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파루시아



4:4-7



4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6.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공동번역)





1) 기쁨과 관용

바울은 4절에서 빌립보서의 주제인 "기쁨"을(1:4, 1:18, 2:17, 18, 3:1참조) 강조합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시오. 4:4의 이 기뻐하라는 말씀은 3:1a의 기뻐하라는 말씀의 반복입니다. 그런데 4:4에서는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기쁨에 대한 강조일 뿐만 아니라 기쁨의 근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는 항상 기뻐할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유달리 기뻐하라고 거듭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특질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가 감옥에 들어있다는 특별한 상황과 연관시켜서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말이 마지막 권면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겠지요. 유언을 해야한다면 누구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말을 하게 마련입니다. 바울에게는 그것이 곧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기쁨이 어떤 토대에서 솟아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뻐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소유감이나 성취감 때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어떤 자연주의적인 깨달음 때문도 아닙니다. 물론 예술과 하나가 되었을 때 인간이 경험하는 기쁨이 대단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베토벤이 일명 "합창 교향곡"이라고 불리는 교향곡 10번에서 Freude! Freude!(기쁨! 기쁨!)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종교적인, 사상적인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기쁨도 역시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합니다. 사실은 예술이나 사상의 깊이를 경험하는 기쁨도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만이라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것처럼 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악상이 샘솟듯 솟아 나와서 위대한 작품을 만들었다면 그것을 누가 인정해 주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참된 희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고승이 10년 독거, 묵언 수행 끝에 자신과 우주가 하나되는 경험을 했다고 합시다. 인간이 평생에 걸쳐 노력하더라도 이루기 힘든 이런 깨침을 통해서 죽음까지도 초월해버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한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그분이 제공해주는 기쁨을 말합니다. 과연 이게 무엇일까요? 주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과 위에서 말한 예술과 사상적인 깨침을 통해서 기뻐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과연 그 어떤 인간적인 노력으로 인해 도달될 수 있는 기쁨과 전혀 차원을 달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출발은 다르지만 결국 기쁨의 상태는 별반 다르지 않는 걸까요?



우선 우리는 기쁨의 차원이 결코 똑같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2십 년 동안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돈을 모아 집을 샀다고 합시다. 그 순간만은 자기가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아주 짧은 순간 동안만 우리에게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장 궁극적인 기쁨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술이나 학문적 성과도 다른 사물을 소유한 것보다는 길겠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삶에서 가장 궁극적인 기쁨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주와의 일체감 속에서 살아갔던 많은 고승들과, 이 우주의 근원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위대한 학자들의 기쁨도 역시 영원한 생명과 관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 스스로 한정적입니다. 이 지구를 포함해서 태양과 그 이외의 별들도 역시 길긴 하지만 영원한 게 아니라 유한합니다. 그것들은 그 어떤 다른 것에 의존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부터만 절대적인 기쁨이 가능합니다. 물론 앞서 잠깐 말한 대로 이런 유한한 지구나 우주와 하나되는 경험을 통해서도 매우 차원 높은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것은 아직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에 못 미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은 창조자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뜻을 포함합니다. 우리 삶의 뿌리가 모든 것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에게 놓여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기쁨의 이유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그 거대함 앞에서 입을 다물 수 없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이런 기쁨은 인간의 성취감에 비해 한 차원 높은 우주론적인 기쁨이나 종교적인 기쁨까지도 뛰어넘습니다. 자연의 신비가 아니라 그 자연을 창조한 하나님이 바로 기쁨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우리에게 궁극적인 생명의 미래를 알려주신 하나님 안에서 얻게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이 구원에 참여한다는 희망에서 솟아나는 기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기쁨이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과연 실제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건 너무 추상적인 생각이다"라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눈에 보이지도 않고 저울로 무게를 달아볼 수도 없는 기쁨을 어떤 사물처럼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사물처럼 우리의 시야에 구체적으로 포착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이 기쁨은 남에게 보여주거나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생명의 능력으로 작용할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쁨은 사랑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이 사랑의 능력에 의존해서 살아가듯이 우리 기독교인들은 기쁨의 능력으로 참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다른 종교인들이나 사상가들이 어느 정도로 이런 기쁨의 능력에 참여해서 살아가는지 우리로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경험하게 된 이 기쁨이 어떤 깊이와 크기인지에 대해서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궁극적 비밀이신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실존을 판단해주는 시금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은 기쁨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그 세계가 우리의 영적인 시야에 들어와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 삶에 들어와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궁극적 생명의 비밀인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보다는 전혀 다른 즐거움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기뻐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대개는 무언가 우리의 생각대로 이루어지거나 뜻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벌어진 것으로 마음이 뿌듯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요소들은 매일 매일 변합니다. 어제 기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늘은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살면서 흡사 생사고락을 초월한 천사들처럼 살아갈 수는 없지만 기쁨의 근원을 주님 안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매일 상기하면서 삶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곧 깨어 있으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기독교인의 삶이 아닐까요?



기뻐하라는 권면과 짝을 이루는 말씀이 5절에 나옵니다. 당신들의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오. 관용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피에이케이아"는 역경을 당해도 쉽게 동요되거나 넘어지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영적인 인내심을 가리키기도 하고(칼빈),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합니다(켄트). 디모데전서에는 이 단어가 감독직을 맡은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성품으로 거론되었습니다(딤전3:3). 여기 빌립보에서는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을 드러내는 표식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바울이 기뻐하라고 강조한 다음에 관용을 나타내라고 권면 하는 이유는 그 기쁨이 사람들에게 증거될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관용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그 능력은 곧 사람들에게 관용의 태도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이외의 길은 없습니다. 또한 기쁨은 기쁨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이웃과의 관계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역시 관용의 태도는 중요합니다.

관용의 태도는 그렇게 해야겠다는 의지로 되는 게 아니라 바울의 가르침에서 보는 대로 기쁨에서 시작합니다. 이런 관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경험됩니다. 누군가에게서 뜨거운 사랑을 받음으로써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역시 넓은 마음으로 대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이 없는 사람은 늘 옹졸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홍세화 씨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라는 저서에서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은 관용(똘레랑스)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프랑스 파리는 온 세계 모든 종족이 모여 사는 전시장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 사람들이 모든 이들에게 관용의 덕을 보여주고 있는지 저는 아직 확실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어쨌든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때 기쁨과 관용이 매우 가까운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쁨을 나무라고 한다면 관용은 열매일지도 모릅니다. 기쁨의 나무는 관용이라는 열매를 맺게 마련이죠. 나무가 좋아야 좋은 열매를 맺고, 좋은 열매를 맺어야 좋은 나무라는 것이 증명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마7:17,18)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에는 기쁨과 관용이 적절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2) 파루시아

바울은 기쁨과 관용을 기독교적인 삶의 내면과 외면의 근본으로 제시하면서, 아주 짧은 한 문장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십니다(The Lord is at hand.).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과 그 기쁨을 아는 자로서 관용의 태도를 보이라는 말씀은 근본적으로 주님이 현재 우리와 함께 한다는 인식에 그 토대를 둡니다. 기독교의 모든 교의와 실천들을 규정하고 있는 이 문장은 주님의 파루시아(임재)와 연관됩니다. 더 나아가서 요한이 마라나다, 주여, 곧 우리에게 임하시기를!(계22:20)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종말에 임할 주님의 재림과도 연관됩니다. 이것은 2천년 전에 목수의 아들로 오셨다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현재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종말에 심판자로 오실 것에 대한 희망입니다.



과연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과거의 역사가 어떻게 현재이면서 동시에 미래입니까? 미래가 어떻게 현재를 규정할 수 있습니까? 초대 교회가 실제로 자신들의 생전에 재림하실 것으로 믿었던 예수님이 2천년 동안이나 지연된 이 마당에도 역시 "주님이 가까이 계십니다."는 명제는 타당한 걸까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론과 종말론에 대해서 약간의 공부가 필요합니다. 325년 니케아에서 소집된 제1차 세계 공의회에 이어,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집된 제2차 세계 공의회 이후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전지전능하고 무소불위 하신 하나님과 역사에 실존하셨던 아들로서의 하나님은 현재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현재적인 존재 양식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들로서의 하나님인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 생명의 영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종말에 일어나게 될 최후의 심판은 오늘날 신비하게 보였던 모든 사물과 사건들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즉 계시되는 결정적인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그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고 믿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손오공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구름을 타고 저 우주 어느 공간에서 이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종말 공동체인 기독교인들입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위에서 언급된 성령론과 종말론에 대한 짤막한 설명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의 물리학적 상식으로 볼 때 너무나 허황한 요설에 불과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그 근거들이 얼마나 부분적이고 얼마나 한정적인지 알기만 한다면 기독교의 교의가 말하는 하나님의 존재론이나 종말론에 대해서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선 시간의 본질에 대한 것만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현대 물리학에 대한 초보적인 상식을 갖고 있다면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시간 개념이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가시적인 공간의 궁극적인 심연에 무엇이 있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는 어떤 면에서 과학자들보다 시인들이 훨씬 가깝게 접근해 있는지 모릅니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삶을 "한 여름밤의 꿈"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종잡을 수 없이 돌아가는 인간사에 요정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낯익은 것만을 확실한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버리고 아무런 선입관 없이 사물을 직관하는 동시에 그것의 보이지 않는, 혹은 숨어있는 심연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리가 이렇게 막연한 개연성에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러한 개연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인격적 개입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계시되는 과정이 바로 이 세계의 보편사입니다.



주님의 파루시아를 향한 간절한 기대와 희망이 기독교인의 기쁨과 관용을 가능하게 한다는 이 사실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무언가 신비주의적인 태도처럼 보일지 몰라도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너무나 실질적인 진리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주 짧은 시간과 더불어서 사라지지만 우리는 그런 보이는 현상의 심연에서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황갈색의 껍질에 싸여 흡사 죽은 듯이 보이지만 그것이 땅에 심겨져 몇 주가 지나면 새싹이 나고, 또 몇 주가 지나면 영롱한 색깔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씨앗에서 그 미래의 생명을 내다보듯이 말입니다. 이런 우리의 신앙이 참되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도록 깨어서 준비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3) 염려로부터의 해방

주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항상 기뻐하며 사람들에게 관용을 알게 한다는 것은 곧 모든 염려로부터 벗어나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구할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당신들을 지키실 것이라고 권면 합니다. 이 말씀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6:25)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내용적으로 일치합니다. 인간의 삶은 실제로 무엇을 먹을까라는 염려로 점철되고 있는데, 이런 염려를 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언가 비실제적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인간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기쁘게 사는 일에 집중하는 사람은 당연히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어느 하나에 열심을 내면 그 이외의 것들은 자연스럽게 사소해지게 마련이니까요. 우리 기독교인들이 주님 안에서 기뻐할 줄 안다면 그 이외의 문제로 인해서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아주 명백하게 들립니까? 아니면 공허하게 들립니까? 너무나 많은 관심이 우리의 삶을 소진시키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염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원칙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자신의 성취가 곧 행복에 직결된다고 착각합니다. 세상 질서를 조금씩 깨달아 가는 나이로부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온갖 염려와 근심에 싸여 있는 이유는 그 염려의 근원인 성취감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껍데기에 연연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사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자기가 성취한 일로 완전히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흥미를 끌기는 하지만 그 이상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성취하려는 욕망으로 인해서 잠시도 편안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염려와 근심으로 날을 세웁니다.

둘째, 인간이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전능을 꿈꾸고 있지만 약간만이라도 그 내용을 들여야보면 헛수고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사에서 무엇을 찾아볼까요?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 정복의 꿈을 생각해볼까요? 왕정을 박살내고 명실상부한 공화정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나폴레옹의 야망을 생각해볼까요? 게르만 민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설계했던 히틀러의 제삼제국을 생각해볼까요? 하나님이 죽었다고 외치면서 생명의 의지를 불태웠던 니체가 무언가를 성취했을까요? 칼 마르크스의 생각대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이 이 세상을 생명의 질서로 변화시켰나요? 미국에서 참되고 선한 것들이 생산되고 있습니까? 일본에서 그렇습니까? 오늘의 과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합니까? 우리의 키를 일 센티라도 크게 할 수 있나요? 소의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한 온갖 연구 끝에 성공시킨 인공 사료 때문에 광우병이 생기는 마당에 우리 인간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땅바닥에 누워 감이 떨어지기를 바라며 사는 게 최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취에 대한 지나친 욕망으로 인해서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염려와 근심만 많아질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원은 역시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고백은 옳습니다(빌3:20).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일 때만 우리는 참된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까이 계신 주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소원과 희망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뢸 뿐입니다(6).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과 성취감으로 인해서 염려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에 자기 삶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는 역으로 말해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이 일정하지 않고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지키며 사는 것이, 이는 불가능한 일인데, 지혜롭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사는 사람이, 이것이 참인데, 지혜롭습니까?



4) 하나님의 평화

이 단락의 마지막은 앞서 1장2절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는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 염려와 걱정을 하지 않고 기쁨게 살아가며 사람들을 관용으로 대하고, 하나님에게 구할 것을 구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약속입니다.(7절). 이 평화는 구원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기쁨이 주어지듯이(4절) 구원도 역시 하나님에게서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평화의 권면은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도 언급됩니다(살전 5:23, 고후 13:11, 갈 6:16, 살후 3:16). 이 평화는 어떤 이성도 능가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평화가 인간의 이성이 수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능가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행하는 모든 염려를 침묵시킵니다(그닐카). 이런 점에서 우리의 기쁨은 이런 하나님의 평화 안에서 공급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평화 문제를 일상에서 상실하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평화가 아니라 경쟁과 대결이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사회 질서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육의 현장에서도 아이들이 이런 평화 담론을 배우는 게 아니라 적자생존의 원칙에 치우친 이념을 배우는 게 아닐까요? 물론 어디서나 선의의 경쟁이 필요하며, 그런 경쟁이 인간의 창조력을 확대시키기는 합니다만 오늘날 이런 선의의 경쟁조차도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지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를 말하기는 합니다만 그런 평화는 대개의 경우에 힘에 의한 평화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샬롬이 아니라 힘이 강한 쪽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유지되는 형식적 평화라는 말씀입니다. 인류역사는 늘 이런 상태로 지내왔습니다. "팍스 로마나"는 늘 로마의 입장에 의해서 강제된 평화이지 피식민지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시대에서도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본디오 빌라도라는 로마 총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도록 내어 준 것도 역시 유대 지역의 소요를 막아내기 위한, 즉 로마의 평화를 위한 조치였습니다. 로마의 권위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떠한 불의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팍스 아메리카나"의 본질은 과연 이런 로마의 평화와 다른 걸까요? 그들도 역시 미국의 평화만 위협받지 않는다면, 더 나아가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부도덕한 전쟁과 외교정책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월남전이 그 단적이 예이며, 또한 우익 독재자들에 대한 지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2001년 10월2일) 미국은 세계무역쎈터 빌딩 폭파 혐의를 받고 있는 빈 라덴을 체포, 제거하기 위해서 그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방위적인 압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탈레반 정권과 내란을 벌이고 있는 북부동맹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급기야 미국이 직접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겠다고 합니다. 이들의 행태는 2천년 전 로마가 벌였던 것과 흡사합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유지할만한 도덕성을 갖지 못했을 때 소위 "람보" 식으로 정의를 강요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 지구상에 테러가 종식될 수 있으며 진정한 평화가 정착될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일반 대중을 향한 테러의 비열성과 무모성을 비호하면 안됩니다. 이 테러를 막아내기 위한 각종의 조치를 취해야만 합니다. 다만 일방적인 힘을 통해서 테러를 제어하려는 발상은 오히려 테러와 복수의 악순환만 야기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바입니다. 다행히 미국 내에서도 반전 운동이 전개되고 있고, 전 세계에서 그런 운동이 번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바울이 하나님의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말씀은 그저 상투적인 공자님 말씀이 아닙니다. 단순히 개개인이 심리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가지면 된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인간과 인간,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인간과 자연에 이르는 우주적인 샬롬을 일구어내는 생명의 힘입니다. 우리는 과연 그런 희망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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