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역사 초월와 내재 사이에서
                    
소극적으로 성서읽기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마다 겪게되는 문제 중의 하나는 오늘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진술을 자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홍해가 갈라졌다거나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다는 이야기를 아무런 지성적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성서의 이런 보도를 단순히 고대의 신화적 요소로 간주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그것의 실존적 의미만을 확보하는 것도 역시 성서읽기에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성서의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과 그것을 수집하거나 편집한 사람들, 더 나아가서 그런 문서를 정경화한 교회 공동체의 실질적 경험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성서읽기는 겉돌고 말 것이다. 그 경험의 실질(reality)이라는 것이 반드시 역사의 객관적 사실이라는 뜻은 아니다. 예컨대 유대인들의 광야생활에서 경험한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이 어떤 초자연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절풍에 의해서 일어난 자연현상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만으로 성서읽기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엄밀한 역사 지평작업을 통해서 그런 현상들을 밝힌다고 해서 그들에게 경험되었던 하나님이 드러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종말에 가서야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궁극적 진리인 하나님을 성서만으로 완전하게 해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말은 곧 우리의 성서읽기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소극적인 성서읽기가 인식론적 허무주의, 또는 불가지론에 빠진다는 말은 결코 아니며, 더구나 세상의 학문에 비해 신학이 불완전하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완전하고 절대적인 세계가 자유롭게 스스로 드러나도록 그 가능성을 열어놓는 태도라는 점에서 훨씬 역동적인 인식론적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오늘 한국 교회의 강단은 지나친 자신감으로 넘쳐난다. 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파악하고 있다는 듯이, 성서의 지평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오늘 본문을 읽은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도 역시 그럴 것이다. 선교의 지상명령을 선포하고,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을 사실적으로 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그런 가르침을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다면 결국 성서의 세계는 닫혀지고 말 것이다. 이런 방식은 흡사 수학문제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 수학의 개념을 이해하기보다는 단지 모범답안을 또박또박 외우는 것으로 끝내는 것과 비슷하다.

임박한 종말론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종말에 대한 것이며(6-8절), 다른 하나는 승천과 재림에 대한 것이다(9-11). 이 두 단락의 주제가 보기에 따라서 약간 차이가 나지만 실제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화두가 다루어진다는 점에서 긴밀히 연결된다. 여기서 말하는 화두는 이 세계의 완성이다.  
누가는 여기서 이 세계의 완성을 유대교의 지평에서 ‘이스라엘의 왕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왕국과 세계의 완성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해명 작업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일종의 민족주의적 희망사항에 불과한 이스라엘 왕국을 세계의 완성으로 볼 수 없다는 논란이 가능하다. 이스라엘은 많은 민족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본다면 그 말이 옳다. 그러나 비록 이스라엘 왕국 개념에 민족주의적 배타성이 내재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편적 지평으로 심화,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이스라엘 왕국을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 관점에 필요하다. 우선 이스라엘 왕국 개념이 그들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발현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보편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오늘날 여전히 배타적인 민족주의에 숨어 있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어쨌든지 역사적 시발점으로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배태된 세계의 완성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체 인류와 우주까지 포함한 지평의 사건으로 기대된 것이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가 재림함으로써 세계가 완성될 것으로 기대했다.  소위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적 역동성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재림이 지체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사도행전을 서술하고 있는 누가의 시대가 2세기 초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재림의 지연에 대한 해명이 매우 시급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 시대는 재림 지연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미 대안적 신앙을 형성했을지도 모른다.
누가는 부활의 예수가 이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보도한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7,8절). 이제 임박한 종말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문제에 대해서 인간이 왈가왈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선교의 사명으로 임박한 종말론을 대치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가 재림의 지연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해석이었는지 아니면 종말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의 변화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은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는 종말에 가서야 모든 결정적인 대답이 주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종말론적 대답이라는 것이 이런 역사적 과정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승천
누가의 설명에 의하면 부활한 예수는 선교적 지상명령을 내린 즉시 승천하셨다. 그런데 그 승천에 대한 묘사는 지나치리만큼 단순했다. 이 이전의 베드로 복음서에는 이 승천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이 장황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반해서 누가는 민간전승의 모든 흔적을 제거하고 있다.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보도도 역시 인간의 심리적 욕망이나 문학적 수사를 생략하고 있다. 엘리야의 승천이나 다시 살아난 나인성 과부의 아들 사건에는 그런 주변적 요소가 상당히 개입되어 있는 반면에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는 그런 요소가 제거되었다는 말은 두 사건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뜻이다. 즉 성서의 많은 초자연적 사건들은 그렇게 보이기 위한 장식이 필요했던 반면에 예수의 부활과 승천 사건은 인간의 인식론적 범주를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방식으로 발생한 하나님의 궁극적 자기계시였기 때문에 성서 기자들이 더 이상의 덧칠할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럴 수도 없었다.
오늘 본문이 전하려는 핵심은 아니지만 우리가 성서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승천’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번 질문할 필요는 있다. 고대는 하늘을 하나님이 거하는 장소로 생각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하늘을 곧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는 하나님이 자리를 잡을만한 곳으로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 하늘은 곧 앞으로 이 세상에 이루어지게 될 완전한 생명이 숨어있는 곳이었다.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은 은폐된 생명의 세계로 변화되었다는 뜻이다. 미래에 드러나게 될 숨겨진 궁극적 생명이 부활이라고 한다면 부활과 승천은 같은 사건이다. 사도행전이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이라는 시간이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논리적 인식 체계를 뛰어넘은 예수의 부활을 그 당시의 신화적 표상으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큰 의미는 없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승천을 낱말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예수님이 실제로 구름을 타고 승천했다는 것이다. 9절은 예수가 구름을 타고 승천했다는 뜻이 아니라 승천한 예수가 구름으로 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구름은 하늘을 가리키는 보조물이지 어떤 실제적인 사물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 승천을 흡사 손오공의 도술과 비슷한 사건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성서의 근본을 인간의 표면적 경험으로 바꿔치기 하는 일이다. 성서 기자들의 세계 인식에 비해서 훨씬 가벼운 인식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에게 성서의 세계는 우리에게서 소외된다.

재림
예수가 구름에 싸여 보이지 않게 되자 사도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빈 무덤에서처럼(눅 24:4) 흰옷을 입은 사람 둘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한다. 천사를 연상하게 만드는 이런 사람들은 외경에 자주 등장하는데, 누가는 이런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그 당시 교회를 항해서 전하고 싶은 말을 했다. 천사들이 이렇게 말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11절).
“왜 하늘만 쳐다보는가?”라는 누가의 지적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임박한 종말론으로부터 역사적 교회와 그 사명으로 관심을 돌리는 계기라 할 수 있다. 졸지에 사라진 예수가 묵시문학적 방식으로 자신들에게 다시 나타날 것을 기다리는 일종의 종교적 열광주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역사에 대한 책임감을 질문해야 할 순간이 된 것이다. 하늘을 쳐다본다고 해서 예수의 재림이 빨라지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그 하늘의 문제는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 세계이니까 이제 하늘을 향한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역사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의 기독교는 적지 않은 부분에서 이렇게 하늘만 쳐다보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담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공허한 하늘만 쳐다보는 신앙 말이다. 물론 겉으로는 사회 봉사도 하고, 때로는 정치적 발언도 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런 태도 안에 숨어서 실제로는 매우 무책임하게 하늘만 쳐다본다. 예수 믿고 하늘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식의 구호로 철저하게 무장된 신앙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재림에 대한 기대가 없어도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사의 입을 통해서 누가가 진술하고 있듯이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가시적인 형태의 구름을 타고 다시 온다는 뜻이 아니라 은폐된 생명의 세계로 변화하는 그런 방식으로 다시 드러난 생명의 세계로 오신다는 뜻이다. 재림은 숨은 것과 드러난 것의 구분이 없어지는 때이니까 역사적인 세계와 그 초월적인 세계가 통합적으로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 신앙의 특징이 있다. 역사 초월적인 세계가 우리에게 온전히 드러나는 때를 기다리면서도 이 역사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것 말이다. 물론 단지 개념적으로 이렇게 표현하기는 쉽지만 초월과 내재, 하늘과 땅의 관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기는 힘들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기는 더더욱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신앙은 늘 영적인 긴장이 따르기 마련이다. 철저하게 역사와 투쟁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어 다가오는 예수의 재림을 의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긴장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렵기도 하고,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는 더더욱 고단하기 때문에 양극단으로 치우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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