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성령이 말씀하신다.
(행 13:1-3)        
5월10일

안티오키아의 지도자들
예루살렘의 참혹한 사건을 보도한 12장과 바르나바와 바울의 선교활동을 시작하는 13장은 단지 장 구분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사도행전 전체를 전후로 나누는 분기점이다. 12장까지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비교적 산만한 방식으로 전개된 반면에 이제 13장부터는 바울의 선교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집중하고 있다. 이 흐름의 시작은 안티오키아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관한 짧은 보도이다.
누가는 안티오키아에서 활동한 다섯 명의 지도자 이름을 열거한다. 바르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사울이 그들이다. 이들 다섯 명 중에서 소위 ‘일곱 집사’(행 6장)에 속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안티오키아 공동체가 기본적으로 헬라파 그리스도인의 전통을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의존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독립적인 체제를 갖춘 게 아닐까 생각된다.
어쨌든지 누가는 이들을 가리켜 ‘예언자와 교사’라고 표현했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카리스마를 부여받은 초기 공동체의 직책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 적이 있다. 사도, 예언자, 교사, 기적 행위자, 신유 행위자, 봉사자, 관리자, 방언하는 자(고전 12:28). 이들 중에서 앞부분에 속한 사도, 예언자, 교사가 가장 중요한 카리스마 담지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안티오키아에는 사도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 분문에서 두 직책만 언급되어 있다. 크게 보면 예언자와 교사라는 직책은 비슷하다. 예언자는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고 교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요즘의 방식으로 구별한다면 예언자는 설교자이고, 교사는 신학자라고 볼 수 있다. 좀더 풀어본다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윤리적 차원과 연결시켜서 선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교사는 말씀 자체에 한정해서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적으로, 구약의 예언자들은 ‘예언’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 때문에 미래의 일을 마술적인 힘으로 밝혀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역사를 해석하는 사람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주변에 있는 제국들의 역사를 영적인 통찰력으로 정확하게 분석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이런 역사 분석과 해석이 특별한 카리스마를 지닌 예언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하는 이유는 역사의 흐름 자체가 매우 영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이라는 성서 주장이 바로 이런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즉 역사는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으로 처리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요즘도 대개의 사람들이 역사의 의미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또는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고 단지 자기의 이해타산에 몰두해서 살아가는 이유는 그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그 역사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혀보려 했던 예언자 전통이 기독교로 이어졌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역사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을 시사한다.

바르나바와 사울
이 다섯 명의 지도자들은 ‘단식’과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고 한다(2). 바르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할 때도 역시 이들은 단식하고 기도한 다음에 안수했다. 하나님의 영에 집중해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종교행위인 단(금)식과 예배와 기도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역시 소홀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이런 종교행위와 우리의 삶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사태가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단절이며, 다른 하나는 소통이다.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고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이 세상의 삶과 단절해야 한다. 예수님이 돈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하셨듯이, 또한 마르다에게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정신이 자기만 집중하게 만드는 이 세상과 단절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행위는 이 세상의 구체적인 삶과 영속적인 소통이 이루어져야한다. 우리의 금식과 예배와 기도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삶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든 종교행위는 단지 자기의 종교적 만족감이거나 열광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단절과 소통이 역동적으로 작용할 때 우리의 예배는 영적인 차원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다섯 명의 지도자 목록은 우리의 예상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바르나바와 바울이 나란히 등재된 게 아니라 양쪽으로 떨어져 있다. 나머지 세 명은 사도행전에서 큰 역할이 없는데 비해서 바르나바와 바울은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만 아니라 다르소에 은둔해 있던 바울을 안티오키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추천한 인물이 바르나바였으며, 이 두 사람이 제1차 선교여행에서 동행한다는 사실을 본다면 당연히 목록의 앞부분에서 차례대로 올라야했을 것이다. 누가는 무슨 이유로 이 두 주인공을 양쪽 끝으로 떨어뜨려놓았을까?
이 대답은 잠시 미루어두고 다섯 명의 지도자 중에서 선교사로 나서게 될 두 사람과 남게 될 세 사람의 관계를 잠시 검토해보자. 일반적으로 한 집단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그 중심에 남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실무를 위해서 선택된다고 한다면 결국 다섯 명 중에서 바르나바와 바울이 후자에 속한 인물이라는 의미이다. 지금도 한 교단의 총회장이나 그만한 역량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어쩌면 바울이 초기 기독교에서 가장 뛰어난, 혹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우리의 예상은 잘못된 것일지 모른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누가에 의해서 바울의 선교활동이 기독교 역사에 부각되었고, 바울의 편지들이 교회에 전승되었기 때문에 바울 중심의 선교와 신학이 기독교의 주류가 된 것이다. 이런 기독교 역사에서 우리는 두 가지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는 아무리 역사적 계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바울이라는 인물의 영적인 카리스마는 교회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 역사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의 수고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령의 말씀
이제 다시 지도자 목록에서 바르나바와 바울이 양끝으로 나뉘어 올라 있는 이유로 돌아가자. 이미 이렇게 짜여진 전승이 누가의 손에 들어있을지도 모르고, 혹은 우연하게 이런 배열을 이루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누가의 글쓰기 능력을 인정한다면 여기에도 분명한 의도가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바르나바와 바울이 다섯 명의 지도자들 중에서 양끝으로 구분될 정도의 관계였지만 성령에 의해서 이제 동업자가 되었다는 의미인지 모른다. 그래서 누가는 이렇게 진술한다. 성령께서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기로 정해 놓은 일이 있다”하고 말씀하셨다.(2절).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1:8)이라든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2장)이라든지, 고르넬리오 사건(10장)을 비롯해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강조된 ‘성령’의 활동이 이 대목에서도 역시 강조된다는 말이다. 성령이 강림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성령이 지시하신다는 것, 오늘 본문처럼 성령이 말씀하신다는 게 무슨 뜻일까? 이와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에서 자주 표현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우선 우리는 하나님, 혹은 성령과 직접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해야만 한다. 성령이 한국말이나 영어로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과 성령과는 전혀 다른 지평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른 지평이라고 해서 전혀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라 죽음으로 모든 게 파괴되는 오늘 우리의 생명 조건 안으로 성령을 제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런 시공간의 범주 안에서만 통하는 언어로 성령과 대화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성령의 말씀이라는 건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서 어떤 깨달음을 준다는 의미일까? 이 상황에서는 이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안티오키아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중에 바르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보내는 게 좋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 서로의 생각이 일치된 걸 놓고 성령이 말씀하셨다고 표현했다면 아무도 시비를 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니다. 단순히 우리의 마음에 느낌이나 판단을 성령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면 성령이 자칫 인간의 심리에 제한받을 수 있다. 더구나 사람의 생각이라는 게 얼마나 부실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전투구가 성령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사이비 이단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게 ‘성령’의 말씀이다. 인간이 철저하게 의존해야 할 성령을 오히려 이용하는 이런 현실 앞에서 성령이 우리의 느낌과 생각으로 말씀하신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어떤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성령이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는 건 아닐까? 출애굽, 시내산의 율법, 교회의 시작 같은 사건들이 성령의 말씀일 가능성은 높다. 그렇지만 인간의 역사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늘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무죄한 사람들의 고통에서 성령의 말씀을 찾는다는 건 지나친 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령이 말씀하신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에서 결코 어떤 실증적인 대답을 찾을 수 없으며, 찾으려 해서도 안 된다. 어머니 가슴에 안겨서 젖을 먹는 아이가 어머니의 따뜻한 체온만으로 어머니를 제한하려고 한다면 어머니를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이 아이가 어머니를 경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어머니가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어머니가 눈을 보면 눈을 마주치고, 뺨을 대면 그 느낌을 받고, 이름을 부르면 그것을 들어야 한다. 이 아이의 인식론적 깊이나 넓이가 풍부해지면 어머니는 그만큼 크게 다가갈 것이다. 이 아이가 철이 들 정도가 되면 어머니가 이 세상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죽음과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대화할 것이다. 이런 정도의 철이 든 사람이 곧 예언자, 신비주의자, 신학자라 할 수 있다.
결국 성령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성숙이다.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이 세계와 역사와 인간을 깊이 통찰할 수 있어야 하며, 더 직접적으로는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영의 활동을 알아야 한다. 개인에게 어떤 영적인 깨우침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을 불러일으키며, 더 나아가서 자연의 생명까지 끌어가는 영의 활동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공부이다. 성령이 말씀하신다는 진술은 이런 영적 성숙이 이루어진 사람들의 신앙적 표현 방식이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