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코이노니아의 원리



2: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우리는 빌립보서 1장을 통해서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일반적인 형편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에 충실한 교회였다는 사실을 바울은 확신하고 있었으며, 앞으로 더욱 이 복음을 위한 싸움에 진력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제 2장에서는 기독교인의 삶을 좀더 구체적으로 규정해주고 있습니다. 1-4절에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는 충고가 있으며, 특히 5-11절에는 소위 "케노시스"(낮춤)라는 기독론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 등장하고, 뒷 부분에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라는 두 명의 제자들이 소개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짐과 그것으로 인해 높아짐이라는 변증법적 구도 속에서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 낮은 자가 높아진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됩니다. 과연 이 말은 타당합니까? 자기를 낮춤으로써 높아집니까? 겸손이 과연 기독교의 가치입니까?



1) 일치(1,2)

바울은 1절에서 기독교인의 신앙적 특성을 네 가지 범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권면, 둘째는 사랑의 위로, 셋째는 성령의 친교, 넷째는 긍휼과 자비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서 서로 권면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구원보다 더 중요한 일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누구를 위로한다는 것은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그 이외의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성령과의 사귐(게마인샤프트)이라고 규정될 수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는 남을 향한 진실한 마음입니다. 열려진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이러한 특성들은 결국 기독교인들의 일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2절)고 했습니다. 다툼과 분열을 그 특징으로 하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기독교인이 구원론적 삶을 세상에 내보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표시는 아마 일치일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기독교인의 일치를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비록 하나의 복음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회였지만 여전히, 그리고 매우 확고하게 분열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늘 그런 싹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고린도 교회에서도 그랬습니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고전1:12).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도 역시 분열의 역사를 그 특징으로 하는 것을 보면 분열이 바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창세기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바벨탑 사건은 우리에게 인간의 분열이 어떤 근원과 결과를 갖고 있는지 단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바벨탑을 쌓게된 동기는 자신들의 능력으로 영원한 것을 건설해보자는 심사에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이 분열의 역사를 갖게된 것은 자기집중, 자기만족, 자기확신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분열의 역사도 역시 이와 똑같습니다. 로마교회와 동방교회의 분열도 역시 서로간에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자기집중이 없었다면 소위 "필리오 크베"로 일컬어지는 성령론에 대한 차이는 얼마든지 좁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과 루터 사이의 분열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 개신교의 입장에서 볼 때 루터를 파문한 교황청에게 분열의 모든 책임을 미루고 싶기는 합니다만, 그 이후 수 백년간에 걸쳐 우리가 보여준 교파분열을 감안한다면 그 책임에서 우리가 완전히 자유롭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바벨탑 사건의 결과는 인간들 사이에 이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의 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이려 했던 이들은 그 능력은커녕 오히려 산산이 흩어짐으로써 무력한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의 방언 사건이 있기 전까지 모든 인류는 자신들의 생각을 서로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진정한 대화의 단절입니다. 대화의 단절은 힘의 대결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인류 역사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폭력적인 전쟁이 있었습니까? 그것은 오늘도 역시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일도 역시 이런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는 물론이고, 같은 나라 안에서도 지방색에 따라서 대화가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지난 9월11일에 있었던 뉴욕의 무역센터 테러 사건과 연관해서 벌어지는 행태는 인간 사이의 진정한 대화와 일치가 얼마나 요원한 일인지 여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수사했지만 아직 누가 범인인지 100% 확실하게 결정되지 않았으며, 비록 빈 라덴 그 테러를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한 사람, 혹은 그를 둘러싼 아프카니스탄의 텔레반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서 수많은 민간인을 살상시킬 수 밖에 없는 보복전쟁을 미국이 밀어붙인다는 것은 매우 무모하며 비지성적일뿐만 아니라 비신앙적입니다. 서로 신봉하는 종교가 다르고 이념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 지구 안에 살아가고 있는 같은 인류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대화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 어떤 분들은 그런 낭만적 사고방식이 테러리즘을 양산한다고 강변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테러의 발생 원인을 분석해 가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할 책임과 그 가능성이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훈련을 그렇게 많이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대화가 안 된다는 사실은 인간의 일치가 어디서 시작되어야 하는가를 암시해줍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화해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분열과 대화단절이라는 것이 결국 인간의 자기집중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그 자기집중, 혹은 이기심과 교만을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사이에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첩경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서로 속내를 열어놓고 대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가 피해를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의 마음이 진정한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하다면 상대방을 적대적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를 방어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와 기쁨과 자유가 하나님과의 화해에서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인간적인 프로그램에 매달릴 게 아니라, 혹은 어떤 심리요법에 기댈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집중해야만 인간의 진정한 일치가 가능합니다. 그럴 경우에만 우리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길 수 있습니다.



언젠가 약간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는 목사님과 성서 영감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저도 사실은 그 분보다 훨씬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만. 그 분은 성서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면서, 칼 바르트가 비록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했지만 여전히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대화에서의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좀더 신학적으로, 혹은 신앙적으로 깊이 있게 대화를 하기보다는 자기가 이해한 범위 안에서 상대방을 재단해 버리기 때문에 대화가 안 되고 그저 자기 주장만 일방적으로 강요할 뿐입니다. 영감론이니, 근본주의니 하는 몇 가지 잣대로 판단하지 말고 어떤 사안을 객관적으로 접근해 들어가야만 대화가 가능합니다. 예컨대 성서에 오류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한다거나, 머리를 가려야 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서는 오늘 우리와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전혀 다른 세계관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보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거나 아니면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자기의 주관이나 감정이 아니라 사실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게 된다면 최소한 대화의 물꼬는 트이리라고 생각합니다.



대화 단절의 문제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 있던 우리의 현대사에서도 매우 날카로운 특징으로 드러났습니다. 육이오 남북전쟁 때 굶주린 빨치산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빨갱이라고 단정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사람의 사상이라는 것을 어떤 틀로 찍어 맞출 수는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이런 점이 좋을 수도 있고 저런 점이 나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그러니까 어떤 이념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난 역사는 이런 사실적인 판단을 용공주의라는 죄목으로 판정해버렸습니다. 이런 전체주의적인 체제에서는 대화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마녀 사냥하듯이 어떤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전통과 습관에 근거해서 폭력을 휘두르기 때문에 분노와 분열만 깊어 갑니다. 남북한의 대립구도 속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알고 싶은 분은 김은국의 "순교자"와 황석영의 "손님"이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두 권의 소설은 기자의 사실 보도가 아니라 소설가의 상상력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어떤 전통이나 습관에 묶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은 곧 인간의 제도나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할 때만 우리의 경직된 마음은 성령에 의해서 자유로워지고, 따라서 상대방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싹이 돋아납니다.



2) 겸손(3)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노력과 성과가 상대적인 가치에 머물러야만 할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는 것은 자기의 수고와 노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겸손해진다는 말입니다. 이런 겸손에 근거하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교양과 인간관계는 다만 다툼과 허영(3절)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다시 한번 율법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오류와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절대화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데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의 모든 노력은 일종의 다툼과 허영이라는 말입니다. 경건의 모양에 치중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다투게 됩니다. 그것은 곧 남에게 보이기 위한 허영심의 본질입니다.



어거스틴이 인간의 원죄는 휘브리스(교만)이라고 했듯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남보다 앞서고 자기를 높이려고 하기 때문에 겸손하게 생각하고 겸손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대 문화를 둘러보십시오. 모든 것이 자기를 드러내려는 시도입니다. 현대인들의 의식구조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텔레비전의 방송 내용을 보십시오. 겸손이라는 가치는 그 어느 구석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공주병"이라는 유행어가 그냥 나온 것은 아니지요. 정치인들의 태도도 역시 겸손이 아니라 자기 과장이고 허영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끔 비치는 겸손한 태도도 역시 자기 자신과 시민들을 속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가장 인간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육 현장은 어떻습니까? 흡사 기업처럼 경쟁력만을 가치 기준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성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생명의 세계인 구원을 경험했다면 교만한 이 세상에서 겸손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길 이외에 우리가 어디서 교회의 구원론적 리얼리티를 이 세상에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죄 받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겸손하지 못하다면 이 세상이 어디서 어떻게 구원의 징표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겉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억지로 겸손하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드러나야 하는 게 아닐까요? 소금이 소금이라면 늘 짠맛을 갖고 있듯이 말입니다. 다툼과 허영이 힘을 발휘하는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의 선교적 사명은 자신의 실존을 겸손에 두는 데에 있습니다.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긴다는 이 겸손의 가르침은 교회 안에서 특별히 지도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목사님들은 그냥 있어도 드러나는 자리인데 자기 자리를 더욱 높이려는 모습들을 간혹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진정으로 낮아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늘 생각해야만 목사님들의 구원이 가능할 것입니다. 평신도의 지도자라 할 장로님들의 태도는 더욱 중요합니다. 만약 장로직을 교권으로만 생각한다면 그에게 평화와 기쁨의 영이 찾아올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갱신은 어떤 조직이나 제도에 앞서서 지도자들이 겸손을 자신의 신앙적 본질로 되살려 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윤리적인 차원에서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겸손이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겸손이 아닙니다. 아마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게되면 그때부터 겸손이 자기의 삶 안에 자리 매김될 것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죠.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 안에 동양 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 노자는 물을 도의 메타포로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곧 낮아짐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은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늘 불안정합니다만 물은 끊임없이 아래로 흘러내리기 때문에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낮은 자리가 자유이고 평화라는 교훈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내다보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이 이런 노자의 깨달음보다 못하다면 우리의 구원은 거짓입니다.



3) 타자를 위한 존재(4)

바울은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각자 자기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각자 다른 사람들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시오.(새번역, 루터번역). 우리 개역판에는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일을 돌아보고 남의 일도 돌아보라는 개역판보다는 자기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새번역과 루터번역이 더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의 일을 돌아보라는 점에서 보면 개역판도 역시 결정적으로 오역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구체적인 삶에서도 남의 일을 우선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요즘 같은 살벌한 생존경쟁의 시대에 이게 어디 말이나 되겠습니까? 또는 그 어떤 다른 태평성대에 이럴 때가 있었을까요? 요순시대가 그랬을까요? 아니면 세종대왕 시대가 그랬을까요? 인간이라는 종이 다른 종을 제압하고 이 지구를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자기 일보다 남의 일을 먼저 돌아보는 삶의 태도는 실종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저 무의식 바닥에 묻혀 있든지 상당히 파손된 상태로 남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초대 교회도 인간 관계에서 중요한 가치를 그대로 실현하지는 못했으니까 인간 공동체의 한계를 우리가 알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개인이나 사회를 막론하고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삶의 자세이기 때문에 여러 모양으로 남의 일을 돌아보는 삶의 인식과 구조를 넓혀나가야 합니다. 오늘처럼 "제로, 섬"이라는 살벌한 경쟁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남의 일을 돌아보는 개인과 단체들이 곳곳에 숨어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단 거시적인 관점에서 경쟁 체제를 코이노니아 체제로 변혁해나가야 합니다. 생산성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를 잡는 자본주의만으로는 이 세상은 별로 희망이 없습니다. 미시적으로는 스스로 생존해나갈 수 없는 이들의 생존을 이 사회가 책임질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해나가고, 자발적인 봉사 단체를 활성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회가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본 본훼퍼의 주장은 타당합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늘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타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 일은 우리의 인격에 맡겨진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신뢰하는 정도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우리를 지배할 때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를 향해서 마음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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