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인
(행 11:19-26)        
4월19일

흩어진 신도들
고르넬리오 이야기에서 초기 기독교 선교의 절정을 보여준 누가는 19절을 새로운 호흡으로 시작한다. 한 박자 쉬어가자는 걸까? 스데파노의 순교 사건 당시에 흩어진 신도들이 전도했다는 내용은 곧 8장4절 “흩어져 간 신도들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다.”는 말씀과 연결된다. 8장4절 이후에 사마리아 전도, 에디오피아 내시 전도, 사울의 개종과 전도활동 및 예루살렘 방문,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에네아와 도르가 사건, 10장의 고르넬리오 이야기에 이어 11장(1-18)의 예루살렘 보고가 이어졌다. 누가가 8장4절 이후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흐른 것처럼 진술했으면서도 그 구절을 거의 그대로 빼다 박은 표현을 여기 19절에서 반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전승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새롭게 편집하는 방식으로 사도행전을 집필하다보니 이런 착각이 일어난 것인지, 또는 8장4절 이후의 전도는 지역적으로 팔레스틴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11장19절 이후의 전도는 벗어났다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반복한 것인지 모른다. 아니면 누가는 스데파노 사건으로 인해서 초기 기독교가 받은 박해가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두 번에 걸쳐 강조한 것일까? 어쨌든지 ‘흩어진 신도들’이 팔레스틴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는 진술은 오늘 본문이 최초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그런데 박해를 받아 흩어진 신도들이 원래 헬라파였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에서 주로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가 앞에서 한번 확인한대로 나사렛 예수를 추종하지만 여전히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으려 했던 히브리파 기독교인들과 유대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했던 헬라파 기독교인들 사이에 벌어진 의견 차이로 인해서 초기 공동체가 분리되었으며, 그 여파로 헬라파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다면 그들의 관심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문화적 배경에 있었던 이방인들에게도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 속사정을 지금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바로 이어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걸 보면 누가가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에게 전도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는 바울의 선교가 반드시 이방인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거의 전방위였다는 사실을, 어쩌면 바울은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우선적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을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은 당분간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안티오키아
흩어진 신도 중의 키프로스 사람과 키레네 사람이 안티오키아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했다(20절). 이들이 누구인지 본문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바르나바가 키프로스 출신이며(4:36), 루기오가 키레네 출신이라는 사실만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13;1). 어쨌든지 이들은 안티오키아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선포하였다. 여기서 말씀은 구약성서를 가리키고, 복음은 예수 사건을 가리킨다. 초기 기독교도 그렇지만 지금 우리도 역시 유대인들에게 전승된 구약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인 신약성서를 함께 우리의 신앙 지침으로 받아들인다. 이 말은 곧 기독교 신앙이 계시의 역사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계시는 역사를 뛰어넘는 게 아니라 의존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적 해석학에 근거해서 그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다. 역사적 해석학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모든 텍스트는 과거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관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미래가 단지 인과율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난 역사에 속한 성서와 기독교 신학을 충분하게 이해해야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사건을 과거로부터 풀어놓아야 한다.
안티오키아의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21절)은 사도행전만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바울의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이 바로 이 안티오키아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기독교를 유대교로부터 근본적으로 구별시키는 율법 문제가 바로 이 안티오키아 교회에 의해서 불거졌으며,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들이 바로 안티오키아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안티오키아라는 지명은 두 군데 나온다. 하나는 원래 시리아 안티오키아이며, 다른 하나는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인데, 지금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지역은 시리아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안티오키아는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서 인구가 50만 명이었다고 한다. 지중해에서 35km 떨어져 있으며, 시리아 공사가 거주하던 곳으로서 이 안티오키아에는 매우 강력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바르나바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가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보냈다고 설명한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선교를 정식으로 인정하는 듯한 이 보도에 의하면 이미 이방인 선교가 실행된 다음에 바르나바가 파송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바르나바가 곧 안티오키아에 복음을 전한 흩어진 신도들 중의 대표일 개연성이 높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누가는 바르나바에 관한 전승을 세 가지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그가 재산을 팔아 예루살렘 공동체에 기부했다는 이야기(4:36,37), 둘째는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 지도자 중에 선두라는 사실(13:1),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야기(11:27-30)이다. 누가는 이런 이야기를 중심으로 바울의 선교 역사에서 바르나바를 적당한 위치에 배치하면서 이 사도행전을 집필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실제의 바르나바 위상보다 사도행전에는 축소된 모습으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누가에 의하면 바르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훌륭한’ 사람이었다(24절). 이런 표현은 교훈적인 의미에서 관용적으로 쓰인 것이다. 스데파노에게 붙은 수식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나(행 6:5), 아리마대 요셉에 붙은 수식어 ‘착한 사람’(아네르 아가토스)이 그대로 바르나바에게 쓰였다. 여기서 바르나바는 가장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전형으로 묘사된 셈이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고 착한 사람이었던 바르나바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 나오게 되었다.(24). 누가는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한 인물로 단정하지는 않지만 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피력한다. 더군다나 고향인 다르소에 은둔하고 있던 바울을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는 사실이라면 세계 선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분명히 바르나바라 할만 하다.

그리스도인
바르나바는 바울과 함께 안티오키아에 일년 동안 머물렀다(26). 역사비평에 의하면 이런 일 년이라는 숫자를 비롯해서 전체 텍스트 자료가 그렇게 역사적 신빙성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르나바에 관한 몇 가지 전승을 중심으로 안티오키아에서 시작된 이방인 선교를 해명하려고 한 누가의 집필 의도를 정확하게 포착하기만 한다면 그 이외의 요소들은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장소가 안티오키아이며, 거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르나바였다는 사실이 이 텍스트에서 핵심이라는 말이다.
왜 초기 공동체는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난 이방인 선교를 복음 역사의 ‘에포크’(신기원)라고 생각했을까? 거꾸로 왜 그 당시 공동체의 주류는 이방인 선교를 외면했을까?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같은 사람들인데도 한쪽에서는 이방인 선교를 거부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추구했을까? 지금 역사가 흐른 다음에는 이방인 선교가 당위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건 그 당시에는 숨겨져 있어서 아무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많은 가능성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역사는 변하고 발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도 역시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진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의존한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결단과 선택이 하나님의 뜻에 의존해 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인지 아닌지는 늘 훗날에 판명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뜻이 아직 명시적으로 인식되거나 동의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안티오키아 선교를 선택한 흩어진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지혜로웠을 뿐만 아니라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누가는 바로 이때부터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졌다고 확인한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단지 유대교에 속한  ‘나사렛 파’ 정도로 불렸다는 말도 된다. 어쨌든지 예수 추종자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건 획기적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는 건 무슨 뜻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이제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라는 보호망을 포기하게 된 셈이다. 그 이전에는 이들이 유대교라는 큰 틀에 속한 것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로마정권에 의해서도 별로 종교적인 억압을 받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런 특권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앞에서 박해에 관한 보도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율법 문제로 인한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벌어진 것이었지 훨씬 거친 로마 정권과의 마찰은 아니었다.
둘째, 이제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들의 정체를 훨씬 분명하게 갖추어나가야만 했다. 유대교인들과 구별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신앙의 내용을 채워나가는 일은 곧 신학작업이며, 이 작업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곧 바울이었었다. 바울 이후로 기독교는 교부들 시대에 이르러 명실상부하게 하나의 종교가 갖추어야 할 전반적인 체계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그런 작업은 사실 지금도 계속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담긴 새로운 현실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는 종교적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었다면 나름의 안정감이 있었겠지만 인류 역사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등장할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에 관한 성찰을 끊임없이 끌고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과연 ‘그리스도인’은 누구이며, 어떤 존재방식으로 살아가는가? 이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게 일종의 ‘영성’이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