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이고니온’에서
(행 14:1-7)        
6월7일

본문의 줄거리
바울과 바나바의 소위 ‘1차 선교여행’은 다음과 같은 동선을 따른다. 시리아 안티오키아, 키프로스 섬,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이고니온, 리스트라, 데르베, 리스트라, 이고니온, 시리아 안티오키아. 사도행전을 문맥으로 보면 여기에 등장하는 지역 중에서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와 리스트라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이 두 지역 사이에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이고니온이 자리하고 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티오키아에서 유대인들을 포기하고 이방인들에게 가겠다고 공언한 것과는 달리 이고니온에서도 역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설교했다. 이렇게 모순 되는 일이 벌어진 이유는 비시디안 안티오키아에서 벌어진 소동이 아직 이고니온에까지 알려지지 않아서 바울과 바나바가 회당에 들어갈 수 있었거나, 아니면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사건과 이고니온의 회당 설교가 아무런 연관성 없이 독자적으로 전승된 사건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저자가 나름의 신학적 목표에서 그 당시에 자신이 확보할 수 있었던 전승들을 중심으로 해명해나가고 있는 그 선교의 역사를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듣고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신도가 되었지만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선동해서 악의를 품게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주께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기적과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하셔서 결국 이들의 말이 참된다는 것을 증명해주셨다. 상황이 좋게 풀려서 이들은 비교적 오랫동안 이고니온에 머무르면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 도시에서도 사람들이 두 갈래도 갈라져, 한쪽은 유대인들을 지지하고, 다른 쪽은 사도들을 지지하였다. 사도들을 반대하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설득해서 사도들을 학대하고, (좀 과장된 표현 같은데) 돌로 쳐 죽이려고 하자 사도들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피신한다.
위에서 설명한 내용이 오늘 본문의 전체 줄거리이다. 바울이 설교하고, 그들을 반대한 사람들과 논쟁한 비시디아 안티오키아나 바울과 바나바가 거의 신(神)처럼 대우받는 리스트라에 비해서 이고니온 이야기는 비교적 이렇다 할 특징 없이 전개되고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회당에 들어가서 설교하자 일단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을 반대한 사람들의 공격이 심해져서 결국 그곳을 떠났다는 이야기니까, 어쩌면 상투적인 진행처럼 보인다. 그리고 본문이 하나의 전승에서 나온 게 아니라 여러 전승을 복합적으로 편집한 것이라는 학자들의 견해도 많다. 편집자가 비시디안 안티오키아와 리스트라에서 벌어진 큰 사건 사이에서 숨고르기를 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삽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기 위한 이음새라고 하더라도 본문은 나름으로 초기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그들이 처한 상황들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영적인 눈높이만큼만 들여다보도록 하자.

기적
누가의 설명에 따르면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기독교인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을 때 복음이 참되다는 사실이 힘을 얻게 된 계기가 ‘기적’과 ‘놀라운 일’이었다. 구약성서에도 이런 기적과 놀라운 일들이 자주 언급되고 있으며, 신약성서, 특히 복음서에는 예수에 의해서 발생한 기적이 흔하게 등장한다. 그런 탓인지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이런 기적적인 사건들과 직결시키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이런 경향은 주로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자신의 운명에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신앙적 정서는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권장할만한 일도 아니다. 즉 기독교 신앙은 중심만 잃지 않는다면 약간 비본질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본질과 비본질이 칼로 무를 자르듯이 늘 명백한 게 아니라 상당 부분에서는 겹쳐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것에 관한 우리의 인식도 역시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는 작업마저 소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신앙의 본질, 교회의 본질을 치열하게 구분하되 그 적용은 일정 부분에서 유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제 이렇게 질문하자. 도대체 성서가 말하는 ‘기적’이라는 게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기적은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론적 체계에서 벗어난 사건을 의미한다. 홍해가 갈라졌다는 건 그 당시에 아무도 해명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구약성서 기자들에게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거나 장애가 치유된 사건들도 거의 그런 차원에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 세상에 기적은 없다. 다만 우리가 그것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만나와 메추라기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기적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매우 자연스러운 사건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리고 성을 긴 행렬을 이루어 돌기만 했는데도 무너진 사건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기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자연스러운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이 호수 위를 걸었다는 건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기보다는 제자들의 착시 현상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기적을 모두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게 능사라는 말은 아니다. 성서는 어느 한 구절에서도 기적 사건 자체에 흥미를 보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고대인들에게는 그런 기적적인 사건이 신적인 능력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그런 사건들을 언급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오늘 본문도 역시 기적은 하나님의 은총이 참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제시되었다. 결국 이런 성서를 읽는 우리는 신화적인 세계관에 의해서 묘사된 기적 자체에 호기심을 보일 게 아니라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는 오늘의 ‘terminology’를 모색해야한다.
아무리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참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모두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었다. 4절 말씀은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 도시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서 한 쪽은 유대인들을 지지하고 다른 쪽은 사도들을 지지하였다.” 정치적으로도 모든 사람의 지지를 받는다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복음의 일에 모든 사람의 지지를 얻어낸다는 건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
도대체 왜 그럴까? 기적을 보았는데도 왜 믿지 못할까?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예언자의 설교를 믿지 못하는 사람은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말해도 믿지 않는 것처럼, 신앙적인 진리는 영적인 인식을 통하지 않으면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성서가 말하는 기적은 그렇게 실증적인 사건이 아니다. 둘째, 참된 기적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만 보인다.
둘째 부분은 좀더 많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앞에서 예를 든 ‘홍해’ 사건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기적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상적인 사건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되고 해석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에게 ‘비’가 기적으로 보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우산을 써야 할 귀찮은 현상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말자. 여기서 나는 성서의 기적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해석하는 사람의 주관적 인식과 판단에 무게를 두는 게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행위에 무게를 두는 관점이다. 이런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초자연적 기적만 찾는 미몽에 빠지든지, 아니면 인간의 주관적 인식론을 절대화함으로써 하나님 행위의 주도권을 해체하고 말 것이다.

피신
상황이 악화되지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을 떠난다. 박해가 왔을 때 순교할 일이지 피하긴 왜 피하는가, 하고 이들을 나무라지 말자. 순교도 귀중한 선택이지만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귀중한 선택이다. 이런 절대적인 선택 앞에서 제3자가 말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다.
김은국의 <순교자>는 6.25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순교의 의미가 무엇인지, 더 정확하게는 죽음 앞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태도가 어떤지에 관해 까뮈 같은 이들의 실존주의에 근거해서 조명한 소설이다. 여러 명의 목사들이 북한군에 의해서 체포되고 조사를 받다가 한 목사만 살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 교회는 살아난 목사가 배교자이고, 죽은 사람들을 순교자로 보고, 그들을 추모하는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박(?) 아무개 대위에 의해서 밝혀진 진실은 살아난 목사만 끝까지 배교하지 않았고, 죽은 목사들은 결국 위협에 못 이겨 예수를 부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다가 살아난 목사는 왜 사실을 밝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작가 김은국은 이런 사실 앞에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약간 다른 맥락의 예가 되겠지만, 요즘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헤밍웨이도 자살했다고 하니 더 이상 살아야 할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만큼의 절박감은 어떤 객관적인 기준으로 제시될 수 없는 것 같다.
어쨌든지 바울과 바나바는 소나기가 올 때는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속담이 이에 해당되는지 모르겠지만 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편집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그들이 리스트라와 데르베와 그 지방으로 피해 “복음을 전하였다.”(7)고 첨언한다. 그들이 피신했지만 결국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했다는 점에서 아무도 그들의 피신을 책망할 수 없을 것이다.  
간혹 기독교 신앙을 늘 전투적인 성격으로 강조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시아버지가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더라도 주눅 들지 말고 무조건 교회에 나와야 한다거나, 동네에서 교회당 건축을 반대하더라도 밀고 나가야 한다는 식이다. 이런 갈등 중에서 ‘제사’ 문제가 가장 미묘한 주제일지 모르겠다. 윤석전 목사는 추석과 설날에 드리는 제사를 3,4대까지 하나님이 징벌하시는 우상숭배로 몰아친다. 교회의 업무와 세상의 업무가 갈등을 빚을 때,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는 세상보다 우리가 잘못일 가능성이며, 다른 하나는 그 세력이 악하다고 하더라도 쳐부수기보다는 피하는 게 훨씬 지혜로울 수 있는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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