에 의해서 작동되고 있는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문명이 발달할수록 바벨탑과 같은 인간의 업적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선진국은 선진국대로, 제3세계는 그들대로 한결같이 발전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특히 1990년 어간에 휘몰아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해서 자본주의가 오늘의 메시아니즘으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습니다. 경제와 과학 만능주의, 생산성 획일주의, 경쟁구조와 오락물이 인간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정신 속에서는 하나님은 고사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화도 오히려 퇴보할 뿐입니다. 모든 개인과 모든 나라가 남보다 잘 살아야만 행복하다는 신념에 빠져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아무도 행복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미국의 사회 체제와 설계들이 사람들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어떤 이유로 자신들이 풍요롭게 살게되었는지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조건만을 즐기려고 합니다. 독일 사람들이 정말 행복할까요? 아니면 스위스 사람들입니까? 물론 민주적인 사회 체제가 굳건한 나라에서는 그나마 인간의 인간다운 삶과 자연과의 일치가 어는 정도 배려되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역시 어느 한계 안에서만 타당할 뿐이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막1:15)는 복음의 기준에는 참으로 요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그들의 경건과 도덕성은 자기 과시이고 자기 만족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럴듯하게 보일 수는 있지만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안은 무엇일까요? 대안 없이 무조건 현실 체제를 비난하는 것으로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싸운다고 변명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당장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해방기구 사이의 싸움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우리에게 있는 건 아닙니다. 러시아와 체첸, 중국과 티베트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어떤 사안에 접근하는 것은 정치나 경제적 논리나 아니면 사회 심리학적 분석이 아니라 성서적 전통과 신학적 해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지나치게 추상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의 미래와 종말에 대한 궁극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지 실용적인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니 당연하게 예언의 방식을 취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예언에 근거해서 구체적인 대안은 담당자들이 모색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종의 프로그래머로서가 아니라 예언자로서 이 세상과 경쟁하고 투쟁합니다. 참된 구원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인간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지 복음에 근거해서 이 세상과 투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즉 인간의 구원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기쁨과 평화와 자유는 인간의 능력이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흔들림 없이 선포해야합니다.



둘째, 기독교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아무 주저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우선적으로 복음적인 구조로 갱신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복음화를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자체가 복음인데 교회의 복음화를 위해서 싸운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복음적이라는 말이 인간의 가시적인 성과에 매어 달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신앙적 태도를 가리킨다고 할 때 우리의 교회가 여기서 과연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세상의 기업들처럼 우리 교회가 성장지상주의에 빠져있다면 이는 곧 비복음적이라는 말이 됩니다.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을 중심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교회가 성장한다는 사실 자체는 매우 귀한 일입니다. 기독교 선교 1백여 년 만에 전 인구의 20% 가량이 신자가 된 한국 교회의 선교 역사는 2천년 기독교 역사상 전무후무하다고 합니다. 이런 저력으로 해외 선교, 신학자 배출, 사회 참여 등, 한국 교회는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양적인 성장 배후에는 그에 못지 않은 아픈 상처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일백 여 개 이상으로 갈라진 교회 분열사는 접어두더라도 우리 교회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많습니다. 최근에는 목회자의 세습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자신의 평생 동안 키워온 교회를 자기 아들이나 사위에게 물려준다는 말입니다. 작게 보면 작은 일이지만 우리 교회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대외명분으로는 교회의 발전을 말하지만 내심으로는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태도입니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복음적 사실을 목회의 명제로 삼아야할 때입니다.



기왕에 말이 나온 차에 가장 우리 한국 교회의 현상 중에서 가장 비복음적이며, 따라서 모든 부정적인 문제들의 원인이라 할 교회성장 지상주의에 대해서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합니다. 물론 교회 성장의 당위성이나 긍정적인 요소들을 전제하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교회성장 지상주의는 실제로 기독교 교회 사이의 진정한 일치를 저해하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을 교회의 본질인 것처럼 생각하니까 교회간의 일치가 부차적인 요소로 미루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이치입니다. 같은 지역에서 같은 대상을 놓고 서로 자신의 교회로 이끌어 오는 것만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교회끼리 경쟁을 펼치게 되고, 이런 경쟁은 상대방을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교회성장 지상주의는 목회자들 상호간에도 일치를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큰 교회를 맡고 있는 목회자들은 어떤 모임에 참석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발언권을 갖지만, 작은 교회를 맡고 있는 목회자는 그의 생각이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그만큼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큰 교회 목회자는 교만하게 되고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열등감에 빠집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모든 교회와 모든 목회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의 구원 사역을 선포하는 과업에서 일치감을 가질 수 있을까요? 사실 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볼 때 부차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히려 어떤 가시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힘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갈릴리 어부들에 의해서 시작된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다면 그 힘이 어떤 성격이어야 하는지 아주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복음화는 모든 인간적인 설계와 염려를 접어두고, 비록 불확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구원과 그 생명만을 집중적으로 추구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데서 개개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자리 매김을 한다면 결국 그것으로 인한 시련과 싸움까지 감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공연한 투쟁이라면 늘 물러서야겠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한 투쟁이라면 그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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