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유대인들의 분노
(행 13:42-52)        
5월31일

설교 이후의 반응
지난 주일에 우리가 함께 공부한 바울의 설교 이후에 일어난 반응인 오늘의 본문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진술은 아니다. 그 이유는 저자인 누가가 이 사건을 현장에서 확인한 사람이 아니라 충분하지 않은 자료에 의지해서 어떤 신학적 의도를 전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진술에 일관성이 부족하더라도 이 진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추호도 없다. 성서 텍스트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새로운 지평에서 해석한 문서이기 때문에 그 해석이 바른 길에 놓여 있기만 하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잘못된 게 아니다. 예컨대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불기둥과 구름기둥’ 같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공동체가 화산폭발 현상을 하나님의 현현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시각에는 좀 미숙한 세계이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 나름으로 야훼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했다는 점에서 크게 잘못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실제적인 초자연적 사건이라고 고집을 피우면서 오늘도 역시 신자들로 하여금 그런 초자연적인 사건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처럼 가르친다면 성서를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만약 성서에서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중요하다면 오늘 기복신앙이나 감상주의적 신앙 같은 것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게 아닐까? 왜냐하면 그런 모든 가르침도 역시 신자들이 신앙적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니까 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놓여 있다. 하나는 이미 우리가 주술 이후의 세계에 돌입한 상태에서 주술적인 세계관으로 기독교를 선포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오류라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성서 시대의 신앙이 비록 신화적인 경향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에 집중했지, 요즘처럼 대중추수주의(포퓰리즘)나 대중선동에 기울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말이 약간 옆으로 흘렀는데, 본문으로 돌아와서, 설교 이후의 전반적인 사태 진행을 검토하면서 이 텍스트에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들을 짚어보도록 하자. 본문에 따르면 바울이 회당에서의 예배를 모두 마치고 나올 때 사람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다시 와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42). 그런데 청중이 흩어진 다음에 많은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왔으며,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해서 살아가라고 권했다(43). 42절의 청중들과 43절의 청중들은 같은 사람들인가, 다른 사람들인가?
이야기는 한 주간을 훌쩍 뛰어넘어서 다음 안식일로 접어든다. 온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모였다(44). 그런데 그 군중을 본 유대인들이 바울을 반대하고 욕을 했다(45). 그 모인 곳이 회당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유대인들이 그렇게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인가. 그렇다면 바울이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집결시켰다는 말일까? 이런 것에 관해서 본문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다시 말씀을 전해달라는 유대인들의 요청에 따라서 그 다음 안식일에 말씀을 전하게 되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반박했다는 사실만을 적시하고 있다. 저자는 바울을 적대하는 유대인, 호응하는 유대인, 적극적으로 따르는 이방인들을 필요에 따라서 적당하게 등장시키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누가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들의 적대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46,47). 다음과 같은 바울의 언급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다. “바울로의 말을 듣고 이방인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작정된 사람들은 모두 신도가 되었다. 이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48). 이어서 유대인들은 이제 노골적으로 바울 일행을 억압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 출신으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귀부인들과 유지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르나바를 추방했다. 바울과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를 떠나 125km 떨어진 이고니온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복음서의 전통에 따라서 발의 먼지까지 털어버리고 떠났지만(눅 9:5, 10:11) 그곳에 기독교 공동체가 설립되었다는 사실(52)에 비추어보면 그렇게 자연스러운 진술은 아니다.

회당 설교
바울로와 바나바는 분명히 유대인들을 떠나서 이방인에게 간다고 단언했는데도 불구하고(46) 그 뒤로 계속해서 회당 출입을 하였다(14:1, 17:1). 그는 오늘의 사건이 있은 뒤로도 매우 오랫동안 안식일과 회당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에게 회당은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예수님도 공생에 초기에는 회당과 가깝게 지내셨다. 회당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경건하게 살려든 유대인들이 정기적으로 영적인 훈련을 받는 곳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최소한 종교적인 대화가 소통되는 이들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회당과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대신 그 당시 종교 엘리트 집단이라 할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에 의해서 요주의 인물로 주목받으면서 회당으로부터 축출당한 셈이다. 우리가 사도행전 앞부분에서 살펴본 대로 팔레스틴 공동체는 물론이고 바울 같은 이방인 선교사들도 여전히 회당 전통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초기 공동체의 모든 정신적 뿌리가 바로 유대교라는 의미이다.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 민족적으로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제도 중의 하나가 곧 회당이다. 회당에 관한 연구가 제법 이루어졌지만 정확하게 그 기원이나 의미에서 대해서 말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회당이라고 일컫는 단어는 70인역에 등장하는 ‘시나고게’인데, 이것은 단순히 모임이라는 뜻이지 어떤 종교적인 의미는 아니다. 시나고게보다 좀더 종교적인 용어는 ‘프로슈케’인데 이것은 ‘기도’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나고게와 프로슈케가 반드시 구별되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지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는 유대인들의 종교교육과 일반교육을 위해서 별도로 모일 수 있었던 장소가 곧 회당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의 성전은 종교 엘리트들이 독점할 수 있던 공간인 반면에 회당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보아도 괜찮다. 그래서 예수님도 당분간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으며, 바울도 역시 회당을 복음 전파의 전초기지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박해
본문은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보인 박해를 매우 부도덕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일단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심에 북받쳐서 바울의 말을 반대하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런데 저자는 유대인들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민족적인, 혹은 종교적인 문제에서는 매우 민감하다는 점에서 이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긴 하지만 지금의 장소가 예루살렘이나 더 넓게 보아서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 도시인 비시디아 안티오키아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런 표현에는 약간의 과장이 엿보인다. 누가는 여기서 사건 진행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비약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누가가 제시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박해는 급기야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는 데까지 발전한다. 그런 행동이 우리의 입장에서는 선동이겠지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었다. 안티오키아에서는 디아스포라인 유대인들도 역시 소수 민족에 불과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신앙적 전통을 해체하려는 사람들을 그런 방식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참고적으로 바울의 설교를 듣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은 원래 이방인들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있었는데(43), 바울과 바나바가 추방당할 때 이들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설명이 없다.
저자 누가가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났던 소동에 대해서 그렇게 수미일관하게 접근하지 않기는 하지만, 선교 초기부터 복음과 유대교 전통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으며, 그런 갈등으로 인해서 복음이 주로 이방인들을 향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사실 누가가 말하려는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제 유대인들이 분노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짚어보려고 한다. 그것은 곧 복음의 본질에 관한 해명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의 거부
이미 바울이 설교에서 언급했듯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너희 비웃는 자들아, 질겁하고 죽어 없어져라. 나는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엄청난 일을 하리라. 누가 너희에게 일러 줄지라도 너희는 결코 믿지 않으리라.”(13:41, 하박국 1:5). 유대인들과 논쟁을 다루고 있는 오늘 분문에서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고 지적한다(46).  
유대인들은 왜 믿지 못하고 거부했을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표상과 달랐다는 게 그 대답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인간에게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대답이다. 유대인들이 예수에게서 발생한 하나님 나라를 인식하지 못하고 믿지 못했다는 말은 결국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적 하나님 경험을 폐쇄적으로 수호하는 데 머물렀다는 뜻이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자신들의 인식 범주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 스스로 자유롭게 열어간다는 사실을 좀더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면 예수의 사건에서 메시야 표상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선입관, 또는 전(前)이해에 근거해서 해석하기 때문에 본질에 접근하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모든 해석은 전이해가 작용한다는 말이 일리가 있긴 하지만 문제는 그런 전이해에 매달리는가, 아니면 그런 전이해가 지양되는가에 달려 있다. 자기의 전이해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인식의 층으로 들어가는 사건이 곧 공부다. 특히 세계를 창조하고 완성할 하나님에 관한 공부에서는 거의 혁명적으로 자기의 생각들을 허물어내야만 한다.
그런데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전통적 신앙을 고수하는 일에 몰두한 유대인들은 예수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하더라도 자신들의 전통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믿을 수 없었고, 더 나가서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