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
(행 11:27-30)        
4월26일


구제헌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전반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안티오키아 교회가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온 세상’에 흉년이 들어서 안티오키아 신도들이 유대 신도들을 위해서, 아마 예루살렘 교회를 가리킨다고 보이는데, 헌금을 했다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저자 누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안티오키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로 결정했을까? 물론 본문은 ‘기근’이라는 이유를 달고 있긴 하지만 흉년으로 인한 고통은 예루살렘 교우들만이 아니라 안티오키아 교우들도 똑같이 당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흉년이라는 말은 그렇게 설득력은 없다. 더구나 상식적으로 본다면 사도들과 예수의 동생들이 권위적으로 이끌어가던 예루살렘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의 안티오키아 교회보다는 물적인 토대가 훨씬 탄탄했었을 텐데 말이다. 특히 예루살렘의 원시 공동체는 부자들이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쳤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이 절대 빈곤을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우리가 좋은 쪽으로 변호할 수도 있다. 안티오키아 지역보다는 예루살렘 지역에 흉년의 피해가 더 컸다거나, 로마 제국 중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던 안티오키아에 비해서 예루살렘은 전체적인 경제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에 그런 구제 헌금 사건이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2천년 전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우리가 정확하게 재구성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저자의 집필의도만은 가능한대로 정확하게 짚어야 한다. 누가의 집필 의도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단서의 하나는 그가 역사적 사실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 글라우디오 황제 시대의 기근에 관한 것이다. 오늘 본문은 하가보라는 예언자가 ‘온 세상’에 기근이 들 것으로 예언했고, 그런 기근이 글라우디오 황제 시대에 일어났다고 보도하지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지역적인 기근은 많았지만 전체적인 기근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없는 이야기를 여기서 진술하고 있는 것일까? 누가의 이 보도는 ‘없는’ 이야기라기보다는 ‘불확실한’ 이야기라고 보아야 한다. 지금 누가는 어떤 구체적인 연대기적 사실을 전하려는 게 아니라 ‘변증적’ 교훈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능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중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성서읽기’의 어려움이 있다. 호교론적 방식으로 진술되고 있는 이런 텍스트를 실증적 역사로 단정하면 성서 ‘축자영감설’, 혹은 ‘규범론’에 빠지게 되고, 반면에 텍스트를 단지 저자들의 실존적 고백으로만 읽으면 ‘존재론적 계시 해체론’이라는 덫에 걸려든다. 텍스트의 문자에 갇히지 않으면서 텍스트의 존재론적 계시 사건을 포착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바른 성서읽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일단 성서를 ‘시’로 이해하는 게 일단 바람직한 관점이다. 예를 들어 강인한의 시 “라일락나무에서 흐르는 밤”, 제1연은 다음과 같다.

라일락나무 연초록 가지와 가지 사이로
바람이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일 때
안돼, 안돼
연등(燃燈)인 양 꽃숭어리를 흔들며
라일락나무 말갛게 눈흘긴다. (창비2002,가을호)

이 시에서 바람이 라일락나무 가지 사이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거나,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라일락나무의 눈흘김이 사실인가의 여부, 또는 그런 자연현상에 관한 시인의 실존적 느낌보다는 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런 시를 쓰도록 가능하게 한 그 원천적 힘을 따라잡는 것이 이 시를 읽을 때의 관건이다. 이처럼 성서도 역시 진술된 사태의 내면에 영적인 현실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우리는 성서의 존재론적 계시의 능력을 만날 수 있다.

예루살렘의 예언자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구제헌금을 결정하게 된 배경을 좀더 검토해보자. 누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일은 일단 예루살렘에서 온 예언자들 중의 한 사람인 하가보가 ‘온 세계’의 기근을 예언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미 예루살렘 교회는 안티오키아 교회에 바르나바를 보냈고, 바르나바는 고향인 다르소에 은둔해 있던 바울을 데리고 와서 상당한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본 상태에서(11:22이하), 이제 다시 예언자들을 보냈다는 건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15장에서도 역시 유대의 할례파 사람들이 안티오키아 교회에 와서 율법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경우만 하더라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세 번이나 사람들을 안티오키아로 파송한 셈이다. 물론 우리는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 사이에 이런 좋은 관계가 유지되었고, 그 중간에 바울의 역할이 두드러졌다는 방식으로 이 텍스트를 단순하게, 혹은 은혜롭게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누가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초기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 오늘 우리는 누가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누가의 이런 진술에 담긴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앞에서 지적한 것이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안티오키아 교회는 사도행전이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이 우호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긴장관계, 더 나아가서 아무런 소통이 없었던 관계라고 보아야 한다. 스테파노의 일로 ‘흩어진 신도들’(11:19)이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사도 교회의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다는 건 상식적으로도 당연하다. 본문이 안고 있는 이런 모순을 한 가지 더 짚어보자.
사도행전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여러 번 방문한 것처럼 설명한다. 이미 다마스커스 회심 이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과 만났으며(9:26-31), 구제헌금을 전달하기 위한 방문(11:27-30), 예루살렘 회의 참석(15장), 2차 선교여행 끝의 예루살렘 방문(18:22), 3차 선교여행 끝의 방문(21:17)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바울이 직접 기록한 갈라디아서는 단 두 번의 방문만 언급하고 있다. 한번은 다마스커스 회심 이후 삼년이 지난 다음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보름 동안 머물러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만 만난 일이 있었으며, 그 다음은 14년이 지난 다음 바나바와 함께 방문한 일이 있다(갈 1:18-2:10). 첫 방문에서 바울은 베드로와 야고보를 거의 형식적으로 만났을 것이며, 두 번째의 방문은 신학적인 결판을 내는 자리였다.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이제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 교회는 제각각 다른 길을 선택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에게로 가게 되었다. 이런 신학 논쟁이 끝난 다음 곧 이어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걸 보면(갈 2:11 이하)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와 매우 거북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누가는 무슨 이유로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 교회가 가까운 것처럼 설명하고 있을까? 누가는 자신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서 교회 전승을 개작했다는 게 그 대답이다. 오늘 본문과 연관된 전승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가보 예언자 전승이다. 하가보에 관한 전승에는 기근 예언과 사도의 체포 예언(21:10 이하)이 있는데, 오늘 본문은 첫 번 것을 채택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전승은 바르나바와 바울이 동행해서 구제헌금을 전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고린도서와 로마서에 의하면 바울은 매우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이런 모금 계획을 세우고 실천했는데, 사도행전은 그저 지나가는 투로 간단하게 다루고 있을 뿐이다(24:17). 그 대신 누가는 오늘 안티오키아 교회에 한정된 텍스트에서 바르나바와 헌금 방문을 취급하고 있다. 이렇듯 사도행전의 보도와 바울의 편지 사이에 놓여 있는 차이를 전제한다면 누가는 결국 바울에 관해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시대(80-85년)의 교회를 향해서 신앙적 교훈을 전하기 위해 교회 전승을 필요한 것만큼 적절하게 편집했다.
참고적으로, 본문은 헌금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아니라 원로(장로)들에게 보내졌다고 설명한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지, 아니면 누가의 시대가 이미 사도 이후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인지는 좀더 생각보아야 한다. 또한 바울과 바르나바의 예루살렘 방문 시기에 본격적으로 예루살렘 박해가 시작되었다. 바울과 바르나바의 방문 시기가 순교의 시기와 맞아 떨어졌다는 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의도적인가?

신학은 해석이다.
이제 오늘의 텍스트가 담고 있는 실체적 진실에 대해서 조금 분명하게 대답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누가의 생각과는 달리 실제로 안티오키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비록 헬라파 기독교인들을 적대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자신들의 관심 밖에 있는 교회로 여기고 방관했다. 사도들과 예수의 동생들로 구성된 예루살렘 교회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걸은 반면에 이방인 교회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소아시아, 헬라 지역에서 꾸준히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바울의 편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방인 교회가 재정적으로 예루살렘을 돕는 일은 꾸준하게 이루어진 것 같다. 다만 여기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초기 공동체에서 주류라 할 예루살렘 공동체에 의해서 배척된 헬라파에 의해서 기독교의 운명이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 우리가 처한 딜레마는 복음의 역사가 실제의 역사와 기록된 역사로 구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역사 중에서 우리가 어느 한 가지만을 선택할 수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그 어떤 역사도 실증적이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예컨대 아무리 뛰어난 교회사가라고 하더라도 종교개혁의 역사를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는 없다. 종교개혁이 역사적 현실로 나타나기까지의 과정이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를 근본적으로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는 복음에 관한 실증적 역사가 아니라 일종의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그 성서를 읽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도 역시 신학적 해석이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소양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성서가 가리키는 구원과 복음의 세계에 그만큼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적으로는 독자적이었던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 교회가 긴밀하게 소통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는 누가의 신학적 해석은 이런 점에서 틀린 게 아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세계(오이쿠메네) 교회가 영적인 일치를 지향해야한다는 영의 가르침에 순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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