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치유 능력의 근원

어느 날
만약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과 사건의 배열이 현재 구성되어있는 그대로 사실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던 베드로가 겨우 두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그 짧은 시기에 앉은뱅이를 치유할 수 있을 정도의 믿음과 카리스마를 확보했다는 말이 된다. 이런 모순은 사도행전의 내용이 단지 사실에 관한 연대기적 서술이라기보다는 누가의 신학적 목표에 따라서 편집되었다고 보아야 해결된다. 누가는 분명히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전승되어 오던 이 이야기를 자신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서 약간씩 손질했을 뿐만 아니라 적당한 위치에 배치했다는 말이다. 성서가 성서 기자들에 의해서 이렇게 편집의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 때문에 성서의 권위가 손상 받는 일은 없다. 오히려 그런 요소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그것의 초월적 성격만 강조함으로써 성서의 문자주의에 빠지는 게 훨씬 비(非)신앙적인 태도이며, 또한 그것을 통해서 결국 인간의 책임 부분이 실종되고 만다. 기독교 전승에 이미 인간의 판단과 해석이 담겨 있으며, 편집 과정에서 그것의 기능이 훨씬 확실하게 개입된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이 원래의 전승과 편집 사이의 긴장을 충분히 밝혀야만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자리가 확보될 수 있다.
이런 긴장이 오늘 본문에서는 ‘어느 날’이라는 표현에 담겨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하는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던 ‘어느 날’은 언제인가? 이들이 여전히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성전을 들락거렸다는 사실을 보면 이 사건의 전승이 일단 원시 공동체의 초기로 소급되는 것 같다. 상식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명실상부한 독립된 종교로서의 체계를 갖춘 다음에는 유대교적인 습관을 포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인들이 언제부터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을 지키지 않게 되었는지, 그리고 성전 출입을 하지 않게 되었는지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우리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그렇게 이른 시기는 아닐 수도 있다. 기도 시간과 성전 출입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누가의 활동 연대가 90년 어간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초기 기독교는 상당히 오랜 기간 유대교적인 범주 안에 머물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인 공동체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공동체 사이에는 이런 점에서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이방인 공동체는 아예 처음부터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이나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과 거리가 멀었겠지만 예루살렘 공동체는 허물어질 때까지 여전히 그 안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참고적으로, 원래 이 전승에는 베드로만 등장했지만 누가의 필요에 따라서 요한이 나중에 첨가되었다.

치유 과정
늘 그랬던 것처럼 성전으로 기도하러 들어가던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있었다. 이 사람은 그들이 정기적으로 성전을 드나들었었던 것처럼 습관적으로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있었다. 아마 다른 날도 이와 똑같은 광경이 벌어졌겠지만 오늘은 이것이 전혀 다른 사건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4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보고 “우리를 좀 보시오”라고 말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요한을 이 사건에 연루시키는 작은 단서에 불과하다. 정작 중요한 말은 그 뒤로 이어진 베드로의 말이다. “나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6절).
이 베드로의 진술에는 두 가지 내용이 대조되어 있다. 하나는 돈이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라는 것이다. 원래의 전승에는 앞의 내용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건 그렇다 치고 과연 베드로가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라고 말했는지, 그렇다면 그가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복음서에는 예수만이 이런 치유의 능력자로 등장할 뿐이고, 제자들에게 보인 약간의 이런 요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그런 능력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지 제자들 자체의 능력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 베드로가 갑자가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처럼 등장하고 있다.
베드로의 이 언급에서 핵심은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지 베드로 자체는 아니다. 즉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해서 이 앉은뱅이를 치유한다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이 사람을 치유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그의 능력은 여기서 동일시된다.
베드로는 “걸어가시오”라는 말과 함께 이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언어와 함께 행위가 이 치유 사건에 개입한다. 이미 존재론적 능력인 언어와 그 언어의 내용인 행위가 이 앉은뱅이에게 작용했다는 말이다.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참된 치유사건에 작용하는 언어와 행위의 힘은 오늘 교회에게도 필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즉 오늘의 교회도 언어의 능력인 설교와 행위의 능력인 역사 변혁의 프락시스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치유의 현실
누가는 앉은뱅이가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7,8절).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것을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할지 어려움에 빠진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여러 방안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표현된 그대로 앉은뱅이의 장애가 고쳐졌다고 믿는 것이다. 누가도 역시 그 사실 자체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받아들이는 게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장애의 치유 사건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게 아니며, 더 근본적으로는 기독교 복음이 그런 치유 사건을 복음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지 전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해야만 한다. 또 하나의 다른 해석은 이 사건의 신앙적 의미를 새기는 것이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기 시작한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역시 앉은뱅이 상태에서 힘을 얻어 걸어야 한다는 식이다. 일종의 ‘큐티’ 유의 성서읽기라 할 이런 접근은 전반적으로 큰 오류에 빠지지는 않지만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성서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흡사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 이런 본문을 근거로 해서 이 사회의 앉은뱅이를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개인이나 사회의 장애 요소를 치유하는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거나, 더 나아가 그것의 실질을 담보해낼 수 있는 보다 근원적인 어떤 현실을 확보하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그 현실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 또는 하나님 나라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앉은뱅이가 치유되었다는 현상 자체에만 매달린다면 핵심을 놓치게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이런 종류의 사건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데만 마음을 쏟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의 생활조건이 향상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생명의 힘이 우리 안에 풍요로워져야만 실제로 우리의 삶이 완성된다. 그렇다고 해서 구체적인 삶의 치유가 무의미하다거나 주변적 요소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음악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 공부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면 크게 쓸모가 있듯이 실제적인 삶의 치유도 하나님 나라의 경험에 따라서 결정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침소봉대의 잘못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8절에 묘사된 내용은 첨가된 부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 전통은 병이 치유된 사람은 우선 제사장에게 가서 그것을 확인 받아야 하고, 이어서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였던 사람은 그런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누가는 유대의 전통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큐티’ 방식의 성서읽기는 이 구절을 침소봉대 한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렇게 껑충껑충 뛰면서 기뻐해야 한다고 말이다. 사족에 불과한 것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적용시키는 게 은혜로운 해석인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세계를 막는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에서는 성서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사람의 반응이 성서읽기의 전반적 흐름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놀라는 군중
오늘 앉은뱅이 보도는 그것 자체가 아니라 그 뒤로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와 체포와 재판과 연결되어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독자들을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드는 일종의 단초라 할 수 있다. 이는 흡사 2장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소개하기 위해서 오순절 방언 현상이 보도되고 있는 구조와 비슷하다. 비록 앉은뱅이 사건이 독립적인 보도가 아니지만 나름대로 그것 자체의 핵심을 찾는다면 사람들이 앉은뱅이에게 “일어난 일에 몹시 놀라서 어리둥절해졌다”(10절)는 구절일 것이다.
앉은뱅이가 비장애인들처럼 걷게 되었다는 이 현상이 사람들을 놀래게 할만한 일인가? 이런 치유 현상은 그 당시 유대교나 이교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정확하게 풀기는 힘들지만 대충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비록 장애나 불치병의 치유가 다른 종교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이것보다 더 놀랄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도 역시 이 현상을 선교의 한 방편으로 사용했다고 말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기독교는 이 치유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고 그것이 지향하고 있는, 또는 그것의 토대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이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어쨌든지 사람들이 놀랐다는 이 보도의 결론은 모든 성서의 핵심 주제라는 점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일을 보고 놀랐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민중이나 귀족, 심지어는 이방의 왕들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일을 보고 놀랐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만날 때 놀라는가?
그 이유는 그 사건의 진행과 그것의 결과가 자신들의 예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힘의 논리를 따르거나, 또는 기계적인 역사발전에 묶여 있는 사람들의 예상과 상식은 그것에 자유로운 하나님의 행위 앞에서 허물어진다. 이렇게 자신의 예측과 예단이 허물어질 때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한다. 하나는 자기의 생각을 합리화하고 변명하기 위해서 훨씬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신비를 향해서 마음을 여는 것이다. 과연 오늘의 교회는 무엇을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을까? 단지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생명을 살려내는 일을 우리가 수행할 수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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