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삶의 기술



4:10-20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느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첨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도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1) 돕는 교회, 받는 교회

바울이 이 빌립보서를 쓰게 된 동기 중의 하나가 바로 빌립보 교회의 재정적인 도움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감옥에 들어간 바울에게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으며(18절), 그 이전에도 여러 번 바울을 도왔습니다. 피혁 세공 기술이 있었던 바울은 원래 자비량 선교를 원칙으로 삼고 있었지만 빌립보 교회의 지원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언제 재판이 끝나서 풀려나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바울은 이 편지의 말미에 여러 번에 걸친 빌립보 교회의 재정적인 도움에 대해서 감사의 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 교회는 처음부터 교회끼리 상부상조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만이 아니라 안디옥 교회도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바울을 통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교회가 교회를 물질적으로 돕는 일은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에서 교회 상호간에 서로 돕는 일은 교회의 교회됨을 살리는 일입니다. 만약에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웃 교회의 어려움을 남의 일로 생각해서 모른 채 한다면, 더 나아가서 이웃 교회의 어려움을 이용하려 든다면 궁극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몸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교회의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모아집니다. 진정한 교회는 기본적으로 에큐메니칼을 지향해야합니다. 하나의 교회, 친교 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비록 기독교의 지난 역사가 분열의 상처로 얼룩져 있다면 이제 그 상처를 회복시켜나가야 할 때입니다. 만약 이런 분열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그것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보하는 기회로 사용한다면 교회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는 셈이 됩니다.

여운이 있는 글을 쓰고 있는 이현주 목사님의 어느 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은 기억이 생각납니다. 이현주 목사님이 어느 날 같은 지역의 후배 목사 한 사람이 끓여먹을 쌀이 없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기도 어렵기는 매 한가지지만 그래도 쌀 한말 팔아서 자전거 뒷좌석에 싣고 그 후배 목사의 집을 찾아 나섰습니다. 읍내를 가로질러 가는데 현재 신축 중인 대형 교회당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당은 같은 교단에 속한 교회였습니다. 이현주 목사는 그 순간에 매우 당혹스러웠습니다. 한쪽에서는 저녁 먹을 쌀도 제대로 없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 부근의 다른 건물을 압도하고도 남을만한 대형 교회당을 건축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불편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당은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지만, 같은 교단의 목사들 사이에, 선후배 지간에 후배들이 굶을 정도라는 사실도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내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 안에 이런 일은 별로 희귀한 게 아니라 일상적입니다. 우리가 재정적인 면에서도 진정한 교회 일치를 이룰 수 있는 때가 언제 올는지 몹시 기다려집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전국 교회 중에서 3분의 1정도가 미자립 상태라고 합니다.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이들 대다수의 교회는 다른 교회로부터 선교비 명목으로 도움을 받습니다. 따라서 대도시의 중대형 교회들은 일년 경상비의 상당한 부분을 이런 미자립 교회를 지원하는 데 사용합니다. 이런 전통은 매우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미자립 교회를 도와주는 일에서도 불미스러운 모습이 보입니다. 별로 큰 액수도 아니면서 도움을 받는 교회의 목회자를 정기적으로 호출하기도 하고 선교 보고서를 내라고도 하며, 심지어는 수년 간 도와주었는데도 자립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라는 충고와 함께 선교 지원금을 끊겠다고 위협을 가합니다. 여러 교회로부터 조금씩의 선교비를 지원 받아 호구지책을 삼고 있는 목회자들의 심정이 어떠할는지 상상이 갑니다. 도움을 받는 교회가 떳떳하게 받을 수 있는 길은 신학적인 면에서 진정한 에큐메니칼 정신을 회복해야 하며, 방법론적인 면에서 개교회가 개교회를 돕는 게 아니라 창구를 일원화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 이런 노력들이 조금씩 싹이 트고 있습니다만 미자립 교회 지원을 자신들의 선교적 업적으로 생각하는 한 이 제도가 정착할 수 있을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표현하고 있는 이 감사의 말은 약간 이상하게 들립니다. 도와 준 것에 대해서 정말 감사하다는 직접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이제 나를 생각해서 도와줄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당신들이 그런 생각을 진작에 했지만 그 동안 기회가 없었습니다.(10절). 대충 이런 뜻입니다. 이런 표현이 그 당시에 일반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11절 전반절에서도 이르기를, 내가 무언가 부족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약간 뻔뻔스러운 것처럼 들립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아첨에 가까운 말을 하거나, 자기의 어려운 형편을 하소연하기 마련인데 바울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울의 태도는 아주 떳떳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몰두해 있는 사람답게 물질이 오가는 일에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 세상이라는 게 이런 주고받는 관계에서 흑막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한쪽 편에서는 비굴해지고 다른 편에서는 오만불손해지기 마련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꾸지도 말고 꾸어주지도 말고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끊고 사는 게 마음이 편할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 전까지는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돕는 일과 도움을 받는 일은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다만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오늘 본문의 바울처럼 떳떳할 수 있는 풍토와 제도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북한을 돕는 우리 남한 사회와 남한 교회의 자세를 잠시 생각해봅시다. 과연 우리가 북한 사람들이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는지, 아니면 졸부가 푼돈으로 자신의 동정심을 남에게 과시하고 싶어하듯이 북한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말입니다. 우리 개신교회에서도 북한 교회와 주민들을 위해서 여러 모양의 재정적 도움을 주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산당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마귀 자식들이라고 매도하던 남한 교회가 어느 사이에 북한에 대해서 동정심을 느끼고 도움의 손길을 뻗쳤다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그래도 다행입니다. 그러나 이런 도움이 자신의 도덕적 만족감에서 시작되었다면, 혹은 우리 체제의 우월감을 내보이려는 속셈이라면 얼마 가지 않아서 이런 노력들이 싸늘하게 식어버릴 것입니다. 마음 속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는 행위라 하더라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전13). 남한과 북한이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고 동정심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서로 돕고 도움을 받읍시다.



도움을 받고 있던 처지에서 바울이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그만큼 빌립보 교회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무리 순수한 마음이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그것을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게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속내를 털어놓고 말할 수 있었던 상대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노파심으로 한 마디 덧붙일 말이 있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누구나 모두 바울 같은 태도를 취하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당한 어려운 일을 도와준 이웃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말이 아니라, 그게 모두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일어났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울만이 갖고 있는 순전한 마음을 자기에 대한 변명으로 오용하는 것입니다. 이러 태도를 보이다가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예수쟁이는 주는 것 없이 얄밉다는 말을 듣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읽을 때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특수한 관계를 전제해야만 합니다. 더구나 우리와 바울의 신앙적 깊이와 경험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합니다.



2) 궁핍의 문제

바울은 자신이 궁핍하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의 재정적인 도움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11절). 궁핍하다는 사실에 묶여 있는 사람은 도움을 주고 받는 문제에서 이렇게 당당하거나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실 인간의 많은 문제는 대개가 자신의 궁핍에서 시작됩니다. 먹을 게 부족하거나 입을 게 부족한 경우에 당연히 삶이 피곤해집니다.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런 절대적인 궁핍은 그 근본 원인이 해결되어야 인간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절대적인 궁핍이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폭력적인 방법을 찾게 됩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 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은 이런 절대 궁핍으로 인해서 빵을 훔치다가 감옥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런 절대 궁핍이 아니라 상대적인 궁핍 안에서도 여전히 궁핍하다는 기분에 빠져듭니다. 좀더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물질적으로 풍부한 가운데서 느끼는 정신적인 궁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잠시 경험한 바에 의하면 독일의 개인 주택들은 대개가 지하실이 있는데, 그곳에는 많은 먹거리들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대형 냉동고 안에는 각종 식품들이 냉동 상태로 보관되어 있으며, 포도주와 맥주, 주스, 각종 식료품들이 넉넉하게 쌓여 있습니다. 아마 전쟁을 많이 겪은 탓인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비상 식량인 것 같습니다. 독일의 가정처럼 오래 버틸 수 있는 먹거리가 지하 창고에 쌓여 있다고 해서 정말 마음이 넉넉할까요? 독일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들도 그렇게 궁핍하게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상류층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30평 아파트에서 네 식구가 그럭저럭 살아가는 보통 가정도 역시 옛날과 비교할 때 왕보다 훨씬 넉넉하게 삽니다. 사시사철 따뜻한 물이 나오고 냉난방이 잘 되어 있습니다. 약간만 성실하게 노력하면 문화생활도 가능합니다. 이처럼 실제로는 전혀 궁핍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궁핍하다는 마음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돈버는 일에만 정신을 빼앗기며 사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무언가 불안하니까 돈버는 일에만 치우치는 게 아닐까요?  

인간의 궁핍감은 인간을 초조하고 비굴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반대로 부자들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이 돈 앞에서 비굴하게 사니까 돈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지, 만약 돈이 많지 않아도 별로 궁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돈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교만하게 굴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원은 부한 사람들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마음이 부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바로 하나님 안에서 부요함을 경험한 사람들 말입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까요? 인간이 궁핍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만큼 필요하지 않은 것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스개 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자기에게는 운전 기사만 있지 정원사가 없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평생토록 궁핍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자신의 삶을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에 이런 궁핍감으로부터의 해방은 아예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작은 집에 사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바로 그런 요소들입니다. 또한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별로 필요하지 않을 것들을 필요한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온갖 광고와 선전 때문에 더욱 심한 궁핍감 속으로 빠져듭니다. 이런 시대 정신이 지배하는 한 우리 인간은 그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근본적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길은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바울의 생각이 어디서 출발하고 있는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의 근원으로부터만 우리는 삶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으며, 모든 궁핍감으로부터 실제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오랜 전에 읽은 책인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지금도 스테디 베스트 셀러라고 하는데, 이것은 곧 그만큼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이런 무소유의 삶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인가요? 우리는 그렇게 문학적으로는 완성도가 높지 않은 이 수필집에서 많은 감동을 받는 이유는 법정 스님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책에 실린 한토막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로 암자에서 혼자 살아가는 법정이 어느 날 매우 귀한 난초(?) 화분을 선물로 받았다고 합니다. 그 난초의 자태에서 풍겨 나오는 멋에 취해서 법정도 애지중지 이 난초 키우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디를 출타했다가도 때 맞춰 들어와야 하는 일이 많았고, 어쩔 수 없이 며칠 늦어질 경우에는 마음이 초조해졌다고 합니다. 결국 법정은 자신의 이 한가지 취미를 포기하고 이 난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이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서 그는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면 결국은 그만큼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는 역으로 무소유만이 참된 자유라는 말이 아닐까요? 이 억척스러운 세상살이에서 우리가 법정처럼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궁핍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파괴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그만큼 자유의 영역이 넓어진다는 깨달음을 넓혀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게 삶의 기술이 아닐까요? 이 기술이 기독교적인 면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3) 자기초월

바울은 자신이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심정을 시적인 운률에 따라서 이렇게 표현합니다(12,13절).

     나는 가난할 수도 있네.

     나는 부할 수도 있네.

     나에게는 모든 것이 견딜 만 하다네.

     배가 부르거나 고프거나,

     소유가 많거나 부족하거나

     나를 강하게 하시는 분 안에서

     내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네.



그렇습니다. 바울은 궁핍하다는 사실에 매어서 살지 않았습니다. 늘 부족한 게 많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의 도움에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가난한 데 처할 수도 있고, 부한 데 처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삶의 모양이든지 그는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강하게 하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곧 삶에 대한 다른 각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절대적인 힘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 힘에 의존해서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자기를 초월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배부름과 배고픔, 넉넉함과 부족함이 자기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바울의 이 말을 인간의 구체적인 삶이 의미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인간의 육신은 죽어서 썩어버릴 것이니까 육신을 돌보는 일은 아무 쓸 데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배부름과 배고픔은 우리가 하나님이 지으신 육신에 속하는 한 우리 인간의 삶에서 소홀히 다루어도 좋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가 먹고 배설하고 생육하는 일은 창조 사건과 연관되는 아주 소중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육신의 배부름과 배고픔만을 삶의 목표로 삼음으로써 벌어지게 될 영의 황폐화를 생각해야 합니다. 배부름과 배고픔의 문제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주기도에 있듯이 생존적인 차원에서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데는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충분하기 때문에, 또한 이런 생존은 하나님이 이미 책임지신다는 믿음 가운데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초월해야만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리스도 신앙은 아무런 의미도, 능력도 없습니다.

어떻게 자기를 초월할 수 있습니까? 자기를 초월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것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이미 그 답은 주어졌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자기를 초월하는 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을 하나님의 나라에 둠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이 초월은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놓여 있는, 혹은 우리의 노력에 들어 있는 무상함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생각한다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격적인 노력으로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삶의 방향을 돌리라는 뜻의 "메타노이아"(회개)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인 것처럼 땅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하늘에 대한 관심으로 삶의 방향을 선회하는 것만이 자기 초월의 길입니다.



초월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재정 지원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이러한 돕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을 돌리라."(20절)고 결론을 맺습니다. 배부름과 배고픔까지도 뛰어넘었던 바울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무위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동양 사상처럼 자기 존재를 극히 가볍게 여기는 정도에서 머무는 삶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의 무위는 나름대로 인간의 삶을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주는 것이 사실이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자유에 이르는 일종의 원리일 뿐이지 그런 원리를 가능하게 하는, 그리고 그 원리를 깨어버리는 방식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에게 이르는 바른 길이 아닙니다. 무위자연 안에서 나름대로 이 세상의 인간 질서로부터 해방되는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겠습니다만 생명의 희열에 참여하기는 어렵습니다. 모든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게 될 종말의 세계, 부활의 세계에 참여하는 희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서만 가능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는 이 땅의 모든 한계와 모순이 극복된 부활의 세계를 향해서 초월해나가는 종말론적 공동체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가는 오늘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거대한 환상 가운데서 재정적으로 서로 돕는 일에 모범을 보여준 바울과 빌립보 교회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무엇을 배웠습니까? 일상적인 일에서 거룩한 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비록 일상이 물적 토대와 밀착되어 있지만 여기서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내다보았습니다. 배고픔과 배부름의 일상에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일상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비밀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세미한 음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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