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율법과 복음



3:1-9



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권면이 있은 다음에(1절) 즉시 개들을 주의하라는 과격한 표현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연결이 아닙니다. 그래서 학자들에 따라서는 1절 전반절을 4장 2,3절과 연결시켜서 빌립보에 있는 동역자들을 향한 권면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그닐카). 원래 있었던 두 통의 빌립보서가 오늘의 성서로 채택된 빌립보서에 편집되는 과정에서 이런 배열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입니다. 당시의 편지들은 대개가  파피루스에 기록되었으며, 또한 같은 교회에 보내는 여러 편의 편지들이 있었으니까 사본에 따라서 이런 편지들의 내용이 서로 다르게 배치될 수 있게 마련입니다. 성서에 대한 이런 역사 비평 문제는 우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고, 바울이 여기서 상당히 격한 심정으로 토로하고 있는 신앙적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모아봅시다.



1) 손할례당

바울은 3절에서 개와 행악하는 자와 손할례당을 조심하라고 경계합니다. 첫째, 바울이 이곳 이외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사용한 적인 없는 욕설인 개는 어떤 이들을 말할까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처럼 생각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도 그 당시에 부도덕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경계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 당시의 시대 정신은 윤리의식이 아주 미약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간을 영과 육이라는 이원론적 시각으로 바라본, 헬라철학의 한 분파인 영지주의가 일종의 시대 정신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영과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몸은 악하며, 또한 영의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몸을 하찮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몸을 학대하는 금욕주의로 빠져들거나 아니면 몸의 본능에 충실해도 된다는 쾌락주의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 교회 안에도 이런 세속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면서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될 있느냐(고후6:14이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또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라(고후7:1)고 당부했습니다. 기독교가 윤리적 실천을 그 본질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열매로 하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개로 일컬어지는 이방인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 바울은 행악하는 자를 조심하라고 경계합니다. 루터 번역에는 거짓 설교자들을 조심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된 개가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악한 행실을 가리킨다면 여기서는 루터 번역에 있듯이 거짓 설교자들을 가리키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아마 빌립보 교회에 이미 복음을 훼손시키려고 들어온 방해꾼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들은 기독교 교회를 순방하면서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자신들의 주장을 선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거짓 설교자들입니다. 바울도 초창기에 여러 회당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그 당시에는 방랑 설교자들이 적지 않게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빌립보처럼 헬라 문명에 깊이 젖어든 도시에는 여러 주의와 주장들을 서로 논하는 일들이 아주 일상사처럼 일어났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도 역시 이런 위험 앞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짓 설교자들을 구분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자신들의 주장을 터놓는 게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까지 숨겨놓기 때문에 전문적인 식견이 없는 한 구분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만 갖고서는 진리 논쟁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있듯이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하겠지만 궁극적인 문제를 말로 드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진리는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구원은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언어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가 거하는 집일뿐입니다. 동양적 표현방식으로 말하자면 언어는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거짓 설교자와 참 설교자들을 당장 분간해 낼 수는 없지만, 결국 언젠가는 그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거짓 설교자들의 말이 그 가면을 벗어야 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 교회가 깨어 있다면 이런 일들이 훨씬 빨리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의도적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박성 때문에 벌어지는 말씀의 왜곡현상도 아주 심각합니다. 설교자가 말씀을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식으로 해석하는 행태를 가리킵니다.  



셋째, 개와 거짓 설교자들을 조심하라는 바울의 당부는 이제 세 번째로 거론되는 손할례당에 대한 경계에서 정점에 달합니다. 바울 시대의 초대 교회 안에는 극단적인 율법주의자들과 그에 버금가는 무(無)율법주의자들이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키고 있었습니다. 특히 할례주의자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율법주의자들은 이방인 기독교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고집함으로써 값없이 의롭다 함을 입는다는 복음의 근본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이들은 어떤 이유와 근거에서 할례 행위를 그렇게도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을까요? 할례의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사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서 언급될 예정이니까, 여기서는 단지 그것을 강조하는 이들의 종교적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만 확인하면 되겠습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이 이방 세계로부터 구분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다는 증거였습니다. 이 말은 곧 할례를 받은 이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혹은 받지 않은 이들과 완전히 다르다는 뜻인데, 일종의 선민의식이며 분별심입니다. 이러한 의식에 근거해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토양을 발전시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 토대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들은 어디를 가나, 무슨 일을 하거나 자신들은 이방인들과 다르다는 자기 의식에 아주 철저했습니다. 2천년 동안 땅과 외교권 없이 살아왔으면서도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은 그 저력이 바로 이런 선민의식에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 사상을 가장 예민하게 가리켜주는 징표가 바로 할례라는 점에서 할례는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한 종교의식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할례를 일종의 종교적 징표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를 절대화하는 기준으로 삼아버렸습니다. 절대적인 세계를 알려주기 위한 상대적인 비유와 징표들이 절대적인 것과 일치되니까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게 되면 그것은 곧 난폭한 힘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 경제, 과학, 종교의 세계에서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림을 받아서 구별되고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이에 상응하는 책임의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한 이론적 방어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여전히 손할례당에 불과할 것입니다.



2) 할례의 본질

바울은 3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바로 참된 할례자들입니다.



우선 할례 제도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봅시다. 유대인 남자아이들 모두가 태어난 지 팔일만에 시술 받아야할 할례(포경수술) 전통은 아브라함까지 소급됩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구십 구세가 된 아브라함이 아내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후손과 땅에 대한 축복과 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할례 명령을 내립니다. 그 뒤에서도 이 할례 의식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였기 때문에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이 할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할례가 유대인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습니다. 근동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종교적, 위생학적 시술이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에집트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에서 발견된 벽화에 할례 행위가 그려져 있는데, 놀랍게도 남아만이 아니라 여아까지도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에집트 여성의 97%가 할례를 받은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남성들의 할례는 위생 건강을 위한 조치인 반면에, 여성들의 할례는 성욕 억제 차원의 조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할례를 비롯한 우리의 모든 종교 의식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상징하는 징표입니다. 예컨대 결혼 반지는 결혼하는 두 사람의 사랑을 상징하는 징표에 불과하지 그것 자체가 사랑은 아니 듯이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영적으로 섬기는 우리들이 바로 참된 할례자들이라는 바울의 말은 과장이나 자기 합리화가 아닙니다. 사람의 겉모습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기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영적으로 섬긴다는 말은 그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욕심을 가득 채운 상태에서 하나님을 영적으로 섬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한다는 말도 이와 같습니다. 할례는 결국 자기의 종교적 특권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것에 치우친다는 것은 자기를 자랑한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바울은 참된 할례자의 모습으로 한 가지 사실을 더 추가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세 번째 명제가 가장 근본적인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적으로 섬기지 않는다거나,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도 누구 못지 않게 육체를 신뢰할 만 하다면서 그 목록을 열거하고 있습니다(4-6절). 할례를 받은 자,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바리새인,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던 자, 율법적으로 흠이 없던 자. 아마 그 당시에 바울과 적대적인 입장에 서서 율법과 할례를 강조하던 사람들도 자신의 종교적 성과를 바울만큼 내세울만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을 비롯해서 모든 유대인들이 가장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여 추구하던 것들을 해로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똥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8절 후).

참된 종교 의식의 본질은 바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 방향을 따라가야 합니다. 자기의 자랑거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종교 심리학적으로 세밀하게 발전된 그 어떤 종교 의식일지라도 그것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을 비우게 하는 계기로 작용해야만 참된 종교적 가치가 발휘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 교회에서 행하는 종교의식은 어떤 상태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교권은 어떻게 작용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똥처럼 생각하던 것들이 우리의 궁극적 관심사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신앙생활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욱 많은 종교 상식과 정보들이,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자신의 종교적 업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채우는 것으로 작용하게 되면 결국 지나친 경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좋게 말해서 선의의 경쟁이지 실제로는 다툼과 허영(빌2:3)입니다. 장로가 되기 위해서 새벽기도회에 나오고, 십일조 헌금을 드리고, 각종 교회 일에 헌신합니다. 그에 상응하는 보답이 없을 경우에는 당장 분노와 미움에 사로잡혀버립니다. 이것은 할례의 본질에서 벗어나서 그 형식에 치우칠 경우에 나타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 양식입니다.



현대인의 일상적인 삶도 역시 할례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의 일상적인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통해서 자신을 채워나가고, 거기서 자기를 확인합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한다는 바울의 생각과는 달리 현대 삶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만을 좇아갑니다. 교육에서부터 직장생활, 취미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은 그것이 아무리 큰 성과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큰 고통일 뿐입니다. 할례주의자들이 다른 사람을 선동하듯이 자신의 불안을 남에게 전염시킬 뿐입니다. 산업과 기술사회를 지나서 정보와 사이버 시대에 이르는 동안 인류는 한번도 자신을 비워내지 않고 채우려고만 했다는 사실 앞에서 인간 구원이 얼마나 요원한 일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종교가 해야할 일은 이런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즉 내게 유익하던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길 줄 알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혁명적 변화라 할 이 경험이 바로 참된 할례이며 마음의 할례입니다.



3) 앎의 토대

바울이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던 모든 것을 해롭게 여기게 되었다고 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삶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자기가 추구하던 모든 것들을 똥으로 여긴다는 말은 일종의 허무주의적이거나 냉소주의적 표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귀하다는 고백입니다(8절).

그가 생각할 때 인식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놓여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이 절대적입니다. 상대적인 가치는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절대적인 가치 앞에서는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더 나아가 그 상대적 가치를 절대적인 가치로 오해하는 경우에는 악하게 작동될 뿐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에는 한 지성인으로서 절대적인 인식에 대해서, 즉 절대적인 앎의 문제에 대해서 투철하게 고민하던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바울의 진술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만 그것 자체로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우리가 이해했다고 해도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달라지는 부분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컴퓨터 이론에 해박한 지식이 있다고 해도 역시 그렇고, 각종 윤리 이론에 대한 이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것들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이 세상의 범주에서만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범주에만 속하는 일들은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신중하다고 하더라도 역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삶을 흥미롭게 만들뿐이지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만을 구하면 그 이외의 문제들은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죽은 자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정도만이 아니라 아버지나 어머니,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절대적인 세계에 직면하는 것만이 모든 인간이 선택해야할 단 하나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모든 인식론의 토대이며 목표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바로 예수님의 이 가르치심, 그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이런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굳이 철학자의 생각을 빌려 말하자면 하이데거의 존재(Sein)나 장자의 도(道)가 가리키는 그런 절대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좀더 발전시켜 봅시다. 우리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바탕에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추상적으로 살아갑니다. 인식론의 기초가 너무나 부실하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재물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것을 확실한 삶의 근거로 생각하고 소유해보려고 해도 그것들은 안개와 같이 경우에 따라서 사라졌다가 보이고, 보였다가 다시 사라집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버립니다. 재물을 모을 수 있는 방식을 많이 안다는 것이 과연 참된 지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한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가졌다고 해서 그가 참된 생명을 안다고 볼 수 있습니까? 바이올린의 대가가 된다고 해서 그에게 궁극적인 깨달음이 찾아올까요? 그런 깨달음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남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사람들의 환호성과 물질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세상의 것에만 집중하면서 그것으로 모든 참된 것을 온전히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흡사 애벌레가 나비의 세계를 무시하고 자기의 경험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것보다 더 큰 착각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리적 사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의 리얼리티를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물리적 사실도 역시 우리의 생각이나 기대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물체는 빈 공간과 에너지의 결합일 뿐이지 어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물체들이 자기 나름대로 일정한 영역 안에서 확고한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 물체 안에서 작용하는 에너지가 너무 강해서 중력에 의해서 허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구의 중력이 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그 모든 에너지를 해체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하게 작용한다면 이 지구는 사과나 계란 정도의 크기로 압축될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바로 블랙 홀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려는 바는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어떤 범주 안에서만 타당하지 그것을 벗어날 때는 그 기초부터 허물어지고 만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범주 안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죽음 이후의 범주 안에서 생명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입니다. 종말에 완성될 참된 생명 사건이 바로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예수님에게 발생했다는 인식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런 큰 깨침(돈오)이 있게 되자 그가 이전에 추구했던 모든 것들이 똥처럼 여겨졌습니다. 이것이 곧 회개 "매타노이아"가 아닐까요?

아는 것이 힘이라는 베이컨의 명제에 의해 이루어진 이 시대의 막강한 지식이 오히려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오늘의 이 현실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인식의 토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인간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삶의 근본을 무시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역시 우리는 인식의 토대에 대해서 훨씬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토대가 참된 생명의 세계를 알게 하고 만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밉습니다.



4) 믿음과 무위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9절)는 바울의 진술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주제이기도 하고 유대교와 대별된 기독교의 근본이며, 약간 좁혀 말해서 로마 가톨릭과 구별되는 개신교의 신학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위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 이 의 문제는 이미 앞서 1장에서 한번 검토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어떤 종교적, 윤리적 노력으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옳음이라는 것이 의식에 있는가, 아니면 행동에 있는가 라는 영속적인 질문에 해당됩니다. 신약성서도 역시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동양적 사유와 비교하자면 로마서는 노장사상에 해당되며, 야고보서는 공맹사상과 통합니다. 물론 이렇게 거두절미한 채 연결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긴 합니다만, 또한 이런 사상들이 서로 대립적인 것만은 아니긴 합니다만 어떤 관점의 특징만 부각시킬 때 이런 대비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노자와 장자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라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의도적인 행함이 없음으로써 행할 수 없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시각은 우선 인간의 행위, 그것도 선한 의지로 실현된 행위가 늘 좋게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 반작용을 수반한다는 논리에서 시작합니다. 삼강오륜이라는 윤리 체제가 절대적인 규범으로 작용하게 될 때 그것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인간성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고도의 예술은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막아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피아니스트 중에서 지나치게 악보에 충실하게 연구하는 사람의 연주는 기술적으로 완벽할지 몰라도 살아있는 연주는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간 사람은 그것으로 인해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기쁨과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악하기만 하거나 절대적으로 선하기만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의도적으로 무엇을 성취해보려는 노력은 아무 쓸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점에서 노장 사상에 따르면 인위가 아니라 무위로 사는 것이, 즉 자연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도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저의 짧은 생각에 의하면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바울의 고백은 어딘가 이런 노장의 주장과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믿음은 기본적으로 행위가 아니라 무위에 의의 토대를 두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수고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진다는 은총론이 바로 이와 상응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구원 사신도 역시 이에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특권층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의 지적 능력이나 재산의 능력이나 교양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마음을 비우고 바꾸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사실 이 무위가 힘드는 일입니다. 또한 회개와 믿음이 힘든 일입니다. 가시적인 성공과 그 압박감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적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무위보다는 행위가 쉽고, 믿음보다는 율법 수행이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이지 않는 무위와 믿음 앞에서는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12과에서 바울이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에 대해서 가혹할 정도로 비판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율법에 완전해보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으로서,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제자에게 할례를 받게 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윤리적인 면에서 무척 엄격했던 사람으로서 이렇게 과격하게 할례와 율법을 비판한 이유는 기독교의 본질이 이것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과 복음의 대립입니다. 이 두 관계는 신학사적으로도 사실 무척 오래된 논쟁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그런 신학사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접어두기로 하고, 율법의 정신과 복음의 정신이 어떤 결과를 빚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비교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특질을 정리해봅시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권리를 주장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라 할 수 있는 율법에 의한 의는 자신이 이룬 업적으로 통해서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을 부각시켜 나갑니다. 많은 기도와 헌금, 사회 봉사, 고상한 태도, 더 나아가서 예술적 능력이나 사업 능력도 결국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싶다는 욕망을 치닫습니다. 능력이 클수록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특별한 취급을 받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만족감을 얻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사랑의 능력"이라는 설교에서 이런 모든 능력이 은사이지만 그것 자체로는 별로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믿음까지도 역시 은사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존재 양식인 사랑에 근거하지 않을 때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고전13:1-3). 그렇습니다. 율법은 그 율법을 수행하는 이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 분별심을 갖게 함으로써 교만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그런 흔적을 여러 종교의 극단주의에서 발견합니다. 우리 기독교인 자신의 모습에서도 그런 흔적을 수다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완전히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어떤 능력이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교만하거나 분별심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자기를 낮추게 되고, 다른 이와 하나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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