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믿음의 아들 디모데



2:19-24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신약성서에 그 이름이 24번이나 등장하는 디모데는(사도행전에 6번, 바울의 편지에 13번, 그리고 디모데서와 히브리서 13:23) 명실상부하게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따르면 바울이 2차 선교 여행에서 바나바와 갈라진 후 루스드라에 들렸을 때 디모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유대계 부인과 헬라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하고 선교 여행에 동참시킨 이후로 영적인 면에서 아버지와 아들처럼 친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바울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디모데를 전령으로 보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3:1 이하에 따르면 아덴에 있던 바울은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내서 간접적으로 데살로니가 공동체를 권면하고 보살폈습니다. 디모데는 비슷한 사명을 갖고 고린도 교회에도 갔습니다(고전4:17, 16:10). 이제 바울은 갇힌 몸으로 빌립보 교회를 직접 방문할 수 없는 상태에서 디모데를 다시 파송하려고 합니다. 그가 디모데를 보내려고 주 예수 안에서 원한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만 그게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마 자기의 재판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아직은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에바브로디도를 먼저 보내고 자기의 형편이 결정되는 대로(23절) 보내려고 한 것 같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소식을 알고 싶어한 만큼 빌립보 교회도 역시 바울의 소식을 알고 싶어했을 텐데, 아직 재판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디모데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재판 결과가 좋게 나와서 자기가 직접 빌립보 교회를 방문하고 싶어했습니다(24절).



바울이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고 싶어한 까닭은 이런 일에 디모데만큼 적당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20절). 디모데는 이미 이런 일을 여러 번 수행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회의 창립 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던(행16:11이하)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야말로 빌립보 교회의 문제를 가장 원만하게 해결할 적임자라고 보았습니다. 특히 20절에서 디모데를 가리켜 사용한 헬라어 "이소푸코스"는 "같은 마음을 가진", "같은 능력을 가진", "확신하는"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선교적 투신의 성실성과 정직성입니다(그닐카).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투신하는 것과 그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정직성이 바로 디모데의 탁월성인 셈입니다.  

20절에서 디모데를 칭찬한 바울은 이제 21절에서 어떤 이들을 비판하면서 디모데를 다시 한번 더 올려 세웁니다. 바울에게서 비판받은 이들이 누구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4장21절에서 구체적인 이름이 거명되지는 않지만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라고 일컬어진 동역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그닐카, 159쪽).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지 않고 자기의 일을 구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중차대한 일을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순수한 신앙적 동기로 모였다고 하더라도 어느 기독교 공동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일보다는 자기의 일에만 치중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들은 물론 구원받은 이들이며 교회에 대한 사랑도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자기의 일에만 몰두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일보다는 자신의 일에 더욱 열심인 이들이 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관심을 갖는 이들과 겉으로만 그렇지 실제로는 자기의 일에 관심을 갖는 이들을 구분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무엇에 충성하는지 확실하게 알려면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 직면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지만 불꽃같은 눈으로 인간과 세계를 관찰하는 주님의 심사대를 무사 통과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신앙의 본질이 오해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행위와, 교회에 대한 열심과 충성이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종교적인 목표를 성취하려는 의도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니까 아무리 오래 교회에 나가도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섭섭하게 생각되고, 더 나아가서 이런 일로 남과 경쟁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자신의 보신에만 마음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주변에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다만 디모데만은 자신을 온전히 복음 사역에 내놓은 젊은이였기 때문에 믿고 빌립보 교회에 파송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에 소위 "대심문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재림한 예수는 초림 때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주다가 당시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서 구금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최고위 승정이 감옥으로 찾아와서 예수와 흥정을 벌입니다. 그의 논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이 땅의 질서는 이미 교회가 잘 감당하고 있으니까 예수는 하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온갖 신학과 의전과 각종 종교 프로그램이 결국은 자기들의 일이었지 결코 하나님의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보이고 있는 열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 자신에 대한 충성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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