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완전과 불완전 사이에서    



빌3:12-16



12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14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

15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 가야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문제에 관해서 다른 생각을 품었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분명히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16 어쨌든 우리가 이미 이룬 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 같이 앞으로 나아갑시다.

                    ( 공동번역)



1) 완전함에 대한 욕망



앞서 한번 지적했듯이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왜곡된 교리와의 논쟁을 감안하고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거짓 교리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만 바울의 강조점을 따라 가보면 여기서 무엇이 관건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그의 논지는 주로 이렇게 모아집니다. 첫째는 누가 참된 할례자인가(3:3), 둘째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참되게 인식할 수 있는가(3:9), 셋째는 현재의 삶에서도 완전해 질 수 있는가(3:12이하)(그닐카). 첫째 논점과 둘째 논점은 이미 앞에서 다루었습니다. 이제 셋째의 논점이 이 단락에서 다루어질 차례입니다. 과연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서 완전해질 수 있을까요?



사실 이 세계의 모든 종교는 완전과의 합일을 추구합니다. 이런 저런 모습으로 절대, 완전의 세계에 도달하려고 애를 쓰는 게 바로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종교인들이 고행이나 수행이나 경건생활에 통달함으로써 얻어보려는 상태가 그런 세계입니다. 예컨대 예수 당시 세상에 속한 어둠의 자녀들과 달리 자신들을 빛의 자녀라고 생각한 쿰란 공동체는 세상과 완전히 구별된 생활을 함으로써 완전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서 이렇게 완전을 주장하던 이들은 율법적인 완전에 사로잡혀 있던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줄곧 보아왔던 것처럼 그들은 율법이 가르쳐주는 지침에 충실함으로써 완전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의 율법적인 완전의 세계가 얼마나 취약한 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며, 율법적으로 흠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 율법에 충실하게 살아왔지만 그것으로는 결코 의로움을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율법적으로 완전할 수 없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죄가 인간을 지배하기 때문인데, 이는 곧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혼신을 다해 애를 쓰다보면 어느 정도의 윤리적이고 율법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긴 하겠습니다만 그의 의식은 여전히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복음서에는 이런 바리새인들의 이중성이 예수님에 의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원(原)인류인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취하게 된 근본 이유는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될 수 있다는 뱀의 유혹 때문이었습니다.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동생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 앞에서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창4:9)라고 반문한 가인은 그 한 인격체가 아니라 우리 인간 보편의 속성을 말합니다. 이처럼 죄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윤리적으로 완성시켜보겠다는 시도는 불가능합니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을 자신 안에 가두는 자기 고집, 이것이 바로 죄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더 큰 창조적 힘, 생명의 힘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게 바로 죄입니다. 어거스틴은 죄를 "휘브리스"(교만)라고 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모르 수이"(자기 사랑)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약간씩 다른 표현입니다만 죄는 결국 자기 집착에 모아집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에서 죄라고 할 때는 실정법이나 도덕 규범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자신의 존재를 걸어두고 사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회개(메타노니아)는 도덕, 윤리 규범을 조금씩 선한 쪽으로 바꾸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삶의 자리를 온전히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결단입니다. 역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 게,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게 바로 죄입니다. 이런 점에서 율법(종교적, 윤리적 인간 행위)으로 완전의 세계에 도달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신비적인 차원에서 완전을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그 어떤 죄 앞에서도 자유롭기 때문에 완전하다는 주장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에 의존적인 면에서 완전을 추구한다면 무율법주의자로 불리는 이들은 율법을 초월함으로써(무율법) 완전을 지향합니다. 말하자면 이들에게는 이미 영적으로 완전한 세계에 들어가 있으니까 육에 속한 모든 문제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영지주의적인 이원론에 근거한 이들의 주장은 보기에 따라서 매우 그럴 듯 하지만 사실은 율법적으로 완전할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피해보기 위해서 시도하는 또 하나의 다른 완전을 향한 욕망입니다. 이런 욕망은 인간을 승화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위선에 빠지게 하든지, 아니면 자기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서는 이들이 구원파라는 이름으로 상당히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물론 이들이 이단으로 단죄되긴 했습니다만 오늘날 정통 교회 안에서도 이런 경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완전을 향한 욕망은 인간의 내부 담겨 있는 매우 보편적이고 강렬한 유혹입니다. 자기 스스로 완전한 존재가 되고자 했던 왕과 장군과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면에서 인간의 예술사는 바로 완전을 향한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사소한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완전의 유혹은 절실하게 드러납니다. 남자와 여자는 상대방에게 완전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무던히 애를 쓸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서도 그런 상태를 요구합니다. 그러다가 서로간에 지쳐버립니다. 요즘의 대중 매체를 통해서 무한정으로 선전되는 온갖 종류의 상품들은 대개가 이런 완전해 보려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시킵니다. 여성들의 샴프 선전을 보셨습니까? 그 샴프를 사용하면 모든 여성들의 머릿결이 비단결같이 될 것 같습니다. 그 광고를 찍은 여성이 머리 손질만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시청자들은 화면에 나타난 그 여성만 보고 자기도 그렇게 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완전한 아름다움을 향해서 몸부림치는 여성 심리를 이용한 선전술입니다. 물론 남성들도 이러 심리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2) 기독교적인 삶의 긴장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고백합니다(12절). 완전할 수 없는 육의 완전에만 치우치거나, 반대로 그것을 포기하고 영적인 완전에만 치우치는 게 아니라 육과 영이 긴장 관계를 이룸으로써 새로운 차원에서 완전을 지향합니다. 바울이 이 구절에서 사용한 "텔레이오스"라는 단어는 도덕적이거나 실제적인 완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신앙적 긴장의 원리라는 점에서 사용되었습니다(뮬러, 125 참조). 초대 교회에서 "하기오스"라는 단어가 일반 성도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미 구원받아 하늘나라에 올라간 성자를 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즉 성도는 원칙적인 면에서 성자이지 실제적인 면에서는 성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사이의 긴장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4:21,22 참조). 바울에게는 이러한 긴장이 늘 있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자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한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는 자신이 이미 성취하거나 완전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리스도 예수에게 붙잡힌 바의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12절).  



바울이 완전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울의 인간적 노력이 소홀했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좀더 다른 문제가 해명되어야 합니다. 바울만큼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자기가 성취했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만약 바울의 노력으로도 이룰 수 없는 완전이라면 완전하지 못한 것이 인간의 책임일 수는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이룰 수는 없다고 해서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게 아닌가요?

이런 점에서 바울이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고 말한 것은 어떤 율법적인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가 이루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달랐다고 보아야 합니다. 앞서 13과에서 공부했듯이 그것은 곧 생명의 세계에 대한 신비를 가리킵니다. 그는 율법주의자들과 경쟁을 하려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된 어떤 궁극적인 현실성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그가 이루어야할, 더 정확히 말해서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율법을 완성시키는 것처럼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기 때문에(고전13:12) 아주 간단히 우리 손에 잡히는 게 아닙니다. 완전한 헌신으로도, 강철같은 믿음으로도 손에 넣을 수 없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천지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 그를 만난다는 것,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다는 것,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를 접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에버하르트 융엘의 유명한 책제목이 말하듯이 하나님은 세상의 비밀(Gott als Geheimnis der Welt)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예언자들이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원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은폐의 방식으로 이 세계에서 우리와 만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직접 만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비밀 앞에서 불안하기 때문에 무언가 가시적인 사물이나 신념을 통해서 절대적인 것을 성취해보려고 하지만 그런 노력은 무용지물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성과를 이룩한 자연과학도 역시 아주 작은 범주 안에서만 그 원리들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지 생명의 근원과 미래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인류가 달에 발을 디뎠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생명의 근본이 약간이라도 달라진 게 있나요? 화성과 목성에 사람을 보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배자 복사 기술을 발견해낸 우리의 첨단 유전공학이 우리 인류의 미래를 영원히 보장하고 있나요? 우리는 여전히 <존재와 시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연과학적 기술이 미지의 세계를 열어낸다고 하더라도 "왜 존재자는 있고, 무는 없는지?"(Warum ist  berhaupt Seiendes und nicht viel mehr nichts?, 라이프니쯔, 하이데거) 모릅니다. 이 하나님의 은폐와 비밀 앞에서 우리 인간이 이룬 것은 이루지 못한 게 많다는 것을 확인해줄 뿐입니다. 이것은 정치, 경제, 과학,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적 노력에 해당됩니다. 종말이 아직 이르지 않은 한 우리는 궁극적인 면에서 얻은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고백은 오늘 우리의 삶에도 타당합니다.



3) 신앙의 집중력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무력감 속에 빠져서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이 세상과 그 생명의 궁극적인 실체가 아직 비밀에 싸여있지만 그는 분명한 삶의 목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푯대를 "잡으려고 좇아간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푯대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힌바 된 그것입니다. 이렇게 푯대를 향한 바울의 자세는 뒤의 일은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놓여 있는 것만을 향해서 매진하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율법주의자들과 투쟁하고 있지만 율법주의자들 못지 않게, 오히려 실질적인 면에서 그들보다 훨씬 구체적인,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남을 구원하다가 자기가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자기 몸을 쳐 복종케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바울이 다시 율법에 충실했다는 게 아닙니다. 율법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기독교적인 삶을, 그 경건생활을 실천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잡으려는 푯대는 결코 율법이나 경건이나 윤리적 실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세계, 부활의 세계였습니다. 그 하나만의 목표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이외의 것들은 사소하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 문제도 그에게는 다급하지 않았으며, 당연히 재산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2001년5월에 출판된 김성동 씨의 소설 "꿈"에 대해서 잠시 말씀을 나눠볼까요? 김성동은 1947년 충남 보령에서 출생했는데, 19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참으로 일찍 철이 들었군요.) 10여 년 간 불문에 들었다가 1976년에 하산했습니다. 1978년에 쓴 "만다라"로 한국 문학 신인상을 수상함으로써 유명 작가가 되었습니다. "꿈"은 수행하는 어떤 승려가 어떤 젊은 여성을 만나서 함께 보냈던 얼마간의 시간을 뒤돌아보니 그게 꿈이 아니었나 하는 깨달음을 소설 형식으로 쓴 작품입니다. 수행 정진하던 승려의 마음 속에 무슨 이유로 젊은 여성에 대한 강한 그리움이 밀려들었는지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추상적인 느낌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런 논리성이야 이런 소설에서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접어두어도 좋습니다. 자신이 반야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 젊은 여성과의 정신적인, 혹은 육체적인 접촉마저도 일종의 수행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이 승려의 자세가 돋보였습니다. 어쩌면 보기에 따라서 이 사람이 위선적이라거나 이중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자기의 삶을 이렇게 한쪽(구원)으로 집중시켜 나가는 자세는 가능하다고 보며,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봅니다. 이 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순수 우리말이 잘 다듬어져 있어서 좋았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에는 당연히 이러한 신앙적 방향성(집중력)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한 그 지향성을 갖지 못한다면 기독교적인 구원은 혼란에 빠질 뿐만 아니라 그 실체를 상실하게 됩니다. 물론 이 말이 하나님의 권한이며 그의 선물이라 할 구원을 우리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구원과 생명의 세계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한 사람은 자연적으로 자신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그 한 가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에서 이런 방향성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똑같이 필요로 하고, 그들이 만족해하는 것에서 똑같이 만족해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들에게 기독교는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더 좋은 교양일 뿐입니다. 일전에 어느 교회의 강단에 걸려있는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일명 우리 교회의 금년도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사실 교회 강단에 그런 구호를 써 붙인다는 것 자체가 너무 인위적인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지 대구시의 성시화를 비롯해서 그런 진부한 제목들이 대 여섯 적혀 있었는데, 그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우리 자녀들 중에 인물과 재벌이 나오게 해주옵소서!"였습니다. 참으로 노골적인 기도제목이었습니다. 화목한 가정을 위한 기도라면 모를까, 도대체 인물과 재벌이 하나님의 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 이런 기도의 제목이 잡혔을까요? 사실 민중의 고난은 어떤 면에서 이런 인물과 재벌에 의해서 벌어졌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말입니다. 제가 굳이 어느 교회의 기도 제목을 시비 걸 듯이 거론한 이유는 오늘의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생명의 세계를 향해서 한 마음으로 정진하지 못하고 자기를 성취하는 일로 인해서 마음이 분분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없고 자기 성취와 욕망이라 할 교회의 형태만(재물숭배) 남았습니다. 이런 상태로 우리가 바울을 신앙의 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간혹 기독교 소종파의 행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완전히 부정해버리는 듯한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아가야 할 이 세상에서 기독교적인 삶의 일관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오늘과 같은 극단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기독교인만이라도 그런 자본에 휩싸이지 않는 삶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모든 기독교적인 삶의 방향성과 일관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없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처한 삶의 자리가 다양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모든 삶에서 세상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본인들이 경우에 따라서 판단해야만 합니다. 다만 바울처럼 오직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는 일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기독교인의 삶에는 그런 생명의 세계를 향한 일관성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완전과 이 현실의 불완전 사이에서 긴장하고 있는 기독교인이 유지해야할 신앙적 삶의 태도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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