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오순절과 성령 강림
                    
오순절
오늘 우리는 성서 해석의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골고루 만나게 될 것이다. 소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이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전승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여러 전승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 전승들이 오늘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재구성되거나 재해석되고 있는지 살펴야만 한다. 또한 열광적인 엑스타시 경험으로 묘사되고 있는 오늘의 현상이 과연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지 아니면 저자인 누가의 각색인지도 역시 고려의 대상이다. 그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에서 핵심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누가의 신학적 의도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의 성서 공부가 전문적인 신학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게 아니라 최소한 인문학적 타당성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세부적인 문제는 접어두고 우리의 취지에 맞는 부분까지만 생각하자. 우선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알려진 ‘오순절’로부터 시작하자.
이 성령 강림 사건이 오순절에 일어났다는 누가의 설명은 그렇게 정확한 정보가 아니다. 그는 1장3절에 본인이 언급한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상에서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자주 나타났다는 사실과 성령 강림 사건의 순서를 자연스럽게 해명하기 위해서 예수 승천 이후 첫 오순절을 성령 강림의 날로 잡았을 것이다. 누누이 밝혔지만 누가는 지금 예수 사건이 일어난 때에 비해서 몇 세대 뒤의 사람으로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팎의 여러 전승을 기초로 해서 동시대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집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에서 객관적 역사를 잡아내려는 것은 헛수고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의 이야기에 역사적 신빙성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에게는 역사 이전의 어떤 것,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복음 사건과 그것이 몇 세대를 걸쳐 지중해 연안 중요한 도시에 전파된 그 과정이 중요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가 오순절을 성령 강림의 순간으로 선택한 이유는 승천과 성령 강림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주기 위한 목적 때문 만이었을까?
오순절(五旬節)의 사전적 의미는 다섯 오, 십 순, 마디 절로서 ‘오십 번째 마디’인데, 실제로는 유월절의 안식일 다음 날부터 오십 번째 되는 날을 가리킨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는 날을 기념하는 날이기는 하지만 보리 타작이 시작되는 절기를 기념했으며, 이어서 수장절이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오순절은 밀 추수를 끝내는 절기로 지켜졌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부터 50일 동안 민족의 해방을 기리는 축제와 아울러 일종의 추수감사제를 통해서 민족적 동일성과 생존의 기쁨을 나눈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전승에 의하면 이 오순절은 모세에 의해서 율법이 수여된 날이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그 날이 이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이 임한 날과 일치한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그럴듯한 그림이다. 누가는 성령 강림을 율법 수여 사건과 연결시킴으로써 동시대 기독교인들에게 성령 강림 사건을 매우 인상 깊게 전달하고 있다. 뒤이어서 성령 강림 현상에 대한 누가의 묘사를 따라가면 문필가로서 누가의 탁월성을 인정하게 된다.

바람과 불
2절을 다시 읽어보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여기서 바람이라는 헬라어 ‘프노에’와 영 ‘프뉴마’는 어원이 같다. 영과 바람을 비슷한 것으로 생각한 헬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언어인 히브리어 ‘루아흐’에도 역시 영이면서 동시에 바람이라는 뜻이 있다. 이들은 영을 생명의 본질로 생각하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숨결이라고 여긴 것 같다. 이들의 이런 생각이 그렇게 유치하다거나 현실성이 없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생명 현상을 보라. 봄기운은 분명히 자연의 생명을 불어내며, 가을바람은 그 생명을 시들게 하고, 인간도 숨을 쉬어야만 살아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강림을 바람 소리처럼 묘사하고 있는 오늘의 본문을 굳이 사실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영을 바람으로 인식했다고 해서 우리도 똑같이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성서가 틀렸다는 말일까? 성서를 읽을 때 이런 두 가지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는 고대인의 인식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려는 ‘문자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그 텍스트의 근본까지 무시하는 ‘상대주의’이다. 우리는 고대의 성서 기자들이 영을 바람과 비슷한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인식론적 한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전달하려고 했던 그 영적인 실체를 오늘 우리의 인식론적 범주 안에서 새롭게 해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3절 말씀은 이렇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불길이 사람들 위에 내렸다는 이 사건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화상을 입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걸 보니 실제로 불길이 임한 것 같지는 않다. 바람은 청각의 현상인데 반해서 불길은 시각의 현상으로 그들에게 특별한 경험이 주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위에서 지적한대로 오순절은 모세의 율법 수여 사건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수여된 시내산과 연관된 전승들이 많았다. 필로의 글에 의하면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소리(에코스)를 일으키셨는데, 이 소리는 불(퓌르)로 변하였고, 이 불은 다시 방언(디알렉토스)으로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에녹서 14:8-15에는 ‘불의 혀’로 둘러싸인 담과 ‘불의 혀’로 지어진 집이 하늘에 있다고 언급되어 있다. 또한 출애굽기 3장에 보도되고 있는 모세의 소명 장면에도 불길이 등장한다. 불길에 휩싸여있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고 모세가 야훼 하나님을 경험하고 출애굽의 소명을 받는 이 호렙산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은 시내산과 똑같은 산이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읽는 유대인들의 머릿속에는 오순절, 율법, 시내산, 호렙산, 떨기나무의 불길이 연상될 것이다. 그 불길이 오순절에 기도하고 있는 120명의 초기 공동체에 임했다는 이야기는 논리적으로도 빈틈이 없다.

방언
결국 바람과 불길 현상을 통해서 누가가 말하려는 바는 “그들의 마음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4절). 외국어를 배우지 않은 이들 120명이 갑자기 외국어를 하게 되었다는 이 보도 앞에서 우리는 좀 괴이쩍은 생각이 든다. 그들이 실제로 다른 언어와의 차이를 순식간에 초월했다는 것일까?
보통 교회에서 ‘방언’이라고 말하는 이 현상은 신약성서에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사도행전의 현상으로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언어로 말하는데 말하는 사람과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이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린도전서 14장의 현상으로서 말하는 사람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상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앞의 현상은 오늘 본문에 유일회적으로 일어났던 것인데 반해서 뒤의 현상은 초기 기독교에서 상당히 지속적으로 일어났던 현상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능성들을 모두 끌어들여서 논란을 확장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었던 고유한 경험을 오늘 우리의 잣대로 훼손시킬 권리가 우리에게 없을뿐더러 그런 현상 자체가 복음의 핵심이 아니며, 또한 오늘 본문의 중심 주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다음과 같은 소극적인 입장만은 명확하게 정리하자. 즉 혀가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는 이런 방언 현상은 기독교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 그것이다. 유대교 안에도 그런 열광적 현상이 있었으며, 가깝게는 신 내린 무당들에게도 그런 현상이 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생명의 영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몰아(沒我)적 경험으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가 이런 현상을 신앙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성령의 증거가 방언 현상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다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누가의 관심이 다른 데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바람, 불길, 방언은 이렇게 한 두 마디로 끝나고 그 뒤로는 사람들의 반응과 베드로의 변증 설교가 훨씬 자세하게 언급되었다는 것은 결국 누가의 관심이 초기 기독교와 세계의 조우에 있었다는 뜻이다.

술 취한 사람들
5절 말씀에 의하면 처음 공동체와 만난 사람들은 조국에 귀향해서 정착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의 말이 자기들의 언어로 들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누가는 이들의 입을 빌려 7절부터 13절까지 매우 소상하게 그 현상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출신 지역이 본문에 열거되어 있는데, 약간 지루할 정도로 세세하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누가는 그 이전에 있었던 목록을 참고했으며, 누가가 원래 제시한 목록도 현재의 목록과 약간 차이가 난다고 한다. 훗날 대필자의 판단에 따라서 보충된 것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지 누가가 지명을 이렇게 상세하게 나열하는 이유는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온 세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두 가지로 반응했다. 어떤 이들은 놀라고 어안이 벙벙하여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하고 웅성거렸다(12절). 누가는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사도행전 초입에 미리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미 예수 공생애에도 주변에서 이런 놀라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던 것처럼 사도들의 활동에서도 역시 그래야만 했다.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낯익지 않은 것을 경험할 때 놀라게 되는 것처럼 기독교는 세상에서 그런 낯설음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반드시 오늘 본문에 묘사되어 있는 방언이어야만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했던 현상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켜야할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우리에게 있는 삶의 내용과 그 현상이 과연 세상 사람들에게 놀랄만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도들의 언어에서 이상한 현상을 경험한 이들 중의 또 다른 사람들 중에는 “저 사람들이 술에 취했군!”이라고 빈정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13절). 이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인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반응이 전혀 이상한 것은 아니다. 영에 사로잡히는 삶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흡사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일 테니까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누가의 이런 보도는 기독교가 술 취함과 영에 사로잡힘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놓여 있다는 경고라고도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신앙이 술(거짓)에 취하면 이성이 마비되고 미몽에 사로잡히게 되는 반면에, 성령에 휩싸이면 현실의 피상성을 극복하고 생명의 리얼리티에 천착하게 된다. 우리가 술(또는 마약에) 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보편적 진리를 향한 열정과 판단력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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