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분열과 일치



4:1-3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 책에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은 여러 형식과 내용의 글들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그닐카의 주석에 따르면 4장1,8,9절은 3장1(후)절부터 3장21절에 이르는 일련의 논쟁서신에 포함된다고 하는데, 이런 역사 비평 문제는 우리의 공부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일단 접어두고 약간의 필요한 내용만 뒤에서(8,9절) 잠시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4장에 나오는 그 이외의 내용은 빌립보 교회를 향한 권면, 재정 지원에 대한 감사, 마치는 인사입니다.



1) 삶의 토대



바울은 4장1절에서 빌립보 교인을 향해서 여러 표현 방식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 사모하는 자, 기쁨인 자, 면류관인 자. 도대체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어떻게 생각했기에 이렇게 절절한 심정을 담아 편지를 쓰고 있을까요?(1:3,4). 이 표현에는 그의 어떤 특별한 생각이나 마음이 들어있는 걸까요? 아니면 단순히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한 수사학적 인사치레에 불과한 것일까요? ㄱ)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렇게 과장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ㄴ) 사모한다는 말은 애타게 보고 싶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현재 옥에 갇힌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디모데를 대신 보내려고 하다가 아직 재판 과정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서 에바브로디도를 우선 보내려고 결정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소식 때문에 마음이 다급한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얼마나 그리워했을는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ㄷ)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긴박한 사명감 속에서 급기야 유럽에 발을 디딘 바울에 의해 최초로 복음이 전파된 곳이 빌립보 교회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기쁨이 아닐 수 있었을까요? ㄹ)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자기의 면류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명예이며 자랑이 빌립보 교회라는 말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꾸준하게 바울을 재정적으로 도왔으며 복음으로 교제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면류관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들이 신앙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바른 길에 서 있기를 진정으로 원했습니다. "주 안에 서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인간을 향한 가장 바람직한 기대와 권면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요? 우리가 굳건히 설 수 있는 토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보다 더 긴요한 것을 없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는 인간들의 생산물만 바라본다면 이러한 바울의 권면이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입니다만, 이 현실의 내면을 보다 정확하게 뚫어볼 수 있다면 그의 말이 참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천민 자본주의 체제 가운데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문제가 더욱 절실합니다. 돈이 우리 삶의 토대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이미 예수님은 한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마6:24)고 말씀하셨는데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두 토대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좀더 솔질하게 우리 자신을 반성한다면 한국 교회 자체가 물신(物神)주의에 빠져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이 시대 정신처럼 교회의 성장과 확대만을 교회의 존재 이유와 근거로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과 구원과 종말을 거론합니다만 그것은 단순히 명분뿐이고 실제로는 다른 절대자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 안에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그 생명의 세계를 향한 간절하고 종말론적인 기다림이 자리하지 못하고 교회 운영만을 위한 "노하우"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주 안에 서 있으라"는 권면을 심각하게 경청해야 합니다.  



2) 유오디아와 순두게

바울은 4장2절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특별히 거명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 두 사람 모두 여성들인데, 이들의 이름 이외에는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유오디아를 빌립보 교회의 창립 멤버인 루디아(행16:14)와 동일인으로 여기는 것은 그저 상상에 불과합니다.

3절에 부녀들을(유오디아, 순두게) 도우시오 라는 권면을 보더라도 이미 그 당시에 빌립보 교회에서는 여성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봉사활동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들이 적극적입니다. 교권은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었지만 그 교권이 지향해야할 교회의 실제적인 봉사활동에는 오히려 여성들이 많이 참가했습니다. 아마 자신의 몸으로 생명을 출산할 수 있는 여성들만이 느낄 수 있는 동정심이 크게 작용했는지 모릅니다.



여성 목사제도가 교회의 실천에서 그렇게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과도기에 있는 한국 교회로서는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입니다. 교단의 형편에 따라서 이 제도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유보하고 있는 실정인데, 이에 대한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정서는 여전히 부정적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숫자적으로 어느 정도 여성 목사들이 배출되기는 했어도 명실상부하게 개교회의 책임자로 일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담임목사를 보조하는 위치나 기관에서 일하는 정도입니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여성 지도자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우선 성서 말씀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성들은 교회에서 잠잠하고 가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2천년이 지난 오늘의 교회에 실제로 적용하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이브에게 사람(아담)이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거나, 뱀에게 먼저 유혹 당한 인물이 바로 여성이었으며, 하나님도 아담이 이브를 다스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런 성서 문자주의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한국 교회의 정서상 여성 목사제도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현실론에 근거해서 이를 반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우리 개신교회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완고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 속해 있는 사제는 한결 같이 남자들뿐입니다. 수녀들은 남자 사제를 돕는 위치이지 결로 성직자는 아닙니다. 영국 성공회도 역시 남자들만을 사제로 인정합니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철학자로서 볼로냐 대학교 교수인 움베르토 에코와 가장 강력한 교황 후보로 인정받고 있는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이 이런 주제를 갖고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서신 교환 형식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 논의된 내용이 책으로 출판되어 나와 있습니다(무엇을 믿을 것인가, 열린 책들). 이 서신 논쟁집에는 이 외에도 희망, 생명, 윤리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라는 책으로 국내에서도 상당한 숫자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에코는 수사학적 맛을 곁들여가며 자신의 입장을 부드럽게, 그러나 날카롭게 제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성이 사제직에서 배제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설득력 있는 논거들을 가톨릭 교회의 교의 속에서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에코는 그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남의 종교를 이유 없이 헐뜯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각기 종교의 신비와 나름의 전통을 무시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지성인으로서 궁금한 점을 질문할 뿐입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성서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그 자체로 모순이 되기 때문에 남자들만 제사장으로 임명했던 구약의 전통을 그대로 따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서에 나오는 여러 종교적인 형식은 분명히 문화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에코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오는 내용까지 다루면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아퀴나스도 사제직이 남자만의 특권이어야 할 이유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했다는 게 그의 결론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마르티니 추기경의 답변도 역시 자기만의 독단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예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오로지 남성에게만 사제직을 부여하기 위해 내세웠던 논거들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제시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실천은 ... 영속됩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이 두 문장에 마르티니의 답변이 모아집니다. 남자만의 사제직이 논리적으로 정당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구원 사건에 충실한다는 점에서 이 남자만의 사제직이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자기가 경험하고 찬양하는 신비들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르티니는 에코의 논리를 교회의 신비로 비켜간 셈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성 목사제도에 대한 분분한 논의를 지루하게 전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합치될 수 없는 논쟁을 재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남성과 여성은 대립적이거나 주종관계에 있는 게 아니라 둘이 합하여 한 인간이 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진정한 일치를 모색해 나가야 한다는 점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가능한대로 역사의 미래를 향해서 전진적으로 사유할 수만 있다면 한국 교회에 적절한,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제도를 세워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만 덧붙인다면 유대민족을 이끌어갔던 사사들 중에서도 걸출한 여성 지도자가 있었으며, 초대 교회에도 여성들의 활동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소위 페미니즘 논쟁에 대해서 한 마디 덧붙여볼까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오랜 세월 확고한 체제로 굳어진 가부장제를 철폐하고 명실공히 여성의 권리를 회복하려는 운동이 우리나라에서는 80년대부터 서서히 일어나다가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맹렬히 확산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가부장제의 악습에 대해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중세기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이슬람 문화권을 제외한다면 가부장적 질서를 옹호하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물론 호주제를 유지해야 한다거나 동성동본의 결혼을 막아야 한다는 유림의 주장이 여전하긴 합니다만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가부장적 가치는 낡아버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페미니즘이 여성의 여성성(性)을 완전히 배격해 버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그것은 가부장제 못지 않게 인간을 왜곡하는 태도입니다. 즉 모성적 품성까지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 파기해버려야 할 비인간적 속성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실제로는 훨씬 본질적인 것인데, 페미니즘이 지금까지 여성들이 감당해온 가사와 육아 노동을, 더 나아가서 출산 행위를 지금까지 남성들이 주로 담당해온 사회활동 보다 저열한 것으로 전제하고 시작한다면 그것도 역시 인간 삶의 근본을 오해하는 태도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지나치게 관념적이라고 비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여성의 여성다움과 남성의 남성다움이 조화됨으로써 참된 인간다움이 형성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남성다움이 여성다움보다 우월하다거나 남성은 사회 활동을 해야하며 여성은 가정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런 문제들은 남성과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 인격체의 특성이나 능력에 따라서 구분되어야 할 일입니다.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지는 않아야 하지만 구별할 것은 구별하는 게 온전히 인간이 되는 길이 아닐까요?



3) 일치

  

어쨌든지 빌립보서에 거론된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안타깝게도 빌립보 교회를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게 한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서로 다른 주장을 했는지, 아니면 바울과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의 편에 섰는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 여성들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충고합니다. 곧 이어서 자기가 믿을만한 사람에게 이 여자들을 도우라는 명령을 내리는 걸 보면 이 여자들이 한때 빌립보 교회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할 정도니까 그 저간의 형편을 알만 합니다. 그러나 일단은 이 여성들 때문에 문제가 벌어진 것만은 분명합니다.

반드시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 때문에 교회 활동에서 많은 분쟁과 다툼이 벌어집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 가는 교회 공동체가 현실적으로는 이리 저리 분열됩니다. 부분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입장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같은 마음을 품는 훈련을 함으로써 큰 틀에서 일치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어떤 제도나 조직을 하나로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을 하나도 묶는 게 무엇보다도 우선합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남긴 분열의 흔적은 우리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내줍니다. 정확한 통계를 알 수는 없지만 크고 작은 교단이 백여 개로 분열되어 있는데, 이런 우리의 분열 현상은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하는 점을 보여주는 걸까요? 교회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아야 할 이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이런 분열의 상처를 남기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 도가 너무 심해서 그 어떤 말로도 설명이 가능하지 못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분열 현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을 하지 맙시다. 중요한 것은 이 현실에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일치를 모색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일단 우리 개신교 교회만 두고 말하자면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KNCC)가 조직되어 한국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는 세계 교회 협의회(WCC)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다음 1948년에 암스텔담에서 제1차 총회를 개최한 이후로 이런 에큐메니칼 운동을 꾸준하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데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성, 사도성, 보편성, 단일성이라는 교회의 징표를 인정한다면 하나의 교회라는 목표를 향해서 줄기차게 매진해 나가야 합니다. 지금 당장 제도와 직제를 하나로 통일시키자는 게 아니라, 그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인데, 우선 교회 상호간에 진정한 평화(샬롬)와 친교(코이노니아)의 정신을 회복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일치가 없이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어떻게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서로간에 형제라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충고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같은 마음을 품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참으로 힘에 부칩니다. 늘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같은 마음을 갖는다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충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상대방을 이해함으로써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과 일치함으로써 사람과도 일치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이렇게 충고하는 것 같습니다. 일단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신뢰하고 희망하는 게 필요합니다. 이렇게 준비된 사람은 이웃과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관계도 역시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관계에서 시작한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4) 멍에를 같이 한 자

바울은 3절에서 익명의 어떤 사람에게 부탁하는 말을 합니다. 나와 멍에를 같이 한 당신에게 부탁하오. 모든 편지의 내용은 빌립보 공동체를 향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만은 한 개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멍에를 같이 멘 자"를 가리키는 헬라어 "진실한 시지고여!"(             )는 고유명사일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시지고를 보통 명사로 생각해서 여러 인물을 거론하고 있긴 합니다. 예레미아스는 실라, 라이트후트는 에바브로디도, 프리드리히는 디모데, 슈미탈스는 에바브로디도나 디모데, 튀빙겐 학파는 베드로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빌립보에 남아 있는 바울의 아내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르낭 같은 사람은 시지고가 루디아를 말하며 바울과 결혼한 사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닐카에 의하면 시지고가 고유명사로서 빌립보 교회의 감독들이나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오늘 본문에 여러 고유명사가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타당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이 사람은 바울이 믿을만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빌립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부탁 받은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는 일은 그렇게 드러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별로 즐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감당하는 일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동역자들을 돕는 일입니다. 바울에게서 부탁 받은 일은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서 힘을 쓰던 부녀들을 돕는 것, 글레멘드와 그 이외의 동역자들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앞장서서 일하는 것은 그런 대로 할 만합니다. 잘하든 못하든 자기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옆에서 돕는 일은 별로 표가 나지 않기 때문에 신앙과 인격에서 감당할만한 준비가 되어 있을 경우에만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동역자들을 돕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상당한 부분에서 복음의 일이 원활하게 돌아갈 것입니다. 아무도 교회의 주도권 때문에 다투는 일은 없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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