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 찬양



2:5-11



여러분은 서로 이 마음을 품으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또한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현존 방식으로 계셨으나

하느님과 동등함을 고수하려 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현존을 수용하면서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사람으로 나타나

자신을 낮추어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실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하느님이 그를 또한 높이 올리우시고

모든 이름보다도 빼어난 이름을 그에게 선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이름 안에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위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무릎을 꿇으며

또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고) 고백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새번역, 그닐카의 빌립보서 주석에서 인용)



바울은 앞부분(1:1-2:4)에서 아주 평범하게 편지 형식으로 글을 쓰다가 바로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정확하게는 2장6절에 이르러서는 약간 다른 성격으로 썼습니다. 우선 내용적인 면에서 볼 때 평상적인 글에서 신학적인 글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흡사 골로새서 1:15-20의 우주론적 기독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은 차원 높은 내용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산문 형식에서 운문 형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개역성경에는 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지만 실제로는 위에서 새번역으로 인용해 놓았듯이 일종의 노랫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밝혀주고 있듯이 이 그리스도 찬가는 바울 이전에 이미 전승되었던 내용이 틀림없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와 그 신학적 성격이 원래의 바울과는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 당시 초대 교회에 전승되던 이 그리스도 찬가를 자신의 편지글에 포함시킴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에게 복음의 진수를 전하려 했습니다.

우선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라는 말로서 이 그리스도 찬가를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부분에서 거론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권면이 단순히 인간의 인격적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바울은 기독교인이 따라가야 할 어떤 원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윤리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에게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지해서 발현되는 것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기독교가 제시하는 삶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있습니다. 여기에 바로 다른 종교나 철학, 혹은 윤리와 대립하는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 구원이 "아래로부터"인가, 아니면 "위로부터"인가의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요즘도 인간 문제에 대한 처방은 대개가 아래로부터 오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합리적인 것이며 실제적인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인간발달, 심층심리학, 정신분석, 정치적 담론, 교육 제도 등, 이 모든 것들은 어떻게 하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인간다운 세계를 건설하는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나름대로, 혹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인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노력은 오랜 세월동안 계속되어 왔지만 인간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아주 미미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뿐입니다.



법 문제만을 좁혀서 생각해보십시오. 로마는 로마법이 부실해서 망했을까요? 오늘 선진국의 많은 문제들은 그 나라의 법이 어딘가 완벽하지 못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일까요? 노동자와 사업자간의 문제를 법적으로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의사와 약사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도 역시 법으로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위로부터의 계시에 희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됨으로써 인간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습니다. 물론 현실의 여러 구조와 세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쉽사리 순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또한 이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그 어떤 완전한 사회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바입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방향성을 갖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우리 각자의 문제나, 혹은 사회적인 문제가 위의 것에 의존해서 풀려야 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이미 전승된 그리스도 찬가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조금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1) 그리스도의 선재성(6)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를 근본 "하나님의 본체"(6절)였다고 노래했습니다. "본체"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실체가 하나님과 똑같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체(substance)는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일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존재 양식에 관한 표현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선재성에 대한 표현입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는 요한복음의 진술처럼 그리스도는 만물이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역사적 실존 인물이 어떻게 역사를 초월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실 겁니다. 그 말은 옳습니다. 역사는 역사 안에서만 타당하지 역사를 뛰어넘으면 이미 역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완전한 진리라는 것이 과연 우리가 계산해낼 수 있는 실증적 역사 범주 안에서만 확인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두 가지 각도에서 이 문제를 풀어봅시다.

첫째, 우리가 엄정한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은 눈에 보이고 감각적인 범주 안에서만 확인된 것뿐이지 그런 보이는 것의 내면에 있는 궁극적인 범주에서는 별로 확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된 사실과 진리를 인식하려면 만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하지 그 외면에만 사로 잡혀서는 안 됩니다. 간혹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생각의 지평을 바꾸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예컨대 화이트헤드가 표명한 이후로 거의 과정철학의 중심 명제가 되다시피 한 "Reality is a process."라는 문장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명제는 만물의 실질을 실체가 아니라 운동과 변화와 진화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인데, 우리의 시각을 넓혀주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만약 이렇게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초대 기독교인들이 역사적 예수의 사건에서 역사의 초월을 경험하고 확신했다는 사실을 그렇게 허황한 주장이라고 매도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둘째, 역사의 흐름이 늘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구도 속에서 단선적으로만 흘러가는 게 아닙니다. 과거의 원인에 의해서 현재의 결과가 파생된다는 생각이 너무 확고하기 때문에 미래가 현재를 규정해낸다는 견해를 도저히 받아들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만 그 가능성을 부정하면 안됩니다. 우선 과거의 원인에 의한 결과가 현재라는 역사관이 늘 정당한 게 아닙니다. 이 역사는 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류사만이 아니라 생물학이나 물리학도 역시 이런 우연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진행된다는 역사관의 한계를 전제해야 합니다. 종말이 현재에 선취(先取)적으로 발생한다고 믿는 기독교는 예수님을 이미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함께 계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예수에게 부활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는 이미 미래의 완성에 참여한 분이며, 그 미래의 완성이 곧 창조의 완성이라고 할 때 이미 선재하고 있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낮춤(7)

그리스도 찬가는 하나님의 본체 안에 있었던 그리스도가 종의 형체(7절)를 가졌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과의 동일한 존재 양식에서 "종"의 존재 양식으로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이 구절이 소위 "케노시스"에 해당합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대로 그리스도가 자기를 종의 형체로 낮추었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기독교의 구원론적 출발점입니다.

이 문제에서도 우리는 사유의 패라다임을 바꾸어야만 이해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높은 데 있고 종의 나라는 낮은 데 있다는 말이 어떤 공간적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이것도 역시 존재 양식과 관계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있는 세계로부터 이 역사의 한계 안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절대로부터 상대로 오셨다고 말입니다. 이 상대적인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낮은 세계입니다. 이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결국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도 역시 자신의 구원으로 인한 황홀한 경험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세계와 함께 거해야 한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성육신(8)

바로 위에서 말한 종의 형태의 구체적인 표현은 "사람"(8절)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성육신"(인카네이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이 말은 기독교의 신론과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에서 핵심입니다. 역사적 실존 인물인 예수님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의가 바로 그것인데, 이 논의가 초대 교회의 3백년 역사를 통해서 줄기차게 진행되었습니다. 간략한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편에서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완전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본질을 가질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역사적 예수님은 그림자처럼 그렇게 보였을 뿐이지 어느 한 순간도 완전한 신성을 잃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신성만을 강조한 사상을 가리켜 영지주의라고 했는데, 이들은 이단으로 내몰렸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본질을 그 인성에 초점을 두고 강조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을 에비온주의자라고 하는데, 초대 교회는 이들도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기독교 교회는 니케아 종교회의(325년)에서 예수님의 본질을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그의 인격은 참된 인성(vere Homo)과 참된 신성(vere Deus)으로 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 이후로, 물론 그 이전에도 그랬습니다만, 예수님은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으로 고백되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 기독교는 공동의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고 있는 유대교와 근본적으로 구별됩니다. 유대교의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한 분으로 영원 자존하신 분이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은 역사에 의존했던 예수님과 동일시됩니다. 유대인들은 역사에 의존적인 하나님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아무리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어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본질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역사적인 인간 예수에게서 인식했습니다. 비록 신성과 어울리지 않는 인간의 고난과 죽음을 맛보신 분이지만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구원 사건을 통해서, 결정적으로는 그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사실을 누구나 믿을 수 있게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것이 타당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해석해야만 하며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맞는지 않는지는 역시 종말에 가야 드러나겠지만, 역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삶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는 드러날 것입니다. 종말은 이미 현재 안에 선취되고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4) 그리스도의 높임(9)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지극히 높이셨습니다(9절). 그리스도가 복종하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미래에 자신을 완전하게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적 한계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관리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십자가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근본 사태를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우리의 신앙 구조에서 자칫 하면 예수님이 자청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뜻으로 오해될 염려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가능하면 그 십자가의 죽음을 비켜가려고 노력했습니다만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면 피할 수 없었던 길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즉 십자가는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라 그의 사명에 의한 귀결이었습니다.



그가 높임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존재 양식의 변화입니다. 곧 부활의 존재 양식입니다. 부활한 분은 곧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의 지상적 존재 양식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세계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렇듯 기독교의 신앙은 십자가와 부활을 두 기둥으로 해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로의 낮아짐과 높은 곳으로의 들림은 서로 나누일 수 없는 관계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이 가능했으며, 부활이 발생함으로써 십자가의 구원 능력이 보증됩니다. 뒷부분에서(3:10,11)에서 부활문제를 다시 언급할 예정이니까 여기서는 이쯤으로 접어두겠습니다.



5) 그리스도의 왕권(10,11)

그리스도 찬가는 10절과 11절에서 그 최고점에 도달하는 것 같습니다. 이 노래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내용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참조, 계5:13,14). 이 내용은 바로 그리스도의 주권과 왕권에 대한 것입니다. 헨델은 그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야에 나오는 "할렐루야"라는 합창곡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king of kings"라고 노래하는데, 이 그리스도 찬가와 일치합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은 천사만이 아니라 그 당시에 절대권력을 잡은 모든 이들을 이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당시의 왕들은 신과 같은 존재들로서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대 기독교인은 땅에 있는 모든 영웅들도 역시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고 노래했습니다. 땅 아래에 있는 악한 영들도 역시 결국에는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우주론적 통치권과 왕권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는 노래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런 노래는 혁명가 같이 들립니다(눅 1:51-53 참조). 2천년 전에 어떤 이들이 감히 이런 노래를 합창으로 부를 수 있었습니까? 죽음을 걸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노래를 공개적으로 부를 수 있습니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로마가 여전히 그 막강한 힘으로 통치하고 있던 그 역사의 한복판에서 초대 기독교인들은 무슨 생각에서, 어떤 용기가 있었기에 기존의 체제를 뒤바꾸어버리는 이런 혁명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까? 이 대답은 아주 명확합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생명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 이편에서만 힘을 쓰던 절대권력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순교역사가 바로 이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이런 그리스도 찬가에서 진정한 신앙의 의미와 용기를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어야만 할 많은 세력을 두려워하고,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궁핍해지지 않을까 해서 경제적인 힘을 가진 이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갑니다. 이 현재 사회에서 고립되지 않을까 해서 이 시대정신을 추종하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우주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속 정신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자기를 나타내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왕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에는 몹시 소홀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는 매 주일, 매일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주이며 왕이라고 선포되고 있긴 합니다만 그것은 한낱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지 실제로 그렇게 믿거나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모든 세력이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믿고 있다면 우리의 교회가 더 이상 자신의 교회를 내세우는, 자신들의 교파만을 내세우는, 그래서 결국 이렇게 분열된 교회 현상에 안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최소한 이런 현상을 고쳐나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 찬가의 신비한 세계를 생각해봅시다. 하늘과 땅과 지하의 모든 세력이 무릎을 꿇어야 할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 집안에서 출생했습니다. 그것도 말구유가 그의 첫 요람이었다고 합니다. 목수의 아들이며, 스스로 목수였던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높임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우리의 생각을 뒤엎어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목수의 아들이 우주론적인 통치자가 된다는 것은 가당치가 않습니다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그렇습니다. 진리를 열어가기보다는 오히려 닫아버리는 우리의 상식과 지식을 뛰어넘어 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이 곧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목수의 아들이 만왕의 왕으로 높임을 받았다는 그리스도 찬가를 믿고 그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면 참된 영광과 생명의 완성은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는데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역사의 신비가 있으며,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신비에 의해 자신의 삶을 규정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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