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가룟 유다의 운명
                  
그 무렵
누가는 지금 예수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사이의 그 짧은 틈으로 초기 공동체가 풀어야 할 하나의 고통스러운 기억인 가룟 유다 문제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 무렵’에 베드로가 ‘일어나’ 여러 교우들에게 말했다는 표현은 전형적으로 ‘70인 역’을 따른 것이다. 이 70인 역은 기원전 3세기 중반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판인데, 70명의 장로들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고 해서 70이라는 뜻의 ‘셉투아진트’로 불린다. 누가가 가룟 유다 이야기를 이렇게 70인 역의 표현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다는 말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독자들이 곧 70인 역에 익숙한 이들이라는 뜻이다.
과연 ‘그 무렵’은 언제일까? 사도행전의 보도 순서를 그대로 따른다면 승천과 오순절 사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그게 그렇게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승천과 오순절 사이에 놓여 있는 열흘 간의 기간이 가룟 유다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우선 그 시기는 그들이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할 만큼의 여유 있는 때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를 대신해줄 사람을 찾는 것이 그렇게 화급한 현안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의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해볼 수 있지만 좀더 구체적인 것은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역사적 사실과 그것의 해석이라 할 성서의 관계를 잠시 다루기로 하자.
지금 누가는 예수 부활, 승천, 오순절 시대의 기독교를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직간접적인 전승만 확보하고 있을 뿐이다. 즉 누가는 이런 초기 사건의 연대기적인 객관성을 원래대로 복원하기보다는 그것을 자신의 신학적 토대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소설을 썼다는 말은 아니다. 소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문기사도 아니다. 기독교 전승에 대한 누가의 신학적 해석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완벽하게 재구성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또 하나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사도행전의 독자가 사도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아니라 훨씬 후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가룟 유다의 자리를 보충하는 일이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이들에게는 거의 7, 80년 전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정확성은 별로 큰 의미가 없었다. 누가의 관심은 자기가 살고 있던 그 시대의 신자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지 일반 뉴스를 전하는 게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역시 ‘그 무렵’은 종교적 사건을 서술하는 일종의 관용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지 누가가 사도행전의 초입에 가룟 유다 사건을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한 것 같다. 기독교의 정통성을 훼손시킬 수 있는 유다 문제를 해결해야만, 우리가 지금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는 부분이지만, 누가가 활동하던 그 당시 기독교의 제도가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일어나서 말할 때 모였던 신도가 120명이었다는 보도도 역시 그런 정황과의 연장선 속에 있다.

예언의 성취
베드로는 120명 가량의 신도들 앞에서 함께 의논해야만 할 주제를 설명한다. 참고적으로 “교우 여러분!”(안드레스 아델포이)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그곳에 비록 여자들이 있기는 했겠지만 이런 교회 정치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델포이’는 ‘형제’라는 뜻의 ‘아델포이’의 호격이다.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에게 핀잔들을 말인지 모르지만 기독교 신앙은 근원적인 것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가부장적 질서라 할 수 있는 여성 참정권의 제한을 받아들였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로마의 정권과 다투지 말라고 한 것도 역시 세속 정권과 영합하라는 것이라기보다는 지엽적인 문제로 사회와 갈등을 일으킴으로써 기독교의 근원을 훼손시키지 말라는 뜻이었다.
여하튼 누가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가룟 유다의 문제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교우 여러분, 예수를 잡은 자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빌어 예언하신 말씀은 정녕 이루어져야만 했습니다.” 누가의 신학적 문제의식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에서도 사실 가룟 유다의 문제는 참으로 곤혹스럽다. 일단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실 뿐만 아니라 그런 마음도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수의 제자가 예수를 배신했다는 사실은 ‘그러려니!’하고 끝낼 문제는 아니다. 교육학자들의 눈에는 그런 배신자를 키운 선생에게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는 지금 이런 문제들을 구약성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는 초기 기독교의 해석학적 원칙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가 자신들의 역사를 예언의 성취로 보는 해석학적 원칙의 정당성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유다 사건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될만한 시편 41편10절에 배신이 거론되지 않듯이, 신약성서에는 그런 부분이 적지 않다. 신약성서 기자들이 구약성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때로는 확대 해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구약성서의 인용과 해석의 정확성 여부는 여전히 검토되어야 하겠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해석하려고 했다는 사실만은 높이 평가해야만 한다. 이 말은 곧 오늘의 교회도 자신들에게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끊임없이 역사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진리론적 토대를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더구나 성서기자들과 교부들이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자신들 주변의 철학(진리론적 인식론)을 이런 해석의 재료로 사용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틀에서 기독교를 변증했다. 결국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들의 진리 경험을 폐쇄적으로, 독단적으로 선언하는 게 아니라 보편적 인식론에 담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고 보아야 한다.

유다 전승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행정적 의결 사안의 주인공인 유다는 누구인가? 가룟 유다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별로 없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등, 몇몇 제자들과 예수가 만나는 이야기는 있지만, 유다는 여기서도 제외된다. 그가 어떤 동기로 예수의 제자가 되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예수 공동체의 재정 책임을 맡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그에 대한 예수의 신임은 각별하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이런 책임을 맡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다른 제자들은 어부나 세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반해서 유다는 비교적 지식인층에 속했다고 한다. 다른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부근의 북방계 사람이었는데 반해서 유다는 남방계 사람이었다. 이 말은 곧 다른 제자들은 주로 예수에 의해서 선택되었지만 유다만큼은 자진해서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공동의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유다는, 베드로와는 다른 점에서 돋보였기 때문에 예수와 관계가 특별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는 주님을 판 돈으로 밭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는 땅에 거꾸러져서 배가 갈라져 내장이 온통 터져 나왔습니다.”(18절). 마태복음 26장15절에 유다는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를 배신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구절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썼다. 유다는 실제로 돈을 밝힌 사람이었다느니, 아니면 자신이 예수를 통해서 기대했던 이스라엘의 해방이 멀어지자 배심감에 휩싸여 스승을 팔았다느니, 또는 그런 방식으로 예수를 압박함으로써 예수가 메시아로서 행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등의 여러 추론이 가능하다. 우리는 지금 유다의 배신에 연관된 실체적 진실을 알아낼 도리가 없지만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것만은, 특히 제사장들에게서 돈을 받은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어떤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어떤 것은 초기 기독교의 여러 다른 전승에 속한다고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힘들다. 다만 가룟 유다가 기독교를 배신함으로써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물론 그 배신이라는 것이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을 직접 제사장들에게 넘긴 일이었는지 아니면 나중에 어떤 일로 인해서 기독교를 포기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 복음서의 내용이 훨씬 사실에 가깝다고 보는 게 좋은 것 같다.
그런데 유다의 죽음에 대한 전승은 매우 다양하다. 오늘 본문에서는 유다가 예수를 판 돈으로 밭을 샀다가 땅에 거꾸러져서 배가 갈라져 내장이 터져나와 죽었다고 보도한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유다는 목매달아 죽었다(27:6). 파피아스의 글에 의하면 유다는 몸이 부어 올라 마차가 지나다닐 수 있는 길도 지나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부활의 증인
초기 기독교의 가장 큰 상처인 가룟 유다 사건은 다른 사도를 뽑아 보충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요셉과 마티아 중에서 제비를 뽑았더니 마티아가 선택되었다. 오늘의 교회에서도 선거를 제비뽑기로 할 수 있을까? 만약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카리스마와의 관계에서 생각할 수만 있다면 이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방식이 나쁜 쪽으로 이용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도의 자격과 직무가 명시적으로 규정되었다. 자격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께서 우리 곁을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줄곧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이다(21절). 어느 공동체이건 중요한 위치를 감당해야 할 사람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부분은 함께 나눈 경험이다. 예수에게 일어난 일들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어야만 사도가 될 수 있듯이 오늘 교회의 일꾼들도 그런 신앙의 원초적 경험이 필수적이다.
사도의 직무는 “우리와 더불어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이다(22절). 역사 안에 교회가 등장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결정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에 있다. 앞서 3과의 제목인 ‘승천 공동체’는 곧 부활 공동체를 가리키듯이 교회의 모든 일들은 바로 이 부활에 집중되어야 한다. 물론 예수의 십자가, 재림, 사랑, 봉사, 믿음 등등, 교회가 변증해야 할 많은 주제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은 바로 부활에 의해서만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다.
사도의 직무인 ‘부활의 증언’은 최소한 두 가지 차원에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인 담론으로 자리를 잡아나가야 한다. 하나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 자체이다. 인류 역사 안에서 유일회적으로 발생한 사건으로서의 예수 부활이 단지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의 진리론적 타당성이 논의되어야 한다. 둘째는 그 예수의 부활에 담겨야 할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작업이다. 앞의 것은 과거의 역사를 면밀하게 검토함으로써, 또는 성서에 대한 엄밀한 역사비평을 통해서 전개될 수 있으며, 뒤의 것은 아직 우리의 역사에 드러나지 않은 종말론적 희망을 통해서 예기(豫期)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정리한다면 역사적 예수의 부활이 모든 것들의 생명을 담보하는 궁극적인 토대라는 사실에 대한 변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사도성을 역사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교회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직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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