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리스트라’에서
(행 14:8-20), 6월14일

앉은뱅이 치유사건
누가는 앞 단락에서(14:1-7) 잠시 한 호흡 숨을 고르고, 이제 리스트라에서 일어난 별난 사건을 보도한다. 그것은 장애치유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들에 의해 신이라는 오해를 받은 다음에, 다시 사도행전의 주제인 고난과 승리의 길로 끝난다.  
바울의 선교여행은 어느 도시에 들어가면 우선 회당이나 경건한 사람들의 공식적인 모임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리스트라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이나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이 없는 탓인지 이들이 설교한 장소가 언급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특징은 어떤 앉은뱅이에 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데에 있다. 누가는 이 사람이 처한 상황을 독자들에게 강조하려고 “나면서부터”,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불구자”였다고 자세하게 묘사한다. 단 한 구절의 묘사이지만 이 구절을 읽는 독자들은 여기서 인간이 헤쳐 나가기 힘든 숙명을 감지한다.
소위 ‘무죄한 자의 고난’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는 이 숙명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의 도움을 바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런 숙명을 허락한 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자. 인간의 이런 숙명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아닐까? 여기서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신앙과 역사의 고난 문제를 좀더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들에게 이런 불행이 닥치지 않은 것만을 다행으로 여기고 만족스러워 한다면 역사 안에서 책임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말 것이다.
다시 우리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던 앉은뱅이를 눈여겨 본 바울은 그에게 몸이 성해질 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소리쳤다. “일어나 똑바로 서 보시오.”(10). 이 사람이 자신의 장애를 치료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는지 아닌지 오늘의 본문만으로는 알 길이 없다. 그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보아야 하는가? 간혹 우리는 이런 구절을 빌미로 ‘믿음’이 있으면 앉은뱅이도 치료될 수 있다는 주장을 듣는다. 이런 방식으로 성서를 설명하기 시작하면 서로 모순 되는 일들이 자주 벌어진다. 사도행전 3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앉은뱅이 치유 사건에서는 그런 믿음이라는 전제 조건이 없이 단지 구걸하던 그를 베드로가 치유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성서해석에서는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원리가 매우 세밀하게 작동되어야만 한다. 즉 모든 부분적인 구절들은 성서 전체의 맥락과 상호적 연관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라고 외쳤던 베드로와 달리 단지 “일어나 똑바로 서 보시오.”라고 외친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히 저자 누가의 생각이 있었겠지만, 지금 우리는 그것을 정확하게 따라잡기 힘들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성전 앞에서 벌어진 사건이고, 바울의 경우에는 순전히 이방인들만 사는 곳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차이 때문이거나, 또는 바울의 이 말에 이미 예수의 이름이 포함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쨌든지 누가는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고 보도한다.(10).
앉은뱅이가 걷기 시작했다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사실 성서읽기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저자의 관심은 이 사실을 전달하는 게 있는 게 아니라 그 뒤로 벌어진 일련의 사건 진행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자가, 혹은 성서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에 초점을 두고 성서를 읽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런 사건에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마디 보충하자.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앉은뱅이의 치유 사건은 늘 기계적으로 반복된 게 아닐 뿐만 아니라 이런 사건들은 교회 밖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성서 저자가 어떤 근원적인 것을 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매개물로 이런 치유 사건을 불러들인 것뿐이다.

제우스와 헤르메스
앉은뱅이의 치유 사건을 목격한 리스트라 사람들은 바나바를 헬라 신의 군주인 제우스로, 바울을 제우스의 전령인 헤르메스로 간주했다. 선교 현장에서는 당연히 바울이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었을 텐데도 그를 서열상 하위인 헤르메스의 강림으로 본 이유는 바울이 말을 잘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외모가 바나바보다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리스트라 사람들이 단지 앉은뱅이의 치유 사건만 보고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착각했다는 보도는 그렇게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좀더 사실적으로 본다면 이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마술사쯤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면 누가는 무슨 집필 의도를 갖고 제우스와 헤르메스 이야기를 여기에 삽입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의도를 우리가 지금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인 것만은 분명하다.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와 그들의 카리스마가 이방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올리려했다는 것은 곧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예식이었다. 누가는 지금 복음이 매우 역동적으로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을, 특히 이방인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최선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변증 설교
리스트라 사람들의 제사소동에 놀란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뜯어말리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는 설교를 했는데, 이 내용은 아마 누가 공동체에도 현안이었을 것이다. 첫째, 우리도 당신들과 똑같은 인간이다. 둘째, 우리는 여러분이 헛된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고 왔다. 셋째, 하나님은 세계 창조자이시다. 넷째, 하나님은 항상 자신을 알리신다.(15-17).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 빠졌다는 사실에서 보면 이 설교는 케리그마가 아니라 이방인을 향한 변증적 설교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변증 설교의 핵심은 무엇일까?
위의 세 번째 항목인 창조와 네 번째 항목인 계시가 바로 이런 변증 설교의 핵심이다. 우선 기독교의 ‘창조론’은 기독교가 타종교 및 이 세상의 자연과학과 보편적인 해석학의 지평에서 담론을 형성해낼 수 있는 도그마이다. 지난날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으로 인해 기독교 창조론이 반과학적이라는 인상을 주긴 했지만 원래 창조론은 그런 독단론에 빠지지 않고 훨씬 역동적인 세계 이해라는 점에서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창조론을 하나님이 6일 만에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에만 국한해서 생각하는데, 이는 성서가 말하려는 근본과는 거리가 있다. 6일이라는 숫자는 거의 무의미하며, 혹시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상징에 불과하다. 앞으로 우주물리학이 대폭발과 장이론을 훨씬 정교하게 증명할 때가 오면 하나님에 의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성서의 근본 주장이 지금보다 훨씬 큰 무게를 받게 될 것이다.
‘계시론’은 역사를 중요한 진리 인식의 준거로 삼는 주변의 모든 학문과 기독교가 소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도그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 자신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말은 곧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뜻이다. 이 진술에 따르면 기독교의 복음이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계시하셨다는 말이 된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계시인지 우리는 그 낱낱의 사건들을 찾아낼 수 없지만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의 ‘익명의 기독교인’ 개념도 이런 보편 계시와 맥을 같이 한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약간 예민한 문제를 하나 검토하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처해지는가, 아니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가? 성서와 신학은 여기서 양자택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예수천당, 불신지옥’ 패러다임이 확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기독교의 구원론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서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만 구원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다고 한다면 자신만 구원받은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오기를 원할 것이다. 마태복음25:31 이하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최후의 심판’ 비유에 의하면 예수를 믿었는가 아닌가의 기준이 아니라 작은 사람에게 어떻게 대했는가의 기준으로 선고가 내린다. 이 말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땅에서 예수 믿는 게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의 삶, 그의 인격,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 곧 이미 구원 사건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지 다른 사람은 지옥가지만 자신만 천국 가겠다는 욕망으로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돌에 맞은 바울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의 변증 설교로 끝나자 곧 안티오키아와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의 선동이 이어지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긴 간격이 있었을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길 생각을 했던 리스트라 사람들이 다른 지역에서 몰로 온 유대인들에게 설득 당할 만큼의 세월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어쨌든지 이들은 바울을 돌로 쳤다.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끌어다 버렸다는 표현은 과장인 것 같다. 이들이 아무리 은밀하게 이런 일을 처리했다고 하더라도 예루살렘도 아닌 이방 지역에서 로마 당국의 눈을 피한 가운데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20절에 보면 신도들이 바울을 둘러싸자 바울이 깨어났다고 한다. 바울이 처음 방문한 곳에 이미 신자들이 있었다는 말은 바울이 비교적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었거나 아니면 그가 오기 전에 헬라파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의미인데, 본문이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실체적 진실인지 우리는 파악할 수 없다. 다만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복음의 역사는 계속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누가가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이다. 고난 가운데서의 승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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