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가난한 공동체
(행 4:32-37)        
10월12일

성서읽기의 자세
성서를 읽거나 설교를 듣는 청중들에게 나타나는 극단적인 두 태도는 다음과 같다. 한쪽은 이 세상의 일상에 정신을 송두리째 빼앗김으로써 성서와 설교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무조건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다. 앞의 사람들에게 성서는 늘 낯선 문서로 남게 되고 뒤의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삶에 그대로 적용해야할 규범으로만 작동한다. 이 두 태도가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성서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정확하게 보려면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아야 할뿐만 아니라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성서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이런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
아마 오늘 말씀을 읽는 사람들도 이런 두 가지 태도로 나누일 것 같다. 한쪽은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 말씀을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며, 다른 한쪽은 이 진술 그대로 우리에게도 교회 중심의 공산사회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으려 할 것이다. 또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곤란하다는 사실 때문에 성서의 내용과 자기의 삶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할지도 모른다. 과연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실체적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오늘 성서 본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본문이 제시하고 있는 그 깊이로 들어가려고 한다.

한 마음과 한 뜻
초기 기독교의 공동생활에 대해서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오늘의 본문이 정작 말하려는 바는 ‘한 마음과 한 뜻’이라는 구절에 담겨 있다. 신명기는 ‘너의 마음과 뜻을 다하여’라는 표현 방식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바람직한 인격적 태도를 자주 묘사했다.(신 6:5, 10:12, 11:13 등). 70인 역의 역대기 12:39절에도 ‘한 뜻’(미아 프쉬케)가 사용되었는데, 놀랍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도 ‘한 뜻’(미아 프쉬케)은 ‘사랑의 공동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마틴 루터는 이 단어를 ‘Seele’(soul)로 번역했다. 여기서 ‘뜻’이라는 단어는 구약성서나 헬라세계, 또는 독일어권에서도 동일하게 ‘영혼’의 차원에 해당되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지성인 독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할 수 있도록 누가가 ‘미아 프쉬케’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종교이든지 초창기에는 열광주의에 빠져서 보편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초기 기독교도 역시 그런 위험성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는 기독교가 지향하는 공동체의 성격이 헬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그런 ‘사랑의 공동체’라는 점을 암시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런 대목이야말로 초기 기독교뿐만 아니라 오늘 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자신들이 보편적 진리의 토대에서 이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플라톤의 철학에 이미 삼위일체론의 흔적이 있다고까지 언급한 어거스틴은 플라톤 철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기독교를 보편적인 차원에서 변증했다. 물론 성서와 기독교 역사가 늘 이런 식으로 세상 학문과의 대화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를 향해서 자신을 열어두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만약 오늘 우리가 세상을 향한 열린 대화를 포기하고 자기의 세계로만 숨어든다면 교부들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셈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설명하는 용어가 바로 ‘프쉬케’였다는 사실은 그 공동체의 토대가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고대 헬라인들이 사용한 ‘프쉬케’라는 단어를 우리가 영혼, 생명 등으로 번역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 딱 들어맞는 단어를 찾을 수는 없다. 아마 생명의 본질과 연관되어 있는 우리의 정신 운동이 곧 프쉬케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들의 선교 사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조직체이거나 또는 친교단체와 비슷한 조직체라기보다는 궁극적 생명을 향한 정신과 영의 운동체라고 보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는 프쉬케를 향한 집중력을 가진 공동체였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자신의 소유가 자기를 절대적으로 지배하지 않는 상태야말로 ‘한 뜻’, 즉 미아 프쉬케에 삶의 토대를 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상태는 반드시 종교적인 경험으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지 절대적인 세계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데, 초기 기독교가 바로 그런 상태에 있었다.
만약 한국 교회가 초기 기독교처럼 영혼의 문제에 집중하는 공동체라고 한다면 지금과 같은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세속적인 삶이야 자본주의에 의해서 움직이니까 빈부의 격차를 원천적으로 해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만큼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상징의 차원에서라도 절대빈곤의 교회를 해결해야만 한다. 같은 교단, 같은 노회에 속해 있으면서 생존의 위기에 놓인 이웃 교회를 내버려두고 수십만 달러를 들여서 해외선교를 하거나 복지관을 세우는 일은 교회의 본질로부터 벗어나는 행위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마지막 심판 때 한국교회에 적용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가난한 사람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팔아서 필요한 대로 나누어 썼기 때문에 초기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누가의 보도는 과장되었거나 아니면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또는 우리가 아직은 알 수 없는 그 어떤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들이 아무리 자기의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고 유무상통의 질서 안에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물론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이 재림하실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땅이나 집이 필요 없기는 했지만 사도행전이 기록되던 100년 어간은 이미 지체된 예수님의 재림이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었기 때문에 교인들이 자기 재산을 무조건 팔아 치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진술을 좀더 생각해보자. 상식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초기 기독교 교인들은 대개가 가난했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이미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재산이 없었을 것이며, 그 당시에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도 대개는 일용직 노동자나 노예, 여성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땅이나 집을 팔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또한 지금처럼 헌금도 제도화하지 않은 반면에 구제해야 할 대상들이 적지 않았다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는 대체적으로 가난했을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여러 번 모금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나, 예루살렘 교회의 세 기둥인 베드로, 요한, 그리고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자신들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모금을 직접 부탁한 사실(갈 2:10)만 보아도 그 형편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가난했는데도 가난한 신도가 하나도 없다는 누가의 진술은 무슨 의미일까? 그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보자. 아주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몇몇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들의 재산을 처분해서 교회 안에 있는 절대빈곤 층을 도운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한 두 번 정도로 끝날 뿐이지 계속해서 재산을 팔아서 가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각을 바꾸어, 그 가난이라는 수준을 최소한의 생존에 놓았을 때는 가난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수행자들은 실제로는 무소유이지만 자신들을 절대로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누가의 진술에 대한 또 하나의 해명은 다음과 같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던 100년 어간까지 교회의 가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는 자기보다 두 세대 앞에서 가난을 극복한 예루살렘 공동체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기 시대의 교회가 겪고 있던 가난을 해결하고 싶어 했을지 모른다.

부활, 기적, 축복
오늘 본문이 대체적으로 초기 기독교가 처한 물질적인 궁핍을 다루고 있는데, 33절은 약간 구별된다. 이 구절의 키워드는 기적, 부활증언, 축복이다. 신약성서의 다른 대목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여기서 언급된 기적은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이 예측할 수 없는 어떤 강력한 힘을 경험했다는 의미이다. 고대인들은 그런 강력한 힘을 홍해가 갈라지거나 바위가 갑자기 갈라져 물이 나온다거나 장애가 치료되는 사건으로 경험했다.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다는 것은 모든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이다. 이 말은 곧 기독교는 궁극적인 생명 사건이 예수에게서 발생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 부활이 일종의 도그마로서만 남아 있을 뿐이지 그것의 실질적인 리얼리티는 상실되거나 축소되었다. 즉 우리는 생명을 신비의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주술적인 차원이나 또는 기계적인 차원으로만 접근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부활의 신비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모습이다. 그 축복의 한 부분이 곧 34절에 기록된 대로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기적, 증언, 축복은 어떤 점에서 기독교인과 공동체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개념이다. 기적이 놀라운 힘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인들에게는 반드시 그런 능력이 나타날 것이며, 예수에게서 진리를 경험한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그의 삶 자체에는 반드시 그 진리의 빛이 반사될 것이며, 그런 생명과 진리의 빛을 본 사람은 비록 가난한다고 하더라도 행복한 모습들이 나타날 것이다.
오늘 본문은 소유 문제를 초월해서 참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나간 초기 기독교의 행복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이면의 슬픈 현실까지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이다.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누가 공동체의 슬픈 현실과 영혼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기쁨이 본문에 교차하고 있다. 가난하지 않으면서도 영혼의 정열을 소유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우리는 영혼의 정열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정열로부터만 가난을 뛰어넘어 궁극적인 생명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실제로는 가난한 교회였지만 전혀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예루살렘 공동체의 심층적 영성을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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