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성도의 길



4:21,2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이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민족도 드물 것입니다. 별로 뼈대가 없는 집안이야 그저 "간난아", 혹은 "개똥쇠야" 같은 속칭으로 부르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체통을 세우는 집안에서는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짓는데 무척이나 공을 많이 쏟았습니다. 요즘 같은 때도 작명소가 성업중인 걸 보면 우리 민족의 심정을 알만 합니다. 그런 건 다 미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근본의미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이 됩니다. 좋은 이름을 가져야만 출세하거나 오래 산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이름이 그의 삶을 그런 방향으로 끌어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늘 평화를 생각하는 사람과 늘 자기의 개인적인 욕심만 생각하는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는지요. 그러니까 좋은 이름 자체가 주술적으로 그 사람을 출세시킨다는 게 아니라 좋은 이름의 의미가 그 사람의 삶을 규정해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좋은 이름은 마땅히 필요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 이름이 따라다닙니다. 신약성서에 나와있는 호칭만 하더라도 그 수가 많습니다. 크리스챤, 형제,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 부르심을 받은 자, 성도. 그 중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된 용어는 형제와 성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쓰기 시작할 때 1:1에서 성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이제 이 편지를 끝내면서 다시 성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보서는 성도에게 축복을 기원하고, 성도에게 문안하는 것으로 시작과 끝을 맺고 있으니까 성도라는 단어의 의미를 확실히 깨닫기만 한다면 빌립보서 전체를 아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편지의 앞 뒤 인사는 의례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편지를 쓸 때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인사와 축복을 기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감옥의 바울이 그런 의례적인 차원에서 이런 인사를 했다기보다는 성도라는 단어에 담긴 깊은 의미를 충분히 전제하고 사용했다고 봅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생각을 표현할 그런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설령 그가 무심결에 성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손 치더라도, 오늘 이 편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읽는 우리로서는 이 단어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여지없이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에 다시 한번 가슴에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본질을 가리키던 말씀이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규정해나가는 능력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되새기는 작업이 소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바로 이름과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입니다.



1. 감옥 공동체와 빌립보 공동체

바울은 21,22절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특히 카이자르의 집안 사람들이 문안합니다.

이런 문장을 보고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감옥 안에 갇혀 있는 바울과 함께 있는 형제들이 있다는 것과 그런 형제들 중에는 카이자르 집안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 중에는 바울을 늘 따라 다니면서 크고 작은 일을 도와주던 디모데가 있었고, 빌립보 교회에서 바울의 어려운 형편을 헤아려 보내준 에바브로디도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문안 인사를 청하는 걸 보면 그들과 개인적인 인간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 주변에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영어의 몸인 바울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중에서 카이자르 집안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일단 이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당시의 황제를 일컫는 카이자르 집안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황실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로마 정부에서 식민지를 경영하기 위해서 파견한 관리라고 여겨집니다. 어쨌든지 비록 감옥이라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국가 체제에 갇혀 있었지만 그는 그런 기회를 통해서도 예수의 복음을 전했으며, 어떤 결실을 맺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여러 번에 걸쳐서 문안한다고 썼습니다. 오늘 우리에게야 의례적인 말투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편지를 쓰고 받던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절실한 표현입니다. 아직 로마의 무자비한 박해가 시작되기 전이긴 했지만 그런 전조들이 여기 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유대인의 모함은 여전히 기독교인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똑같은 말이나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자세나 형편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있듯이 빌립보서 말씀에서도 역시 문안한다는 일상적인 말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다른 그 어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깊이가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진정한 의미에서 이런 문안을 나누고 살아갈까요? 별로 이렇다할 진정성 없이 그저 형식인 인사만 나눌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런 것 같습니다. 첫째, 우리 기독교인은 언어의 의미보다는 그 형식에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고유하게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이 그 의미는 죽어버린 채 그 모양만 기독교 안에서 인플레이션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전화를 받을 때마다 "할렐루야!"라고 외칩니다. 보기에 따라서 좋은 습관일 수는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그 단어에 어울릴 정도의 삶의 내용이 없는데도 그렇습니다. 둘째, 우리 기독교인은 기독교인다운 삶의 특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자기가 실제로 살아가는 삶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지도, 갈구하지도 않으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을 진정한 의미에서 말할 수 있을까요? 은혜라는 말은 많이 하지만 실제로 은혜롭게 살아가지 못한다는 이 모순을, 이율배반을 우리는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성서의 가르침은 그 껍데기만 남게 되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적 모습을 과장하게 됩니다. 악순환이죠. 이것을 벗어나는 길은 성서말씀의 깊이로 우리가 우선 빠져들어 가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한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도"라는 단어입니다. 성도에게 문안한다는 바울의 말씀은 과연 어떤 생각을 담고 있는 걸까요?



2. 성도

성도는 헬라어 "하기오스", 히브리어 "카도쉬"의 번역입니다. 구약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에게 특별히 헌신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였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가리켰습니다. 그리스도는 인자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서도 으뜸가는 분이었습니다(막1:24, 눅4:34). 성도들의 거룩함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관계된 것으로, 그들은 하나님께 봉헌된 사람으로서의 소명을 가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며(롬1:7),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구성됩니다(고전1:2).



그런데 "하기오스"라는 단어는 거룩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따로 구별된"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양자가 모두 비슷한 뜻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그렇지 못한 것에서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의 가장 핵심적인 종교 개념은 바로 이런 거룩과 구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민족들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었습니다. 이들은 먹거리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삶을 이런 성속의 구도로 구별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유별한 구별이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만 그것의 근본 의미는 매우 보다 적극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바로 거룩한 힘을 체험한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때 들려온 음성이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것이니 네 발의 신을 벗으라는 소리였습니다. 거의 모든 구약성서의 하나님 경험은 이처럼 거룩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지 않은 것과 구별된 거룩한 힘입니다. 이런 거룩한 것의 체험이 바로 인간을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줍니다. 고대인들은 이 거룩한 힘을 공간적으로 생각했습니다만 그것은 그들의 역사적 한계이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고, 거룩의 근본적인 의미는 생명에 담겨있습니다.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힘이 바로 거룩한 힘이며, 곧 성령입니다. 이런 힘은 당연히 세상을 파괴하는 악한 힘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인 하기오스는 바로 거룩한 자들이며, 구별된 자들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성도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거룩한 자들이며, 구별된 자들입니까? 만약 우리가 매 주일 교회에 나오고 찬송을 부르고 헌금을 드리고, 이러한 일정한 종교의식 때문에 거룩한 백성이라든지, 구별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를 너무 축소시키는 일입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필요하기도 하고, 기독교 역사에서도 계속되어 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는 쿰란 공동체나 바리새인들이 그런 하기오스를 지향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도 사막의 성자들이나, 유무명의 많은 고행주의자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오늘도 역시 산 속의 기도원에 파묻혀서 이 세상과는 전혀 상관없이 유별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기독교인의 본질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특정한 태도나 행동들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본질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 성도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기독교인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다는 뜻을 좀더 생각해봅시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유대 종교와 로마 정치의 질서로부터 거리를 두고 살아감으로써 받아야 했던 시련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당시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공무원이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실제로 신체적인 폭력을 당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들이 카타쿰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려야만 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했을까요? 로마의 권력이 기독교를 범죄 집단처럼 다룬 이유는 자신들이 절대화하고 있던 그 로마의 권력을 기독교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법에 의해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던 예수를 퀴리오스(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땅의 절대 권력을 상대화하는 집단이 그들의 마음에 들 까닭이 없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정책이라는 게 웬만하면 식민지 백성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만은 반역자들을 대하듯 했다는 것은 대제국 로마답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아마 로마 황제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근원적인 불쾌감을 가졌든지 아니면 어떤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게 로마 정부로부터 미움을 받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 반전입니다.

어쨌든지 성도라는 단어의 근원적인 의미와 그것이 구체화되었던 초대교회의 신앙과 삶을 받아들인다면 기독교는 이 시대에 걸림돌로 작용해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 사회가 우리 기독교인들을 귀찮게 여긴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신앙이 살아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만, 반대로 이 세상이 기독교인들을 "소 닭  보듯이" 대한다면 우리가 성도로서의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게 아닐는지요.



3. 성자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 나라를 가장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들은 바로 순교자들입니다. 사도행전 7:54-60에 나오는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보십시오. 그는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앉은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모든 것을 걸어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성자라고 부릅니다.

사도신경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곧 우리 믿는 성도들의 영적인 사귐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이미 순교해서 하늘에 올라간 성자들과의 사귐을 뜻합니다. 초대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 하늘의 성자들과 땅의 성도들이 하나가 된다고, 영적으로 친교를 나눈다고 믿었습니다.

성도는 곧 성자입니다. 성자가 되어야만 예수를 믿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하고 엄청난 사건입니다.



과연 성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실제로는 이 땅에서 여전히 인간적인 한계를 갖고 살면서 성자 운운한다는 것은 일종의 착각이나 망상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성자를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다닌다거나 타임머신으로 신출귀몰하는 존재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런 성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자는 그가 한 일 때문에 성자가 됩니다. 성자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늘을 보고 땅의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성자입니다. 그냥 땅의 규칙에 사로잡혀 있으면 순교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원리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만이 땅에서 살지만 이 땅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땅의 일을 초월할 때만 땅의 일에 사심 없이 최선을 다할 수 있으며, 그렇게 산 사람들이, 그렇게 살다가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이, 그래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이 성자입니다.

언젠가 류시화 씨가 번역한 바바 하리다스의 "성자가 된 청소부"라는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바바 하리다스는 인도 출신으로서 묵어 수행으로 유명하며 자기의 가르침이나 여러 종류의 글을 순전히 흑판에 기록한 글로 쓸 뿐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은 인도에서 가장 천한 계층에 속하는 인물로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거리 청소를 업으로 살아가는 젊은이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마약을 복용하게 되었으며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서 결국 어느 마을에 들어가서 다시 청소 일을 하며 마지막 인생을 마감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직업적인 청소부로 인생을 시작했다가 마지막으로는 아무 조건 없이 단지 청소만 하는 사람으로 인생을 마친 이 사람이 결국 그 마을에서 성자로 추앙됩니다.

우리는 지금 성자가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불행합니다. 모두가 자기의 업적을 드러내는 일에 분주할 뿐이지 사소한 일에 자기의 전 존재를 걸어둘 수 있을 만큼 거룩한 영에 사로잡혀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청소년들의 마음도 공부와 인가 가수나 텔런트들에게 빠져 있기 때문에 거룩한 힘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마 상당한 기간 동안 성자는 등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약성서와 기독교 전통은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바로 성자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성자의 흔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비열하고 세속적인 정신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서 거룩한 것에 휩싸이는 경험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초월하게 만드는 거룩한 힘만이 우리를 이 세상 한 가운데서 거룩한 삶을 유지하도록 만듭니다. 성자는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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