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구원의 깊이



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만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는 처음부터 겸손한 마음(3절)으로 살아가라는 충고를 하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낮춤을 노래한 다음에, 이제 다시 복종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 뒷 부분에서도 역시 자신을 제단의 제물로 바친다는 고백(17절)과 아울러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의 신실한 자세를 설명한다. 이러한 전반적인 사정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그리스도처럼 낮아짐에 있다는 사실의 증언에 있다. 우선 순종이라는 말의 의미부터 생각해봅시다.



1)복종

앞서 그리스도 찬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복종했다고(8절) 서술한 다음에 빌립보 교인들에게 다시 복종하라고 권합니다. "복종의 현실성은 공동체의 실존을 규정합니다."(그닐카).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라고 한다면 서로간에 겸손한 가운데서 복종하는 것이 자신들의 실존을 드러내는 징표일 것입니다. 아마 다른 초대 교회와 마찬가지로 빌립보 교회에서도 신자들 상호간에 불신과 분리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머물고 있었을 때에는 그의 권위에 의해서 그래도 교회의 일치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이제 바울이 떠난 상태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없을 때에 더욱 서로간에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복종이라는 말은 무언가 수동적인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 말에서 우리는 명령에 의해서 작동되는 군대 조직이나 주인과 노예 관계에서처럼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수직적인 권위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우선 생각하게 됩니다. 기독교 교회는 아주 오랫동안 기독교 신앙을 이렇게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인상을 부정적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어구를 내세워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 운영에 민주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무조건 교회의 관리 체제에 복종하는 것을 가장 아름다운 신앙적인 미덕으로 간주했습니다. 교회 밖의 활동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순수한 교회 활동을 제재하지만 않는다면 교회는 그 어떤 독재자들에게도 충성하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과연 성서가 가르치는 순종이 그런 뜻일까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이나 체제와 권위에 굴복하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만 순종함으로써 모든 세상의 걸림돌로 살아갑니다. 몰트만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말하고 있는 바가 바로 그게 아닐까요? 이런 면에서 순종은 본훼퍼가 말한 대로 항거의 이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왜곡시키는 악한 세력에게 항거할 수 있을 때 성령에게 순종할 수 있고 믿음의 형제들에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는 순종은 역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이 서로간에 순종하라는 말이지 서로 눈치를 보듯이 살아가라는 말은 아닙니다. 참된 순종은 위선과 반대입니다. 일하러 가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고 큰아들은 "예"라고 대답은 했지만 실제로는 가지 않았고, "싫습니다."라고 대답했던 둘째 아들은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는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잘 보이기 위해서, 혹은 임시방편으로 보이는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순종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두말 할 것 없이 우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대상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순종한다는 것은 날이 갈수록 우리를 위선적으로 만들며, 결국에는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거나 자기가 부담을 느끼게 될 뿐입니다. 사실 순종은 단순히 순종하는 태도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 생활 전반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순종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대하게 됨으로써 따라오는 아주 당연한 귀결입니다.



2) 구원

순종은 구원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높임을 받았다는 그리스도 찬가에 따르면 순종이 결국 구원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합니다.(12절).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이 말씀은 과연 무슨 뜻입니까? 마틴 루터 역본에서는 너희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성화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온전히 하나님의 행위인 구원 사건을 인간이 노력해서 성취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특히 12,13절이 1-4절의 내용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아무 공로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구원이라기보다는 구원받은 개인이나 교회의 삶에서 발현되어야할 구원의 열매를 가리킨다는 게 분명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역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과정에 대해서 강조한 바 있습니다(벧전2:2)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합니다만, 구원받은 사람이 기독교인으로서 성숙해져야 한다는 사실도 역시 우리의 신앙적 실존에서 간과될 수 없습니다. 우리 각각의 기독교인은 자기의 분량대로 구원을 성취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시작하거나 완성시킨다는 게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성숙해진다는 뜻입니다. 이 문제는 개인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게도 역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자신의 형태를 성숙시켜나가는 작업은 거의 구원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 유지시키면 된다고 생각해서 이런 성숙해지는 자세를 갖지 않는다면 그 신앙적 본질마저 언젠가는 희미해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들은 우리로 하여금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으며, 성령으로 충만해지라고 했습니다.



3) 수행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수행(修行)의 과정을 포함한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물론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일 뿐이며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일 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포괄적인 의미에서 구원을 말할 때, 즉 우리의 삶에서 구원의 리얼리티가 드러나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는 분명히 수행이 신앙 안에 포함됩니다.

사실 기독교의 경건 훈련에서는 이런 수행 과정이 매우 소홀히 다루어졌습니다. 물론 산상 집회, 성서 연구, 봉사 활동 등에 열심히 참석합니다만 그것 자체가 수행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종교적인 형식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자기의 삶 전체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수행해 나가는 태도가 바로 수행입니다. 여러분들이 불교의 승려들이나 가톨릭의 수도사들, 혹은 에크하르트 같은 신비주의자들을 생각해보시오. 그들은 먹는 행위마저도 신, 혹은 절대와의 교감으로 여겼습니다. 오늘의 현대 기독교인들이 그런 종교 전문가들처럼 생활할 수는 없지만 자기의 인생을 그런 자세로 대하는 것만은 필수적이라고 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들은 이런 수행의 과정을 전제할 때만 타당합니다. 그것이 곧 성령 충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구원의 깊이

바울의 말씀 중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저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궁극적 생명과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의 전 실존에 담겨진 투쟁이지 예술품을 감상하거나 아니면 산책길에 나서는 것처럼 가벼운 소일거리가 아닙니다. 저의 식구가 베를린에서 일년 동안 지내던 2000년 9월 어느날 열살 짜리 저의 막내딸 지은이가 학교에서 친구와 놀다가 오른 쪽 새끼손가락 손톱 사이에 가시가 깊이 박혀서 돌아왔습니다. 바늘로 집어내려고 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손톱깎이로 손톱을 깊숙하게 잘라낸 다음에야 겨우 집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지은이의 모습은 온통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을 보듯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 아이의 모습에 볼 수 있듯이 우리는 보통 자기 자신의 일에만, 특히 물질적으로 이익인가 손해인가, 혹은 건강에 이상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만 진지하게 대하지 정작 궁극적인 생명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구원론적 의미가 담긴 교회의 신앙생활도 역시 취미생활이나 교양강좌를 수강하는 듯한 자세로 임합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없고 여흥과 투기와 신변잡기만이 있습니다. 어떤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 듯이 진지하고,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여기 계신 하나님"이라는 설교집에서 야외 예배가 끝난 다음에 불고기를 구워먹을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신자들에게 순교자적인 신앙에 대한 설교는 소귀에 경 읽기에 불과하다면서, 현대 기독교인들이 복음 앞에서 취하는 태도의 문제점들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칼 바르트도 <복음주의신학 입문>에서 신학적 실존을 놀라움이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과 생명 문제에서 진지하지 못한 이유는 실제로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빠져서 그 내면의 깊이를 못 보거나 아니면 알고 있다 하더라도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돈벌이나 출세, 자녀교육, 취미생활을 확장시켜나가는 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뜻대로 성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완전하게 만족할 수 없고, 오히려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자극적인 수단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 읽었던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주인공 조나단 리스턴 시걸이라는 갈매기는 동료 갈매기들이 인간들의 고깃배 부근을 날아다니면서 썩어버린 생선 대가리나 빵 조각을 얻어먹는 것으로 자신들의 삶을 성취한다고 생각하는 동안에 그런 먹고 배부르고 배설하고 후손을 번식하는 일을 잊어버리고 오직 높고 빠르게 비상하는 훈련에 몰두합니다. 갈매기 사회의 장로들이 그를 훈계하고 위협했지만,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그를 비웃었지만 그는 그렇게 전통적으로 내려온 일상적인 행위만을 갈매기의 삶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고독과 아픔을 견뎌내고 결국 어떤 절대적인 비상의 세계에 돌입하여 황금 갈매기로 변신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의 일들이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고 자나깨나 늘 심각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상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일상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일상의 내면에서 움직이는 생명 운동, 혹은 구원 사건이 중요합니다. 일상의 겉모습이 아니라 일상의 깊이에 들어있는 그 내면의 세계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먹는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먹는 행위는 본질이 어떻다고 하기 전에 생존에 걸린 것이기 때문에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의미 있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먹는 행위를 통해서 단순히 외적인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더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와 접목될 수 있는 매개로서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양과 물과 흙과 공기가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생산해낸 먹거리를 먹음으로써 우리는 그런 창조의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혜를 깨달을 수 있고, 따라서 서로 사랑으로 함께 나누어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인간의 모든 일상은 이처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토대로 해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사건들입니다. 한 조각의 햇살, 한 모금의 물, 천둥소리, 바람소리, 이웃과의 대화 등, 이 모든 일상적인 것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낯익은 관계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우주론적으로 엄청난 사건들입니다. 장자의 말이라고 기억됩니다만, 모기 한 마리도 역시 지구 전체와 같은 무게를 갖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어가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우리 일상의 깊이와 높이에 있는 참된 생명의 세계를 눈여겨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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