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초기 기독교의 갈등
(행 6:1-7)        
11월9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초기 공동체의 전승을 사실대로만 기록한 게 아니라 자기 나름의 신학적 판단에 따라서 편집 작업을 거쳤기 때문에 그것을 읽는 오늘의 독자는 사도행전에서 얻을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와 누가의 신학을 구별해야만 한다. 누가가 제공하고 있는 정보는 사실에 가까운 것도 있지만 사실과 다른 것도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승의 과정에서 변형되거나 누가의 정보 수집 능력에 한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누가의 신학 자체를 우리가 파악하는 작업이 힘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초기 기독교 전체 신학과 맺고 있는 연관성을 파악하는 작업도 간단하지 않다. 더구나 누가의 신학이 초기 기독교의 전승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수준으로 편집했는가에 대한 정확한 실체를 포착하는 일은 더욱 험난하다. 사도행전의 편집 역사를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어야만 이 말씀의 의미를 새길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런 노력이 우리로 하여금 성서의 깊이로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초기 공동체에 관한 정보와 그 뒤에 숨어 있는 실체적 진실을 구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일곱 지도자
우선 본문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면서 그들의 형편을 살펴보자.  
1절: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는 과정에서 그리스 말을 쓰는 유대인들이 아람어를 쓰는 본토 유대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 불평의 원인은 그리스 말을 쓰는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식량 배급을 받을 때마다 푸대접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노년에 접어들어 고향에 뼈를 묻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서 기독교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제법 많았던 것 같다. 특히 가족 없이 혼자 사는 과부들을 돌보는 문제가 교회의 현안으로 등장했다. 이런 과부들은 원래 유대 사회의 복지 시스템에 의해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여러 사정으로 여기서 제외됨으로써 교회가 독자적으로 그들을 구제하게 되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이 과정에서 그리스 계 과부들이 푸대접 받는 일이 벌어졌다.
2절: 별로 좋지 못한 현상을 본 열 두 사도들은 이렇게 제안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제쳐놓고 식량 배급에만 골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말씀을 ‘제쳐놓고’라는 표현은 자신들의 잘못된 처신을 자책한다기보다는 자기들에게 벌어진 사태를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3절: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사도들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 가운데서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아내시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사도 이외의 첫 지도자들이 사도들에 의해서 직접 뽑힌 게 아니라 청중들에 의해서 뽑혔다는 사실은 매우 특기할만하다. 이런 진술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미 2천년 전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오늘의 민주주의 제도와 비슷한 것을 실시했다는 말이 된다.
지도자가 될 사람의 덕목은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깊이 경험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고 지도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덕목을 골고루 갖춘다는 것은 간단한 게 아니지만,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역시 이런 덕목이 필요할 것이다.  
4절: 사도들은 이제 식량 배급을 새로 뽑히게 될 일곱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오직 기도와 전도하는 일에만 힘쓰겠다”고 설명한다. 기도는 곧 유대교로부터 물려받은 종교 태도이고 ‘전도’는 예수님을 전한다는 뜻이다. 이는 곧 기독교가 유대교적 전통과 예수의 사건을 포괄하고 있다는 뜻이다.
5절: 신자들은 사도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곱 명의 대표자를 선발했다. 스데파노, 필립보, 브로코로, 니가노르, 디몬, 바르메나, 니골라오가 그들인데, 이들이 한결같이 그리스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일견 이 문제가 그리스 유대인들의 불평으로 인해서 벌어졌다는 사실과 연관된 것 같다.
6절: 청중들이 선출한 이들 일곱 명을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했다고 한다. 물론 안수도 역시 유대교의 전통이다.
7절: 누가는 이 단락의 결론을 이렇게 내린다. “하느님의 말씀이 널리 퍼지고 예루살렘에서는 신도들의 수효가 부쩍 늘어났으며 수많은 사제들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 여기서 사제들은 대제사장이 되지 못한 일반 레위인들로서 그 당시에 그들은 생존이 위태로울 정도로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지 교회의 문제가 좋은 쪽으로 수습되어 예루살렘 공동체는 훨씬 활기차게 되었다는 게 누가의 주장이다.

왜 그리스 계만?
우리는 위에서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가 최초로 일곱 명의 지도자를 선출한 그 내막을 잠시 살펴보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들을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라고 부르지만 누가는 여기서 집사(디아코노스)라는 단어를 회피하고 있다. 그들이 안수를 받았기 때문에 안수 집사, 또는 장로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역시 그들에 대한 정확한 진술은 아니다. 스데파노와 필빕보 같은 사람들의 역할은 이런 집사와 장로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도와 같았기 때문에 이 일곱은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일곱 지도자의 선출 사건을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과 연결시켜서 보는 시각도 있다. 사람들이 늘어나다보니 갈등이 파생되었고, 그 문제를 순리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이제 교회의 조직이 체계를 잡아간다고 말이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고 평신도 지도자들은 교회 관리를 맡는 업무 분담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조직이 그만큼 탄탄해졌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 일곱 명의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그리스 말을 쓰는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이 궁금하다. 물론 앞서 잠간 지적한 대로 문제의 발단인 그리스 계 기독교인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서 그들을 지도자로 뽑았을 개연성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힘들다. ‘굴러온 돌’인 그리스 계는 소수자이고 ‘박힌 돌’인 히브리 계는 주류이기 때문에 그런 이질적인 집단으로 구성된 예루살렘 공동체가 평화를 유지하려면 소수자를 우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우리가 본문을 조금 더 역사 비평적으로 읽는다면 그 속사정은 훨씬 복잡하다. 아무리 소수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이었다고 하더라도 최초의 지도자들을 그리스 계 일색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않다. 그런데다가 이들이 이전에 사도들이 하던 식량 배급 업무만 감당한 게 아니라 사도의 업무를 감당했다는 점에서 여기에는 누가가 표면화할 수 없는 복잡한 내막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게 무엇일까?

공동체 분리
이 사건의 앞머리에 문제를 풀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스 말을 쓰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과부가 식량 배급 때마다 푸대접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불평을 터뜨렸다는 설명은 거의 완벽한 공산주의 체제로 운영되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기본정신에 비추어 볼 때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리 절실한 신앙 안에서 생활했다고 하더라도 유유상종 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쪽을 푸대접할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사도들이 직접 꾸려가던 예루살렘 공동체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누가가 단지 식량 배급처럼 사소한 일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리스 계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계 유대인들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틈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 중에서도 유대교로부터 실제적으로 심한 박해를 받은 이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다고 한다. 원래 예루살렘 공동체는 예수살렘 성전 출입을 자연스럽게 했으며 자기들이 지켜오던 모든 율법을 그대로 지켰기 때문에 비록 예수를 전한다고 하더라도 유대교로부터 노골적으로 박해를 받지는 않았다. 반면에 그리스 계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율법을 포기했기 때문에 유대교로부터 심각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유대교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으며, 결국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교로부터 서로 다르게 대우받았다는 사실에 있다기보다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마저 이 율법 문제로 인해서 심각한 갈등이 초래되었다는 데에 있다. 기독교 내의 율법 문제는 사도행전만이 아니라 바울의 여러 편지에서도 교회 분열의 매우 심각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예루살렘 공동체 스스로 극복할 수 없을 만큼의 심각한 갈등이 파생된 그 현실을 누가는 식량 배급이라는, 일종의 해프닝으로 대신 설명하고 있다.
이제 예루살렘 공동체는 결정해야만 했다. 이 상처를 그대로 안고 가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길을 가는가. 이들은 서로 다른 길을 가기로 결정한다. 열 두 사도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계 기독교와 일곱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계 기독교로 분리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주로 그리스 계를 따라간다.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은 비록 예수를 믿었지만 여전히 율법의 범주 안에 갇혀 있는 반면에 그리스 계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진 자유를 안고 율법 너머의 세계로 달려갔다.

다양성 속의 일치
우리는 지금의 잣대로 예루살렘 공동체의 분리가 과연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단정할 수는 없다. 전혀 다른 종교 패러다임을 강제적으로 하나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와의 분리도 역시 그 당시 그들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분리를 합리화할 수도 없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일치의 영에 최선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견지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다행히 예루살렘 공동체는 공식 회의를 거쳐 일곱 지도자들 세워 안수하고 자신들과 동일한 권위를 부여한 다음에 분리시켰다. 팔레스타인 기독교는 그들 나름으로, 그리스 계 기독교는 그들 나름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했다는 점에서 비록 분리가 아픔이겠지만 그 기본 정신만은 일치를 상실하지 않았다고 본다. 뒷날 그리스 계 대표자 격인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을 돕기 위해서 성금 모금에 앞장섰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초기 기독교의 숨겨진 아픔을 들여다보았지만, 그런 모든 과정이 합해서 선을 이루었다는 데 위로를 받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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