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기쁨의 심연



2:14-18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지금 어둡고 침침한 어떤 감옥의 골방에 갇힌 상태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일을 당하면 무언가에 대해서, 혹은 누군가를 향해서 원망을 하거나 신세 타령에 빠져있을 법 한데, 바울은 오히려 영적으로 훨씬 깊은 세계에 들어간 셈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를 통해서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적으로 큰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한 인간에게 닥친 불행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위대한 사건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비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의 조건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바울이 당한 감옥과 같은 상황에 빠지지 않는 것만을 생각하다가 그런 상황에서도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면 아무리 좋은 환경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삶이 됩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면 결국 그런 삶은 아무리 화려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나와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죽는다"는 그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허무한 삶이죠.



1) 세상의 빛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기독교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만 생각을 집중시켰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기독교인의 삶이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15절). 공동번역은 이렇습니다.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십시오. 이것은 곧 신앙의 외면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이 기독교인의 신앙을 알아차릴 수 있는 모습은 이 "빛"이라는 단어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신약성서가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을 가장 특징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는 단어입니다. 물론 구약성서도 역시 하나님의 백성을 빛으로 설명했으며, 쿰란 공동체는 이 단어를 훨씬 더 이원론적인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자식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빛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를 빛이라고 칭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4,5). 디모데전서에서 그리스도는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딤전6:16). 그 이외에도 복음서에만 수십군데나 이 빛에 대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5:14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8:16).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20,21).



신약성서만이 아니라 교회 전통도 역시 이런 빛의 메타포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초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태양의 길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때라고 생각된 12월25일에 탄생하셨으며, 태양의 날인 일요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전통이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바로 세상의 빛이어야 한다는 확신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빛을 세상에 반사시키는 빛이라고 말입니다. 바울도 역시 초대 교회의 이런 전반적인 생각과의 연관 가운데서 빌립보 교인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겉모습에 대한 매우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시대의 사람들은 이 빛을 오늘 우리보다는 훨씬 인상깊게 경험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어두운 감옥 속에 갇혀 있는 바울은 오죽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물리학적인 지식이 별로 없었던 그들은 태양으로부터 시작되는 빛이라는 현상 앞에서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과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태양 빛이야말로 그들에게는 모든 존재의 근거이며 생명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거의 모든 고대 종교는 태양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이집트 문명이나 잉카 문명도 역시 이런 태양신을 숭배했습니다. 물론 유대교와 기독교는 태양과 그 빛을 하나님으로 섬긴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표현 방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빛은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데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생명체는 빛을 전제로 합니다. 모든 생명순환계의 기초는 탄소동화 작용으로 인해서 형성되는데, 거기서 결정적인 요소는 태양의 빛입니다. 이런 탄소동화 작용이 없다면 그것을 먹고사는 모든 동물과, 먹이 사슬의 상층부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도 역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문명은 석기 시대 때 불을 발견한 이후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게됩니다. 불의 빛과 열을 통해서 다른 동물을 완전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연을 변형시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과 인간 문명의 구도는 오늘도 여전합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빛으로 고백하고 있으며, 기독교인들도 역시 빛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빛의 본질에 대한 깊은 사색의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인 힘으로서의 빛이 바로 기독교인의 신앙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습이라는 이 말씀은 우리 기독교인의 살아가는 실제적인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그저 골방에 틀어 박혀서 기도만 하거나 아니면 광야에 나가서 금욕생활만 하는 이들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빛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진지하려면 우리의 살아가는 전체 모습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뒤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비하고 놀라운 구원과 생명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면 그것은 자기 확신이거나, 혹은 자기 기만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세상에서 빛처럼 살아가고 있을까요? 세상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빛이라고 생각할까요? 세상은 과연 교회와 그 신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명의 근원인 빛과 연관해서 생각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신앙적인 외면은 빛으로 확실하게 나타납니까?



그런데 기독교인이 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빛이 아니라 오히려 어둠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당시의 세상을 그런 어둠으로 경험했습니다. 이 어둠이라는 것이 직접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는 반 기독교적인 집단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모든 힘의 질서는 사랑과 기쁨이 아니라 다툼과 허영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어둠입니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다툼과 허영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원망과 시비(14절)입니다. 1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공동번역은 이렇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을 하거나 다투지 마십시오. 마틴 루터 번역에는 불평과 의심을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망과 시비가 없이, 혹은 의심 없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나는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게 된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빌립보 교회에 원망과 시비가 분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실 교회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외쳐집니다만 사실 그 초대교회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완전한 대안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 공동체 안에도 시비가 분분했고, 사도들이 목회 하던 교회도 여전히 시끄러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고린도 교회는 여러 파로 나뉘어 상당히 심각한 상태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여기 빌립보 교회도 그런 문제의 소용돌이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4장2절에서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충고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빌립보 교회 안에 적지 않은 문제들이 내재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원망과 시비, 불평, 의심을 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것이 곧 세상에서 빛으로 드러나야 할 신앙의 외면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신앙의 내면이 보이는 외면으로 드러나게 되는 현상인 셈입니다.

바울의 충고는 2천년이라는 시간적 간격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매우 절실합니다. 개인이나 사회가 원망과 시비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은 어린 아이의 눈에도 아주 확실합니다. 정당과 정파는 어떤 논리도 없이 상대방을 낮추는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고, 사회 계층간에도 이런 원망이 쌓여갑니다. 예컨대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매우 심각하게 사회 문제로 대두된 의약분업에 얽힌 일들만 생각해도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의사들은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고, 국민은 의사와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며, 정부는 드러내놓지는 못하지만 내심으로는 보험료를 적게 내려는 국민과 의료수가를 높게 받으려는 의사들에게 이런 문제의 책임을 떠넘기려고 할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는 착하게 보이고 상당히 높은 지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고 교양도 있고 신앙도 있습니다만 서로간에 원망과 의심을 계속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원망과 시비와 의심은 참으로 그 뿌리가 깊고 그 폭이 넓습니다. 원망과 의심은 인간의 교양이나 계몽에 속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에 속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교회 밖에서도 인간은 늘 이렇게 서로 원망하고 의심하고 불평합니다. 이런 것은 그가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아니면 삶의 조건이 좋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닙니다. 일종의 원죄와 같다고나 할는지요. 그렇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 사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자 아담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살게 된 저 여자가 주어서 먹었을 뿐입니다. 아담은 결국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답변했습니다. 이브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최초의 인간들이 내보인 이 행태는 인간 역사를 계속적으로 지배했습니다. 아마 과거와 현재만이 아니라 종말이 오기 전까지 인간은 이렇게 원망과 시비를 일삼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바울이 지금 도덕과 윤리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아, 착하게 살라는 말씀이구나."하고 간단하게 생각해 버립니다만, 바울은 그런 율법과 윤리를 기독교의 복음과 신앙으로 제안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보다 근원적인 인간의 문제를 들여야 보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곧 인간은 남에게 불평하기 전에 이미 자기 삶을 원망하고 의심한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늘 불안하죠. 존재 불안이라고나 할까요? 자기가 자기 자산을 불신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 늘 사심에 빠져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게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 라는 차원에서만 판단하기 때문에 당연히 원망과 시비에 휩싸이게 됩니다. 따라서 바울의 이 말은 인간의 이기심과 연관되며, 더 나아가서 인간의 죄에 연결됩니다.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원망과 시비가 없이 살아가라는 말씀은 그저 모든 게 다 좋다는 식으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아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으니까 그저 마음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런 것과는 상당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구체적인 일에서 시시비비를 따져야 할 일은 따져야 하고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은 책임을 물어야 하지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게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마틴 루터가 면죄부나 교회 무오성 같은 로마 교황청의 많은 문제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은 원망과 불평과 의심으로 한 게 아닙니다. 원망과 불평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만 민감하지,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겁한 방식으로 자기를 방어할 뿐이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심 없이 오직 하나님에게 삶의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이익이 온다고 하더라도 옳은 일을 행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옳은 일이 아니면 하지 않습니다. 사심을 버리는 사람만이 이 바울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해타산에 따라서 행동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바울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 일은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점잖게 보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 속으로는 원망과 분노가 불길처럼 타오를 뿐입니다. 교회 일을 하면서도 역시 이런 원망과 시비가 그치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사실이 분명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깊이 들어와 있는 사람들도 이런 원망과 시비를 극복하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은 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목사와 장로가, 장로와 집사들이 서로 원망하고 의심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외면은 외면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 내면이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이 말씀에 진지하려면 이런 저런 교양강좌를 쫓아다닐 게 아니라 신앙의 내면에 충실해야 합니다. 외면은 내면이 드러나는 것뿐이지 내면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빛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둠이 아니라 빛에 속해야만 하는데, 생명의 세계인 빛에 속한다는 것은 곧 생명의 비밀을 희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생명의 세계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만이 빛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환상은 첫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에게 경험된, 바로 그것입니다.



지난 2000년 9월말에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에 피렌체에서 몇 장의 그림을 샀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라파엘의 "두 천사상"인데, 현재 우리집 거실에 걸려 있습니다. 두 천사는 모두 책상 앞에 기대어 앉아 있습니다. 왼편의 천사는 왼손으로 턱을 괴었고, 오른 편의 천사는 책상 위에 포개진 두 팔로 턱을 받치고 있었는데, 두 천사 모두 눈을 치켜 뜨고 하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눈빛과 그 표정에는 하늘의 생명을 향한 신비로움이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 땅의 세계에서는 아직 경험할 수 없는 미래의 세계이며 생명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기다림을 그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이 천사들은 라파엘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겠죠. 이렇듯 하나님의 나라와 그 구원과 생명에 대한 환상을 경험할 때 우리는 빛으로 산다는 의미를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제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을 위한 희생 제사에서 제물이 되어도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고 피력합니다. 그가 이런 비장한 말을 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빌립보 교회를 위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현재 진행 중인 재판에서 불리한 판정이 나와서 죽게 되더라고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비장한 자기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 공동체인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희생제물이 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구약 시대는 여러 종류의 제사가 드려졌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아마 희생제사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실존을 죄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는 심정으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특히 그 해의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을 위해서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희생제사에서 핵심은 사죄 받기 위해서 대신 죽임을 당하는 제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나 양이나 비둘기의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써 자신들의 죄가 사해졌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구약적인 희생제사는 일단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감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끝났습니다만, 이런 희생제사의 의미는 기독교의 모든 예배에서 반복되었습니다. 성만찬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빵과 포도주는 바로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 감당한 제물이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피로 사죄 받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믿음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규정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이런 희생제물로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며......." 우리는 각자가 모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실제로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피를 거름으로 성장했습니다.



희생제물이 될 각오로 살아야 한다는 이 기독교의 가르침은 몇 가지 면에서 오해될 여지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적인 삶을 무조건적인 자기 희생으로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된다는 생각에서 이 세상에서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조건인 금욕을 주장하면서 모든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의 삶 자체를 부정하신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첫 이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 자리였다는 사실은 우연만은 아닙니다. 온갖 금욕과 경건의식에 충실하던 바리새인들의 눈에 예수님은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고 죄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 분으로 비쳤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십자가와 희생제물은 인간의 삶을 부정하거나 희생 자체를 미화하는 게 아니라 훨씬 높은 차원에서 언급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다가 당하게 되는 고난과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뜻입니다. 즉 희생과 고난을 자학적으로 즐기는 게 아니라 생명과 사랑의 세계를 위해서 살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이 희생당하거나 순교 당하거나 금욕생활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독신으로 살아야 할 사람이 있고 결혼해야할 사람이 있으며, 가난에 처할 수도 있고 부한 데 처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자리에 있을 수도 있고 높은 자리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점입니다. 자기의 인생을 희생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다면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면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에 자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참된 생명과 자유의 나라를 의식하고 그 나라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 풍족한 삶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재물 자체를 악마화 하거나 가난 자체를 미화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나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에 슬퍼하며 물러간 어떤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긴 합니다만, 그것도 부나 명예 자체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지향성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삶을 약간만이라도 꼼꼼히 들여다보면 아무리 자기의 의지대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무언가에 희생제물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년 열두 달, 하루도 쉬지 않고 돈 버는 일에 제물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적인 야망을 펼치는 것에 자신의 삶을 제물로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좀더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예술과 문학과 사회봉사라고 해서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습니다. 평생 동안 작곡을 하거나 그림을 그려서 유명한 예술가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에 매달려 있는 한 그는 그것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그것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분노, 더욱 위대한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는 후회, 혹은 완전히 예술성 안에 파묻혀서 모든 현실과 미래를 도외시하는 자기망각은 결코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없습니다. 돈도 사라지고, 정치도 사라지고, 오락도 사라지고, 예술도 짧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생명의 나라와 연결되지 않는 한 우리를 헛된 것의 제물이 되게 할 뿐입니다.



3) 기쁨

바울은 자신이 제물로 드려진다고 하더라도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17절과 18절에서 그는 네 번에 걸쳐 기뻐한다는 말을 합니다. 자신만 기뻐할 뿐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기뻐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기뻐하라고 권면하면서 자신과 함께 기뻐하자고 덧붙입니다. 17절 전반절에 나오는 "제물"이라는 단어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때 이 기쁨의 근원은 "순교의 반열"에 참여하는 데에 있습니다(그닐카, 156쪽). 바울 시대에 순교는 기독교인들이 현실적으로 감안해야만 할 일종의 운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순교의 역사를 꿰뚫고 기독교가 이렇게 좋은 결실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예상을 넘어서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진리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순교의 현장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몹시 고통스럽고 끔찍스럽습니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운명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표현하고 있는 이 기쁨은 자기 기만은 아닐까요? 실제로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기쁜 일이라고 자기를 위로하거나 자기의 행위를 미화하는 것은 아닌가요? 실제로 그런 자기 합리화가 교회 안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예컨대 자기 사업을 하다가 파산을 한 후에 이게 모두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신 은혜라고 말하는 것같이 말입니다. 과연 순교 당하는 일이 기쁨일 수 있을까요? 그 순교에서 정말 서로 기쁨을 공유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자기를 성취할 때인데 자기 자신이 완전히 파괴되는 순교에서 우리가 기쁨을 느끼라고 말하는 것은 어딘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우선 우리는 기쁨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의 존재론적 근거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이 표상하고 있는 기쁨의 존재론적 근거가 일단 명확해야 이 순교와 기쁨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제적인 생활에서부터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보통 출세하고 건강하고 가족이 잘되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면 기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기쁨의 조건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이런 일반적인 기쁨의 기준에서 본다면 성공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크게 기쁘게 살아야하는데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게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큰 기쁨을 맛보고 살아야 하는데, 이것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은 그 건강의 소중함을 건강하지 못한 사람보다 절실하게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 기뻐할 줄 모릅니다. 미혼의 젊은이들은 자기의 이상적인 상대를 만나서 결혼하게 되면 기쁘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인간의 모든 삶은 그것이 성취되는 순간에 아주 순간적인 자극으로 끝나버리고, 모든 것은 일상성 속으로 떨어져버립니다. 오히려 이런 자기 성취에서 기쁨을 맛보려는 사람은 그것이 비록 성취된다고 하더라도 더 큰 성취욕으로 인해서 다시 불만에 빠져버립니다. 실제로 옛날에 비해서 오늘 우리의 삶이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졌지만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옛날 사람들보다 행복하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의 삶이 훨씬 더 심한 허무와  탐욕으로 얼룩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쁨은 인간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참여해 있는 사람은 인생의 조건이 어떻든지 간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흡사 하나님을 인간이 소유할 수 없듯이 기쁨도 소유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상품이 결코 아닙니다.  



참된 존재, 궁극적인 존재는 곧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참된 기쁨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이 말은 순수한 이상이나 심리적인 차원에서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오늘의 인생이 고달프지만 영광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즐거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물론 완전한 생명과 그 기쁨은 종말에 이루어지지만 그 미래는 이미 여기서 현실성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미 구원의 기쁨에 실제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래서 순교도 역시, 아니 가장 기독교적인 삶의 특징이라 할 순교만이 가장 큰 기쁨을 허락합니다. 바울은 이런 기쁨으로 충만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함께 기뻐하자고 외칩니다.



오늘 우리는 실제로 순교와는 거리가 먼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순교의 기쁨이 가능하지 않다는 말일까요? 기독교의 역사에서 나타났던 순교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순교적인 자세는 오늘도 역시 가능하며, 따라서 바울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가시적인 성과에 자족하거나 매달리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한 뜻에 의지해서 살아가다가 당하는 불이익과 고난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는다면 아마 순교적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 신자들처럼 영적으로 예민하게 살아갈 훈련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이 세상의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순교자의 반열에서 얻게 될 기쁨의 맛을 보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로 인한 영광을 서로 이해했고 서로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순교와 그 영광의 신비를 함께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가 아닐까요? 이렇게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일들을, 그런 구원 사건과 희망들을 확장시켜나가는 공동체가 바로 기독교 교회가 아닌가요? 인간의 모든 성취와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하는 그 기쁨과 평화의 나라를 희망하는 종말론적인 공동체가 우리 교회가 아닌가요? 대한민국이 월드컵 축구시합에서 우승했다는 사실이 모두 함께 기뻐해야 할 사건은 아닙니다. 우리 집 딸이 서울의 일류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함께 기뻐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흥미를 느끼고 있는 모든 사건들은 그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니기 때문에, 즉 그 결과에 따라서 슬퍼해야 할 이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함께 기쁨을 나눌만한 일이 못됩니다.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 끝 날에 다시 오신다는 약속에 관계된 것입니다. 인간의 경쟁으로 인한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승리에 관계된 일들입니다. 그 승리를 내다보고 기꺼이 순교의 반열에 참여하겠다는 결단과 연관되어 살아가는 이들이 기독교인입니다. 이런 기쁨이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  모두를 하나되게 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쁨은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큰 긍정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환희에서 자기의 삶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생활조건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라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입니다. 자기의 삶을 긍정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의 내면에서 어떤 생명력이 꿈틀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명력에 사로잡혀 있을 때만 우리는 모든 일을 원망이나 시비(2:14)로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궁핍은 바로 삶에 대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기쁨입니다. 사는 것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신의 환경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일에만 마음을 쓰고 있기 때문에 기쁨의 세계에 참여하지 못하고 맙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봅시다. 젊은 남녀의 결혼만 해도 그렇습니다. 결혼식이 왜 이렇게 소란스럽습니까? 배우들처럼 사진을 찍고 패션 모델처럼 옷을 차려입고, 이런 저런 관계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다가 결혼식을 치릅니다. 평생에 한번이니까 그렇게 할 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요란스럽게 결혼식을 치르는 이들이 모두 비정상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과장된 행동들은 결국 결혼 자체의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결혼 자체를 생각하지 않고 그 주변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게 어디 결혼 문화뿐인가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바로 이렇습니다. 교회의 행사도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이런 거품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가 이벤트 회사처럼 행사에 매달린다는 사실은 무언가 본질적인 것, 즉 구원의 기쁨을 알지 못하거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2000년 1년 동안 독일에서 생활한 느낌을 우리 사회와 비교해서 잠시 말씀드릴까 합니다. 정치, 교육, 문화와 예술, 의료, 사회, 종교에 이르는 전 영역에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20년 전에 보았던 독일 대학교의 모습이 지금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때와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집에서 살고, 비슷한 것을 먹고 공부합니다. 핸드폰을 사용하는 학생들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초중고 학생들도 핸드폰을 갖고 다니는 것과 비교하면 독일은 아주 미개한 나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점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삶은 핸드폰이 별로 필요 없을 만큼 안정되어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우리는 일단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학교다, 학원이다 해서 돌아다녀야 하니까 자녀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핸드폰이 유용하게 사용되지만, 독일에서는 학생들이 그렇게 밤늦게 돌아다니는 일이 없습니다. 지난 2001년 2월말에 서울의 종로2가 뒷골목과 인사동 골목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늦은 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부딪쳐서 걸어다니기 힘들 정도로 많았습니다. 저는 우리가 반드시 독일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 많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서 우선 진지하고 합리적인 자세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만은 배워야 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내면의 참된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모든 삶의 방향이 영성, 진리, 하나님 나라, 부활, 생명 등, 이런 내면적인 기쁨으로 집중될 때 우리는 그 어떤 삶의 환경 가운데서도 불평과 의심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