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부활, 하나님 안에 은폐된 미래의 생명



3:10,11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11.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공동번역)



바울은 3장에서 계속 적대자들과의 논쟁을 날카롭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손할례당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 사상의 가장 핵심에 속하는 이 부활도 역시 적대자와의 논쟁을 배경에 두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온전히 종교적 업적에만 집착하는 율법주의자들을 향해서 자신의 종교적 토대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 토대가 부활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신자들이나 목사들은 부활절에만 부활 설교를 듣거나,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주일에 선포되는 교회의 복음 설교는 사실 이 한 가지 사실, 예수가 부활했으며, 우리도 부활하게될 것이라는 사실에 모아져야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이야말로 여전히 잠정적이고 유한한 삶으로부터 궁극적인 삶으로 돌입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만 교회가 이 세상의 다른 이념이나 철학이나 종교로부터 구별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부활 신앙을 통해서만 교회의 모든 인간적 약점도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설교가 부활에 관해서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만이 아니라 설령 부활을 언급하더라도 단순히 사실 전달에 머물러 있지 그 사건이 내포하고있는, 그리고 의미하고 있는 실질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게 없다는 점에서 설교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서양 철학사에서 다루어진 것이 단순히 존재자였기 때문에 결국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분석에서, 즉 존재망각에 빠졌다는 분석에서 우리 교회의 문제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적극적인, 혹은 소극적인 많은 일들이, 그리고 많은 설교와 성서연구가 하나님 자체와는 별로 상관이 없고 그저 교회 생활에만 집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부활, 구원이라는 단어는 사용되지만 하나님 자체에 대서는, 부활과 구원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 교회의 언어들이 담고 있는 인류 정신사와 문명사를 알지 못할뿐더러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철학사에서 "존재망각"이 있었듯이 교회도 역시 "하나님 망각"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달리 복음서는 두말할 것도 없고, 바울의 편지들도 신앙의 근본을 치고 들어갑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부활만큼 더 근본적인 게 어디 있습니까? 바울의 편지는 거의 십자가와 부활을 그 바탕에 깔고 언급됩니다만 특히 고린도전서 15장은 전체가 부활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물건을 만드는 공장이나 물건을 파는 가게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구원을 존재론적으로 붙들고 나가는 삶의 태도라고 한다면 우리는 율법을 성취하는 일에, 즉 교회를 양적으로 키우는 일에 몰두하기보다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알아 가는 일에 전념해야합니다. 그저 들은 풍월로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 체험된 그 세계를 서로 나누고 확장시켜나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부활은 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우리의 가장 중요한 거시담론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종말론적 의미에서 다루어져야 할 궁극적 실질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원래 구약성서에는 부활 신앙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살아있을 때만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소위 묵시문학이 형성됨으로써 유대인들이 죽은 자가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묵시문학이 신약성서 형성에 적지 않게 영향을 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에서 어렴풋하게 생각되던 부활이 이제 초대 기독교에서 가장 확실한 신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지상의 삶을 마쳤던 나사렛 예수에게서 발생한 부활이 우리 모든 인류가 미래에 참여하게 될 부활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예수에게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누구도 부활의 생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죽음으로 끝나면 너무나 무의미하고 허무하다는 일반적인 직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에게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의 확실성에 의지해서 부활을 희망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부활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중요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10절). 부활한 분은 바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바로 부활하신 그분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상호관계에서 기독교의 부활 사상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해서 이 부활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이 부활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아직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 가장 완전한 생명인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문제는 종말이 임한 후가 되어야 명명백백하게 밝혀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단 몇 가지 면에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보도록 합시다.



첫째, 자연과학적 사유방식에 묶여있는 사람들은 부활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심장이 멈추고 뇌파가 정지되고, 땅에 묻혀 썩어버린 사람이 다시 형체를 입고 살아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자연과학적 사실은 인간의 부활을 부인할까요? 우선 우리는 자연과학 그 자체가 매우 한정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비록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가 자연과학적 진리를 배척하다가 이제는 그것으로부터 오히려 수모를 당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또한 자연과학이 인간을 미몽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일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참된 진리가 오직 자연과학에 의해서 재단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현대과학은 과학적 사실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불확정성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탄 하이젠베르크는 그 동안에 이루어진 물리학적 이론들이 미시의 세계에서는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관찰의 대상이 되는 미립자는 관찰되는  그 순간에 다른 형태로 변해버리기 때문에 물리학적 관찰과 실험으로 밝혀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생물학적 진리도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요? 진화론적 근거가 아무리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이 지구의 생명체가 반드시 그런 기계론적 질서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예상치에서 훨씬 먼길을 돌아서 현재의 생명 세계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저는 자연과학적 사실들이 허망하다거나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어떤 범주 안에서만 타당한 질서가 궁극적인 생명 세계를 재단하는 시금석으로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적 사유로 인해서 부활이 부정될 수는 없습니다.

자연과학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는 철학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와 아주 흡사하게 여러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가 과학보다 우월하다는 입장. 둘째는 과학이 기독교보다 우월하다는 입장. 셋째는 과학과 기독교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입장. 넷째는 양자가 하나의 진리를 여는 작업에서 공속(共屬)적이라는 입장. 중세기까지는 기독교의 교리가 과학을 압도했습니다. 교권으로 과학자들의 실험과 연구결과를 가차없이 재단하고, 심지어는 종교 재판에 회부하기도 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사건은 기독교 교리의 우월감이 저지른 결정적인 과오였습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과학은 기독교 사상을 맹신이나 미신으로 폄훼 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비과학적이라는 분위기가 오늘날도 매우 팽배한 상태입니다. 19세기에는 이제 과학(철학)과 신학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 절대 의존의 감정(쉴라이에르마허)이나 윤리(칸트, 리츨)만이 기독교 신학의 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세기에는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말씀의 신학이 철학과 과학을 여전히 신앙과 신학의 울타리 밖에 내버려두었습니다. 이제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신학은 철학과 과학과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과학 실증주의가 무너짐으로써 신학이 과학과 대화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진 것입니다. 이미 이런 단초는 진화론 신학을 제시한 떼이야르 드 샤르뎅에게서 볼 수 있으며, 오늘에는 보편사 신학을 주창한 판넨베르크가 그 선봉에 서 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미 1987년에 "과학이론과 신학"를 통해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사이의 가교를 세웠으며, 1985년에는 "신학과 철학"(한들 출판사에서 2001년 출판)이라는 책을 통해서, 또한 그 후로 여러 강연과 글을 통해서 신학의 장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최근에 번역된 "자연신학"(한국신학연구소, 2000년)이 이런 전반적 국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어쨌든지 이제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을 말하는 신학은 현실 전체를 신학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요구는 정당하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부활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매도해버리는 이들에게 보편 타당한 대답을 모색해 나가야 합니다.        



둘째, 부활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부활을 생물학적 연장선 속에서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부활을 일종의 재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배고픔과 질병이 없고, 고통과 슬픔이 없는 곳, 사시사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천사와 같이 노래하며 늘 기쁨과 자유가 충만한 곳이라고 합니다. 요한 계시록의 묵시문학적 서술을 이렇게 문자적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추구하던 삶의 욕망을 죽음 이후에도 연장시키려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말 그대로 일종의 유토피아니즘이지 기독교적인 종말론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이 아닙니다. 여러 위대한 정치가와 사상가들이, 혹은 사교의 교주들이 민중들에게 제시했던 이런 유토피아니즘으로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이 닿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세계를 머리 속으로 그려보십시오. 현재 고통으로 생각하는 그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고 영원히 잘 먹고 잘 살면 그것이 곧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게될 참된 생명의 세계일까요?

물론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사도신경의 맨 끝절을 보면 우리의 생물학적인 몸의 부활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고 진술했으며, 사도요한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6:63)고 했습니다. 신약성서는 이런 육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반하여 사도신경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명시적으로 언급되었다는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초기 기독교 시대에 서양 정신사에서 막강한 기세를 올리던 헬라 철학과의 투쟁에서 도입된 명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라 철학은 인간을 영육 이원론으로 보고 육을 비하했습니다. 반면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영과 육이 통합적으로 구성된 인간 존재를 말했을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이라는 표현은 "인간이 다시 사는 것"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고트홀트 뮬러는 <현대인에게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우리가 죽은 후에 이 세상에서 살아 있던 그 인간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다시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셋째, 약간 까다로운 문제로서 영혼 불멸설을 생각해봅시다. 많은 사람들은 죽었을 때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죽지 않고 하나님에게로 간다고 믿습니다. 이런 생각은 일단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말하고 있는 영육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그 책에서 인간의 육은 가치가 없지만 영혼은 영원하고 불멸하고 순수하다고 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죽음은 인간이 육이라는 감옥으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는 기쁨의 사건입니다. 기독교 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플라톤의 중요성으로 인해서 원래는 없었던 영혼 불멸설이 기독교 안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5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이 영혼 불멸설을 정식 교리로 채택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구약성서에서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플라톤의 영은 인간의 육과 대별되는 의미이지만 구약성서의 영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루아흐라는 히브리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혼 불멸성은 사이비 내지 이단입니까? 인간이 죽는다고 할 때 완전히 무가 되는 게 옳습니까?

여기에는 판넨베르크의 설명이 도움을 줍니다. 그는 <사도신경해설>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기독교가 플라톤적 영향이 있는 영혼 불멸설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개체 인간이 죽는 시점과 미래에 있을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의 시점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시기와 연관된다고 합니다. 비록 영혼이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영혼만으로는 온전한 인간이 아닙니다. 몸이 포함된 온전한 인간으로의 부활이 이루어지는 그 최후의 종말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폐 가운데 들어 있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은폐가 하늘이며, 그 상태에 대한 표현으로 영혼불멸설이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영혼불멸설은 육은 썩어버리고 인간의 영만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헬라적 사상이 아니라 참된 생명의 신비인 부활을 기독교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사상적 차용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3,4).  



부활 문제는 결국 생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생명이 이 땅의 것으로 완전히 끝나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독교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생명은 죽음이라는 경계선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너머에서 완성된다고 믿는 사람은 부활을 근본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박하게 이렇게 질문해 봅시다. 과연 무엇을 우리는 생명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우리는 아마 생명을 여러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자의 몸에 있는 난자와 남자의 몸에 있는 정자도 생명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난자와 정자의 결합이 이루어지면 좀더 구체적인 생명을 구성하고, 여성의 몸에서 분리되어 이 세상에 나왔을 때 이 생명은 훨씬 확실한 생명체가 됩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이 땅에서의 모습만 보더라도 생명에는 여러 차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죽어서 이제 육체가 다시 땅으로 흩어진다고 해서 모든 생명이 완전히 끝나버리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변화된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말하듯이 우리가 아직 인식할 수 없는 차원으로, 즉 아직은 하나님의 은폐 안에 숨어 있기 때문에 확인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생명체로 변화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른 차원의 생명 세계, 변화된 생명의 세계를, 그 비밀의 세계를 희망하며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부활 신앙입니다.



그러나 아직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부활의 리얼리티를 온전히 밝혀낸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대로 생명의 모든 것은 종말이 이르러야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함으로써, 또한 기독교의 전승에 나타난 사건과 그 경험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되살려냄으로써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면 우리는 부활에 대한 그의 약속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게 됨으로써 미래에 다가올 생명의 힘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아무리 우리가 부활에 대한 확신이 단호하더라도 그 객관적 사실을 서술할 수는 없습니다. 그 세계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다만 그 생명의 세계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미래에 이루어진 약속이면서 동시에 현재에 일어날 생명의 힘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영적인 시각을 좀더 심화시켜나가는 일은 신앙성장에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영적인 눈높이의 심화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비록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우리게 다가올 영적인 생명의 깊이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우리의 마음이 그 부활의 생명을 향한 희망으로 가득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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